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결론은 버킹검(Buckingham) 7.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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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차 ===
이른 아침부터 다시 농성을 하기 위해 자리를 찾아 앉는 조선선비들이었다. 김병기가 맨 앞자리를 잡아서 앉았다. 그 옆에 그동안 농성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이 앉는 것을 본 김병기는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 효정, 공무를 팽개치고 여기에 오시면 어떡하오? 정식 품계를 받은 조선 관원인 자네가 여기에 오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하시지 않았습니까? ”
“ 어차피 자네들과 나를 이곳 윤경 사람들이 구분하겠는가? 그들 눈에는 거기서 거길 걸세. 차라리 한사람의 정성이라도 보태어 애란 땅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일세. 그리고 ······. ”
상주사신관(常駐使臣館)의 임시서장관 직분으로 부렬전에 남은 효정 조병준은 다른 조선선비들이 부렬전의 풍속을 배우기 위한 유학 명목으로 이 땅에 남은 것과는 달리 조정의 정식 품계를 가진 관원이었다.
그런 입장 때문에 공연한 오해를 사 조선 조정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그동안 이들이 지부상소를 올린다며 농성할 때에도 조용히 있었다. 간혹 부렬전 예부(연합왕국 외무성)에 찾아가 현안과 관련된 안건을 통보받거나 주의를 받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부렬전 측에서도 동역에서의 조선의 중요한 위치- 대개는 흥선군이 친 허풍과 중원에서 획득한 연합왕국의 국익 때문에 얻어진-를 고려하여 불미스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지부상소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전일 자신의 종제인 조병기가 결국에는 탈진하여 쓰러진 탓이 컸다. 그도 의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조선의 유자 아니던가?
“ 이런 힘들 일을 자네들에게만 맡겨둔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네. 마침 소석이 뻗었으니 우리 풍양 조문을 대표해서라도 누군가 나와서 엎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
“ 허어, 고맙습니다. ”
그동안 자신의 입장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조병준이 합류하자, 많이 지쳐있던 김병기는 큰 힘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감사를 표했다.
“ 그럼 어서 태후제 폐하게 우리 뜻을 밝히고, 불쌍한 애란 땅의 백성들을 구할 방책을 마련해주시기를 고하도록 하세나. ”
그동안 지부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탓에 몸에 힘이 넘치던 조병준은 일동을 독려했다.
“ 예, 알겠습니다. 이제 이곳 부렬전의 충의지사들까지 우리에게 속속 합류하고 있으니 태후제 폐하와 부렬전 조정에서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는 없을 겁니다. ”
“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질 각오로 태후제 폐하께 고하도록 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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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차 ===
“ 글래드스턴 경, 경께서 여기에 어떻게? ”
하얀 색의 코트를 입은 글래드스턴이 조병준과 김병기가 앉아있는 앞줄에 나타났다. 놀라서 묻는 조병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가 말했다.
“ 조 서기관께서 시위에 합류한 일로 정계에서 조선의 내정간섭이 아닌가 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 전에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 자리에 나섰습니다. 인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아도 사실 진즉에 제가 나섰어야 할 일이었지요. ”
“ 제가 경솔하게 생각했었나 봅니다. ”
처음에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조선 청년들이 나선 것만으로도 외국인이 내정에 간섭하려 한다는 목소리가 제법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종제인 조병기가 쓰러지자 그러한 고려는 모두 잊고 조선 선비의 의기를 보이겠다며 합류한 것이 조병준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애란에서 구휼에 참가하지 못한 조병준은 다른 선비들이 말하는 애란의 참상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참혹했으리란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귀한 도련님으로 자란 종제 조병기가 탈진하도록 황궁 앞에서 목숨을 걸고 농성을 했다면, 응당 선비로써 유자로서 나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었다.
“ 감사합니다. ”
글래드스턴이 하얀 옷까지 챙겨입고 자신들에게 합류한 것에 감사를 표하는 김병기였다.
“ 아일랜드의 가련한 사람들을 위해 나선 당신에게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저와 전 브리튼 인민의 무기력을 꼬집어 주셨으니 말입니다. ”
사실 지난 이년 간 이것이 ‘신의 뜻’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무력함까지 느꼈던 글래드스턴이었다. ‘신의 뜻’을 인간이 거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반쯤은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온 이 젊은이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한다며 일년 간 병들고 굶주린 자들을 돌보다 자비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거는 의지로 농성을 했다.
조선 청년들의 그런 마음에 글래드스턴은 무력감에서 벗어나 다시 아일랜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야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자신은 의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계속 이 시위에 참여할 수는 없겠지만, 단 며칠이라도 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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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일 씨, 이곳엔 어떻게 오셨습니까? 뒤늦게라도 의뢰를 받아들이려는 의향이시라면 이미 늦었습니다. 도일 씨를 대신해서 구한 무명의 삽화가가 요즘 대세거든요. ”
취재를 위해 이젤과 의자 간이테이블까지 준비해 놓고는 오늘의 취재를 준비 중인 헨리 도일과 윌리엄 러셀은 자신들의 취재본부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유명한 삽화가이자 현재 러셀과 일하고 있는 헨리 도일의 부친인 존 도일이 자신의 장남인 제임스(James William Edmund Doyle)와 리처드를 데리고 버킹엄 궁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그들과 쏙 빼어 닮은 소년 한명까지 서있었다.
러셀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먼저 터져 나오는 걸 참으며 존 도일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약간 색이 바래서 누르스름한 빛깔이 나는 이불보 같은 걸 대충 목에 감은 행색을 한 채로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차남인 리처드가 두른 이불인지 이불보인지 모를 헝겊은 새것인지 색이 바래지는 않았다.
“ 우리 꼬맹이를 잘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란 놈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러셀 씨께서 잘 돌봐주셔서 녀석의 이름이 요즘 많이 오르내리더군요. ”
그렇게 말하며, 존 도일은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삼남인 헨리를 쳐다보았다.
“ 어? 아버지, 여기엔 어떻게 오셨어요? 찰스 너까지? ”
아버지인 존 뒤에 서있는 찰스를 보면서 헨리가 당황해서 말했다. 이미 유명한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는 아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일터에 온 아버지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거기에 한참 사춘기라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바로 밑의 동생인 찰스(Charles Altamont Doyle)까지 말이다. 저놈도 아버지와 형들에게 그림을 배우고 있었기에 이미 각자 삽화가, 화가로 유명세를 얻은 첫째 형이나 둘째 형에게는 대들지 못하면서 같은 신출내기인 자신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며 덤비곤 했었다. 그러던 중에 이번 취재의 삽화를 헨리가 담당하면서 앞서 나가자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 우린 우리 동생이 잘하고 있나 감독하러 왔지. ”
“ 아직 실력도 여물지 않은 녀석이 러셀 기자 덕분에 뜨기 시작해서 배가 아팠거든. ”
두형들은 헨리를 놀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찰스는 아무 말 없이 찡그린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 장난은 그만 치고, 나도 우리 아일랜드 동포들을 위해 저기에 앉아서 여왕폐하께 청원을 드리려고 왔다. 모닝 크로니클 기사에는 흰색 코트를 입는다고 하길래, 어디서 하얀색 코트를 맞출 곳도 없고 해서 침대보를 가져왔는데 이걸로도 될까 모르겠네? ”
아버지인 존 도일이 자신이 두른 침대보를 들쳐 보이며 말했다.
설마 진짜로 침대보를 걷어 온 것이었어? 존 도일의 말을 들은 러셀은 뭐라 대꾸를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 하하하, 여기 짠돌이 아버지나 큰형과는 달리 난 흰색 면직물을 사왔단 말씀이지. ”
차남 리처드(Richard "Dickie" Doyle)는 자신이 두르고 온 헝겊을 과시하듯 펼쳐 보이며 자랑했다. 그리고는 버킹엄 궁 앞에 시위자들이 연좌해 있는 곳으로 그대로 갔다.
“ 아이 씨, 항상 형들만 재밌는 것, 좋은 것 하고, 아버지 이것 좀 받으시고, 그거 제가 쓸게요. 그럼 여기 좀 부탁드려요. ”
그들의 대화를 듣던 헨리가 자기 아버지가 두르고 있던 침대보를 뺏어서 자신의 목에 두르곤 그 대신 존 도일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목탄을 손에 쥐어주고는 형제들을 따라서 농성장으로 달려갔다.
“ 형들, 같이 가. ”
“ 그런 이유로 도일 씨께서 아드님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는 대신 계약사항을 이행하셔야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
농성장으로 뛰어 들어가는 헨리의 뒷모습을 흘끔 본 러셀 기자는 존 도일에게 말했다. 요즘은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도 받는 존 도일이지만, 삽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렇게 얼렁뚱땅 섭외할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일 정도로 말이다.
헨리는 아직 신출내기여서 러셀이 일일이 지시하며 가급적 사실적으로 그리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존 도일이 그린다면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면 된다. 그는 여러 매체에 실린 풍자가 가득한 삽화로 인기를 끌고 있는 사람이었다.
“ 빌어먹을!! ”
자신이 쥐고 있는 목탄과 아들들이 간 방향을 번갈아 쳐다보던 존 도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탄식을 내뱉었다.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존 도일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떠나려는 러셀이었다. 그런 러셀을 존 도일이 붙잡으려 했다.
“ 자넨 어딜 가는가? 여기 나랑 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 저도 오늘은 기자 폐업입니다. 그래도 일단 시위가 끝난 후에 기사를 써야하니 도일씨께서 눈에 띄는 특이사항을 잘 기억해두시고 계시다가 있다가 시위가 끝난 후에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
러셀은 그동안 취재원으로만 보았던 조선 선비들에게 오늘만큼은 함께하고 싶었다. 자신도 아일랜드 인이었으니 말이다. 존 도일은 삽화가이긴 하지만, 풍자화로 유명한 만큼 그의 시선으로 본 사실만으로도 기사거리가 될 것이다. 땡땡이는 이럴 때 치는 거지. 편집장인 ‘장인 잘 둔 앤드류 도일’, 그 새끼도 도일이네? 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
“ 이봐, 같이 가세. ”
도일 형제들을 향해 외치며 뛰어가는 러셀의 뒷모습을 얼떨결에 취재본부를 맡게 된 존 도일이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 그래······, 나도 너희 같은 때가 있었지 ······. ”
이젤에 걸린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면서 존 도일은 자신의 독백을 이어갔다.
“ 나도 뭐 딱히 저 앞에서 쭈그려 앉고 싶었던 것은 아니야. 그럼 도일이라는 이름이 우습지 않도록 솜씨 좀 발휘해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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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창밖을 쳐다보았다. 처음에 브리튼인이 합류한 이후로 런던 인근에 살고 있던 아일랜드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에 이제는 대략 이백 여명 가까이 되는 인파가 연좌 농성에 합류했다. 그녀는 창밖을 쳐다보다가 시종을 향해 말했다.
“ 창을 열어주세요. 저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군요. ”
시종들이 창문을 활짝 여는 모습을 쳐다본 후에 옆에 있던 자신의 남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앨버트, 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훌륭한 어머니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
언제나처럼 정중한 어조의 답변이 그녀에게 기분 좋은 울림이 되어 들려왔다.
“ 하기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나를 하얀 큰어머니(Big white mother)라고 부른다죠? 고마워요. 앨버트.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요. ”
자신이 낳은 아이조차도 정해진 시간에만 안을 수 있는 그녀가 세상 만민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을까? 왕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지키고 있던 ‘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 라는 경구에 얽매어 있던 그녀를 억누르던 마음을 모두 벗어던진 탓인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려 궁내부 장관인 스펜서 백작에게 말했다.
“ 스펜서 백작, 광장으로 나가겠어요. 안내를 부탁해요. ”
“ 폐하, 혹시라도 ······. ”
궁내부 장관 스펜서 백작은 혹시라도 밖의 사람들이 폭도로 변하지 않을까하는 염려에 여왕을 만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 그의 말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여왕, 빅토리아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백작에게 말했다.
“ 그런 염려는 접어두도록 하세요. 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자들이 저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제 제가 가진 제관(帝冠)의 권위에 덤으로 딸려온 의무를 행하러 가야될 시간이에요. 그러니 ······. ”
자신이 모시는 군주의 결심이 확고해졌다. 그동안 여왕이 침묵한 것은 권리가 없음이 아니었다. 이나라의 최고권력은 오롯이 여왕, 그녀에게 있었다. 단지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위임하고 있었을 뿐 ······.
스펜서 백작은 그것을 깨닫자 자신이 하려던 모든 말을 잊고 묵례를 올리며 자신의 군주가 내린 명에 대한 대답을 했다.
“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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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열린 버킹엄 궁의 테라스 창문, 그리고 곧 이어 자신들 앞에 선 여왕의 모습에 버킹엄 궁 앞에 연좌하고 있던 이들은 일순 긴장했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 자신들 앞에 나타났을까? 혹시라도 자신들을 질책하기 위해? 아니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왕은 그런 여러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군중들을 향해 걸어왔다. 한발, 한발. 그녀의 걸음이 연좌 농성의 맨앞줄에 닿았을 때 그 걸음은 멈췄다.
그녀는 맨 앞에 앉아 있는 김병기의 어깨에 자신이 걸치고 있던 붉은 색의 숄을 덮어주고는 말했다.
“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경······. ”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왕-조선인들은 태후제(太后帝)라 부르는-이 김병기에게 말했다.
“ 그러니 오늘은 그만 쉬도록 하시오. 당신들은 나를 세계 만민의 어머니라고 부른다죠? 어머니의 부탁이에요. 내일까지 쉬고 모레 다시 오도록 하세요. ”
자신들의 청을 가납하겠다는 말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의 죄를 물어 처벌하겠다는 말도 없이 하루 쉬고 오라는 말을 들은 김병기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지난 이십여 일 동안 목이 터져라 외쳐서 이제는 제대로 된 소리로 들리지도 않는 쉰 목소리를 쥐어짜며 외쳤다.
“ 폐하, 저희들이 몸이 고된 것은 상관없습니다. 부디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마소서. ”
김병기의 선창에 다른 조선 선비들이 자신들의 청을 가납해달라는 소리를 외쳤다.
“ 그렇사옵니다. 폐하. 저희들이 올리는 말씀을 부디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
“ 폐하!! ”
“ 폐하!! ”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김병기가 자신의 머리맡에 놓은 도끼와 자신에게 올리기 위해 가져온 상소문을 쳐다 본 여왕은 허리를 굽혀 자신에게 올리기 위해 써왔다는 종이뭉치를 직접 집어 들었다.
“ 이것이 그대들이 내게 올린다는 보고서인가요? 이것은 내가 가져갈 테니, 오늘은 그만하세요. 그대들같이 올곧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잃게 된다면 슬퍼하게 되실 조선 국왕을 생각해서라도······. ”
김병기와 조선 선비들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한 빅토리아는 고개를 들어 연좌 중인 모두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 나, 빅토리아의 이름으로 명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해산하고 돌아가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그리고 내일까지 푹 쉬고, 모레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라. 그 때 너희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
그들이 간청하던 상소문을 승지를 통하지도 않고, 태후제 폐하께서 직접 가납하셨다. 목적을 이룬 조선선비들은 감격에 겨워 그동안 외치느라 쉬어터진 목소리로 외치며 엎드려 태후제-빅토리아를 향해 절을 했다.
“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조선 선비들의 모습을 본 왕국신민들은 그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그들 또한 그들의 군주를 향한 축수를 외치기 시작했다.
“ 여왕폐하 만세 (God save the Queen) !! ”
이 축수는 시위자들뿐 아니라 그들을 구경하던 런던의 한량들과 버킹엄 궁을 지키던 병사들, 시위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던 런던 경시청의 경관들까지 외치기 시작했다.
“ God save the Queen !! ”
조선선비들 틈에 끼어서 연좌농성에 참여한 글래드스턴 또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신이시여, 여왕폐하를 지켜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