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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식당합니다-114화 (114/125)

114화. 수고했어

게이트로 들어서자마자 검은 짐승이 달려들었다.

“웍! 웍!”

상체로 뛰어드는 묵직한 덩어리를 가뿐하게 받아들었다.

베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꼬리를 흔들면서 내 얼굴을 핥았다.

“삐이이이!”

“삐이잇!”

“삐이이이이익!”

아래에서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는 듯한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호빵이, 찐빵이, 만두가 평소보다 더 높은 톤으로 소리 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랑말랑한 젤리 같은 손들이 서로 내 다리를 붙들려고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타앗! 탓!

등 뒤쪽에서는 얼음여우 구름이가 폴짝폴짝 뛰며 등에 업히려고 계속 시도하는 중이었다.

“잠깐, 잠깐. 알았으니까 싸우지 말고.”

모두 한 번에 안아 들고 싶었으나 베로만큼은 불가능했다.

무게가 아니라 부피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베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 바닥에 내렸다.

베로는 충분히 만족한 듯 검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리에 앉아 헥헥거렸다.

다시 살짝 허리를 숙이고 팔을 내리니 슬라임 셋이 두 팔을 붙들었다.

찰싹!

등을 굽힌 사이 등에도 묵직한 것이 올라왔다.

구름이가 내 양어깨에 흰 앞발을 올리고 등에 찰싹 달라붙은 것이었다.

얼음여우와 세 슬라임, 그렇게 넷을 동시에 들어 올리니 그제야 만족한 듯 삑삑거리던 소리가 작아졌다.

이 녀석들 모두가 평소보다 훨씬 더 들러붙고 있었다.

아마 최근 얼마 동안 그리 관심을 주지 못하고 소홀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반가워하고 좋아해 주는 걸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 이제 내려가자.”

“삐이이잇!”

“삐이익!”

“삐이이이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슬라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양팔로 내 몸에 더 찰싹 달라붙었다.

구름이도 내 말을 못 들은 체하며 그대로 업혀있다.

“…할 수 없지.”

거추장스럽지만 억지로 떼어놓는 것도 못 할 짓인 것 같다.

나는 녀석들을 몸에 주렁주렁 매단 채 마계로 향했다.

***

“오셨습니까, 현호 님.”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는 칼로스.

그의 뒤에 선 타론과 십여 명의 마족들이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삐이이이이!”

“삐이이익!”

“삐이이이잇!”

칼로스와 타론을 발견하고 슬라임들이 반가워했다.

물론, 여전히 내 몸에 붙은 채로 소리만 내는 거였다.

열매처럼 몬스터들을 매달고 있는 모습에 마족들은 살짝 당황한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칼로스와 타론이 태연하기만 하니, 그냥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수고했어, 칼로스.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던데?”

“그, 그렇습니까?”

사실 계획을 실행하기 전 칼로스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자신 없어 했다.

진짜 위협하고 공격하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그걸 하는 척만 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래놓고 막상 실전에서는 꽤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어차피 마족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 적당히 하라고 했는데 그 이상으로 잘해냈다.

“그래. 사람들이 제대로 겁먹고 움직이기 시작했어. 목표는 제대로 달성한 거지.”

“그거 정말 다행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전날부터 엄청 고민했습니다. 사실… 부하들을 데리고 사막에서 연습도 좀 했습니다. 잘해내고 싶었거든요.”

리허설까지 했다니, 그건 몰랐다.

칼로스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

타론은 그 옆에서 할 말이 있는 듯 슬슬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타론.”

“네, 현호 님.”

“너도 지시했던 걸 잘해냈던데? 곧 희진 씨가 승급할 것 같아.”

칭찬에 타론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왼쪽 팔뚝을 앞으로 보여주며 말했다.

아물어가고 있는 흉터가 보였다.

“처음에는 슬렁슬렁 피하면서 상대해도 저에게 티끌만 한 위협도 가하지 못하더군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쯤에는 이렇게 한 번의 공격에 성공했죠. 큰 상처는 아니고, 방심했던 것도 있지만… 좀 놀랐습니다.”

“기대 이상이었나 보네?”

“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습득력이 뛰어난 것 같았습니다.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게… 평범한 마족보다도 더 나은 것 같았습니다.”

“뛰어난 헌터니까 당연하지.”

타론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인간에 대한 그의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유희진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하고 있었다.

분명 조금만 끌어주면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게 보이는데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게 아쉬웠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 능력은 F급이나 다름없는 거로 알려진 내가 직접 그녀를 지도하거나 대련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참에 이번이 괜찮은 기회가 될 것 같아 그나마 자연스럽게 잠재력을 끌어낸 것 같다.

별다른 의심을 산 것 같진 않으니 꽤 성공적이었다.

나는 뒤쪽에 얌전히 서 있는 나머지 마족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몸에는 크지 않은, 자잘한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다.

사람들에게 조금은 당해주라는 말을 착실히 이행한 것이다.

“너희도 고생했다.”

“……!”

마족들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게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그저 서열에 따라 명령하고 따르는 게 당연한 종족이었다.

그래서 이런 별거 아닌 말에도 당황하는 것이다.

나도 알고는 있는데, 인간으로서 사회생활도 하고 있다 보니 저절로 이런 말이 나오곤 한다.

“가, 감사합니다….”

서로서로 눈치만 보던 이름 모를 마족들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삐이이이!”

“삐이이익!”

“삐이이이잇!”

여전히 내 어깨에 올라타 있는 슬라임들이 재밌다는 듯 소리쳤다.

***

쏴아아아-

던전과 통하는 강물이 넘쳐 오를 듯이 울렁거렸다.

맑은 물에서 작고 동그란 것이 하나둘 솟아났다.

물의 정령 운디네와 운다인이었다.

그들의 뒤쪽에서 물의 정령왕 엘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현호 님!”

엘시스는 환하게 웃으며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서 와.”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가끔 운디네를 통해 연통을 드리려 했는데 도무지 답이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찾아올 수도 없고…. 며칠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연락이 없으면 무례하지만 초대 없이 찾아와볼 생각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답을 해주셔서 정말 안심했습니다.”

“내가 어디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물론 이곳에 현호 님을 해할 만큼 강력한 존재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엘시스는 진짜 한국인 같은 어투로 말했다.

정다은과 함께하는 지구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다.

“그동안 좀 많이 바빴거든.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부르긴 했지?”

“네. 곧 올 겁니다. 아무래도 물길이다 보니 제가 더 빠르게 도착할 수밖에 없어서 차이가 좀 나게 되었습니다. 아, 지금 거의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럼 조금 기다리는 게 낫겠네.”

엘시스의 말대로였다.

존재감이 남다른 기운들이 엘시스가 들어왔던 통로로 점점 가까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고, 내 던전에 발을 내디딘 것은 개성 있는 생김새의 정령들이었다.

하나는 안면이 있는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였고, 둘은 초면이었다.

그러나 기운을 제외하고 생김새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의 여성은 불의 정령왕일 것이고, 엘시스를 포함한 넷 중에는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갈색 머리가 땅의 정령왕이겠지.

불의 정령왕은 눈빛에서 자신감이 느껴졌고, 땅의 정령왕은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성격 또한 자신들이 가진 자연의 속성과 이어지는 것 같다.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땅의 정령왕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하신 초월자시여. 엘시스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접근하는 것이 혹여나 불편하실까 봐 엘시스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혹시 그게 불쾌하셨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랬으면 진작 말했겠지. 괜찮아. 그런 건 신경 안 써.”

“다행입니다. 너그러우시군요.”

“흠,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말이야.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초월자께서 원하시는 대로….”

땅의 정령왕이 허리를 굽히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불의 정령왕은 그를 따라 살짝 고개만 숙일 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굽혀야 하는 처지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했다.

옆에 있던 엘시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도 빨리 돌아가 봐야 합니다. 모두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는 말에 오긴 했으나, 이렇게 모든 정령왕들이 대륙을 떠나본 적은 없어서… 조금 불안합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보내줄 테니 걱정하지 마.”

사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과거 엘시스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아스키나 대륙의 가장 강력한 정령 넷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 자체부터 그리 흔치 않은 일인 것 같다.

그럼에도 굳이 이 자리에 모두 모이도록 한 것은, 지금부터 내가 할 말에 누군가 반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아무래도 직접 전하는 게 좋을 거로 생각했다.

“음….”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내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정령왕들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나는 박문석 국장에게 했던 것처럼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해 전했다.

이들은 지구의 인간들과 달리 마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으니 말을 정제할 필요는 없었다.

“…마계에 전해질 충격은 당연히 아스키나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칠 거야. 차원 간의 틈이 또다시 벌어질 거고, 마물들이 쏟아지겠지. 너희 대륙의 시간대로 수십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설명을 마치자 네 정령왕의 표정은 모두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또다시 그때처럼….”

엘시스는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대륙의 여러 종족들은 아직 여전히 피해를 모두 복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살아남은 이들은 극소수이고 모든 것이 불완전합니다. 정령들이 자연을 복구하는 것과는 속도 자체가 다릅니다. 지금 마물들의 공격을 받게 되면 수십 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당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정말로 멸망에 가까운 상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지.”

가볍게 대꾸하니 뒤쪽에 서 있던 불의 정령왕이 불쑥 앞으로 튀어나왔다.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대비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기나긴 마계의 침략에 대륙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잘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그만!”

“화내지 마십시오, 샐리온.”

“이거 놔 봐! 화내는 게 아니라 잠깐 얘기 좀 하려는 것뿐이라고!”

“우리가 널 얼마나 오래 봤는데 그런 거짓말을 해? 좀 가라앉히고 다시 얘기해.”

“아니라니까!”

불의 정령왕은 다른 정령왕들에게 붙들려 더 다가오지 못했다.

목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정령왕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작정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답답한 마음에 울분을 토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야.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꾸면 되는 거지.”

“그건 또 무슨 의미지?”

이번에는 불의 정령왕뿐만 아니라 다른 정령왕들도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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