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그만하자
포션은 인간들의 것.
치료를 위해 쓰는 물약이라는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지만 칼로스가 직접 써본 적은 없었다.
마족은 자체 회복력이 강했고, 자신들만의 치료법도 가지고 있었다.
약해빠진 인간들의 치료법 따위가 그리 효과 있을 거라고 믿지 않지만... 현호가 두고 간 것이니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순간 가까운 곳에 쓰러져있는 타론이 떠올랐다.
이제서야 그의 상태를 살펴보니,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미약하게 숨이 붙어있는 것 같았다.
물론 구멍 난 몸에서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고, 곧 죽을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어쩌면….
칼로스는 타론에게 포션을 마구 뿌렸다.
그러자 미동도 없던 손가락이 미세하게 꿈틀 움직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포착한 칼로스는 더더욱 가열차게 포션을 뿌렸다.
일반적인 포션을 넘어선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끄으응….”
거의 들리지 않던 숨소리가 점점 안정되어가더니 마침내 입 밖으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타론, 이봐! 정신이 들었나?”
칼로스가 반갑게 묻자 타론이 힘겹게 눈을 떴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기억이 끊긴 것 같은데….”
“저 괴물의 기습공격에 맞고 쓰러졌었다.”
“으으…. 그러고 보니 너무 아픈데요…. 그 새끼 어딨습니까? 죽여버려야….”
“이미 죽었다.”
칼로스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엔 나뒹구는 머리와 몸뚱어리가 있었다.
“카, 칼로스 님이 복수해주신 겁니까…?”
타론이 감격하여 물었지만 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위를 봐라.”
“…오, 오셨군요…!”
조금 멀지만 타론은 저 위의 실루엣이 그토록 기다리던 최현호라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지쳐있던 타론의 얼굴에도 희망의 빛이 생겨났다.
말하지 않았지만 애타게 현호를 기다렸던 건 타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현호라면 이 상황을 바꿔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대치 중인 초월자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곧, 자신들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바눔을 발견하고 무기를 꺼내 들어야 했다.
***
그간 내 속을 썩여왔던 존재를 드디어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차라리 일대일로 싸우는 거면 몰라, 여러 차원이 얽혀있어 대비하는 데 꽤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누구 하나 상의할 사람도 없이 혼자 감당해야 했고, 거기에 얼마나 강한지조차 알 수 없으니 여러모로 고생했다.
이렇게 일이 터지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할 지경이었다.
다른 거 신경 쓸 거 없이 지금 이 순간에는 눈앞의 상대에게만 집중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놈은 정체가 뭐지? 말도 안 되는 힘 아닌가.’
파괴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미 리넬에게서 들을 수 있는 건 다 들었으니.
지금의 의문은 이들의 목적 같은 게 아니라, 본인을 존이라 소개했던 눈앞의 남자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조금 전 기습적으로 죽였던 후드를 쓴 파괴자, 그리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여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힘이 이 남자에게 내재되어 있었다.
진짜 신과 마주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압박감.
‘크리판의 심장이 아니었다면 아예 상대가 안 됐겠는데.’
그 모든 마력을 받아들이는 데도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최대한 빠르게 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천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걸 해낸 후에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쉽게 끝내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조차 자만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상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해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결국, 싸워봐야 아는 것.
나는 시험 삼아, 그러나 결코 약하지 않은 강도로 검을 휘둘러 공격해보았다.
남자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쉽게 피해버렸다.
놈의 속도에 맞추어 나도 점점 속도와 힘을 가중시켰다.
그러는 와중에 남자의 입가에 걸쳐졌던 미소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스슥!
남자의 볼에 검 끝이 스치며 얕고 긴 선이 그어졌다.
피가 흐르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들어간 공격이었지만 어쨌든 먹혀들어 갔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오….”
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검지로 볼을 살짝 만져 피를 확인한 그는 이제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하하핫! 상처라니,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기에 앞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그냥… 이제 좀 재밌겠다 싶어서.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투른을 죽일 때부터 괜찮다 싶었는데 점점 더 마음에 들어.”
“미친놈. 같은 편을 죽였는데 뭐가 좋다는 거야?”
“흠, 같은 편…?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아니지, 그렇게 보는 게 당연한 건가? 흠… 그냥 내가 원하는 것과 그들이 원하는 것이 일치했기에 잠시 함께 다녔던 거였지….”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 너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왜 굳이 찾아와서 죽이는 거냐고.”
“이유…? 음…. 뭐였더라….”
남자는 진심으로 기억이 안 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그냥… 더는 할 일이 없어서 시작했던 것 같군. 너무 오래 살았는지 뭘 해도 재미가 없더라고. 너도 알겠지만 싸움 구경이 그래도 제일 재밌는 일이잖아?”
“미친놈. 기껏 생각해서 내놓은 대답이 겨우 그거냐?”
“아니, 이게 진짠데.”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리넬에게 들었던 말과 일치한다.
워낙 황당한 이유라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건데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상해 보여?”
내 표정에서 그게 읽혔는지 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럼 넌 네가 정상인 것 같냐.”
“뭐…. 아마 아니겠지? 그렇다고 그렇게 이상해할 건 아닌데. 너 또한 초월자로서 언젠가는 내 심정을 이해하게 될걸? 모든 것이 너무 지루해져서 어떻게든 해결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올 텐데, 그땐 아마 알 수 있을 거야. 아, 아니다. 그날이 오지 않겠구나. 지금 내 손에 죽을 테니까.”
자기가 말하고 재밌는지 킬킬거리며 웃는다.
‘대화하는 의미가 전혀 없군.’
일단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얘기를 좀 해보려 했으나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놈의 헛소리를 계속 들어주며 시간 끌어봤자 불리한 건 내 쪽이다.
더 반응해주지 않자, 남자는 씨익 웃으며 오른손을 들었다.
여태 맨손이었던 그의 손에 자기 키보다 더 커 보이는 길쭉한 낫이 파직거리며 생겨났다.
나 또한 본격적으로 검을 쥐며 자세를 잡았다.
어차피 아까 그놈과 달리 기습 같은 게 먹힐 상대는 아니다.
정면으로 맞붙어 이기는 수밖에 없다.
남자가 여전히 웃음기 띤 얼굴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자, 와라. 제대로 상대해주지. 부디 최선을 다해 오래 살아남아서 나를 즐겁게 해주면 좋겠군.”
“미안하지만 오늘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될 거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앞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동시에 존 또한 나를 향해 돌진했다.
가운데서 놈과 무기를 맞부딪치는 순간, 거대한 파장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
‘미친놈들.’
레이나는 다리를 절뚝이며 걸었다.
등 뒤로 거대한 두 힘이 격돌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흠칫흠칫 몸이 떨렸다.
애초에 존과는 같은 초월자라 묶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능력 차가 컸다.
존과 레이나, 투른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존은 모든 일에 무심하여 웬만해서는 뭘 해도 신경 쓰지 않아서 보통은 제멋대로 행동해도 관계없었다.
그러나 가끔 섬뜩하게 무서울 때가 있었고, 힘의 차를 알기에 종종 그의 눈치를 보고, 무슨 일이든 그의 결정을 따라왔다.
레이나와 투른을 계속 데리고 다닌 건 귀찮은 일을 대신 해줄 만한 수족으로 적절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잖아.’
새로이 등장한 이곳의 초월자가 투른을 죽일 정도로 강하다 해도 존이 직접 나서면 아무 문제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 모를 불똥에 맞지 않기 위해 둘에게서 멀어지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구경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둘의 충돌은 생각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켰고 레이나는 부상을 입었다.
거리가 있는 만큼 치명적이진 않지만, 가벼운 부상도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힘을 컨트롤하기 어려울 만한 충격이었기에 하는 수없이 이렇게 땅 위에 올라선 것이다.
심지어 다리도 다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었을 적에도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더 비참한 건, 존과 또 다른 초월자의 주변에 있던 다른 생물들은 거의 다치지 않고 그녀만 이렇게 되었다는 거였다.
이곳의 초월자는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순간적으로 아래에 거대한 배리어를 발현시켰다.
레이나는 그 배리어 바깥에 있었고, 존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존이라면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레이나가 충격파에 다칠 거라는 걸.
그리고 분명 그녀 하나쯤은 그 힘에서 보호해줄 여유가 있었을 거고.
알면서도 다치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투른이 죽었을 때의 상황을 보면 내가 죽었을 때도 다르지 않을 거야. 아무렇지 않게 힐끗 보고는 떠나버리겠지.’
존이 자신에게 동료 의식 같은 걸 가지고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보호해줄 거로 생각한 적도 없지만, 기대한 적도 없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실망스러웠다.
아니라고 해도 꽤 긴 세월을 함께한 만큼 같은 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이제 그만하자.’
존을 만나 함께 다니기 시작한 것은 죽기 싫다는 공포감과 그가 하는 일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흥미 때문이었다.
레이나 또한 초월자로 긴 세월을 지내면서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던 시점이었으니까.
과거 인간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기억 또한 흐릿해졌다.
그들과 아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그들이 고통스러워하건 죽건 말건 전혀 이입하지 않고 즐거운 유희 거리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이 일도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존의 곁에 있으면 안전할 거로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이젠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심지어 지금 온몸으로 겪고 있고.
다른 세계를 돌아다니며 분탕 치고 파괴하는 일을 굳이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지루하긴 하겠지만, 휴식기라 생각하면 여유를 즐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계획에 조금 들떠서 레이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젠 어디 정착해볼까? 돌아다니다 보면 마음에 드는 곳이 있을 것….”
푸욱-!
등 뒤에서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다리의 부상 같은 건 견줄 수도 없을 강렬한 감각.
너무 뜨거워서 불에 타버리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으으윽…. 무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옆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