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식당합니다-121화 (121/125)

121화. 재밌어지네

초월자들이 자기들끼리 잡담하는 사이 아래에 있던 칼로스와 타론은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었다.

분노와 참담함으로 속이 타들어 갈 듯 괴로웠고 당장이라도 저 미친놈들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마음속으로는 벌써 백 번도 넘게 저것들을 죽였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긴 어렵다.

날지 못하니 아예 목숨을 걸고 공격하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타론은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는 데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고.

어디 도망갈 수도 없고 또 저렇게 떠들다 흥미를 잃고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놈이 칼로스와 타론을 타겟으로 삼은 것이다.

‘현호 님….’

극심한 무력감 속에서 떠오른 건 한 사람뿐.

그러나 이 사태를 해결해주러 올 거라는 막연한 희망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컸다.

‘이런 사태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게 해준 것까지가 그분이 준 최대한의 기회였을지도….”

“크크크크크….”

투른이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내며 칼로스와 타론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

“어떻게 해줄까? 바로 죽이는 건 좀 재미없는데…. 너희도 그렇지? 조금 더 오래 살고 싶을 거 아냐. 나는 재밌어서 좋고…. 큭크크…. 팔다리를 먼저 차례로 없애줄까? 아니면 가죽을 한 겹씩 벗겨줄까? 둘 다 너무 식상한가? 뭐 원하는 방법 있으면 얘기해봐 최대한 반영해줄 테니까! 크캬캬캬캭!”

투른은 혼자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미친놈.’

그 광기 어린 모습을 칼로스와 타론은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툭 내뱉은 존의 한마디에 급격히 중단되었다.

“빨리 끝내.”

“아, 알겠어.

거의 중얼거리듯 한 말에 투른이 흠칫 뒤를 보며 즉각 대답했다.

아주 잠깐 존의 눈치를 살핀 투른은 그가 화가 난 건 아니라는 걸 알고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칼로스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여기서 너무 시간 끌 거 없지. 너희가 특별대우해줄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고, 우리에겐 다음 할 일이 있으니….”

칼로스는 묵묵히 검을 집어 들었다.

아무리 무력한 상황이라지만 네 마음대로 하라고 목을 내어준 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

추한 발악이라도 해볼 심산이었다.

피잇!

그때, 예고도 없이 날아온 무언가가 칼로스의 귓가를 스쳤다.

“……!”

불길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니 타론이 스르륵 쓰러지는 중이었다.

가슴팍 어딘가에서 콸콸 솟구치는 피는 타론의 붉은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타론!”

칼로스가 침통하게 그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그걸 확인해볼 틈은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타론을 공격했던 투른의 기운이 칼로스에게 향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의 공격을 감지하지 못했으니 이번이라고 제대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두 번째이고 미리 알아챘으니 한 번쯤은 피하거나 튕겨낼 수 있지 않을까.

칼로스는 투른이 미세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걸 포착했다.

그리고 조금 전의 공격을 예상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럼에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즉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입술을 깨물었다.

피슉-!

“으어어억!”

콰앙!

무언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 같다는 걸 알아챈 순간, 칼로슨는 온몸에 큰 충격을 받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거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껏 살아왔던 수백 년의 세월이 그의 머릿속을 촤르르 스쳐 지나갔다.

덩치만 컸지 싸우는 요령이 없어서 종종 얻어맞았던 어린 시절.

그러다 점차 타고난 자신의 능력이 결코 다른 마족에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었지.

강자라고 이름난 마족들을 하나둘 꺾어버리고, 통합되지 않은 마족 간의 전쟁을 수십 년간 치르고 보니 어느새 그는 마계 제1군단장이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서 있었다.

‘마왕님을 보좌하며 꽤 오랜 세월을 보냈었지….’

싸울 일이 적어서 좀 지루했지만 지나고 보니 좋은 때였다.

마계 이인자라는 명예로운 자리였고, 휘하에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마족이 있었으니.

그러다 마계에 예상치 못한 충격이 가해지고 아스키나 대륙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마왕은 몇몇 군단장들, 그리고 마족 군단들을 데리고 떠났다.

칼로스도 따라가려 했으나 현재 마계 이인자인 그마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는 말에 마계를 지키기로 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뭘 하진 않았지만,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일 테니.

그리고…

또 다른 충격으로 지구라는 곳과의 게이트가 열리게 되었고, 지구의 초월자를 만나고… 머리가 하나인 케르베로스와… 희한한 슬라임… 그리고 얼음 여우….

갑자기 이전과는 너무 다른 삶이 펼쳐졌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긴 하지만 인제 와서 보니 그것 또한 재미난 경험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여차여차해서 마지막에는 결국 마왕이라는 마계 최고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래, 나쁘지 않은 생이었다….’

칼로스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툭툭.

그때 뭔가가 그의 팔뚝을 건드렸다.

‘죽었나 확인하러 내려온 건가?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죽지 않은 건가? 아님 원래 죽은 후에도 이렇게 계속 생각할 수 있는 건가?’

“뭐야? 왜 안 일어나고 있어? 어디 크게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웃기는 또 왜 웃는 거고?”

황당해하는 목소리에 칼로스가 눈을 번쩍 떴다.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목소리!

“현호 님!”

칼로스는 벌떡 일어나 앉아 그의 옆에 선 인간을 보았다.

“아니, 멀쩡한 놈이 안 일어나고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이없어하며 내려다보는 그 얼굴이 너무 반가워서 칼로스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바보같이 죽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그렇게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쪽팔린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셨군요! 드디어…! 저는 저흴 버리고 가신 줄 알고……!”

말을 하다 보니 진짜 눈물이 찔끔 맺혀서 칼로스는 혼자 당황했다.

눈물이라니.

얻어맞거나 눈에 뭐가 들어가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그런 눈물이면 몰라도, 이렇게 멀쩡한 상태에서 눈물이 나는 경험은 살면서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버리긴 뭘 버려? 그럴 거면 내가 그 고생을 왜 했겠어?”

어이없어하는 현호를 보며 칼로스는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방금 일어난 일은 그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누군가 과거 제1군단장이었고, 이제는 마왕이 된 칼로스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그의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칼로스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공기 중으로 말려버렸다.

“덩치는 소만 한 놈이 울긴 왜 우냐?”

“……!”

피식 웃으며 뒤돌아서는 현호의 모습에 칼로스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어졌다.

한편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튕겨낸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투른이 헛웃음을 흘렸다.

“오호, 내 공격을 튕겨냈다고? 이거, 상황이 재미있게….”

파앗!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피가 흩날렸다.

투툭!

데구르르르…….

1초 전까지 말하고 있던 투른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신체보다 더 소중하게 쓰고 있던 후드는 무심하게 벗겨졌다.

바닥을 구르는 머리는 흉측했다.

얼룩덜룩하게 얼굴을 뒤덮은 검고 푸른 반점, 몇 가닥 없는 머리털, 화상을 입은 듯 우툴두툴하게 녹아내린 피부.

머리에 이어 힘을 잃은 신체 또한 땅으로 떨어졌고, 현호는 그 장면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

지금까지 무표정했던 존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그는 곧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투른이 이렇게 한순간에 죽어버리다니. 너, 보통이 아니구나? 우리와 같은 초월자야. 맞지?”

“너희와 같다는 표현은 좀 많이 불쾌하네. 나는 그 추잡한 무리에 같이 묶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까칠한 대답에도 존은 미소를 띤 채 제 할 말을 계속해나갔다. 드물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래! 네가 그거구나. 저놈이 말했던 숨겨둔 계획.”

“숨겨둔 계획? 그건 또 뭔데?”

“후후후…. 그래, 그랬구나. 이런 게 있었어. 이제 좀 재미있어지네. 정말 다행이야. 그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아서. 하마터면 준비한 보람 없이 시시한 놀이가 될 뻔했거든.”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둬라. 곧 웃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될 테니까.”

상황이 달라진 걸 느낀 레이나가 돌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마룡 두 마리를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죽인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시체를 보고

“무슨 일이야, 존? 어… 잠깐, 저거 저 후드 투른 아니야?”

경악하여 외치는 그녀에게 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투른이 죽었어. 투른을 죽일 수 있을 만한 강한 사람이 있었던 거야. 여기, 우리 같은 초월자가 있었어. 그리고 당장이라도 모두 다 죽여버릴 것 같은 살기를 내뿜고 있지. 아무래도 최선을 다해 나와 싸울 건가 봐.”

실실 웃으며 말하는 존의 모습에 레이나는 잠시 섬뜩함을 느꼈다.

그녀도 투른이 죽은 것이 크게 슬프진 않았다.

오랜 세월 같이 다녔다고 해서 정을 쌓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투른의 허무한 죽음에 약간은 마음이 공허했을 뿐.

그러나 슬프지 않은 것뿐이지, 재밌는 일이 생겼다고 실실 웃음을 흘릴 수 있는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존은 투른이나 레이나보다 훨씬 오래 산 존재.

셋 다 인간성이라고 할만한 걸 잃은 지는 한참 지났지만, 존은 그중에서도 차원이 달랐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그녀와 투른의 능력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투른이 저 자에게 죽었다면 레이나 또한 죽임당할 수 있었다.

물론 존이 저 남자가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만큼 존은 모든 걸 뛰어넘는 존재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저 남자도 만만하진 않을 것 같으니 둘의 싸움의 파장이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레이나는 은근슬쩍 뒤로 물러났다.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은 자와 무작정 싸울 만큼 생각 없진 않았다.

괜히 끼어들지 말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레이나가 태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됐네, 존. 나는 방금 용 몇 마리를 가지고 놀았으니 이놈은 너에게 양보할게. 너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좀 움직이는 게 좋잖아? 이 정도면 너무 시시하지 않고 딱 너에게 맞는 상대인 것 같은데.”

“좋아!”

존은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

칼로스는 대치 중인 외부인과 현호를 올려다보았다.

현호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 솔직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아까 일방적으로 당할 때에 비하면 훨씬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

달그락.

땅을 짚은 손을 움직이자 피부에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칼로스는 그제야 아까는 없었던 병들이 그 옆에 놓여있다는 걸 깨달았다.

“…포션?”

현호가 오지 않았을 때는 없었다가 그가 오고 난 후에 생겨났다.

그러니 이건 분명 현호가 두고 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