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대영제국, Great Britain ? 大英? 1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시간을 잠시 앞으로 돌린
1844년 영길리로 떠나는 입조사행(入朝使行) 출항 이틀 전 창덕궁.
“ 앉으시오. 흥선군. ”
임금은 흥선군이 자신의 앞에 앉아서 몸을 조아리자 말을 건넨다.
“ 편히 앉으세요. 내 오늘 흥선군을 따로 보자고 한 것은 모래면 먼 길을 떠나시니 이를 위무(慰撫)하고, 긴히 당부할 말도 있어서요. ”
“ 하명하시옵소서. 전하. ”
“ 내 일전에 편전에서 신료들과 이번 입조에 대해 의논할 때에는 내가 미욱하다보니 그만 병판(兵判, 김좌근)이 하는 말에 이치를 따지지도 않고 칭제건원까지 운운하며 그만 들떠서 제신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었소. 아마도 흥선군도 조정에 떠도는 소리를 들었을 거요. 내 앞에서야 입을 다물고 있어도 그런 일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어느새 옮겨지는 것이니 말이오. ”
“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불경하게도 그런 말을 옮기는 자가 있다면 붙잡아서 엄벌에 처해야 할 것이옵니다. ”
“ 됐소이다. 어찌되었든 오늘 흥선군을 보자고 한 것은 내 당부할 말이 있어서요. 이번 입조에 종친이신 흥선군을 정사로 보내는 것은 먼저 번에 말했던 바대로요. 그에 몇 가지 덧붙이려고 하오. ”
“ 말씀하시오소서. 말씀 받잡고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나이다. ”
“ 그날 경솔하게도 칭제건원을 말하기는 했으나, 실상 우리 조선이 함부로 칭제건원을 했다가는 수백 년을 이어온 사직을 건사하기조차 힘들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소.
허나 요동의 고토를 수복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진실이오. 내 그래서 청의 국운이 기울어 멸망의 징조가 보이자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안(集安)과 안동(安東)에 군대를 보내어 점령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관리를 보냈소. ”
임금은 슬쩍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 그런데 다 망해가던 청국이 아라사의 오랑캐를 끌어 들여서 그 세를 회복하려 하니 우리는 서역의 대국인 영길리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스스로를 영국(英國)을 칭하는 남경의 도적놈들의 웃기지도 않는 짓에 맞장구를 치면서까지 입조를 하니, 천자를 모시니 해서라도 저들 양이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왕에 수복한 고토를 지켜내고 사직을 지켜야 할 밖에 없지 않겠소? ”
흥선군은 가만히 임금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흥선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임금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 영길리가 천하의 패권을 거머쥔 것은 명확해 보이긴 하오. 우리 조선은 어찌해 볼 엄두도 못 내던 청(淸)을 일만에 불과한 군대로 격파하고 멸망 직전까지 몰았으니 말이오. 하지만 그러한 영길리 국이 아라사 국에서 보낸 대비달자(大鼻㺚子, 코가 큰 타타르인, 코사크기병을 말함)의 기마대가 청조를 구원하기 위해 들이닥치자 싸울 생각 없이 황하로 군대를 물린 것을 보면 아라사(鵝羅斯,러시아) 또한 서역의 대국이고 영길리에 못지않은 나라이지 않겠소? ”
잠시간 임금은 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흥선군을 보았다.
“ 그런 대국을 우리 조선이 홀로 상대하기는 버겁지 않겠소? 더군다나 내가 고집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집안과 안동 등지로 군대와 관리를 보냈소. 그것을 지금에 와서 그들의 군세를 겁내서 청조에 다시 입조하고 군대를 물리는 것도 불가하오. ”
열이 오르는지 임금은 손으로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털어낸 후에 말을 계속했다.
“ 가뜩이나 왕실의 위신이 무너진 이때에 창끝은 대어보지도 않고 군대를 물리게 되기라도 하면 당장 반정이 나서 내가 쫓겨나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이오. 그렇게 되면 워낙에 종친의 씨가 말라버린 상황이니 흥선군께서 보위에 오르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니겠소? ”
씨익 웃으며 떠보듯 임금이 흥선군에게 농치듯이 말을 하자, 깜짝 놀란 흥선군은 다시금 몸을 조아려 임금에게 외치듯 답했다.
“ 전하, 무슨 망측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소신 추호도 그럴 일이 없사옵니다. ”
그러거나 말거나 씨익 웃던 임금은 하던 말을 계속 했다.
“ 그러다 보면 전조 말처럼 곧 나라가 망하고 다른 성씨가 임금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지요. 아니면 아예 머리를 밀어 변발을 하고 청조의 일파가 되어 버리거나 말이오. 그래서 흥선군께 간곡히 부탁을 하겠소. 영길리로 가거든 저들이 무리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더라도 다 들어 주시오. ”
임금의 호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눈빛에 흥선군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런 흥선군을 바라보면서 임금은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 어차피 저들도 서역에서 아라사와 창끝을 대고 대치를 하는 형세라고 하니 우리를 내치지는 못할 거요. 대신에 지금 점령한 땅의 권리를 인정받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원조는 꼭 받아 내시오. 그래야 나와 왕실의 권위를 살려서 사직을 튼튼히 할 것이고, 나아가 청조나 아라사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오. ”
잠시 자신의 앞에 놓인 물 사발을 들어 물 한 모금을 목에 삼키고는 임금은 계속 말을 잇는다.
“ 더불어 여태껏 중원의 천조에게 받았던 대접대로 최소한 천조에 대접받는 번국의 앞자리를 계속해서 보장 받아 오시오. 영길리가 중원의 나라가 아니라고는 하나 천하 만방에서 신속하는 나라들이 많다하니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하지만 그것만 이룬다면 옥좌를 노리던 자들 또한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이오. “
“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나라가 오히려 혼란해지고 그들의 고삐를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미욱한 소신이 과분한 일을 맡아서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됩니다. 지금이라도 더 명망 높고 능력 있는 이를 찾아서 입조사로 보내심이 마땅하옵니다. ”
“ 아니오. 천조에 입조하는 일등 공신은 반드시 종친이 되어야 하오. 분명 입조를 다녀오면 그 자체로 공신이 될 터인데, 그런 영예를 지금도 권세를 누리며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척신들에게 줄 수는 없소. 더군다나 흥선군께선 이태 전에 이미 영길리 사람들과 만난 경험도 있지 않소? 그리고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흥선군을 탄핵할 수 없도록 안동 김 씨나 풍양 조 씨의 일가 젊은이들이 입조사행에 수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들이 자기네 가문을 이끌어갈 준재들의 앞길을 막기 싫어서라도 조용히 넘어 갈 것이오. ”
임금은 흥선군에게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면서 말을 다시 이었다.
“ 그러니 사행길이 고단하더라도 이 나라 조선의 종실과 사직을 위함임을 명심하시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시오. 이 나라의 명운이 그대에게 걸려 있음을 잊지 마시오. 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내 그대를 위하고 감싸줄 터이니 말이오. ”
흥선군은 임금의 마지막 말을 믿지는 않았다. 임금의 입장이 난처해지면 자신을 버려서라도 임금의 자리와 위신을 지키려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흥선군은 이 나라와 종실(宗室)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평소에 갖고 있었으니 자신이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반드시 임금이 명한 바를 이루리라 생각했다.
••••••••••••••••••••••••••••••
다시금 1845년 현재 연합왕국
조선사절단의 정사와 부사 등 직급이 높은 사람들이 일부 수행원과 함께 묵고 있는 미바트 호텔(Mivart’s Hotel)의 조선인들이 집무실 겸으로 쓰는 공간에서는 흥분한 사람들의 고성이 들려온다. 다만 일반적인 잉글랜드에서 겪을 수 있는 것과는 다름 점은 그 외치는 소리가 보통사람들이 평생에 들어본 적이 없을 동방의 언어였다는 것이었다.
“ 이런 낭패가 있소이까? 이들이 우리 땅을 침범하여 점거한 것이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조정에서 이를 몰랐다는 것이 말입니까? ”
“ 그래도 저들이 순순하게 말을 해주었기에 알았지. 입조협상이 자칫하면 입조협상이 모두 끝마친 다음에도 까마득히 몰라서 땅을 저들에게 그냥 떼어 주는 모양새가 될 뻔했습니다. ”
“ 그래, 고산자(古山子), 저들이 말하는 포도 해밀도가 어디쯤인가? 우리 땅이 맞기는 한가하는 말일세? ”
흥선군이 창피함과 분기가 가시지 않은 채 격앙된 목소리로 김정호에게 물었다. 흥선군은 영토에 관한 조율 중에 연합왕국 측에서 점거하고 있다는 포도 해밀도(Port Hamilton, 현 거문도)에 관한 조회(照會)에 분격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숙소로 쓰는 이곳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김정호는 자신이 가져온 지도와 지리지 등을 탁자에 펼쳐 놓아 보이면서 설명을 한다.
“ 아···까도 설···명드···리다가··· 말.았는···데···여기 ···를 으음··· 보시···면···아마도···통···영에···소···속한···어···음··· 삼···도가 아닐···까···싶···습니···다. 위···치···를 생···각해도···그렇···고······ 세 개의 ···섬···이 붙···어 있···다는···것···도 ···일 ···치···합니···다.”
“ 그러니 삼도(거문도)가 분명히 맞다는 건가? ”
옆에 있던 환재 박규수가 더듬거리는 김정호의 말을 받아서 정리하였다.
“ 대감, 지도에서 보더라도 삼도가 통영 관할이기는 하지만, 통영에서도 멀고 오히려 고흥 끝자락이나 제주에서 더욱 가까운 위치인 절해고도(絶海孤島)인지라 관할하는 관아에서도 미처 파악을 못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
“ 통영이면 해방(海防)하기 위한 조선 제일의 군영(軍營)이오. 그 직분이 바다를 통해 외적이 침탈해오는 것을 방비하는 것인데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통영에 그 섬이 속한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건데 그 방비를 소홀히 하다니, 그런 것도 까맣게 모르고 이곳 영길리 땅에 와서 저들의 입을 통하여 알게 되니 이런 망신이 또 있소이까? ”
“ 그래도 저들이 앞으로 상국(上國)이 될 의리로 스스로 말을 해주고 사용에 대한 대가(代價)도 치러주겠다고 나오니 번방으로써 입조하려는 우리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에 대하여 조용히 덮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환재의 말에 흥선군은 분한 마음을 참으려는지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넣는다. 처음에는 씁쓸한 게 목구멍에 넘기기가 힘들더니 이제는 제법 입에 익어서 맛이 괜찮다.
이 차를 우리는 데 쓴다는 흑두(黑豆)를 구해서 조선에 좀 가져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였다. 그건 돌아갈 때의 일이고, 하던 일을 계속 해야 했다.
“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가 입조사행을 출발하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저들에게서 더 많은 걸 뜯어 낼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나랏일을 하는 인간들이란 게 토색질(討索질)이나 할 줄 알았지. 자기의 직분에 맞는 일을 할 줄 아는 인간이 조정에 없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오? ”
환재 박규수는 그제야 흥선군이 화가 난 이유가 삼도(三島)가 저들에게 무단으로 침탈당한 것과 그것을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 저들의 입으로 토설해서 그걸 약점으로 삼아서 더 많은 걸 뜯어낼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워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면 대감께서는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저들이 먼저 사용료와 손해를 벌충해주겠다고 하니 번방이 되겠다고 스스로 찾아온 입장에서 야박하게 굴 수도 없고 말입니다. ”
“ 아니지요. 그래도 받을 것은 최대한 받아 내야지요. 아쉬운 것은 우리가 먼저 내밀었으면 열(10)을 받을 것을 저들이 먼저 말을 하는 통에 일곱(7)밖에 못 얻어 낼 거라는 것이 아쉬운 점이지요. ”
“ 그래도 저들이 아라사(阿羅闍, 러시아)의 뱃길을 막기 위해서 긴급하게 삼도를 점거하고 방비를 한 것을 알렸으니, 청과 손을 잡은 아라사를 막는다는 명분이 있으니 우리 조선으로서도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겠습니까? ”
“ 저들이 먼저 밝히고, 적절한 대가와 손해에 대한 벌충을 해준다고 말을 했다함은 이 곳 구라파(歐羅巴, 유럽)의 법도에도 남의 땅을 말도 없이 점거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 아니겠소이까? 이를 어물쩍 넘어간다면 옛적 명장(明將) 모문룡이 가도에 군대를 주둔하고 우리에게 그 부담을 지운 전례가 또 다시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될 말이지요. ”
박규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흥선군을 바라보면서 말을 잇는다. 그로서는 20대 초반의 젊은 왕족 흥선군이 경망하게 굴다가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될 뿐이니 조언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이곳 구라파 나라 사이에는 제국법(諸國法, Law of nations)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네 동방의 나라들이 천조의 천명 아래 그 예로서 서로를 대하듯이 그 질서를 정한다고 하니, 청국이 아라사를 청하여 불러들여서 그것을 방비하기 위하여 삼도에 군영을 지었다고 변명을 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통고하고,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는 것은 훗날 삼도를 무단으로 점거한 것에 흠이 되어 이곳 본령 조정(연합왕국 정부를 말함)이 명분에서 밀리는 것을 막으려 함이지, 결코 이곳 영길리의 본령조정의 선의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 그러니 우리가 이렇듯 뻗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
흥선군은 박규수가 부연하며 조언하는 말을 듣자 빙그레 웃으며 답을 했다.
“ 하여간 고산자가 조선에서 가져온 여러 지도와 서책 덕에 많은 도움이 되는구먼. 자네의 서책들이 없었다면 저들이 삼도(三島)를 주인 없는 땅이라 우기기라도 했을 때엔 꼼짝없이 우리 땅을 두 눈 뜨고 빼앗길 뻔했네그려. 앞으로도 영길리 조정과 협상하는 동안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열심히 궁리해서 명분에서 밀리지 않도록 도와주게나. ”
“ 가···감사 ··합니···다. 대······감 ”
흥선군은 자기 앞의 찻잔에 담겨있는 검은 차(커피)를 마시면서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의 일을 생각했다.
종실과 나라를 위하여 무엇이든 하리라. 자신은 비록 왕위를 언감생심 바라볼 수도 없고, 자신이 욕심을 낸다 하더라도 항렬을 역행해서 왕위가 이어질 리도 없지만 임금이 손(孫)을 남기지 못하기라도 하면 자기 자식이나 손자들은 임금의 형제의 자격이나 임금의 자식으로 입적해서 보위에 오를지도 모르니 그런 날을 위해서라도 조선과 종실의 위신을 세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