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서쪽에서 부는 미풍, 동쪽에 이는 격랑 10.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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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곳에서 오신 손님께 대접이 소홀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성의를 생각하여 많이 드시도록 하시지요. ❞
좌식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앙리 5세를 배려해서 흥선군의 사랑방에는 탁자와 걸상이 마련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앙리 5세에게 방문하기 위해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들이 차려져있었다.
마침 그들이 집에 도착한 시각이 저녁 식사할 무렵이라 대화를 하기 전에 식사부터 하자고 청했다. 아직은 이곳의 주인으로서 손님을 대접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흥선군이 손님에게 음식을 권하며 수저를 들었다.
❝ 프랑스요리보다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브리튼, 그 작자들이 먹는 음식보다는 먹을 만 하다오. 식사하면서 얘기합시다. ❞
흥선군의 말을 바로 받아서 앙리 5세가 말했다. 그도 자신을 찾아온 이 독특한 손님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 좀 독특하긴 하지만, 이런 이국의 풍미를 느끼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죠. ❞
흥선군과 앙리 5세의 말을 웃으며 받는 루이지애나에서 온 노베르 릴리유(Nobert Rillieux)였다.
❝ 하하하,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그랑제콜(Grandes Écoles) 출신이라서 그런지 아주 똑똑하군. 프린스 흥선! 이 친구 말 들었소? 일본에서도 그렇고, 제주에서도 그렇고, 그곳의 음식을 즐기면서 한 달 정도는 푹 쉬는 것이 미덕이란 말이오. 특히나 제주에서는 어린애 주먹만 한 작은 오렌지를 꼭 먹고 싶었는데······. ❞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이 끌려 다닌 여행 아닌 여행에 대한 푸념을 하는 앙리 5세였다. 그는 제주도에서도 제주에 머물며 여행을 하자는 자신의 제안을 뿌리치고, 자기 볼일 만 본 흥선군에게 골아 나있었다. 그나마 논 것처럼 논 것은 성산포에서 기지 건설을 지휘하던 클리포드 제독과 제주도 지사(박규수), 제주도 주둔 사령관(신헌)과 가진 연회였을 뿐이었다.
제주도에 제법 많이 있던 독특한 오렌지를 꼭 맛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먹지 못하게 했던 흥선군이었다.
❝ 아니, 귤은 전량 임금님께 진상하는 귀한 과일 인 것인데, 그것을 어찌 신하된 도리로 함부로 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아직 수확철도 아니어서 퍼런 것을 보셨으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오? 겨울이 되어 황감(黃柑)이 진상되면 그때 주상전하께 청하시면 국공전하께는 충분히 나누어 주실 겁니다. ❞
익지도 않은 과실을 먹고 싶다는 것부터 성격이 이상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입밖에 내지는 않고 흥선군이 달래듯 앙리 5세에게 말했다.
❝ 과일이란 것이 제철에 수확한 현지에서 먹는 게 제 맛이란 것도 모르는가? 에이, 이러니 맛알못인 브리튼 인들이랑 죽이 짝짝 맞는 거지 ······. ❞
은근히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면 최대한 맛없게 조리해서 먹는 브리튼인과 조선인들을 동급으로 돌려까는 앙리 5세는 자신의 손님을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 조선 사람들이 다 괜찮은 데 그거 하나 틀려먹었단 말이오. 하하하. ❞
❝ 샹보르 백작님, 오렌지를 좋아하신다면 언젠가 제 고향 루이지애나에 오십시오. 아주 멋진 루이지애나 스위트 오렌지(Louisiana sweet orange)를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대접해드리죠. ❞
앙리 5세의 뭔지 모를 조선 오렌지에 대한 푸념을 들은 릴리유는 가볍게 앙리 5세에게 자신의 고향에 모실 뜻을 전했다.
❝ 오, 루이지애나 스위트 오렌지? 뭔가 특별한 건가? ❞
❝ 다른 오렌지처럼 쓰고 텁텁한 뒷맛이 없는 달콤하고 향긋한 특산물입니다. 아주 멋진 과일이죠. ❞
❝ 역시 뭔가 좀 아는 친구군. 자넨 분명 프랑스인이 맞군. 그래? 하하하하. ❞
일단 맛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이라면 프랑스인 밖에는 없다. 앙리 5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에 있는 독특한 손님을 향해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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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도 마쳤고, 이제 그대가 우리 조선에 온 이유를 말해주시겠소? ❞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과 어색함을 풀기 위해 식사부터 한 그들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통해 조금은 어색함이 덜어졌으니 이제 노베르 릴리유가 조선에 찾아온 이유를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 사실 부렬전과 친교를 맺고, 여기 불란서 국공전하께서 한양에 체류하시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가 여전히 청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대는 조선에 발도 내딛지 못하고 쫓겨 갔을 거요. 국공전하를 뵙기 위해 찾아온 불란서 사람이라니까 국공전하께서 숙소를 쓰고 계신 내 집에 한정에 체류를 할 수 있었던 거지. ❞
릴리유에게 경고가 될만한 말을 덧붙이는 흥선군이었다. 그가 혹시 앙리 5세를 이용하여 외교적으로 수작을 부리기 위해 아미리견(亞美利堅)에서 보낸 간자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천하 정세는 이제 서쪽의 세력이 강성하고 동쪽의 세력이 기울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혼란기였으니 말이다.
❝ 방문목적에 따라서는 바로 자네 나라로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일세. 한번 말씀해 보시게나. ❞
흥선군의 말을 들은 노베르 릴리유는 한참을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후식으로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차 잎을 우린 특유의 떫은맛을 없애기 위해 약과를 한 조각 먹은 후에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 사실 조선에 오게 된 것은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여서입니다. 제 고향은 지금 차별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
❝ 무엇 때문에 말이오? ❞
자기 고향얘기부터 하는 릴리유의 말에 흥선군이 관심을 보였다. 저자의 고향이라함은 부렬전에서 큰바다를 건너 있는 아미리견 아니던가? 그곳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조선까지 충동적으로 오게 되었다는 말인가?
천하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입장의 흥선군으로서는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 일단 제 개인사에 대해 말씀드려야겠군요. 제가 프랑스인이자 미국인임을 자처하지만, 제 외모는 확실히 샹보르 백작님과 차이가 나지요? ❞
❝ 솔직히 그렇소. 내가 부렬전에서 본 사람들과 외모가 많이 차이 납니다. 내 듣기로 구라파 사람들도 부렬전 사람들과 외모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들었소만. ❞
흥선군은 릴리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질문에 답했다. 노베르 릴리유의 외모는 콧대의 모양 같은 것은 부렬전에서 본 사람들처럼 높고 컸지만, 그의 살색을 짙은 갈색이었다. 구라파 사람들의 피부는 희다 못해서 붉은 빛이 돌 정도였는데 말이다.
부렬전 사람들의 외양은 구라파에 사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얘기는 눈앞에 앉아 있는 릴리유를 본다면 맞지 않는 말이었다.
❝ 제 아버지는 프랑스계 백인이셨습니다. 어머니는 뮬라토(흑백혼혈인)의 후손으로 나름대로 유서 깊은 크레올(Créole)가문의 후손으로 자유인이셨죠. 우리 루이지애나에는 유색인과 백인간의 결혼인 플라싸쥬(Plaçage)를 통한 자손들은 엄밀히 말해 부친의 모든 권리를 물려받고 자유민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누벨 오를레앙의 제 이웃들은 은근히 저를 노예로 몰고 제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려고 합니다. ❞
여기까지 말하고는 목이 타는 것인지 다시 찾잔을 들어 차를 마시는 릴리유였다. 약간 식어 미적지근한 찻물을 모두 입에 넣어 버린 릴리유였다.
그 모습을 본 흥선군은 조용히 찻주전자를 들어 릴리유의 찻잔에 차를 다시 채워주었다.
❝ 그래서 프랑스의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부정당하고 있는 여기 샹보르백작님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 조선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때에 또 다시 제 정당한 권리를 빼앗으려는 시도를 당했습니다. 그건 해결하기는 했지만, 제 고향에 대한 환멸이 생겨나 도저히 참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샹보르 백작님을 만나 뵙기 위해 제 시종인 샘만을 데리고 조선으로 온 겁니다. ❞
❝ 잠깐, 자네 혹시 아까 자네 옆에 있던 그 샘이라는 사람도 노예인가? ❞
앙리 5세는 릴리유의 말에 무언가 모순된 느낌을 받아서 확인하듯 말했다. 얘기를 듣자하니 아직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대충 백인들이 흑백 혼혈인 릴리유를 노예 취급한다는 말인 것 같았다. 릴리유야 아직 자신의 사연을 제대로 풀지 않은 것이지만, 얘기가 뻔하지 않는가?
그런데 시종이라고 데려온 그 샘(Sam)이란 자는 누가 봐도 흑인 아니던가?
❝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주 훌륭한 친구죠. 어릴 때부터 제 주변에서 제 조수노릇을 한 친구입니다. ❞
❝ 자네는 자신이 당한 취급에는 부당함을 느끼면서, 다른 이에게는 둔감한 것 같군그래? ❞
자신이 당하는 차별에는 분개하면서도, 피부색이 같은 다른 이를 노예로 부리는 릴리유의 둔감함을 비꼬는 앙리 5세였다. 자신과 같은 아픔 운운하길래 들던 공감하는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적어도 앙리 5세 자신은 그 누구도 압제하지 않았었다.
❝ 아, 그런 것은 다음에 말하기로 하고, 우선 이친구의 말을 마저 듣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앙리 5세가 갑자기 불쾌해하는 낯빛을 보이자 흥선군이 그를 진정시키고 릴리유의 말을 계속 듣고자 했다.
❝ 알았네. 일단 다 듣고 그런 것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지. ❞
❝ 저는 프랑스에서 그랑제콜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최연소 강사로 재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제 고향에서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제가 출원하는 특허마다 노예라며 주인의 이름으로 출원 등록해야 한다는 둥 저를 이유 없이 괴롭혔습니다. ❞
릴리유는 자신의 사연을 계속 이야기했다. 흥선군이 따라준 차를 다시 한입에 털어 넣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 프랑스에서는, 아니 유럽에서는 노예제도는 이미 철폐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저는 천한 노예의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자유인의 후손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저를 자랑스러워 하셨고 말입니다. ❞
릴리유는 앙리 5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 프랑스 삼색기의 정신처럼 자유, 평등, 동지애 (Liberté, Éégalité, Fraternité)의 정신이 고향의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전 그것에 괴로워하다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원래는 프랑스로 돌아가려다 그런 프랑스에서조차도 배척당하고 있는 백작님의 처지에 공감해서 이곳에 온 겁니다. 백작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말입니다. ❞
프랑스 삼색기의 정신까지 말하자, 앙리 5세의 얼굴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릴리유의 프랑스 예찬이 지나쳐서 그만 부르봉을 무너뜨린 대혁명 정신까지 언급한 것이다. 열띠게 말하는 릴리유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런 앙리 5세와는 별개로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개념에 대해 질문하는 흥선군이었다.
❝ 그런데 특허? 그게 무엇인가? ❞
❝ 특허제도를 모르오? 프린스 흥선? 조선에는 그런 제도가 없는 건가? ❞
앙리 5세는 흥선군의 질문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고 반문했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신선하고 신기한 앙리 5세였다.
❝ 그렇습니다만, 특허 출원을 할 때마다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기에 ? ❞
❝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쑥스럽습니다만, 저는 제법 유능한 공학자이자 과학자입니다. 제가 개선하고 창안한 기술들이 꽤 여러 개 있습니다. 제가 만든 기술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이익을 제가 가질 수 있게 공인해주는 것이 특허제도인데, 제 기술을 빼앗아 자기들이 쓰기위해 그런 수작을 부린 것이겠죠? ❞
자기 자랑을 하는 노베르 릴리유의 표정에는 겸손함보다는 자부심에 찬 표정이 드러났다. 마치 자기처럼 대단한 사람이 박해를 받은 것에 공감해달라는 것같은 표정이었다.
❝ 노베르, 무슨 기술을 창안했길래 남들이 그렇게 탐을 낸 것인가? ❞
❝ 카리브해나 미국 남부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성행하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단맛이 유럽의 귀하신 분들의 식탁에서 소비되니까 말입니다. ❞
자기 자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자 여유가 생긴 릴리유는 자기 앞에 높은 작은 접시에서 조선 과자를 안조각 입에 넣으며 말했다.
❝ 그렇지? 그게 없으면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수 없지 않나? ❞
앙리 5세가 릴리유의 말에 맞장구 치며 말했다. 단맛이 안나는 디저트라면 누가 먹을까?
❝ 그것의 생산효율을 몇 배나 높일 수 있는 기술이죠. 저는 그것을 지켜내는 싸움을 했습니다. 결국 제가 이기긴 했지만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말입니다. ❞
❝ 그게 그렇게 귀한 기술인가? ❞
흥선군의 말에 릴리유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그의 설명을 듣는 흥선군은 앙리 5세의 손님으로 온 릴리유라는 작자가 조선에 필요한 인재임을 직감했다. 서역의 나라와 비교해서 꽤나 늦은 조선의 상공을 따라잡으려면 이런 자가 많이 필요할 것이다.
조선 사람이 배워오면 좋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다면 이자가 조선에 온 김에 아는 것을 모조리 배우는 것도 답 아니겠는가? 좋은 기회였다. 그 특허란 것? 조선에서도 인정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혹시 아는가? 천하의 재주가 넘치지만 제 땅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들이 이자의 소문을 듣고 조선으로 몰려들지?
부렬전에서 만난 아라사의 상주사신이 그? 브룬나우(von Brunnow)란 노인도 아라사 사람이 아님에도 자기 재주를 아라사 황제를 위해 평생 바치지 않았던가? 외국인이 조선을 위해 일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