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식당합니다-120화 (120/125)

120화. 실망인데

두근 두근.

크리판의 심장은 아직 박동을 멈추지 않은 채 내 손에 들려있다.

본체가 죽고, 갈 곳을 잃은 마력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 더더욱 심장으로 모여 응축되었다.

그 농도가 어마어마하여, 거의 마력의 양으로만 따지면 거의 내가 가진 것과 비등한 수준이었다.

이 대단한 마력을 제대로 다룰 줄 알았다면 아마 마왕이 아닌 이놈이 마계를 평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판은 그 마력을 오로지 모으는 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를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 사용했고.

스스로 그걸 의도했다기보다는, 생물이 여러 세대를 거쳐 진화하듯 크리판도 살아남으려는 본능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진화한 거겠지.

전대 마왕들이 고전했던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방어력이 뛰어났다.

나조차도 뚫기 어려울 정도의 쉴드와 생긴 것답지 않게 재빠르게 도망치던 크리판.

심지어 심장이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더더욱 처리하기 까다로운 상태였다.

작정하고 도망치기만 하다가 다시 잠들어버렸다면 아무리 나라도 답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판은 마냥 도망치지만은 않았다.

‘도발이 먹혀서 다행이지.’

못났다는 말에 격하게 반응하던 녀석은 나에게 원한이라도 품게 되었는지 중간중간 나름의 반격을 하려고 했다.

덕분에 점차 틈이 생겨났고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크리판을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쓰러진 크리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고 특별히 해를 끼치는 놈도 아니었지만 필요에 의해 죽이게 되었다.

말귀를 알아듣는 정도의 지능이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좀 미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크리판은 세상의 이치를 벗어난 존재였다.

지금은 괜찮아도 언젠가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물론 지금의 목적은 크리판의 마력이었지만.

나는 크리판을 불태워 공기 중에 흩날리는 재로 만들었다.

조금 있다 몰려들 다른 마물들에게 뜯어먹히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수만 년을 산 마물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다음으로 할 일은 손아귀에서 박동하는 크리판의 심장을 흡수하는 것.

이게 목표였으나 생각보다 과도한 마력이라 막상 손에 넣었음에도 흡수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지나치게 압축되어 분리하거나 일부만 갖는 것도 불가능하고.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인간을 초월한 이 몸으로도 버거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는 사이에도 마계 저편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는 게 느껴진다.

크리판을 잡는 데 거의 나흘 가까이 걸렸으니 그사이 파괴자들의 침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워낙 곳곳에서 강대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어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아직 마족 군단이 잘 버티고 있는 것 같다.

한시가 급한 상황.

생각이 길어지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이 마력이 없으면 내가 파괴자들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력 없이 이길 수 있는 상대인데 굳이 섭취하여 더 일을 망치게 될 수도 있다.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짧은 고민 후,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나는 크리판 심장에 정신을 집중하고, 버거울 정도로 농밀한 마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크윽….”

역시나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 같다.

나는 칼로스가 조금만 더 버텨주길 바라며 점차 무의식 상태로 빠져들었다.

***

콰지직!

“크아아악!”

“으으으으…….”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충돌음과 비명, 그리고 고통스러운 신음에 칼로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지금 극도로 지쳤다.

벌써 일주일이 넘게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수일 동안 멈추지 않고 싸워본 적은 과거에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까지 시간을 끌 필요가 있을 정도의 호적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과거와 현재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때 칼로스는 분명한 강자였고, 대부분 상대의 우위에서 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칼로스의 주변에는 다수의 마족이 있었다.

절반 정도는 계속 바눔을 막아내고 있었으나 나머지 절반은 죽거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건 살기 위한 발버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길 수도,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는 전투.

군단장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책임감과 부담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으드드득.

칼로스는 바로 앞에 다가온 바눔의 목을 꺾으며 허리를 절단 냈다.

진화한 바눔은 처음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다행히도 칼로스보다 강하진 않았다.

그러나 다른 마족들에게는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어서 점점 피해가 커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부러진 한쪽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마족들을 지켜보든 외부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숨겨 놓은 힘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혀를 차더니 흥미가 떨어졌는지 칼로스 곁을 떠난 것이다.

아마 또 다른 구경거리를 찾아간 듯했다.

힘겨워하는 자신들을 보며 난이도를 조절해야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누더니 바눔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졌었다.

최대한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걸 보기 위해 뭔가 조처를 한 것 같았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겠지….

철저하게 농락당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어이없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소음 중에도 그 소리가 귀에 꽂힌 것은 아주 익숙한 목소리기 때문이었다.

“타론!”

붉은 머리 마족이 꿈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칼로스는 빠르게 달려 그를 밟으려는 바눔을 온몸으로 튕겨냈다.

마무리 짓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는데, 발밑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못… 일어날 겁니다. 제가 거의 반 죽여놔서…. 거의 이기고 있었는데 잠깐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반 죽은 건 너인 것 같은데, 타론?”

“아직 멀쩡합니다.”

“…….”

타론은 끙 소리를 내며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그는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뼈는 여러 군데 부러진 것 같았고 얼굴도 제대로 맞았는데 코마저 휘어있었다.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칼로스의 어이없는 눈빛에 타론이 결국 다시 풀썩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사실 죽을 것 같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가 문제인지 파악할 시간도 없네요.”

이대로 뒀다간 이 녀석도 죽을 게 분명해 보였다.

칼로스는 타론을 어깨에 짊어 멨다.

“으허어억!”

타론은 깜짝 놀라 파드득거렸지만, 칼로스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고 그나마 숨을 만해 보이는 바위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래봤자 열린 공간이라 오래 숨어있을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두두둑!

칼로스는 그새 덤벼드는 바눔 하나의 집어 들어 반대로 완전히 접어버렸다.

바위에 기대어 누운 타론은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대단하다.

원래도 대단했지만 마왕이 된 후 그는 더 대단해졌다.

이제는 전대 마왕과 비교해봐도 뒤처지지 않을, 아니 더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숨어있는 거야? 포기한 건가?”

머리 위쪽에서 들리는 기분 나쁜 목소리.

가래가 들끓는 듯한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킬킬거리는 자는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였다.

“에이, 재미없게 구네. 뭔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시시하다니. 우리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나타났는지 다른 두 사람 또한 그의 뒤에서 칼로스와 타론을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윽….”

칼로스는 이를 갈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날 수도 없으니 아까와 같은 의미 없는 공격조차 시도할 수 없었다.

칼로스는 끝없는 무력감에 휩싸였고, 타론 또한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흐음, 이거 더 볼 게 없는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 존?”

존은 대답 없이 무표정하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처음엔 그들이 준비한 병기에 뒤처지지 않게 제법 잘 싸우는 모습에 꽤 즐거웠다.

그러나 뭔가 더 있는 것처럼 한껏 기대감을 높여놓고, 그에 맞춰 병기를 업그레이드시켜줬더니 달리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다 겨우 만든 이벤트가 흐지부지 끝나버릴까 봐 다시 놈들의 능력치를 조금 낮춰 조정해줘야 했다.

그러다 보니 흥미가 뚝 떨어지고 김이 새버리고 만 것이다.

대규모 전투를 구경하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훨씬 좋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존이 투른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건 투른과 레이나 모두 알았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좀… 은근히 시시하지 않아? 다른 차원의 생명들보다 반응이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그 말에 투른도 동의했다.

“도망도 좀 치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놈들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내가 대신 죽을 테니 얘만은 보내달라거나… 그런 게 좀 있어야 여러 가지 보는 재미가 있는데. 진짜 얘넨 그런 게 없네.”

태생적으로 호전적이고 싸우길 좋아하는 마족들이었다.

또한 평범한 인간들처럼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끈끈한 유대감이 덜하다 보니 그들이 원하는 다양한 장면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거… 실망인데.”

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툭 내뱉었다.

그 반응에 투른과 레이나가 살짝 긴장했다가, 존이 별다른 행동을 할 것 같진 않자 다시 긴장을 풀었다.

레이나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있잖아, 내가 재밌는 걸 알아냈는데 들어볼래?”

“듣기 싫다면 말 안 할 건가?”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너희도 들으면 좋아할 만한 거야.”

타박하는 투른에게 눈을 흘기며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아까 혼자 둘러보면서 알게 된 건데, 이 세계는 좀 특이하더라고.”

“뭐가?”

“여기, 이미 다른 차원과의 문이 열려 있는 것 같던데? 아까 우연히 발견했지?”

“뭐? 그게 가능한 일인가?”

투른이 못 믿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봤다니까? 심지어 각각 다른 두 세계 같았어! 혹시 몰라서 넘어가 보진 않았는데 분명히 다른 세계와 이어지는 틈이었어. 그리고 지성이 없는 이곳의 생물들이 꾸역꾸역 넘어가는 걸 잠깐 보다가 돌아왔다고.”

“흐음….”

고개를 갸웃거리는 투른을 보고 레이나가 화를 내려는 순간 존이 입을 열었다.

“가능성이 극히 낮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우리가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충격을 줬던 것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고.”

시체처럼 탁했던 존의 눈에 생기가 약간 돌았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투른도 흥미가 생긴 듯했다.

“봐,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나 아니었으면 모르고 그냥 떠났을걸? 내가 잘 관찰한 덕에 안 놓치고 알아낸 거라고!”

레이나가 한껏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투른이 마지못해 인정했다.

“…웬일로 한 건 했군. 어쨌든 레이나의 말이 맞다면… 굳이 이 지루한 놈들을 계속 살려둘 필요는 없는 거잖아? 차라리 여긴 빨리 정리하고 넘어가 보는 게 어때?”

“그래! 그러자. 이놈들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시시해.”

레이나와 투른이 동시에 존을 쳐다보았다.

둘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암묵적 결정권자인 존이 거절하면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던 존이 까딱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나와 투른이 환호했다.

“좋아, 그럼 우리가 직접 죽여도 되는 거지? 봐줄 필요 없는 거니까.”

“역시 보기만 하는 것보단 직접 움직이는 게 더 좋지, 그럼 어떤 놈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

“흠, 나는 저쪽에 날아다니는 뚱뚱한 놈으로 할래. 크면 클수록 패는 맛이 있잖아?”

레이나가 멀리서 포효하는 마룡을 보고 말했다.

반면 투른은 가까운 곳에서 첫 번째 목표물을 찾았다.

컴컴한 후드 안의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타론을 향했다.

“난 이놈들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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