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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식당합니다-113화 (113/125)

113화. 가능성

나보다도 박문석 국장이 더 놀란 듯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매체에서 보이는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앤더슨의 이미지는 현실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

그러니 이렇게 굽히는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괜찮아요. 그 상황에서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했겠죠. 다행히 아직 늦지 않은 것 같으니,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얘기를 나눠보면 좋겠군요.]

[그러려고 두 분을 불렀습니다. 이제 다른 나라의 수장들과도 자리를 만들어 어떤 대비를 해야 할지 논의해야 하겠죠.]

이거면 됐다.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

이것을 위해 칼로스를 이용해 가짜 소란을 일으킨 거였다.

앤더슨이 사퇴하고 새로운 사람이 헌터 관리국 국장이 되는 것보다는 이 사람이 자리를 지키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런 과정을 일일이 거치고, 새 국장이 상황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아무래도 직접 된통 당한 앤더슨이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잘해내지 않을까?

그래도 꽤 유능한 사람이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박문석 국장이 입을 열었다.

[다들 몸소 겪었으니 반발 없이 진행될 것 같군요. 어쩌면,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전 세계의 의견이 일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 이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겠지만, 그래도 그놈들, 마족이라는 걸 직접 본 사람들이라면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건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앤더슨이 소름이 돋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놈들은 정말 오싹하더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놈들이 봐준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직 공격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인간들의 전력을 대충이라도 확인하려 한 게 아닐까요? 아니면 일종의 도발이나 경고일 수도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요. 어쩌면 이번이 처음 온 것이 아닐 수도…. 감지기로 알 수 없는 다른 경로로 온 것이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여러 번 들락거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생각보다 우리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대화가 계속될수록 박문석과 앤더슨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너무 비관적인 분위기가 될 것 같아서 내가 나섰다.

위기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는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망할 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흘러가 버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대화에 끼어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내 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것이다.

앞선 일들로 이미 큰 신뢰를 얻게 되었다.

[만약 몰래 여러 번 드나들면서 인간에 대해 다 파악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요?]

[경고하러 왔다거나….]

[말이 통하지도 않는데 뭘 경고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전할 말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요? 마족의 지능이 인간보다 낮지는 않을 거로 예상되는데요. 단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위협하려고 했다고 쳐도 이상합니다. 몰래 전력을 다해 습격하는 게 훨씬 쉽고 편한 길인데 굳이 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직 그쪽에서도 이길 거란 확신이 없는 거라 봐야 한다… 그 말이로군.]

[네.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은 거겠죠. 그게 지금까지 나온 얘기 중에서는 가장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요.]

앤더슨과 박문석이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생각하지 못한 거지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어려울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헌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몇몇 대면하긴 했지만 아직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하지는 못했습니다.]

앤더슨이 대답했다.

[저는 여러 헌터들과 얘기를 꽤 많이 나눴습니다. 조금 전,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도요. 그리고 그들이 마족과 마주쳤을 때 어땠는지 꽤 자세히 들을 수 있었죠.]

[뭐라고 했습니까?]

[뭐… 할 만했다던데요? 몇몇은 타격을 입히는 데도 성공한 것 같다더군요.]

[그게 정말입니까?]

앤더슨의 말에 박문석이 대신 대답했다.

[최현호 헌터 말도 맞습니다. 꽤 많은 헌터들이 그 소란 속에서도 그냥 당하고만 있진 않은 것 같더라고요. 물론 실제론 어땠는지 확인할 수는 없고, 허세를 부리는 헌터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그 말에 앤더슨도 조금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라는 거네요.]

[네. 이길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준비해야죠. 부딪쳐봐야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좀 더 나눴다.

[저는 여기까지면 될 것 같습니다. 실질적인 방법에 대한 것은 전문가들이 많으니 그분들과 논의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이 정도면 내가 할 만한 일은 다 한 것 같다.

나머지는 이 사람들의 몫.

박문석과 앤더슨은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내가 단호하게 말해서인지 더 붙잡지는 않았다.

[혹시 또 다른 걸 알게 되면 빠르게 알리겠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뭔가 기대하지는 마시고, 철저하게 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각 나라 헌터들과 관계자들을 불러서 함께 회의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앤더슨의 말에 박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조금 있다가 다시 뵙죠.]

돌아서는 우리를 앤더슨이 머뭇거리며 붙잡았다.

[그…….]

[네, 국장님?]

[유 헌터에 대한 일은 정말로 유감입니다.]

앤더슨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침통하게 말했다.

[…….]

[미국에서도 가장 유능한 수색대가 최선을 다해 수색하고 있습니다.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한결 안심되네요.]

박문석은 애써 웃으면 대답했다.

그러나 저 말이 진심은 아닐 것이다.

아까 나에게는 마족에게 직접 끌려갔으니 희망이 없을 것 같다는 자기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었다.

물론 나는 아직 기다려봐야 할 일이라고 했지만, 내 말을 받아들인 것 같진 않았다.

띠리리리링!

그때, 앤더슨의 책상 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하는 그에게 나와 박문서 국장이 눈짓으로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앤더슨이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좀 차분히 말해봐. …뭐? 잠깐, 그게 정말인가? 신원확인 다 한 건가? 확실한 거지?]

전화를 받은 앤더슨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박문석이 의아한 눈길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달칵.

전화를 끊은 앤더슨의 표정이 묘했다.

눈빛에서 사소한 보고가 아니라는 걸 읽은 박문석이 물었다.

[무슨 일이 또 생긴 겁니까?]

[그게… 실종자를 발견했답니다.]

[그 말은……!]

박문석의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당연히 시신을 발견했다는 말로 들은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은 앤더슨이 빠르기 말을 덧붙였다.

[아뇨. 살아 돌아왔답니다. 그것도 멀쩡하게 혼자 걸어서요…!]

[예??!]

박문석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식을 전달한 앤더슨도 별반 다르지 않은 얼떨떨한 상태였다.

[화, 확실한 겁니까?]

[저도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물었는데 맞다고 합니다.]

[말도 안 돼….]

[크흠, 이러고 있지 말고 만나러 가보시죠.]

바보처럼 멀뚱멀뚱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이 내 말에 정신을 차렸다.

우리는 함께 밖으로 나섰다.

***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유희진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암묵적으로 사망했을 거라 여겼던 유희진이 멀쩡하게 돌아온 건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유희진은 여기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 마족과 사투를 벌이다가 겨우 도망쳤다고 했다.

그 마족이 대체 왜 그녀만 잡아채 갔는지, 일대일로 싸우기를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도 모른다고 답했다.

지치고 힘들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요청으로 바로 다음 날 나와 함께 한국으로 떠나게 된 것이었다.

“컨디션은 좀 어때요?”

내 질문에 유희진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어제는 진짜 죽을 것 같았는데, 좀 쉬었다고 이제 괜찮네요.”

그 말대로 어제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졌다.

돌아온 직후 유희진은 쓰러지기 직전인 몸을 정신력으로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큰 상처를 입지 않도록 타론에게 단단히 당부해놨었지만, 본인으로서는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였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까지 몰아붙여졌으니 버티기 쉽지는 않았겠지.

“마족이랑 싸우는 건 어땠어요?”

“솔직히 기억도 잘 안 나요. 진짜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거든요.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수십 번은 물어봤는데 역시 대답은 없더라고요. 뭐, 대답해봤자 말이 통하진 않았겠지만. 그놈도 싸우다 지쳤는지 마지막에 잠시 한눈파는 사이 잽싸게 도망쳤어요. 솔직히 다시 붙잡힐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아 돌아왔네요.”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던 유희진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요….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진 않았는데, 저 뭔가 알 것 같아요.”

“뭘요?”

“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렵네요.”

타론과 싸우기 전의 유희진과 지금 그녀의 기운이 분명히 달랐다.

미약한 차이라 본인은 아직 긴가민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 다음 단계를 향한 걸음을 내디뎠다.

때에 따라 강한 상대와 맞붙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이룰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이 유희진에게 딱 적합한 때였고.

조만간 엄청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붉은 머리 마족이 순간순간 뭔가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해요.”

“하하! 그거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네요.”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황당한 소리네요.”

키득거리던 유희진이 이내 눈을 반짝이며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

비행기가 착륙하고, 공항으로 걸어 나가자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떠날 때보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취재진과 관계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마중 나온 한성 길드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실종되었던, 그리고 모두가 죽었을 거로 생각했던 유희진이 멀쩡하게 되돌아왔다는 소식에 모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한성 길드원들은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로 얼싸안고 풀쩍풀쩍 뛰는 게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특히 고영한은 사람들 뒤쪽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나는 아는 얼굴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취재진을 피해 뒤로 빠졌다.

박문석 국장을 통해 이미 모든 인터뷰는 거절해두었지만, 특종에 미친 인간들이 워낙 많으니 분명 빈틈을 타서 접근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눈이 없이 없는 곳에서 게이트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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