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반드시
나는 박문석에게 말했다.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방심하고 있었다면 몰라도, 그동안 준비한 게 있잖아요.”
[…그렇죠.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한 것 같습니다.]
직접 관여한 건 아니지만 나는 현재 이들이 어느 정도 대비해뒀는지 대략 알고 있었다.
최상급자만 알고 있는 기밀 정보들도 일부 들었고.
솔직히 탁상공론에서 끝날까 봐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철저하게 실질적인 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한꺼번에 쳐들어오진 않을 겁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적어도 이틀 정도는 있어야 실질적으로 평소와 다른 현상이 나타날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점검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당신은 어떻게…. 아니, 알겠습니다.”
박문석은 뭔가 물으려다가 말을 돌렸다.
던전을 소유한 것 이상의 어떤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만, 거기서 더 캐묻지는 않았다.
초반에 말을 꺼낸 적은 있으나 은근히 대화의 방향을 돌리자 더는 묻지 않았다.
국장이라는 직위는 나에게 별다른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리판의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미미하게 움찔거리던 놈이 자리를 옮긴 것 같다.
동시에 파괴자들이 마계의 바깥쪽에서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도 움직여야 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최지수.”
마침 자기 방에서 걸어 나오는 동생을 불렀다.
“하아아암. 왜?”
해가 중천에 든 시간에 일어나서 태평하게 걸어 나온다.
별생각 없이 대답하며 스쳐 지나가려던 지수가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나도 모르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
“왜? 불러놓고 말을 안 해….”
지수가 불안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너 당분간 좀 숨어있어.”
“숨으라고? 어디에?”
“내 던전에. 베로랑 구름이랑 애들 다 데리고 거기에서 지내. 안에서 생활할 수 있게 다 해놨으니까 절대 나오지 말고.”
“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 던전에서 안전하게 있어.”
“돌아오다니…. 어디 가는 건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올게.”
“무섭게 왜 그래….”
다가올 대격변에 대해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수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긴가민가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 나는 흘리듯 던전에 숨어있으라고 말했었고.
눈치 없는 애가 아니니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뭔가가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지.
“시간 없으니까 빨리 들어가. 너희도 빨리.”
그때 마계 바깥쪽에서 아까보다 더 큰 충격이 느껴졌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바로 게이트를 열고 지수와 몬스터들을 밀어 넣었다.
“어어어? 잠깐만!”
“웡! 우어어엉!”
“삐이이이익!”
“삐이이잇!”
“웬만한 건 다 있으니까 크게 불편하진 않을 거야.”
그들을 모두 던전으로 말아 넣고 나 또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던전 식당이 아닌 숨겨진 공간으로 모두를 들려 보냈다.
“아니 이게… 뭐야? 이건 데도 있었어?”
보여 준 적이 없으니 놀랄 만도 했다.
집과 같지는 않아도 푹신한 침대와 필요한 가구, 생활용품들은 다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의식주는 모두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시간을 때울 수 있게 책과 퍼즐 등 혼자 할 수 있는 취미용 물품들도 다양하게 가져다 놓았다.
“물은 저쪽에서 흘러들어오는 게 있으니까 거기서 쓰면 돼. 깨끗한 물이라 마셔도 되고. 식량은 여기에 있고 이건 빨리 먹어야 하는 거, 이쪽은 통조림이랑 장기 보관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나는 최지수를 데리고 다니며 빠른 속도로 설명했다.
지수는 놀라고 당황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내 말을 새겨들으려 노력하는 듯했다.
상황 파악이 끝난 것이다.
“이 애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외롭지는 않을 거야. 더 시간이 없다. 난 가봐야겠어.”
“언제 올 건데? 뭐 하러 가는 거야?”
“지금 그런 거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나는 대충 대답하며 게이트를 열었다.
미리 차근차근 알려줬다면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조금만 힌트를 줘도 눈치 빠르게 내가 함께 던전에 피신해있지 않을 걸 알아챘을 테니까.
괜히 불안감만 증폭시킬 수도 있고, 내가 가지 못하게 말리려고 할 것 같아서 미루다 보니 이 시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후다닥 알려주고 가는 게 나은 것도 같다.
게이트를 여는 나를 지수가 붙잡았다.
“조, 조심해! 그리고 빨리 와야 해!”
“최대한 노력해볼게. 내가 오기 전까지 여기서 나가면 안 돼.”
재차 당부하자 지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내가 게이트를 열어주지 않는 이상 나갈 수가 없긴 하지만….
“끼이이잉….”
“우어어어엉!”
“삐이이이….”
“삐이익!”
구름이와 베로, 그리고 슬라임들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구슬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마계로 넘어갔다.
이미 한참 전부터 계획했던 것이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게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네.’
안전을 위해서는 내 던전에 피신해있는 것이 제일이다.
밖에서는 온갖 난리가 벌어질지라도, 던전 내부는 안전하다.
그곳에서 갖춰진 것들을 활용하며 평화롭게 지내다가,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것만큼 좋은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지수는 던전에 갇힌 채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가야겠지.’
그러니까 내가 파괴자들을 막지 못하고, 그들이 마계와 지구, 대륙까지도 모두 점령할 경우 말이다.
아무리 베로와 다른 몬스터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과는 또 다르다.
혼자 고립되어 살아가면서, 내가 결국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나를 원망하게 될 수도 있겠지….
나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다.
비각성자인 동생을 이곳에 안전하게 넣어두고 모든 걸 해결한 후 다시 꺼내주는 것.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다.
게이트를 통해 마계의 서쪽 협곡으로 나온 나는 곧장 아래로 빠르게 하강했다.
***
그르르르….
가래가 끓는 듯한 불쾌한 소리를 내는 검은 바윗덩이 같은 놈.
크리판은 원래 있던 곳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사이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마물들이 없어.’
본래 웅크린 크리판의 옆에 크고 작은 마물들이 꾸물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놈들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는 길목도 깨끗했다.
쩌어업. 쩌어억. 끄르르….
자세히 들어보니 질척하게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크리판이 그것들을 모두 먹어 치운 것 같다.
이 고립된 긴 협곡에서 살아가는 마물들의 수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자기들끼리 먹고 먹히면서도 자꾸 증식하여 어떤 좁은 길목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마물들이 들어차 있기도 했다.
그것들을 모두 합치면 크리판의 덩치보다 몇십 배는 더 클 것인데.
이 기괴한 놈은 그것들을 모두 먹고 소화시켜 버린 것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쩝쩝대며 만찬을 즐기는 크리판의 뒷모습을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두근.
수치로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
크리판의 내부에서 전율이 일 정도의 마력이 확실히 느껴졌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마력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수준의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전대 마왕들이 탐내는 게 당연할 정도군.’
나는 소리 없이 검을 꺼내 들었다.
빠르게 크리판을 해치우고 저 마력을 얻고 파괴자들을 죽인다.
아주 간단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계획.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우르르르….
이번의 울림은 크리판에게서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마계의 하늘 어디에선가 미약한 진동과 함께 무언가 거대한 것들이 마찰하는 소리였다.
즉, 파괴자들이 곧 마계로 들이닥칠 거란 의미.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크리판에게로 다가갔다.
신중히, 정확하게, 그리고 재빠르게.
나는 검 끝이 크리판의 심장에 닿도록 정확히 겨냥했다.
그리고 대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며 몸을 움직였다.
무아지경으로 식사 중인 크리판의 등에 날카로운 검 끝이 닿았다.
아니, 닿은 줄 알았다.
……!
내 마력을 한껏 담은 검 끝이 크리판의 몸을 관통하지 못했다.
검 끝과 크리판의 등 사이에 극도로 미세한 틈이 있었다.
이놈이 찰나의 순간 자신의 등에 엄청나게 압축된 배리어를 씌운 것이었다.
분명 검을 휘두르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쩌어어업… 쩌업….
크리판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식사 중이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의식하여 만들어 낸 배리어가 아닌, 자동 방어기제 같은 것일까?
평범한 배리어였다면 내 마력으로 손쉽게 뚫고 들어갔을 것인데, 역시 보통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전대 마왕들이 이놈을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 어차피 쉽게 해결될 거란 생각은 안 했어.”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도 놈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청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평범한 마물이 아니니 뭐 하나 일반적일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꾸울꺽.
쩝쩝대던 크리판이 드디어 입 안의 것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뒤돌았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끼이이이이이이잇!”
뒤돌던 놈이 귀가 찢어질 듯한 고음을 내질렀다.
마치 등 뒤에 내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고 깜짝 놀란 것 같은 반응이었다.
크리판은 후다닥 뒷걸음질 치며 순식간에 나에게서 몇 미터 떨어졌다.
짧은 다리로 어떻게 저리 빨리 움직인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놈은 등을 절벽에 붙이고도 더 멀리 도망칠 곳이 없는지 주변을 살피는 기색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판의 정면은 극혐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생김새였다.
딱딱하고 검은 등짝과 달리 앞모습은 온통 시뻘겠다.
겉 피부가 없는 속살처럼 보이는 그곳에 눈알로 보이는 것과 입으로 보이는 것이 규칙성 없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 생긴 것도 제각각인 눈알 수십 개가 주위를 살피듯 요리조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중 1/3 정도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속살을 최대한 숨기려는 듯 고슴도치처럼 몸을 점점 움츠리면서도 눈동자는 나를 향해있었다.
놈은 도망치려는 듯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했다.
“…뭐 저렇게 생겼냐.”
기괴한 형상에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크리판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마치 말뜻을 이해하고 분노한 듯한 반응이었다.
몇 초간 부들거리던 놈은 곧 다시 잠잠해지더니 가던 길을 다시 가려고 했다.
진짜 알아들은 건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가?
“못생겼다.”
“……!”
크리판이 몸을 잘게 부풀렸다 움츠리기를 반복한다.
이제 절반 이상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