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결론은 버킹검(Buckingham)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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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차 ===
“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이대로 애란으로 돌아가 구휼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윤경(런던)에 돌아온 김에 원래 우리가 이 땅에 남은 목적대로 부련전의 학문과 풍속을 익히는 공부를 계속 하는 것이 낫겠습니까? ”
어제 밤에 몇 시간 동안의 구금에서 풀려난 조선 선비들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 따로 기거할 숙소를 구하지 못해서 대강 숙소가 딸린 선술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는 조선에서의 관습대로 하옥된 후 석방되면 몸보신을 해야 한다며 선술집에서 조반으로 장어묵(Jellied eels)을 주문했다가 비린 것을 잘 먹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그 역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 게워냈다.
그 덕분에 지난 일 년 간 아일랜드에서 구휼에 나서느라 수척해진데다가 리버풀에서 이곳 런던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등 한동안 몸을 고되게 굴린 선비들은 아침부터 퀭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입이 짧아서 먹을 것을 많이 가리는 조병기는 아침부터 유독 호들갑스럽게 난리를 쳤다. 그런 그가 먹은 것을 게워내느라 묻어있는 입주변의 토사물을 소매로 닦으며 좌장격인 김병기에게 물었다.
그의 옆에는 정식품계를 가진 조선 관헌으로 임시로 상주서장관직을 맡아 상주사신관(常駐使臣館) 설치 업무 때문에 애란으로 구휼하러 간 조선 선비들에 합류하지 않고 윤경에 그대로 남아있던 조병준이 앉아있었다.
그는 태후제 폐하께 상소를 올리기 위해 황궁 앞에 갔던 조선 선비들이 모두 연행되어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을 빼내기 위해 어제 하루 종일 윤경의 상국 조정에 석방을 요청했었다.
“ 사영, 내 생각에는 우리 조선 선비들은 할 만큼 한 것 아니겠소? 나머지는 상국 사람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어떻겠소? 부렬전 관원들이 제 나라 사람 건사 못하는 것이 우리 책임은 아니지 않겠소? 이제 그만 우리 본연의 일에 매진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
조병준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없이 김병기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 ······ ”
“ 상주서장관께서는 그 참상을 보지 못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 두 눈으로 목도하고 왔는데도 그것을 외면한다는 것은 성현의 말씀을 몸에 익혀 행한다고 자부하는 우리 조선선비들의 수치입니다. ”
김병덕이 조병준에게 말했다. 조병준과는 달리 이 자리에 있는 조선 선비들은 지난 일년간 애란 땅의 백성들이 겪은 고통을 같이 겪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도 외면한다면 어찌 성현의 말씀을 익혀 행동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 조선 선비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모두에게 휩쓸려 여기까지 오게 된 자들도 어제 황궁 앞에서 상소를 올리고자 했을 때 강제로 연행되어 옥에 갇히게 된 후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조선이라면 폭군 연산이나 광해 때 외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직언을 올리는 의로운 선비들을 보듬어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잡아서 옥에 가두다니······.
경반 사대부 집안에서 귀하게 나서 자란 조선 선비들로서는 생애에 처음 겪는 충격이었다.
“ 하지만 내 일 년 만에 모두를 보니 마음이 아파서 그러네. 선비의 본분을 망각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주상전하의 신하가 아닌가? 우리들이 왜 이 땅에 남아서 공부하게 되었는지 잊었는가? 주상전하와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할 우리들이 공부를 다 마치기도 전에 몸이 상하여 그 큰 뜻을 펼쳐보지도 못할까 두려운 것이네. ”
정식으로 품계를 받은 조선관원이기도 한 상주서장관 조병준은 혹시라도 이들의 행동을 상국조정에서 고깝게 여겨 조선에 대한 인식도 안 좋아질 것이 우려되었다. 그런 입장으로 선비들을 진정시켜서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 하지만 사대부가의 자제로 유자로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힌 바가 있지 않습니까? 어찌 그 짐을 외면하고 일신의 입신양명만을 바라겠습니까? 저는 다시 애란으로 돌아가 구휼에 나서겠습니다. ”
평소에도 큰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한 성품이었던 김병덕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순한 성격이라고만 보았는데, 어쩌면 평소 목소리가 큰 이들보다도 더 담대한 성정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어허, 이 사람아. 이 정도면 우리의 정성을 충분히 상국에 보인 것이야. 우리들은 우리 힘을 아껴서 보듬어야 할 바다 건너 조선 백성들이 있지 않은가? ”
“ ······ ”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뭔가 곰곰이 계속 생각하는 김병기였다. 그런 김병기를 흘끔 보고는 이번에는 김병학이 한마디 거들었다. 김병기를 바로 옆에서 보좌하던 그였다. 지금 김병기가 생각하고 있을 법한 의견을 자신의 입으로 내었다.
“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휼을 그만 둔다면 아니한 것만 못한 것 아닙니까? 사람은 사람대로 죽어나가고 그 결과를 보지 못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들, 그건 군자연(君子然)하는 위선일 뿐입니다. ”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 볼일을 본다면 우리 조선 선비를 보는 부렬전 백성들의 시선이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그렇게 고생해놓고 생색내기밖에 안 된다면 그것도 웃기는 일 아니겠습니까? ”
조병기도 자기 의견을 거들었다. 종형인 상주서장관 조병준의 편을 들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도 애란에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는 더블린에서 장젓고와 덕장을 관리하고 애란의 유력자들과 교유하며 여러 가지 도움을 받는 일을 했기에 이들이 말하는 참상을 다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신이 하던 일이 종국에는 조선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 마무리까지 다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 모두의 의견 잘 들었네. 어제의 일로 내 깨달은 것이 있다네. ”
다른 이들의 말을 듣던 김병기가 입을 열어 말했다. 김병기가 말을 하자 주변의 선비들은 자신들의 말을 멈추고 일제히 김병기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여기 모인 이들의 위계를 따지자면 나이로도 품계로도 조병준이 윗줄이었지만, 일 년간의 구휼활동으로 그들 모두의 좌장 역할을 한 김병기인지라 그의 의견은 모두에게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 무엇을 말인가? ”
조병준이 김병기에게 묻자, 김병기가 지금까지 자신이 궁리하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 상소를 접수하지도 않고, 의기에 찬 선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오늘 조선 선비의 의기를 보일 것이네. ”
“ 그러면 어쩌시려는 겁니까? ”
“ 내 오늘 다시 황궁 앞으로 가서 상소를 올릴 걸세. ”
“ 그것은 어제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
“ 자네들이 애란에서 말하던 그것을 하려하네. ”
“ 혹시? ”
애란에서 상소를 올리기 위해 떠나기 전 모두가 모여서 토의를 했을 때 다들 젊은 혈기에 취해 반은 농담처럼 떠들던 그것을?
김병국은 짚이는 바가 있어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 그래, 의로운 선비들의 입을 틀어막는데 의당 우리도 우리의 결기를 보여야 하지 않겠나? 지부상소를 올리려 하네. 오늘도 어제와 같다면 내 그 자리에서 내 목을 내놓겠네. ”
그때는 김병기가 우리와 풍습이 다르고, 조선이 아닌 상국 부렬전이니 행동거지에 조심해야 한다고 만류했었다. 그래서 어제도 상소만 접수하고자 황궁 앞에 엎드려 청원했었다.
그게 어제 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하고 나서는 마음이 바뀐 것인가?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조병준이 다시 김병기를 만류했다.
“ 사영, 조선 백성도 아닌 애란의 백성들을 위해 목까지 내놓겠다는 거요? 그것은 불충이오. ”
“ 백성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만 보는 것도 불충 아니겠습니까? 내 조선선비의 의기를 부렬전에서 보일 겁니다. ”
김병기가 결의를 보이자 자리에 앉아있던 조선 선비들 또한 그와 함께할 결의를 다졌다. 도끼를 등에 메고, 황궁 앞에 다시 간다.
조금 전까지 역한 장어묵(장어젤리)을 게워내느라 초췌했던 그들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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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트랜드 야드
“ 이거 정말 문제없는 것 맞겠지요? ”
런던경시청장 중 한명인 찰스 로완은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치안조직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군대에서 상명하복의 문화에 살던 그로서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할 치안 조직에서 가끔은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광역도시화한 그레이트 런던의 치안조직을 통폐합한 런던경시청(Metropolitan Police)의 출범 때 군사적 성격이 강한 공권력 행사와 법률의 집행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조율하기 위해 한명은 법조계에서 한명은 군에서 청장을 임명했다.
그 때 군에서 옮겨온 사람 중 최고위직인 로완은 정치적, 외교적 고려까지 한 어제의 조치에 내심 불안감이 들었다. 군대라면 그저 ‘하달된 명령을 받들었을 뿐입니다’라는 변명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
“ 러셀 총리대신께서도 외교적 문제가 우려되니 조선 청년들에게 과잉대응을 하지 않게 현장에 지침을 전하라고 했잖습니까? 우린 내각에서 보낸 지침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겁니다. 걱정 마시지요. ”
불안해하는 로완을 안심시키는 또 한 명의 청장인 리차드 메인은 자신도 불안한 것인지 일어선 채로 탁자 주변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 하긴 필 경께서 의회에서 막아주신다고 했으니 별 문제는 생기지 않겠죠. 기다려 보아야겠네요. ”
“ 그들은 아일랜드의 동포들을 위해 저렇게 나서고, 우리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며 감시하고, 뭔가 이상한 나라에서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들? ”
법률전문가와 행정관료 집단과 군 조직, 이질적인 집단을 런던경시청이라는 하나의 조직에 몰아 넣다보니 아직은 서로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는 둘은 혹시라도 버킹엄 궁에서 사고가 날까 걱정되는 불안함을 잡담으로 넘기려는 것인지 업무 외적인 말을 나누고 있었다.
메인이 던진 말에 로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뭐? 그게 우리 일이니까요. 하는 수 없지요. 그들의 기행(奇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저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군요. ”
공교롭게도 이 방에 있는 두 명은 아일랜드에 연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조선에서 온 젊은이들이 벌이는 퍼포먼스가 큰 반향을 일으켜 무언가 상황이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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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사람들, 진짜로 저질렀어 ······. ”
버킹엄 궁 앞에 엎드려서 자신들의 청원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시위를 보고 있던 모닝 크로니클의 기자, 윌리엄 러셀이 감탄했다.
아일랜드에서 저들이 여왕폐하에게 청원을 올리자는 회합을 가질 때 뭔지 모를 조선어인 ‘Ji-bu-sang-so' (지부상소)의 뜻을 나중에 안젤로(김병한)에게 설명 들었다. 그때는 그 독특한 조선풍습이 참으로 재미있는 관습이라고 생각했었다.
왕성 앞에서 무장한 채 농성하는 것을 용인하는 문화라니? 잘 벼린 도끼날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거창한 뜻이야 나중에 붙이기 나름인 것이고, 자신이 국왕이라면 그들이 언제 반란분자가 될 지 몰라서 불안감에 잠도 못 이루다가 모조리 체포하여 교수대에 세울 것이다.
그리고 설마 자신이 브리튼에서 '지부상소' 퍼포먼스를 실제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자기들끼리 떠들 때야 그런 것을 하자고 할 수는 있겠지만, 대브리튼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그들이 실제로 실행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정말 그때는 그래도 그 퍼포먼스를 버킹엄 궁 앞에서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저 사람들은 진짜로 그걸 하고 있었다.
분명 하루 전에 여왕폐하께 청원을 하기 위해 왔을 때는 런던 경시청에서 출동한 경관들에게 연행되어 구금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어제보다도 더 과격하게 그 때 말로만 들었던 ‘도끼’를 등에 매고 군주에게 하는 청원을 실제로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행하고 있었다.
조선식 정장 차림을 한 젊은 사람들이 도끼를 맨 모습은 동양을 다룬 판타지에서나 들었던 타타르 전사들의 모습이 혹시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보다는 흰색의 코트와 말총으로 엮은 ‘갓’이라고 부르는 햇(hat)을 쓴 모습은 꽤나 젠틀해 보이기는 했다. 등에 짊어진 도끼가 그 모습을 모조리 상쇄해 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신도 저자리에 엎드려서 같이 청원할까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지만 자신은 독자들을 위해 저 모습을 취재하는 게 본분이었다. 아일랜드에서부터 그들과 함께 했지만, 엄연히 자신은 기자였다. 저들은 자신의 취재원(取材源)이었다.
“ 이보게, 헨리, 저들의 모습을 최대한 비장한 느낌이 들도록 스케치 해주게나. 할 수 있겠지? ”
“ 그거 제가 제일 잘하는 겁니다. 맡겨주세요. 러셀씨 ”
유명한 예술가 집안인 도일(Doyle)가의 삼남인 헨리에게 자신의 기사에 게재될 삽화의 지시를 내리는 러셀이었다.
“ 그럼, 어쩌면 이 삽화로 헨리, 자네도 아버지와 형들 만큼의 명성을 얻게 될 거야. 그러니 최선을 다해주게나. 알겠지? ”
이미 헨리의 아버지인 존 도일과 두 형인 제임스와 리처드는 런던에서 화가이자 삽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원래 그들에게 의뢰를 했지만 퇴짜를 맞고는 삼남인 이 애송이를 데리고 온 것이다. 원래 다른 삽화가를 섭외하려 했는데, 자기 형들에게 퇴짜를 맞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러셀을 쫓아와 부탁을 했었다.
러셀은 아직 실력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와 두 형의 명성에 기대어 모험을 걸어보기로 하고 현장에 데려온 것이다.
“ 예, 형들을 섭외하지 못한 것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캔버스와 이젤을 거리 한켠에 거치하면서 아직은 무명인 헨리 에드워드 도일(Henry Edward Doyle)은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이며 씩 웃었다.
마치 자신만 믿으라는 듯 말이다. 러셀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격려했다.
“ 알았네. 믿겠네. ”
이제 자신이 글만 잘 쓰면 되는 것인가? 조선 친구들과 엮인 것이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러셀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언론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더 명성을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