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식당합니다-118화 (118/125)

118화. 침입

어쩌면 지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도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정도면 생각보다 똑똑할지도 모르고.

아무래도 생각보다 공격적이지는 않은지 도망칠 생각이 큰 것 같다.

‘그럼 더 골치 아파지지.’

생긴 것답지 않게 재빠른 놈이다.

게다가 공격력은 모르겠지만, 방어력이 장난이 아니다.

도망치고, 스스로 몸을 지키기로 작정하면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야, 이 못생긴 놈아. 거울 안 봐도 네가 어떻게 생긴지는 알지? 살다 살다 너 같은 건 처음 본다. 마룡이 싸지른 똥도 너보다는 잘생겼겠어.”

부들부들 떨기만 하던 크리판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수십 개의 눈 나를 노려본다.

그리고 귀 아픈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잇!”

덤벼드는 크리판을 피하지 않고 나 또한 앞으로 튀어 나갔다.

***

아스키나 대륙.

수십 년 만에 겨우 평화를 찾고, 살아남은 생명들이 다시 땅을 일궈나가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스키나 대륙은 또다시 마계에서 튀어나오는 마물과 몬스터들에게 마구잡이로 짓밟히고 있었다.

애써 되살려놓은 수백 년 묵은 나무가 꺾이고, 살아남은 엘프들이 열심히 지은 거처가 무너져내렸다.

대륙의 위대한 존재들, 불의 정령왕, 땅의 정령왕, 바람의 정령왕은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웰.”

바람의 정령왕 샐리온이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게 진짜 맞는 건가?”

“…….”

“우리 땅이, 겨우 제 모습을 되찾아가던 땅이 다시 죽어가고 있는데 이걸 이렇게 구경하고만 있는 게, 맞아?”

“…지금은 감정적으로 행동할 때가 아니야, 샐리온.”

“감정적? 이 분노를 겨우 그딴 식으로 취급하겠다고? 하,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

“대답해봐!”

대답 없는 노웰의 모습에 샐리온이 점점 더 격분했다.

그러나 노웰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노웰!”

무시당했다는 느낌에 샐리온이 발끈하여 더 크게 화를 내려 했다.

스윽.

그때 샐리온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그만하라는 듯 샐리온의 어깨를 힘주어 잡은 것이었다.

“왜 이래? 이거 놔!”

“샐리온.”

“너도 노웰과 같은 생각인 거냐, 실피드! 명색이 정령왕이라는 것들이 대체…!”

실피드는 샐리온의 분노에 반응하지 않고 눈썹을 까딱이며 조용히 눈짓했다.

“뭐! 그건 무슨 의민데?”

그 모습에 샐리온이 덩달아 시선을 옮겼다.

시선 끝에 닿는 것은 노웰의 손이었다.

그의 두 주먹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

덤덤해 보이기만 했던 노웰이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손톱이 살을 파고든 것도 모자라서 어찌나 힘을 줬는지 이상하게 틀려있기까지 했다.

진짜 인간이었다면 뼈와 관절에 큰 부상을 입은 거로 봐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정령체였으므로 근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 않는 이상 육체의 손상은 어렵지 않게 치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육체의 상처로 인한 고통은 인간들과 같았다.

샐리온은 더 몰아붙이려던 걸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정령왕들이 아스키나 대륙을 아끼지만,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건 노웰일지도 모른다.

땅의 정령왕인 그는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 강한 애착을 느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동물들, 수십 년을 산 나무들과 며칠 살지 못하는 작은 풀, 하다못해 흙 속에 사는 작은 곤충들까지도 특히 노웰에게는 보물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들이 겪고 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함께 느끼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샐리온은 혼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어디엔가 화풀이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침울했던 분위기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노웰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아래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고 있었고, 샐리온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쉴 새 없이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실피드는 결국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긍정적인 엘시스가 있었다면 분위기가 좀 달랐겠지만, 한없이 진지한 이 녀석들은 끝없이 땅굴을 팔 기세였다.

실피드는 의식적으로 가벼운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자, 자, 손가락 좀 펴. 이러다 진짜 손가락 다 부서지겠어. 그리고 샐리온, 너는 한숨 좀 그만 쉬고.”

“……!”

“아….”

노웰과 샐리온은 그제야 자신들이 뭘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듯했다.

그 얼떨떨한 표정에 실피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니, 뭐, 그래. 한숨은 무의식중에 푹푹 쉴 수 있다 쳐. 그런데 노웰 너는 그거 안 아파? 손가락 부러진 거 아니야?”

“아프네…….”

노웰이 두 주먹을 펼치는데 뭔가 잘못된 듯 뿌득 소리가 났다.

손바닥에 난 상처에서는 하염없이 피가 흘렀다.

“쯧, 뭘 어떻게 하면 주먹을 쥐면서 그렇게 피가 줄줄 흐르게 할 수 있는 거야? 그것도 재주다, 재주.”

“…….”

“뭘 가만히 보고만 있어. 피 보기 싫으니까 빨리 치료해.”

실피드가 타박하자 노웰의 두 손이 흙으로 부스러지며 흐트러졌다가 다시 뭉쳤다.

뒤틀렸던 손 모양은 정상으로 되돌아왔고, 피로 얼룩졌던 피부는 깨끗한 색이 되었다.

샐리온은 아까 뭐라고 한 게 미안한 듯 한걸음 뒤에서 머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자자, 얘들아. 좋게 생각하자고. 이렇게 우울해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실제로도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야. 일단 지성체들은 모두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에 일이 벌어졌으니까.”

생명에 경중은 없다지만 현실적으로 지성체들을 복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지켜내기만 한다면, 그리고 이 사태가 끝나기까지 버텨낼 수만 있다면 생각보다 빨리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니까 너무 침울해하지 말자는 말이야.”

“옛날….”

실피드의 말에 샐리온과 노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모두가 온 힘을 다해 싸우고 대항했다.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에도 대륙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몬스터뿐 아니라 상당수의 마족이 합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많은 생명들이 죽었고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다.

살아있는 것의 90% 이상이 사라졌다.

그분이 나타나기 전, 대륙은 온통 절망뿐이었다.

“확실히 그때에 비하면 훨씬 괜찮은 상황이지. 이번에는 마족들도 없고, 우리가 해야 할 조치는 미리 해둔 상황이니.”

뼈 아프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수준의 피해만 입고 있는 것이었다.

노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아주 미미한 변화였지만 오랜 세월 함께해왔기에 읽을 수 있는 변화였다.

인간, 엘프를 비롯한 몇몇 지성체들과 가능한 많은 동물들은 고립된 섬 몇 군데에 분산시켜 놓았다.

과거 수십 년간 이어진 마계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대부분은 섬에 고립되어 있었다.

바다에 사는 몬스터도 있긴 했지만 그리 많지 않았고, 그들의 생태를 파악해 조심하면 큰 피해를 볼 일은 거의 없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몬스터라 해도 망망대해를 넘어오긴 어려운 일이었다.

마족들이 가장 위험한 적이었으나 워낙 외딴 섬이라 그들 또한 그 존재 자체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안타까운 과거지만 그를 통해 얻은 노하우라면 노하우였다.

“딱 한 번 쓸어버리면 속 시원할 것 같은데. 안 되겠지? 음, 안 되겠군.”

샐리온이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가 실피드와 노웰의 표정을 보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노웰이 엄격하게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놈들을 쓸어버리는 게 아니야. 섬이라고 해서 안전하진 않은 거 알잖아. 최대한 안정적인 곳을 선별했지만, 언제든지 새로운 게이트가 생겨날 수 있지. 주시하고 있다가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 하니 불필요하게 힘 뺄 생각은 하지 마.”

“알아, 알아. 나도 그냥 해본 소리였어. 하도 답답해서.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참고 견뎌내는 것 또한 우리가 할 일. 현호 님이 오실 때까지 참아내야 해.”

“알겠어. 알겠다니까….”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던 실피드가 중얼거렸다.

“엘시스는 잘하고 있으려나?”

부재가 아쉬우니 자꾸 생각나는 것이었다.

정령왕 중 유일하게 이 자리에 없는 엘시스는 지구의 작은 꼬마 곁에 있었다.

정식 계약을 맺진 않았지만 이미 계약자나 다름없는 관계였기에 정령왕들은 엘시스를 이해해주었다.

정령인 이상 그들도 계약자가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때 투덜거리던 샐리온의 옆에 작은 불꽃이 하나 생겨났다.

불꽃이 일렁이며 팔다리가 생겨나 불의 하급정령 형상을 갖추었다.

“타이밍 좋네. 말 꺼내기가 무섭게 침입자가 생기다니.”

“샐리온, 네가 가는 게 어때? 몸이 근질근질해 보이던데.”

“좋지.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어. 어차피 불의 정령이 제일 먼저 찾아왔으니 나에게 그 권리가 있지 않겠어?”

“싸울 권리라니 그건 또 무슨 희한한 소리야.”

“아무튼, 내가 가볼게. 여긴 나한테 맡기고 너흰 다른 지역에 신경 써.”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샐리온의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래.”

남은 두 정령왕은 못 말린다는 듯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저었다.

샐리온은 불의 정령왕답게 급하고 과격했지만 그만큼 강했다.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결하고 올 것이 틀림없었기에 노웰과 실피드는 걱정 없이 다른 지역의 살아남은 인간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

후우….

칼로스는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괜찮으십니까, 칼로스 님!”

콰직!

타론이 옆쪽에서 달려드는 적의 머리를 날리며 소리쳤다.

놈은 검푸른 액체를 흩뿌리며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놈은 머리 없이도 꿈틀거리며 기어가 타론을 공격하려 했다.

발목을 붙잡힌 타론이 질색하며 발길질을 했다.

“이 미친 것들이! 죽어! 좀! 뒤져버리라고!”

콰직! 콱! 콱! 뿌드득!

온몸이 거의 쥐포가 되고 나서야 적은 꿈틀거림을 멈췄다.

타론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징그러운 놈들 이게 다 뭔지…. 아, 칼로스 님!”

“너는 날 뭘로 보는 거냐? 당연히 괜찮지. 너야말로 힘들어 보이는데?”

“무슨 소리십니까. 저도 아직 팔팔합니다!”

타론이 붉은 머리에 엉겨 붙은 검푸른 액체를 불쾌해하며 털어냈다.

“그나저나 저것들은 정체가 뭡니까? 살다 살다 저런 놈들은 처음 봅니다. 마계에도 싸움에 미친 놈들이 수두룩하지만 저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은데…. 멍청한 마물들도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알건만, 이것들은 그런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군요.”

“심지어 쉽게 죽지도 않아. 이 질긴 것들은.”

칼로스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놈의 양팔을 힘으로 잡아 뜯으며 말했다.

사흘 전.

마계의 지축이 흔들리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두 번이나 비슷한 일이 벌어졌으니까.

그러나 영문을 몰랐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외부의 침입.’

이제 마왕이 된 그조차도 알지 못했던 더 큰 세계에서 그들의 땅을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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