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식당합니다-123화 (123/125)

123화. 결판

“너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었으나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그런 짓들을 해놓고, 이제 와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리넬을 놀란 눈으로 응시하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사라졌다.

레이나는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초월자였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중상이거나 죽을 수 있을 상처도 스스로 회복시킬 힘이 있었다.

뭔가 이상하게 화끈거린다는 불길한 느낌을 무시하고 레이나는 빠르게 등에 꽂힌 단검을 뽑아냈다.

남은 힘을 끌어모아 벌어진 상처를 임시로 치료하려 했다.

“이이익….”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 지금은 몸 상태가 멀쩡하지 않다.

아까의 충격파에 의한 영향이 컸다.

다친 다리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질질 끌고 있었는데 다른 상처라고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레이나가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폐를 찔린 것인지, 점점 숨이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초월자가 된 후로 몸 상태가 이렇게까지 나빴던 적은 없다.

마치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었다.

“후우, 허윽….”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레이나의 모습을 리넬이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너…! 죽여, 버리겠어…!”

당장 치료는 포기한 듯 레이나가 리넬에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리넬이 살짝 뒤로 빠지자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되었다.

중심을 잡는 것조차 힘든 듯 팔을 허우적거리던 레이나가 흙바닥에 풀썩 넘어져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마, 말도 안….”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부정하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레이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크게 뜬 눈은 감기지 않은 채였다.

풀썩.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넬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죽었어…?”

당연하게도 레이나의 시체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죽었다는 걸 아는데도,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파괴자들을 죽이는 꿈은 수없이 많이 꿨기에, 이것도 꿈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시신을 내려다보던 리넬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다.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복수했다.

누군가 대신 죽여주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자신이 직접 죽일 기회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틀거리는 레이나를 잠시 동안 지켜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었다.

잘못 건드렸다가 도리어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파괴자들을 쫓아다니면서 이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차원이 다른 힘을 과시하며 자신들 때문에 무너지는 존재들을 낄낄거리며 구경하곤 했는데….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났다.

확실히 평소와 달리 지척까지 가까워진 리넬을 알아채지 못하는 걸 보고 확신에 차 찔러버린 거였다.

복수에 성공하면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그저 얼떨떨했다.

이자들을 죽인다고 해서 잃은 것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고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기분이 이상하네.’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오랜 세월 가슴에 얹혀있던 묵직한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언제나 속을 답답하게 했던 죄책감을 조금 덜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야.’

레이나를 직접 죽인 것은 리넬에겐 큰 의미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존을 죽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새로운 부하들을 구해서, 또는 혼자서라도 존은 세상을 파괴하는 일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리넬의 시선이 수백 미터 떨어진 허공을 향했다.

그곳에는 엄청난 속도로 공격을 주고받는 두 초월자가 있었다.

콰아앙-!

귀가 떨어질 듯한 소음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지구의 초월자는 정말 존을 상대로 비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 같다.

투른도 죽고, 레이나도 죽었다.

‘정말 해낼지도….’

리넬의 눈빛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

“아하하하핫!”

광기에 가득 차서 웃던 남자가 내 목을 겨냥해 낫을 휘둘렀다.

몸을 뒤틀자 낫이 섬뜩한 예기를 내뿜으며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크하하핫!”

“그만 처웃어, 미친놈아!”

진짜 질리는 놈이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낫을 휘두를 때마다 즐겁게 웃는데 미쳤다는 말밖에 안 떠오를 지경이다.

“즐거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 걸 어떡하겠어? 직접 싸우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는 걸 참 오랜만에 다시 느끼는군. 그동안은 내가 마음껏 날뛰는 걸 받아줄 만한 상대가 없었거든.”

“그딴 사정은 궁금하지도 않아.”

나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아나는 걸 느끼며 말했다.

미친놈이 맞긴 맞는데, 능력만으로 보면 진짜 대단한 놈이다.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놓치는 미세한 빈틈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공격한다.

섬뜩하게도 몇 번은 정말 그대로 썰릴 뻔했고, 완전히 피하지 못한 공격에 팔과 어깨에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건 또 아니다.

“하하하하하핫!”

생일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는 존의 얼굴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내가 저놈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만큼, 저놈도 내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해볼 만해.’

내 생각을 읽은 듯 남자가 웃음을 멈추고 싱긋 웃었다.

“계속해볼까? 이런 적은 처음이라 나도 궁금하군. 과연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인지.”

콰콰쾅!

또다시 거대한 두 힘이 맞붙었다.

***

마계의 드넓은 땅에서 벌어지던 마족들의 전쟁은 점점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눔의 진화 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마족들이 어느 순간부터 승기를 잡았다.

그들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투른과 레이나가 죽은 시점부터 바눔의 움직임이 체계를 잃은 것이었다.

놈들을 만들어내고 키워내고 지시를 내리던 두 초월자가 사라지니 바눔들에게는 본능만 남게 되었다.

그 본능이라는 게 무작정 공격하고 죽이려 드는 것이기에 상대하기 힘든 건 여전했지만, 최소한의 제어가 사라지니 오히려 패턴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저돌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은 생각을 하는 마족들을 이길 수 없었다.

다수의 마족이 이를 깨달으면서 점차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이대로만 계속하면....’

칼로스는 이제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많은 마족들이 죽었고 그 자신도 만신창이었지만 승리할 거라는 생각이 드니 점점 더 힘이 솟았다.

때때로 천지가 흔들리는 충격에 모두 적군 아군 할 것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이유는 저기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높은 곳에서 싸우고 있는 초월자들 때문일 것이다.

‘만약 현호 님이 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전투에 몰입해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놈들을 다 죽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가장 강한 놈이 남아있으면 그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다.

꿀꺽.

칼로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현호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침입자들 또한 강했다.

그중 지금 싸우고 있는 놈은….

칼로스의 두꺼운 가죽에 닭살이 돋아났다.

겉모습은 평범한 인간, 그것도 힘 하나 없어 보이는 연약한 인간 같았지만,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한참 전에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분한 마음에,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달려들었는데도 아직 목이 붙어있다는 게 사실 기적이었다.

우두두둑!

칼로스는 제발 모든 게 잘 흘러가길 바라면서 바눔의 목을 꺾었다.

그때, 눈앞의 모든 것이 희게 변했다.

어디선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얀빛이 뿜어져 세상을 덮어버린 것이었다.

당혹스러운 감정을 표출하기도 전에, 뒤이어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콰콰콰쾅!

큰 충격을 받은 지면이 마구 뒤틀렸고, 그 움직임에 땅에 발을 딛고 있던 자들이 동시에 넘어졌다.

“으아악!”

“크으으윽…!”

“이게 무슨….”

여기저기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로스 또한 땅에 온몸이 처박혔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순간 날아오르려 했으나 다친 날개 때문에 불가능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옆의 기척이 마족인지 바눔인지도 알 수 없어 그저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결판이 났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이긴 건지, 뭐가 어떻게 됐을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새하얗기만 했던 눈앞에 조금씩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조하게 주변을 경계하던 칼로스의 어깨에 뭔가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칼로스는 재빠르게 반응했다.

바눔의 공격일 것이라 예상하고 당장 집어던질 심산으로 힘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칼로스가 두 손으로 움켜쥔 누군가는 땅에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칼로스는 수백 킬로짜리 쇳덩어리도 거뜬히 들어 올렸고, 조금 전까지 싸우던 바눔 또한 몇십 마리는 집어던졌기에 순간 이게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바눔의 몸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늘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라면, 그가 아는 한 한 명밖에 없었다.

“초, 초월자님…?”

조심스러운 물음에 기가 찬 듯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다. 이제야 알아본 거냐?”

“……!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끝난 겁니까? 그 침입자는 어디에…!”

“소리 지르지 마. 네 목소리 듣고 괴물들이 몰려들잖아.”

“아, 네…!”

칼로스는 빠르게 소리를 죽였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현호의 눈에는 보이는 듯했다.

그로부터 몇 초 지나지 않아 시야가 점점 더 밝아져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칼로스는 아직 조금 흐릿한 눈으로 초토화되어버린 주변 상황을 눈에 담았다.

평평하던 땅이 뒤틀려 울퉁불퉁해졌다.

마족과 바눔의 시신들이 수없이 많이 보였지만 이건 아까의 큰 충돌 이전에도 있었던 거고.

현호가 말했듯이 실제로 바눔 세 마리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임을 보니, 저들도 멀쩡히 앞을 다 볼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칼로스의 목소리가 사라져서 그런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며 자기들끼리 부딪쳐 넘어지기까지 했다.

칼로스가 다시 앞을 보자 반가운 얼굴이 드디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현호님…!”

그는 작은 목소리로나마 반가움을 표했다.

“무사하십니… 아니, 무사해 보이시네요. 너무….”

상처는커녕 피 한 방울도 튀지 않은 멀끔한 모습이었다.

“아, 피를 뒤집어썼었는데 그 꼴로 갈 수는 없어서 빨리 처리했지.”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그리고 이긴 건 맞지요? 그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어.”

“그럼, 그럼 이제 다 끝난 겁니까?!”

“거의…. 하지만 다 끝났다고 할 수는 없지. 마무리까지 제대로 해야 되니까.”

“마무리…. 그렇죠.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현호의 말을 이해한 칼로스가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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