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승급
“꼭 맞서 싸워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 말은… 설마 우리에게 대륙을 지키지 말고 도망치라는 말을 하는 건가?!”
불의 정령왕이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 등 뒤로는 불길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걱정했던 대로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다른 정령왕들 또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굽히지 않고 다시 말했다.
“그래. 맞아.”
“현호 님…. 조금 더 제대로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굳은 표정의 정령왕들 중, 엘시스가 혼란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대륙은 저희의 고향이고, 저희는 대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버리고 모른 체하는 건….”
“버리고 떠나라는 말이 아니야. 잠시 숨으라는 거지.”
“그게 그 말이 아닌가!”
샐리온이 여전히 씩씩거렸다.
“같은 말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안하는 거니까 흥분하지 말고 일단 좀 들어.”
“네, 말씀하십시오.”
엘시스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샐리온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아까 네가 말했듯이… 대륙은 이미 오랜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남은 자들보다 몇 배는 더 많지. 살아남은 자들은 안정을 찾으려 노력 중이지만 아직 예전과 같은 삶으로 완전히 되돌아가지 못했어. 그렇지?”
“…맞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싸운다고 해도, 곧 나타날 마물들을 이길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 현실적으로 그렇지.”
“그렇지만 질 게 뻔하다고 해서 가만히 당하기만 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엘시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한다기보다,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 여기는 것 같다.
“누가 당하라고 했어? 도망치고 숨으라고 했지.”
“…그렇군요.”
잠자코 뒤쪽에서 듣고 있던 땅의 정령왕이 입을 열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는 알 것 같다는 듯 입꼬리를 잔잔하게 올리고 있었다.
“지금 살아있는 여러 종족과 함께 대피하라는 말씀이신 듯한데…. 제가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습니까?”
고개를 끄떡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숨어 있는다고 침입한 마물들이 그냥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초월자님께서 이걸 모르실 리도 없고요. 그렇다면, 뭔가 직접 조치를 취하실 생각인 모양이군요.”
그나마 이 녀석이 말귀를 좀 잘 알아듣는 편인 것 같다.
샐리온은 한마디 하고 싶은 걸 참는 건지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실피드와 엘시스는 조용히 나와 땅의 정령왕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속성만 다를 뿐 동등한 위치의 정령왕들 사이에서도 이 녀석이 꽤 신뢰받고 있는 듯하다.
순수하기만 한 엘시드보다는 조용히 머리를 굴리는 스타일인 것도 같고.
“너는 이름이 뭐지?”
“노웰입니다.”
“그래. 너희가 인간들을 데리고 숨어있는 동안 내가 마계의 일을 처리하고 다시 이리로 올 생각이야. 그때까지 최대한 마물들을 피해 숨어있어. 지금 살아남은 인간들은 이전의 전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 그 비법 같은 건 있을 거 아니야?”
“…….”
“어차피 현재 대륙의 인간들, 그리고 다른 종족들 모두에게 전쟁할 여력 같은 건 없을 거다. 그들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숨고 도망치는 것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어. 그러니 너희는 인간들이 최대한으로 잘 숨을 수 있도록 돕는 게 최선이다. 너희끼리 열 내서 싸운다고 마물들을 모두 해치울 수는 없을 테니까. 얼마나 큰 균열이 생길지, 얼마나 많은 마물들이 튀어 나갈지 누구도 알 수 없거든.”
“완전히 소탕하지 못할 바에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맞아. 지금이 자존심 따질 때는 아니잖아? 네 자존심이 얼마 남지도 않은 사람들 목숨보다 더 소중한 한 게 아니라면.”
샐리온과 눈을 마주치며 말하자 분한 듯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러나 뭐라 반박할 말은 없는지 말을 내뱉진 않았다.
노웰이 침착하게 끼어들었다.
“샐리온과는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감정이 많이 앞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짧은 녀석은 아닙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눠보면 충분히 이해할 겁니다. 초월자님의 말씀에 틀린 점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초월자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말씀하시는 걸 보면, 마계에 쳐들어올 그 외부 세계의 초월자들을 혼자 상대하실 것 같은데….”
“이길 수 있을지가 걱정인 건가?”
“그렇습니다. 마계의 일을 정리하고 대륙으로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혹시라도 실패하신다면…. 무례한 말이지만 솔직히 걱정됩니다. 초월자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들 또한 초월자라고 하니 어떨지 감이 오지 않아서….”
“아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리고 나도 내가 말한 대로 다 잘될 거라고 확신은 못 하겠고.”
“그 말은, 정말로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거군요.”
“그럼 역시 저희도 숨는 것보다 싸우는 게 더 나은 게 아닙니까?”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너희가 이 전투의 결과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아. 진짜로 막아야 할 적은 마계로 침입할 거야. 그리고 내가 놈들을 막지 못하면 대륙이고 지구고 그대로 초토화될 거고. 시간차가 조금 있을지는 몰라도 내가 막아내지 못한 놈들을 너희가 이길 수는 없으니까.”
정령왕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짜 위기라는 것이 이제야 좀 와닿은 것 같다.
“우선 최대한 잘 해결될 방향으로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걸 하려는 것뿐이야. 잘 대비해놓을수록 막아낼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
정령들은 생각이 많아진 듯 입을 다물고 묵묵히 나를 보았다.
내 말을 탐탁지 않게 듣던 불의 정령왕마저 입을 열지 못했다.
“모든 게 초월자님께 달려있다는 있다니… 어깨가 너무 무거우실 것 같습니다.”
엘시스가 조금 서글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앞으로의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보다 안타까움이 담겨있는 듯했다.
그녀는 다른 정령왕들보다 나와 알고 지낸 시간이 훨씬 길었다.
나는 인간을 초월한 힘과 정신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현재의 사태에 대해 걱정하는 다른 정령왕들과 달리 나에 대한 걱정도 해주는 거겠지.
이런 상황을 생각해본 적도, 원한 적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나에게 너무 큰 짐이 생겼다.
그렇다고 혼자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다.
리넬의 제안처럼 내 안위를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거야 가능하지만, 결국 후회만 남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거야. 그러니까 너희도 너희가 할 수 있는 걸 해. 너희 세계의 생명체들을 최대한 보호하고 지키는 데 주력하란 말이야. 잘될 거라 확답은 못 하겠지만, 그러는 게 너희도 후회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대륙의 살아있는 모두에게 숨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으로 숨으라고 전하겠습니다. 실피드가 있으니 소식이 퍼지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노웰과 눈이 마주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자기만 믿으라는 듯 든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전, 던전에 들어올 때와 달리 정령왕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워져 있었다.
자신만만해 보이던 샐리온마저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용건은 이게 다야. 인제 그만 돌아가. 빨리 가봐야 한다면서?”
“…그랬지요. 그럼 이만…. 다음에 뵐 기회가 오면 좋겠군요.”
노웰이 고개를 숙였고, 다른 정령왕들도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정령왕들은 던전으로 들어왔던 물길을 따라 떠났다.
엘시스는 떠나기 전 걱정스러운 눈길을 한 번 더 건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파괴자들이 쳐들어올 때 생겨날 지구와 대륙의 균열.
그로 인해 생겨날 이차적인 문제에 대한 대책은 모두 세웠다.
지구와 대륙은 비슷한 상황에 부닥치겠지만 그에 대한 방안은 완전히 정반대다.
사회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데다가, 모두가 숨거나 피하는 게 불가능한 지구는, 군사적으로 대비하는 방향으로.
이미 한 번 멸망에 가까운 일을 겪은 대륙은 싸워봤자 이길 수도 없으니 최대한 숨고 피하도록.
다가올 위기를 알리고 대략적인 방향까지 지시해줬으니 더 이상 내가 손댈 생각은 없다.
‘남은 건 나에게 달린 건가….’
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걸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리넬의 말에 따르면 놈들이 나보다 강한 것 같긴 한데, 아직 직접 놈들을 마주해본 적이 없기에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초월자가 된 후로 나보다 강한 존재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솔직히 감이 제대로 안 온다.
“흠......
나는 잠시 마계 서쪽의 협곡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깊고 깊은 협곡의 안쪽에 바위처럼 가만히 놓인 크리판의 존재가 느껴진다.
전에 봤던 그 자리에서 1mm도 이동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생물이 아닌 무생물로 봐야 할 것 같지만….
‘박동이 있었지.’
며칠 전 크리판에게서 또다시 심장이 박동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일시적이었지만, 확실히 느꼈다.
분명히 깨어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 시기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미국에서 돌아오고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한성 길드의 분위기는 전에 없이 밝고 떠들썩했다.
죽은 줄 알았던 길드원 유희진이 무사히 살아 돌아온 데다가, 재측정 결과 S급으로 승급까지 한 것이었다.
엄청난 경사였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력과 경험으로 A급까지 올라간 헌터들은 꽤 여럿 있었다.
그러나 A급에서 S급으로 성장한 헌터는 유희진이 처음이었다.
“축하드립니다, 길드장님. 이로써 한성 길드는 S급 헌터가 두 명이나 소속된 길드가 되었군요. 국내 최초 맞죠?”
“맞습니다. 저희 한성 길드가 국내 최초 두 명의 S급을 보유한 길드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목표 중 하나였는데 그 일이 이렇게 뜬금없이 이뤄질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희진이가 S급이 되다니….”
길드장 한성진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그게, 이런 경사에 잔치가 빠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곳 던전 식당에서 유희진 헌터 승급 축하 파티를 열면 좋을 것 같아서 제안하려고 왔습니다. 유희진 헌터도 직접 보고, 겸사겸사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끼워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이걸로 우리 한성 길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길드로 인정받게 될 겁니다. 곧 기사로 보도될 예정인데, 그럼 이제는 4대 길드라는 말도 옛말이 되겠지요. 독보적인 한성 길드와 그 아래에 3대 길드가 존재하는 모습으로 인식될 겁니다. 영웅 길드도 이제 명백히 한성 아래가 되겠군요. 규모가 아무리 커 봤자 S급 헌터가 둘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니까요.”
말을 이어나가는 한성진의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