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무슨 일이냐
앤더슨은 형식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각국에서 오신 귀한 분들을 위해 만찬 또한 세심하게 준비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바라며….]
앤더슨이 말을 마무리하는 사이에 박문석 국장이 일어섰다.
내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와 함께 일어섰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뭔가 볼일이 있겠거니 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쪽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배윤호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동했고, 나와 함께 일어난 박문석이 그에게 몇 마디 하고 내 뒤를 따라왔다.
현 대통령은 헌터계에 별다른 지식이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 박문석 국장은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배윤호는 불안해하면서도 우리를 막지 못했다.
나와 박문석은 금방 단상 가까이에 도착했다.
마크 앤더슨은 단상에서 막 벗어나는 중이었고, 곳곳에서 식기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만찬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
[지금? 뭐… 갑작스럽긴 하지만,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 나누는 것도 좋겠군요.]
내 말에 앤더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기 모인 모든 분이 들어야 하는 말입니다.]
앤더슨에게 마이크를 달라는 손짓을 하자 그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변에 있던 관계자들은 나를 제지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건… 일정에도 없고, 아예 협의되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요. 이런 돌발행동이 허용되는 자리가 아니란 건 알지 않습니까?]
앤더슨이 불쾌감을 표하며 박문석에게 눈치를 줬다.
자국의 헌터인데 말리지 않고 뭐 하냐는 의미였다.
그러나 박문석은 도리어 나를 옹호했다.
[앤더슨 국장님, 깜짝 같은 요청이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니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이게 무슨….]
황당해하는 앤더슨에게 박문석이 몇 번 더 간곡히 말했다.
그러나 앤더슨은 결국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분 안에 끝내시오. 원래는 안 될 일이지만, 그간 봐왔던 모습을 믿고 허가하는 겁니다. 혹시라도 문제 될 발언을 하는 경우에는 당신뿐만 아니라 한국까지도 어떤 불이익이든 감수해야 할 겁니다.]
박문석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앤더슨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에게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나는 단상 중앙으로 가서 섰다.
앞자리에 앉은 몇몇 사람만 약간의 소란에 고개를 들었을 뿐, 나머지는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에서 온 헌터 최현호라고 합니다.]
말을 꺼내 보았지만 분위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나를 쳐다본 몇몇도 웬 얼굴도 모르는 동양인이 갑자기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잠시 힐긋거리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이런 분위기면 어차피 듣지도 않는 서론 따위는 필요 없을 것 같다.
[머지않아 제2의 대격변이 있을 겁니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대격변’이라는 단어에 집중해서 강하게 말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대화로 어수선하던 연회장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잘못 들었나요? 제2의 대격변이라고 한 것 같은데.]
[저도 들었어요.]
그리고 몇몇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슬럼임이 점점 커졌다.
어이없어하는 사람도 있었고,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응은 제각기 달랐으니 그들의 눈동자에는 공통적으로 공포의 감정이 깃들어있었다.
배윤호 대통령은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려다가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가까이에 있던 앤더슨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한 나라를 대표해서 온 사람들이 이런 거짓 정보로 분탕을 칠 줄이야! 믿고 자리를 내줬더니 내 호의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당장 내려오게!]
나는 마이크를 떼지 않고 그대로 대답했다.
[거짓 정보가 아닙니다. 그리고 곧 대격변의 징조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겁니다. 게이트 감지기로 감지할 수 없는 게이트가 생겨난다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게이트 감지기가 틀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어!]
게이트 감지기는 미국에서 특수 능력자들과 천재적인 공학자들을 한데 모아 만들어낸 제품이었다.
원래도 강대국이었던 미국은 게이트 감지기를 통해 더더욱 많은 부를 얻게 되었다.
[저 인간 당장 끌어내려!]
앤더슨의 지시에 주변의 험악한 인상의 덩치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내 팔을 잡아채려는 그들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었다.
그리고 공격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걸어 나왔다.
박문석은 앤더슨의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앤더슨은 나와 박문석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인류에 다가올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할 얘기가 있었으면 차라리 안건을 내든지 했어야지!]
[그런 단계를 하나하나 거치고 설득해야 할 만큼 시간이 많은 게 아니어서요.]
[말이 아예 안 통하는군.]
앤더슨은 박문석에게 고개를 돌려 더 크게 소리쳤다.
[이런 망상에 빠진 자를 왜 데려온 것이오! 세상에, 한 나라의 국장이라는 자가 설마 이런 말에 동조하는 겁니까? 혹시 두 사람, 십수 년째 대격변 타령만 하는 그 사이비 소속인 겁니까!]
[그, 그런 게 아닙니다.]
박문석은 당황하여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자기가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당황한 것 같았다.
15년 전의 대격변 이후 수많은 새로운 시스템이 자리 잡았고, 비각성자들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곧 제2의 대격변이 올 거라 소리치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한때 지구종말론을 외치던 자들이 이제는 제2의 대격변을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증거는 없었고, 단체의 수장이 원하는 건 오직 돈이었다.
그러나 한 번 공포를 경험해보았기에 과거보다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이비 단체들은 꽤 큰 종교단체로 발전하여 각국에서 골치를 썩이는 중이었다.
앤더슨은 나와 박문석 국장을 그런 부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앤더슨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오늘 일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할 것입니다. 당신들 개인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책임져야 하겠지요. 이런 중요한 행사를 망쳐버리다니, 조금 전의 만행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앤더슨이 이를 갈며 단상 위로 올랐다.
연회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어느새 카메라를 꺼낸 기자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잠시 소란이 있었던 것에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조금 전의 이야기는 헌터 개인의 주장이며….]
미 헌터 관리국 국장이 직접 나서서 해명하자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잠깐의 해프닝으로 넘어가려는 분위기였다.
박문석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게 맞는 건지….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은데, 역시 이런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군요.”
“…….”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내가 밀어붙여서 이렇게까지 된 것에 대해 상당히 후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식의 경고는 당연히 안 먹히겠지.’
잠깐의 공포와 소란을 불러일으키고, 웬 미친놈의 돌발행동으로 화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진지한 의견으로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었기에, 나는 박문석처럼 심란하지 않았다.
“후우….”
박문석의 한숨에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서 조금 진정한 듯한 배윤호 대통령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냥 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거리는 중이었다.
쿵쿵거리는 걸음에서도 격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때였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연회장 전체가 흔들렸다.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고, 의자가 넘어졌다.
‘시작됐군.’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꺄아아아악!”
“조심해!”
연회장의 한쪽 벽과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국제적인 행사답게 대부분의 나라에서 S급 헌터 한 명 정도는 데리고 온 참이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수의 S급 헌터들이 모여있었고,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앤더슨은 벽을 짚고 몸을 지탱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무전기로 바깥과 소통하던 관계자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바, 바깥에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S급 마룡으로 추정된다고….]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바,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건물을 공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이, 일단 밖으로 모두 대피시켜!]
[알겠습니다. 국장님도 빨리 나가시죠!]
관계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비상사태입니다! 모두 대피하세요!]
[나가야 합니다!]
쿵!
또 한 번 건물이 울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내달렸다.
헌터들은 각자 무기를 꺼내고 비각성자를 보호하며 이동했다.
나 또한 국장과 대통령을 데리고 밖으로 달렸다.
두 사람은 놀라서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내가 이끄는 대로 달릴 뿐이었다.
바깥은 해가 거의 진 저녁 무렵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건물의 불빛들로 그리 어둡지 않았다.
하늘에 거대한 무언가가 떠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붉은 마룡이었다.
S급 중에서도 특히나 더 강하고 난폭한 몬스터였다.
비각성자들은 물론, 웬만한 헌터들은 실물을 본 적조차 없을 것이다.
“저런 게 어떻게 도시 한복판에….”
유희진의 중얼거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얼이 빠진 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다.
하늘 위의 저 괴물이 어디를 공격할지 알 수 없으니 어디로 피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미 늦은 거였나….”
박문석 국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까 그 말이 진짜….”
대통령은 중얼거리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모두가 놀랐지만 그중 가장 충격받은 것 같은 사람은 마크 앤더슨 국장이었다.
“말도 안 돼! 오늘은 근처에 S급 던전이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 거지? 일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모, 모르겠습니다. 분명 완벽하게 확인했는데….”
“방금 관제센터와 연락했는데 오늘 이 근방에 S급 던전은커녕 A급 던전도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 곳도 없고요.”
“그럼 저건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데!”
키이이이이익!
붉은 마룡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향해 불을 뿜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이 순간 붉게 물들어서 마치 지구 멸망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잘하고 있군.’
나는 만족스럽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다잡았다.
좀 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공포감을 줄 필요가 있었다.
대충 설명만 했는데 생각보다 잘해주고 있다.
불을 내뿜은 마룡의 등에서 무언가 풀쩍 뛰어내리며 검은 날개를 폈다.
얼굴은 짐승, 몸은 사람과 같은 우락부락한 존재 조금씩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높이에 멈췄다.
“저거 설마… 마족… 아니에요?”
유희진이 경악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