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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식당합니다-110화 (110/125)

110화. 회담

나에게 어이없이 당해버리긴 했지만, 사실 국장이 저렇게 한심한 눈으로 쳐다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S급 정도는 되겠는데.’

경호원의 얼굴은 전혀 익숙하지 않다.

나만 모르는 헌터일 수도 있겠지만, 국장의 바로 곁에 혼자 남은 걸 보면 비밀리에 활동하는 S급 헌터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허둥지둥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직 전후 사정을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은 표정.

어쨌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저렇게 하는 게 최선의 수습 방법이겠지.

경호원은 무슨 일이 있었든 게 아닌지 불안한 눈치였으나, 본인의 잘못이 있기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럼 다시 봅시다.”

박문석 국장은 경호원과 함께 복잡한 표정으로 떠났다.

그들을 보내고 나는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국장에게 말했던 제2의 대격변은 물론 곧 발생할 파괴자들의 침입에 관한 얘기였다.

과거 놈들이 마계에 가한 공격 때문에 차원의 균열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이미 충격이 가해진 곳을 한 번 더 치는 것이니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와 마계 사이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날 거다.

현재 지구의 헌터 모두가 나선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결국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고 그곳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와 마물들은 도시를 무너뜨리고 일반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겠지.

특히 지성이 없는 놈들은 마왕조차 제어할 수 없다.

지구로 넘어오는 순간 더더욱 광폭하게 날뛸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미리 마계에서 마물들을 처리하는 건 또 다른 불균형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이른 대격변이 일어날 수도 있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파괴자들이 더한 충격을 가하게 되면 그땐 진짜 손쓸 수도 없을 것이다.

국장에게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인간들이 자기 터전을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라도 혼자 모든 걸 다 해낼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마계에 침입할 파괴자들을 상대하는 게 먼저이기도 하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비교할 수도 없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헌터들이 각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니 15년 전의 대격변보다는 피해가 덜하기를 바랄 뿐.

어쨌거나 이것도 내가 파괴자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겠지만….

그때 슬금슬금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코너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건 베로의 검은 코였다.

식당에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나를 찾아온 것 같다.

“베로, 이리 와. 조용히.”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베로는 내 말을 알아듣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다가왔다.

평소처럼 터벅터벅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모습이 꽤 귀엽다.

가까이 다가온 베로는 내 손으로 자기 머리를 들이밀었다.

쓰다듬어달라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부드러운 검은 털의 촉감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다.

한동안 혼자 바쁘게 이것저것 하다 보니 베로를 잘 챙겨주지 못했었다.

이 녀석은 그런 나에게 나름대로 힘이 되어주기 위해 이렇게 치대는 것 같았다.

제멋대로 말썽을 부릴 때도 있지만 이럴 때는 또 속이 깊다.

“당분간은 계속 바쁠 것 같아. 구름이랑 같이 잘 놀고 있어.”

“웡! 웡!”

베로가 입 모양으로 조용히 짖으며 대답했다.

***

비행기가 이륙하며 창밖이 온통 푸른 하늘과 구름으로 가득 찼다.

옆자리에 앉은 유희진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걸까요?”

“글쎄요.”

“오늘 분명 사냥 일정이 있었는데… 갑자기 왜 비행기에 타게 된 건지…. 지금 이게… 미국 가는 거라고 했었나요?”

“네. 미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헌터 회담이라고 하던데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일까요?”

“며칠 전 국장님께서 식당에 찾아오셨을 때 얘기를 좀 나눴는데, 한성 길드의 성장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길드장님이 제가 꼭 가야 한다던데 설마 국장님이 저를 꼭 집은 건 아니겠죠?”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사실 유희진을 끼워달라는 건 내 요청이었다.

유희진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영어도 못 하는데….”

“통역이 있을 테니까요. 그냥 놀러 간다 생각하고 편하게 가요.”

우리가 탄 비행기는 대통령 전용기였다.

대통령 배윤호와 헌터관리국 국장 박문석을 비롯해 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모두 행사를 위해 떠나는 인원이었다.

대통령과는 아까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국장이 나를 소개했으나 대통령은 별다른 질문 하나 없이 제 갈 길 가버렸다.

그는 각성자와 몬스터에 관해서는 잘 알지도, 크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명목상 이번 회담에 함께 참석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헌터 관리국 국장이 나설 것이다.

아까 봤을 때 여전히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테니 자기 역할은 다해줄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한 호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미국, 중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국가를 대표하여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진심으로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굳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최소한의 아는 척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지난 회담 때의 친분 등이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박문석 국장도 이 사람 저 사람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유들유들한 성격 덕분인지 누구를 만나든 대부분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것 같았다.

나와 유희진은 그와 약간 거리를 둔 채 함께 이동했다.

가끔 상대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때면 가벼운 악수 정도만 하고 물러났다.

그때 큰 키에 탄탄한 체형을 가진 금발 백인 남성이 박문석과 마주쳤다.

“잠깐만요. 현호 씨, 저 사람 미국 헌터 관리국 국장 아니에요? 이름이….”

“마크 앤더슨. 맞아요. 미 헌터 관리국 국장.”

귓가에 속삭이는 유희진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마크 앤더슨은 40대의 나이에 미 헌터 관리국의 국장이 된 사람이었다.

큰 사건이 벌어질 때면 언제나 기사나 뉴스에 얼굴이 나왔으므로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문석이 이쪽을 보며 말했다.

“이쪽은 최현호 헌터와 유희진 헌터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촉망받는 뛰어난 헌터들이지요.”

통역가가 영어로 말을 전하자 마크 앤더슨의 푸른 눈이 나와 유희진을 향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눈빛이었다.

특별히 의식하는 건 아닌 것 같고 항상 상류층에서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려오며 살았던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았다.

[S급 헌터들입니까?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 궁금하군요.]

“S급은 아니지만 둘 다 아주 대단합니다. 유희진 헌터는 A급으로 각성했지만 이제 거의 S급에 가깝게 성장했죠.”

[흐음, 그렇군요.]

앤더슨의 표정에서 급격히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객관적으로 유희진도 뛰어난 헌터가 맞지만 그의 기준에는 전혀 아닐 것이다.

미국 헌터 관리국 국장의 주변에는 일반인들은 만나볼 수도 없는 S급 헌터들이 널렸을 테니.

특별히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박문석 국장과 유희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유희진은 자존심이 상하는 듯 보일 듯 말듯 입술을 깨물었다.

박문석 국장이 분위기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최현호 헌터는 특수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호, 특수 능력이라면?]

[던전을 다루는 능력입니다. 제가 자유롭게 게이트를 여닫을 수 있는 제 소유의 던전이 있습니다.]

내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오자 유희진이 배신당한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슬쩍 눈길을 돌려 모른 척했다.

초월자가 되면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증가했다.

마족의 언어도 알아듣는 판에 영어라고 못하겠는가.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언어는 배우는 기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영어처럼 친숙한 언어는 별다른 노력 없이 과거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앤더슨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아, 알겠습니다. 던전에서 장사를 한다는 그….]

들릴 듯 말듯 얼버무렸으나 마지막에 분명 괴짜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무례한 단어 선택이었으나 태연하게 받아주었다.

[한국의 소식이 거기까지 전해졌나 보군요.]

[물론이죠. 그런 특별한 소식을 제가 아직 모르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앤더슨이 눈썹을 까딱이며 외국인 특유의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아쉽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다만… 미국이었다면 그 능력을 좀 더 크게 활용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하하, 나중에 더 많은 얘길 나눠보면 좋겠네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거든요.]

앤더슨은 나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다음 박문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여차하면 사람을 빼갈 생각이라는 걸 박문석 국장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꼬리가 조금 굳어있었지만, 그냥 보기에는 평온해 보일 뿐이었다.

박문석과 앤더슨은 형식적인 안부를 조금 더 나눈 후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떠나는 앤더슨의 뒷모습을 보며 유희진이 나에게 속닥거렸다.-

“우리끼리라서 하는 말인데… 좀 재수 없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이후 진짜 핵심 인사들만의 비밀 회담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과 박문석 국장만이 참여했고 나와 유희진을 비롯한 몇몇 헌터들은 각자 자유시간을 가졌다.

유희진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고, 나는 몰래 던전으로 들어가 해야 할 일을 처리했다.

솔직히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내 던전을 이용해 쉽게 이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구와 내 던전이 통하는 게이트의 위치를 이렇게 자유자재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다.

그 게이트는 처음부터 집에 고정되어 있고, 그걸 조정하는 건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라고 말해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까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와야 했고, 또 던전에 들어가려면 이렇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움직여야 했다.

두어 시간 후, 성대한 저녁 만찬이 열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연회장에는 수십 개의 잘 꾸며진 원형 탁자가 있었다.

각국에서 참석한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나는 대통령과 국장, 그리고 다른 몇몇 관계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내 왼쪽에는 박문석 국장이, 오른쪽에는 유희진이 앉았다.

나는 국장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얘기는 좀 꺼내 보셨습니까?”

그는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쩍 언질을 줘보려 했는데 마땅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의제도 정해져 있으니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리고 다들 나라를 대표해서 온 사람들인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아서… 눈에 보이는 증거 없이는 믿지도 않을 겁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상황을 더 지켜보고….”

“시간이 있다니요?”

“회담 일정은 모레까지니까요.”

“한시가 급한데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국장님께서는 상황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조용히 몰아붙이자 박문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연회장 앞의 무대에 낯익은 사람이 등장했다.

마크 앤더슨 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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