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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식당합니다-119화 (119/125)

119화. 다음 단계

‘현호 님이 아니었다면 짐작조차 못 했을 일이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른 채 당하기만 했을 게 분명했다.

아마 마계 밖에서 온 침입자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적들은 마족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인간의 얼굴 또는 몬스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덩치는 각양각색이었는데, 평균적으로 일반 마족보다 컸다.

칼로스는 마족 중에서도 덩치가 가장 큰 편에 속했는데 그와 비슷한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무기나 싸우는 방식은 제각각이었고.

그래도 적군과 아군이 구분은 되어서 다행이었다.

놈들의 눈빛은 어딜 보는지 모르게 흐리멍덩했다.

속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같은 느낌이었다.

마족들은 놈들을 마계어로 가짜라는 의미를 가진 바눔이란 단어로 부르고 있었다.

빠지지직!

수많은 동료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걸 보고도 전혀 두려움 없이 덤벼드는 또 다른 바눔.

칼로스는 놈을 완전히 하나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찰나의 여유가 생겨 칼로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쩌다 보니 마왕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현호의 말대로 해야 할 일에 책임을 다했으나 그에게 더 어울리는 건 실전에서의 전투였다.

자신 같은 전력이 낭비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칼로스는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전장에 뛰어들었다.

한동안 미친 듯이 덤벼드는 바눔 수백 마리를 정신없이 때려 부수기만 하다가 이제 겨우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타론을 비롯한 몇몇 군단장들이 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마족 군단들 또한 밀리지 않고 바눔을 하나하나 물리치며 선방하고 있었다.

마룡들을 비롯하여 길들일 수 있는 몬스터들 모두가 협력했다.

그야말로 모든 걸 끌어모아 싸우는 중이었다.

칼로스가 마족이 되고, 마족 전체에 시행했던 체계적인 훈련.

‘분명 성과가 있었다.’

개별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마족들 하나하나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본인들은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로스가 뿌듯할 정도였다.

전대 마왕, 아니 지금껏 마계에 존재해왔던 그 어떤 마족 군단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어떤 상대인지 모른다, 생각 이상으로 강할 수 있다고 현호는 당부했었다.

그러나 칼로스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마음 한쪽에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만약 그 훈련이 없었다면, 그리고 칼로스가 마왕이 되지 않아 마족들 간의 단결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끝장나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는 회의감이 들었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깊이 할 때는 아니었다.

그냥 보기에는 막상막하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우세하다.’

칼로스는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차이는 아니지만, 분명 자신들의 공격이 더 잘 먹히고 있다.

이대로 전투가 이어진다면 결국 마족의 승리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눔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짝짝짝.

칼로스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위를 향했다.

머지않은 허공에 마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것 같은 자세로 앉아 내려다보는 남자가 낸 소리였다.

그 옆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와 후드를 뒤집어써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하나하나가 엄청난 기운을 내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초월자들.’

그들은 눈을 한껏 휘고 웃고 있었다.

아래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즐거운 것처럼.

자신들과 함께 나타난 이 텅 빈 껍데기 같은 놈들이 죽어 나가는 것마저 재밌어하는 듯했다.

“좋아, 잘해주고 있어! 네가 이곳의 주인인가 본데, 아주 마음에 드는군!”

진심으로 신나 하는 모습에 칼로스는 이를 갈았다.

“혹시 금방 끝날까 봐 좀 걱정이었는데 생각보다 볼 만하잖아?”

“지지난번이었나, 제대로 반항도 못 하고 하루 만에 끝나버려서 엄청 시시했는데 말이야.”

“기다린 보람이 없었지. 너무 약해빠져서 어이가 없었다니까?”

“벌레만도 못한 것들. 우리가 발견하기 전까지 살아남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지.”

양옆에 선 여자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나누는 대화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키득거리는 모습에 칼로스의 눈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파앗!

칼로스는 더 참지 못하고 검은 날개를 펼치며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콰아아앙!

그리고 역시, 목표물 가까이에 다가가기도 전에 커다란 파공음과 함께 온몸에 고통이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 정신을 잃었고, 또다시 몸에 와닿는 충격에 깨어났다.

바닥에 거대한 분화구 모양이 생길 정도로 강하게 처박힌 것이었다.

머지않은 그곳에 있던 타론이 경악하여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먹먹하고 온몸이 아팠으나 그보다 더한 건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당했다는 허망함이었다.

“크흑….”

어찌나 아프던지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땅에 가해진 충격에 근방 몇 미터 안의 바눔이 모두 죽어버려서 다른 위험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어 본 적이 있었던가.

타의에 의해 바닥에 얼굴을 비비는 경험은 육체적인 충격 이전에 정신에 큰 타격이었다.

‘…아니지.’

처음이 아니었다.

현호에게 더 심하게 처맞고 나뒹굴었던 적이 있지 않던가.

잠시 잊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그때가 더 아프고 충격적이었다.

칼로스가 빠르게 멘탈을 회복하는 사이 위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 날파리가 버르장머리 없게 어딜 덤벼들어?”

“투른. 다치게 하면 안 돼. 이제 시작인데 중요한 전력을 죽여버리면 볼거리가 사라진다고.”

“알고 있어. 나도 적당히 쳐내기만 한 거야. 설마 저렇게까지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네.”

조용히 지켜만 보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이봐. 어서 일어나. 그렇게 누워 있으면 재미가 없잖아.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어쩌면 운 좋게 이길 수도 있잖아? 아니면 노력이 가상해서 우리가 물러날지도 모르는 거고. 더 재밌게 해봐. 그럼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내용은 모욕적이었다.

목숨을 건 사투가 이놈들에게는 단순한 유희거리인 것이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줄 아느냐?.”

“오호, 뭔가 숨겨둔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숨겨둔 계획이라기보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현호가 곧 돌아와서 함께 싸울 것이다.

솔직히 칼로스의 수준으로는 저놈들과 현호 중 누가 더 우세한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숫자로 따지면 3대 1이니 당연히 더 불리하겠지만, 칼로스는 이미 현호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그가 어떻게든 해줄 거란 생각이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거 지금 보여주면 안 될까?

“…….”

칼로스의 말이 흥미를 끈 모양인지 놈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칼로스는 더 입을 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욱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말을 할수록 정보를 주는 격이니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이다.

왼쪽 날개가 부러졌는지 지끈거렸다.

조금만 쉬면 낫겠지만 지금은 짧은 휴식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대로 버티는 수밖에.

“뭐야, 말 안 할 거냐?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얘기해줘야지. 뭘 숨겨놓은 건데? 뭘 더 보여주려는 거냐고!”

“…….”

칼로스의 침묵은 파괴자들의 심기를 약간 불편하게 했다.

가운데 있던 소년이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양옆의 인물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아니, 존! 잠깐만. 그렇다고 네가 다 쓸어버리면 또 우리 볼거리가 사라져버리잖아. 조금만 참아, 응?”

“그래. 얼마나 기다려서 얻은 기회인데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잖아? 다른 적당한 세계를 찾으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인데. 들어가는 데까진 또 수십 년이 넘게 걸릴 거고. 잘못하면 백 년이 넘어갈 수도 있어.”

“…….”

존은 들어 올렸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으나 이 상황이 못마땅한 듯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있었다.

그걸 알아챈 투른이 좋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어때? 지금은 버틸 만하니까 아직 다 보여주지 않는 거 아니겠어? 좀 더 몰아붙이면 이놈이 꽁꽁 감추고 있는 게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오, 투른. 네가 웬일로 머리를 써? 괜찮은 생각인데?”

“뭐 이런 거 가지고. 당연한 거 아닌가?”

후드 쓴 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존은 그의 말에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들의 대화에 칼로스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다음 단계라고?’

이 껍데기만 있는 것 같은 놈들이 다가 아니었단 말인가.

칼로스가 저들에게 덤빌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당장에 죽임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내심 있었기 때문이다.

관찰하듯 유심히 지켜보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으니까.

살짝 심기를 건드리는 정도로 상황이 크게 바뀔 거로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우우우우웅.

공기가 불길하게 울렸다.

“뭐, 뭐야?”

“이놈들 갑자기 이상해졌어!”

바눔을 공격하던 마족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놈들이 갑자기 얼어버린 것처럼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긱.

기기긱.

기기기기기긱.

싸우던 상대가 동작을 멈추는 건 엄청난 기회였다.

무방비상태를 노려 쉽게 승리할 수 있으니 당연히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해야 했다.

그러나 어쩐지 마족들은 쉽사리 바눔을 공격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묘한 압박감에 자기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다들 뭣들 하는 거야! 왜 가만있어! 지금이 기회인데!”

그중 몇몇 감이 좋지 않은 마족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황당해했다.

타앗!

성격 급한 마족 하나가 장창을 앞으로 쭉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비등비등하게 싸우던 바눔을 단숨에 죽일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뻐억!

“헉…!”

호기롭게 달려 나가던 마족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등으로 바눔의 손이 튀어나와 있다.

순식간에 맨손에 관통당해버린 마족은 그 상태로 축 늘어져 버렸다.

주변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눔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바닥에 떨구는 것이었다.

이런 장난감은 마치 장단을 맞춰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듯….

바눔의 희미했던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왔다.

서서히, 조금 전과는 다른 무거운 기운을 내뿜으며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막이 흘렀다.

수많은 마족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갑자기 뭔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그럭저럭 싸울만한 상대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마족 중에는 칼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안한 마족들은 지도자인 칼로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일 텐데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현호 님, 어디 계신 겁니까….’

칼로스는 속으로 깊게 탄식했다.

***

꾸르르르….

크리판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꼬꾸라졌다.

풀썩.

바닥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진 놈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수만 년을 살아온 미지의 생물이 마침내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생물… 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세월이 훨씬 더 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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