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부, 운명의 미로에서-1화 (1/36)

        댄스, 댄스. 댄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카

    출판사 문학사상사

  

  제1부, 운명의 미로에서

  1  

  나는 자주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즉 일종의 계속되는 상황으로 나는 그 

호텔안에 포함되어 있다. 꿈은 분명 그러한 계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꿈속에서의 

이루카 호텔의 모습은 일그러져 있다. 아주 길쭉한 것이다. 어찌나 길쭉한지 

그것은 호텔이라기보단 지붕이 있는 긴 다리처럼 보인다. 그 다리는 태고로부터 

우주의 종국에 이르기까지 길쭉하게 뻗어 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포함돼 

있다. 거기에선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호텔 그 자태가 나를 포함하고 있다. 나는 그 고동 소리나 온기를 

또렷이 느낄 수가 있다. 나는, 꿈속에선, 그 호텔의 일부이다. 그런 꿈이다.

  잠을 깬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할 뿐 아니라 실제로 입 

밖에 내어 나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물음이다. 물을것까지도 없이 대답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여기는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활, 나라고 하는 현실 

존재의 부속물, 특별히 인정한 기억이 없는데도 어느 틈엔가 나의 속성으로서 

존재하게 된 몇 자지의 사항, 사물, 상황, 옆에서 여자가 잠자고 있는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나 혼자다. 방 바로 맞은편을 달리는 고속도로의 진동 소리와 

베갯머리의 유리잔(바닥엔 5밀리미터 쯤 위스키가 남아 있다)과, 적의를 

품은-아니, 그건 단순한 무관심인지도 모르지만-티끌 투성이의 아침햇살, 때론 

비가 내리고 있다. 잔에 위스키가 남아 있으면, 그걸 마신다. 그리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면서, 이루카 호텔의 일을 생각한다. 팔다리를 천천히 

뻗어본다. 그리곤 자신이 그저 자신일 뿐이며,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어디에도 포함돼 있지는 않다. 하지만 꿈속의 감촉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선 내가 손을 뻗치려고 하면, 거기에 호응해서 

나를 포함한 전체상이 움직인다. 물을 이용한 자잘한 구조를 갖춘 장치처럼, 

하나씩 하나씩 서서히 주의 깊게, 한 단계 한 단계 아주 희미한 소리를 내면서, 

그것은 차례차례 반응해 간다. 내가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진행해 가는 방향을 

들을 수가 있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그리곤 누군가의 조용한 흐느낌 소리를 

듣는다. 아주 조용한 소리, 어둠 속 깊숙한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흐느낌. 

누군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이루카 호텔은 현실로 존재하는 호텔이다. 삿포르(홋카이도의 제1 도시)거리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한쪽에 있다. 나는 몇 해 전이던가 거기에 1주일 가량 

머문 적이 있다. 아니지, 분명히 기억해내자. 명백히 해 두자. 그게 몇 해 

전이더라? 4년 전,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4년 반 전이다. 나는 그때는 아직 

20대였다. 나는 어떤 여자아이와 둘이서 그 호텔에 투숙했다. 그녀가 그 호텔을 

선택했다. 그 호텔에 숙박하자고 그녀가 말했던 것이다. 그 호텔로 정하는 것이 

좋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요구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루카 호텔 같은데엔 아마 숙박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작고 

초라하기만 한 호텔로, 우리들 말고는 숙박객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그 1주 동안 그 호텔에 있으면서 로비에서 눈으로 본 손님이라곤 둘 

아니면 셋 정도였고, 그나마 숙박객인지 아닌지조차 몰랐었다. 하지만 프런트의 

보드에 걸린 열쇠가 군데군데 비어 있었으니까, 우리들 말고도 숙박객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다지 많지는 않다 해도 조금쯤은. 아무튼 작으나마 작은 

도시의 한편에 호텔 간판을 내걸고, 직업별 전화부에조차 의젓하게 번호가 나와 

있으니, 전혀 손님이 오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말고 손님이 있었다 해도, 그들은 무척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들이었을 게다. 우리들은 그들의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고, 그 무슨 소리도 

듣지 못했고, 느낌도 갖지 못했었다. 보드위의 열쇠 배치만이 매일 조금씩 

바뀌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아마도 희미한 그림자처럼 벽을 기어서 복도를 

오가곤 했나 보다. 가끔씩 덜컥덜컥, 덜컥덜컥 하는 엘리베이터의 주행음이 

조심스레 울려 왔지만, 그 소리가 그치면 침묵은 저보다도 오히려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든 이해할 수 없는 호텔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생물 

진화의 막다름 같은 것을 연상케 했다. 유전자적 후퇴. 빗나간 방향으로 진행한 

체 되돌이킬 수 없게 된 기형 생물. 진화의 힘을 가진 인자가 소멸하고, 역사의 

박병속에 정처없이 우두커니 서 보니 마치 고아라도 된 것 같은 고독한 생물. 

시간의 익곡.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누가 나쁘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가 그것을 구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첫째로 그들은 그곳에 호텔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오는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제 

1보부터, 모든 것이 그릇돼 있었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져, 거기에 맞춰 모든 

것이 결정적으로 혼란되어 있었다. 혼란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시도는, 새로운 

세세한-세련됐다 곤 할 수 없다, 그저 세세할 뿐이다-혼란을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결과, 모든 것이 다 조금씩 비뚤어져 보였다. 거기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만히 

응시하려고 하면, 극히 자연히 목이 몇 도쯤 기울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비뚤어짐, 기울인다지만 아주 작은 각도니까 특별한 해악 정도야 없고, 따로 

부자연함을 느낄 정도도 아니며, 줄곧 거기에 있으면 그것에 이골이 나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역시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비뚤어짐(게다가 그런 것에 이골이 

나 버린다면 이번엔 온당한 세계를 볼 때조차도 목을 기울이게 될지 모른다).

  이루카 호텔은 그런 호텔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하지 못하다함은-그 

호텔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한 끝에 포화점에 달해서, 이윽고 머지 않은 장래에 

시간의 크나큰 소용돌이에 몽땅 삼켜져버리게 될 것이라는 건-누가 보든 

일목요연했다. 애처로운 호텔이었다. 마치 12월의 비에 젖은, 발이 셋밖에 없는 

점은 개처럼 애처롭게 보였다. 물론 애처롭게 보이는 호텔은 세상엔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루카 호텔은 그런 것과도 또 좀 다르다. 이루카 

호텔은 좀더 개념적으로 애처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더욱 애처롭다. 말할 나위도 

없다곤 생각하지만, 그런 호텔을 택해서 일부러 숙박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잘못 찾아든 손님 말고는 별로 없다. 이루카 호텔은 정식 

명칭은 아니다. 정식으로는 그것은 '돌핀 호텔'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과 

실체로부터 받는 인상이 상당히 거리가 있기 때문에(돌핀 호텔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에게 바다 언저리의, 사탕과자처럼 새하얀 리조트 호텔을 연상케 

한다.)내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입구에는 이루카(돌고래)를 

새겨놓은 꽤나 훌륭한 부조가 걸려있다. 간판도 결려 있다. 하지만 만일 간판이 

안 걸려 있다면, 그건 전혀 호텔로는 보이지 않을 게다. 간판이 있는데도, 

아무래도 호텔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까. 무엇으로 보이느냐 하면, 그것은 꼭 

퇴락한 박물관처럼 보인다. 특수한 전시물을 보기 위해, 특수한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이 살그머니 찾아올 듯한, 그런 특수한 박물관. 하지만 사람이 이루카 

호텔을 눈앞에 두고 그러한 인상을 품었다 해도, 그것은 결코 빗나간 상상력의 

비상은 아니다. 사실은 이루카 호텔의 일부는 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런 호텔에 숙박하겠는가? 그 일부가 영문 모를 박물관이 되어 있는 그런 

호텔에? 어둑한 복도 안쪽에 양의 박제니, 먼지투성이의 모피니, 곰팡내 물씬 

나는 자료니, 검붉게 변색한 낡은 사진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그런 

호텔에.못다한 상념이 마른 진흙처럼 구석구석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그런 

호텔에? 모든 가구는 색이 바래고, 모든 테이블은 삐걱거리고, 모든 열쇠는 

제대로 잠궈지질 않았다. 복도는 닳아 떨어지고, 전구는 어두웠다. 세면대의 

마개는 일그러져서 물이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뚱뚱한 여자아이(그녀의 다리는 

코끼리를 연상케 했다)는 복도를 걸으면서 칵칵 불길한 기침을 했다. 언제나 

카운터에 있는 지배인은 애처로운 듯한 눈을 가진 중년 사내로, 손가락이 두 개 

없었다. 이 사내는 보기에도, 무엇을 하건 우선 잘돼 나가지는 않을 그런 

타입이었다. 그러한 타입의 바로 표본 같은 사내였다. 마치 짙은 청색 잉크 

용액에 하루 동안 담가 두었다가 끄집어 낸 것처럼, 그의 존재의 구석에서 

구석까지에 실패와 좌절의 그림자가 깊이 배어들어 있었다. 유리 상자에 넣어 

가지고, 학교 실험실에 놓아두고 싫어질 그런 사내였다. <무엇을 하건 제대로 

되지 않는 사내>라는 딱지를 붙여 가지고, 그를 보고 있기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소의 차이야 있겠지만 비참한 기분이 되었고, 화를 내는 자도 적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사람은 그러한 타입의 비참한 인간을 보고 있기만 해도, 

의미도 없이 무턱대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법이다. 누가 그런 호텔에 

숙박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들은 숙박했다. 우린 여기에 숙박할 거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런 뒤에 그녀는 없어져 버렸다. 나 하나를 남겨놓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가 가버렸다는 걸 내게 알려준 사람은 '양 사나이'였다. 

그 여잔 가버렸단 말이오, 하고 '양 사나이'는 내게 알려주었다. '양 사나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나로서도 이제는 

알겠다. 그녀의 목적은 나를 거기로 인도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몰로다브 강이 바다로 이르는 것같이. 나는 처마의 

빗방울을 보면서, 그 일을 생각한다. 운명. 내가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꾸게끔 

되었을 때에, 우선 떠올린 것은 그녀에 대해서였다. 그녀가 다시 나를 요구하고 

있다.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선, 왜 잃게 몇 번이고 꿈을 꾸는 

건가? 그녀,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몇 달 동안인가 

살았는데도, 나는 그녀에 대해서 실질적으론 무엇 하나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녀가 어느 고급 콜걸 클럽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클럽은 회원제로, 신원이 확실한, 제대로 규격에 맞는 고객밖엔 상대하지 

않았다. 최고급의 창녀다. 그녀는 그밖에도 ㅁ 가진가의 일을 갖고 있었다. 

평소의 낮 동안은 조그마한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로 교정일을 하고 있었고, 

파트 타임으로 귀 전문 모델도 하고 있었다. 요컨데 그녀는 매우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녀에겐 물론 이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말이지, 

그녀는 몇 개나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녀의 소지품-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의 어느 것에도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정기권도, 면허증도, 크레디트 카드도 갖고있지 않았다. 

조그만 수첩을 하나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영문 모를 암호가 볼펜으로 

지저분하게 적혀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존재에는 시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창부는 이름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름을 갖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그녀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나이가 몇 살인지도, 생일조차 알지 못한다. 

학력도 알지 못한다. 가족이 있는지 어떤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비처럼 어디선가 와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만 

기억만을 남겨놓고, 하지만 지금 나는 나의 주위에서 그녀의 기억이 또다시 

어떤 종류의 현실성을 띠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녀는 이루카 호텔이라는 상황을 통해서 나를 부르고 있다라고, 

그렇다, 그녀는 이제 또 다시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루카 

호텔에 다시 한 번 포함되는 것으로써만, 그녀와 다시 한 번 해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거기서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낙수물을 쳐다보면서 자신이 무엇엔가에 포함된다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몹시 먼 세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달인가 우주인가 그런 곳에서의 

사건처럼 느껴진다. 결국 그건 꿈인 것이다. 손을 제아무리 길게 내뻗어도, 

제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나는 거기에 당도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어째서 

누군가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아니지, 그래도, 그녀는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저 이루카 호텔의 어딘가에서, 그리고 나도 역시 마음의 어느 

구석에선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장소에 포함될 것을, 그 기묘하고도 

치명적인 장소에 포함된 것을. 하지만 이루카 호텔로 돌아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화로 방을 예약하고,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에 가면 그걸로 끝날 일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호텔인 동시에 하나의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호텔이라는 

형태를 취한 상황인 것이다. 이루카 호텔로 돌아간다는 것은, 과거의 그림자와 

다시 한 번 상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나는 이 4년 동안, 그 냉랭하고 

어둑시근한 그림자를 없애버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루카 호텔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가 이 4년 동안 조용히 부지런히 모아온 

모두들 송두리째 포기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는 그다지 

대수로운 것을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그 거의 대부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잡동사니였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으며, 

그 같은 잡동사니를 제법 그럴싸하게 짝을 맞춰 가지고 현실과 자신을 

연결하고, 내 나름의 조촐한 가치관에 기초한 새로운 생활을 쌓아온 것이다. 

다시 한 번 전의 텅 빈 자리로 되돌아 가라는 것인가? 창문을 열고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라는 것인가?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로선 그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밖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침대에 

나뒹귈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념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단념하자, 무슨 생각을 하건 소용없다. 그것은 너의 힘을 넘어선 

것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거기서부터밖엔 시작되지 않는 거다. 그러게 

마련이다. 이미.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자기소개. 옛날, 학교에서 자주 했다. 학급이 새로 

편성되었을 때, 순번으로 교실 앞쪽에 나가서, 여럿 앞에서 자신에 관해 여러 

가지를 지껄인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질색이었다. 아니, 질색일 뿐만도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행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내가 내 의식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일까? 바로 테이프레코드에 취입한 소리가 

자신의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가 파악하는 나 자신의 상은, 왜곡되게 

인식되어 적당하게 변형되어 만들어진 상은 아닐까?... 나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소개를 할 때마다, 남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마다, 나는 마치 성적표를 멋대로 고쳐 쓰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언제나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럴 때, 나는 되도록 

해석이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하도록 마음을 

썼지만(나는 개를 기르고 있습니다. 수영을 좋아합니다. 싫어하는 음식물은 

치즈입니다. 등등), 그래도 어쩐지 가공의 인간에 대한 가공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으로 

다른 여럿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도 역시 그들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겐 느껴졌다. 우리들은 모두가 가공의 세계에서 

가공의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지껄이기로 하자.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 지껄이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것이 우선 제 

1보인 것이다.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못한 것인지는 나중에 다시 판단하면 

된다. 나 자신이 판단해도 되고 다른 누군가가 판단해도 된다. 어떻든 간에, 

지금은 이야기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도 이야기하는 것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제는 치즈를 좋아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지 못하나, 

어느틈엔가 자연히 좋아하게 되었다. 기르고 있던 개는 내가 중학교로 전학한 

해에 비를 맞고 폐렴으로 죽었다. 그 후로 개는 한 마리도 기르지 않고 있다. 

헤엄치는 일은 지금도 좋아한다. 끝. 하지만 세상사는 그렇게 간단하게는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인생에서 찾으려 할 때(찾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인생은 좀더 많은 데이터를 그에게 요구한다. 명확한 도형을 그리기 

위한, 보다 많은 점이 요구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아무런 회답도 절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데이터 부족으로 회답 불가능, 취소키를 눌러 주시오.' 

취소키를 누른다. 화면이 흐려진다. 교실 안의 인간들이 나에게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좀더 지껄여라. 좀더 자기 이야기를 지껄여라, 하고. 교사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교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다. 지껄이자. 

그러지 않고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도 되도록 길게.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못한 것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 된다. 때때로 여자가 내방에 

묵으러 왔다. 그리곤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회사로 출근했다. 그녀에게도 역시 

이름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름이 없는 건, 다만 단순히 그녀가 이 이야기의 

주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그 존재를 지우고 만다. 그러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나는 그녀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의 존재를 가볍게 생각한다고 여겨선 안 된다. 나는 그녀를 몹시 

좋아했으며, 없어져버린 지금에 와서도 그 심정은 다르지 않다. 나와 그녀는 

이를테면 친구였다. 적어도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던 인간이다. 그녀에겐 나 말고 제격인 연인이 있다. 그녀는 

전화국에 근무하고 있으며, 컴퓨터로 전화 요금을 계산하고 있다. 직장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특별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대충 

그러한 느낌의 일자리였다고 생각된다. 개인의 전화 번호마다에 요금을 

집계해서 청구서를 만든다든지 하는 그런 종류의 일이다. 그래서 매달 우편함 

속에 전화 요금 청구서가 들어 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꼭 개인적인 편지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일과는 관계없이, 나와 

동침하고 있었다. 한 달에 두번, 아니면 세 번인가, 그정도. 그녀는 나를 달 

세계인인가 무엇인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봐요, 당신 아직도 달로 돌아가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킬킬거리면서 말한다. 침대 속에서 알몸뚱이로, 서로 몸뚱이를 

밀착시켜 가면서. 그녀는 젖가슴을 나의 옆구리에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는 

새벽녘 시간에 곧잘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고속도로의 소음이 

줄곧 끊일 새 없이 계속되고 있다. 라디오에서 단조로운 휴맨 리그의 노래가 

들려 온다. 휴맨 리그. 싱거운 이름이다. 어째서 이런 무의미한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옛날 인간들은 밴드에 좀더 진지하고 절도있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임패리얼즈, 쉬프림즈, 플라밍고즈, 임프레션즈, 도어즈, 포 시즌즈, 비치 보이즈.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웃는다. 그리고 내가 변했다고 한다. 나의 어디가 

변했는지 나는 모른다.나는 나 자신을 매우 성실한 생각을하는 매우 성실한 

인간이라고 알고 있다.

 [당신과 있는 게 좋아요]하고 그녀는 말한다.

 [가끔 가끔 말예요, 지독하게 당신과 만나고 싶어지는 거예요.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라든지 말예요.],

 [응]

하고 나는 말한다. 

 [가끔 가끔]

하고 그녀는 어조를 강조해서 말한다. 그리곤 30초 정도의 사이를 둔다. 휴맨 

리그 노래가 끝나고, 알지 못할 밴드 곡으로 바뀐다.

 [그게 문제점이예요, 당신의]

하고 그녀는 계속한다.

 [난 당신과 둘이서 이렇게 있는 게 아주 좋지만,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줄곧 

함께있고 싶진 않아요. 웬일인지.]

 [응]

하고 나는 말한다.

 [당신과 있으면 답답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함께 있으면 말예요, 

가끔 가끔 공기가 쑤욱 엷어져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마치 달에 

있는 것처럼.]

 [이건 극히 작은 한 예이지만...] 

 [봐요, 이거 농담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나, 당신을 위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말해 

주는 사람, 달리 또 있어요? 어때요? 그런 말 해주는 사람, 달리 또 있어요?]

 [없지]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한다. 한 사람도 없다. 그녀는 다시 옆으로 누워, 

젖가슴을 정겹게 내 옆구리에 밀착시킨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아무튼 가끔가끔, 달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엷어진단 말예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달의 공기는 엷지 않아]

하고 나는 지적한다.

 [달 표면엔 공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엷은 거예요]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한다. 그녀가 내 발언을 무시한 건지, 또는 전연 

귀담아 듣지 않은 건지는, 나로선 알 수없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작다는 

것이 나를 긴장하게 하다. 왠지 모르지만, 거기엔 나를 긴장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가끔 가끔 쑤욱 엷어진단 말예요.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공기를 당신이 

마시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인식된단 말예요.]

 [데이터가 부족한 거야] 하고 나는 말한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럼?]

 [나 자신도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

 하고 나는 말한다.

 [정말 그래. 특별히 철학적인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야. 좀더 실제적인 의미로 

말하는 거야. 전체적으로 데이터 부족이야.]

 [하지만 당신 벌써 서른 셋이죠?]

 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스물 여섯이다.

 [서른 셋]하고 나는 정정을 한다.

 [서른네 살하고도 2개]

 그녀는 고개를 흔든다. 그리곤 침대에서 나와 창문으로 가서, 커튼을 젖힌다. 

창 밖에는 고속도로가 보인다. 도로 위에는 뼈처럼 하얀 아침 여섯 시의 달이 

떠 있다. 그녀는 내 파자마를 걸치고 있다.

 [달로 돌아가요, 당신]

 하고 그녀는 그 달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춥지?]

하고 나는 말한다.

 [춥다니. 달 말예요?]

 [아니, 지금의 당신 말이야]

 하고 나는 말한다. 지금의 2월달인 것이다. 그녀는 창문께에 서서 하얀 숨을 

토해내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제서야 추위를 깨달을 것 같았다. 

그녀는 급히 침대로 돌아온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는다. 그 파자마는 지독히 

차다. 그녀는 코끝을 내 목에 밀어붙인다. 그 코끝도 차다.

 [당신이 좋아]

 하고 그녀는 말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 이렇게 둘이서 침대 속에 있으면 아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녹여주거나 머리칼을 조용히 

어루만지거나 하는게 좋은 것이다. 그녀의 작은 잠결의 숨 소리를 듣거나, 

아침이 되어 그녀를 회사로 보내거나, 그녀가 계산한 -그렇게 내가 믿고 있는- 

전화 요금 청구서를 받아들거나, 커다란 내 파자마를 그녀가 걸치고 있는 걸 

보거나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란, 막상 말하려고 들면 한 

마디로 잘 표현되지 않는다. 사랑하고 있다는 건 물론 아니고,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하지만 어떻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이라는 게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으로써 

그녀가 상심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녀는 그걸 내가 느끼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에겐 느껴진다. 부드러운 피부 위로부터 그녀의 등뼈의 

형상을 더듬으면서 나는 그걸 느끼는 것이다. 매우 선명하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 껴안은 채, 제목도 알지 못하는 노래를 듣고 있다. 그녀는 

애 아랫배에다 살며시 손바닥을 갖다 댄다.

 [달세계의 여인과 결혼해서 훌륭한 달세계인의 아이를 가져와]

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한다.

 [그게 제일이에요.]

 열어 젖혀진 창문으로는 달이 보인다. 나는 그녀를 껴안은 채, 그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달을 보고 있었다. 가끔씩 무엇인지 몹시 무거운 물건을 실은 장거리 

트럭이, 붕괴하기 시작한 빙산 같은 불길한 소리를 내며 고속도로를 질주해 

갔다. 도대체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침 식사, 무엇이 있지요?]

 하고 그녀는 내게 묻는다.

 [특별히 색다른 건 없어. 햄과 계란과 토스트와 어제 낮에 만든 포테이토 

샐러드, 그리고 애플파이. 당신을 위해 밀크를 데워 가지고 카페오레를 만든지]

하고 나는 말한다.

 [훌륭해요]

하고 그녀는 미소 짓는다.

 [햄에그를 만들고,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구워 줄래요?]

 [물론이지. 기꺼이]

하고 나는 말한다.

 [매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짐작이 안 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무엇이냐 하면 말예요]

하고 그녀는 내 눈을 보면서 말한다.

 [겨울의 추운 아침에, 싫구나, 일어나고 싶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커피 

향기와,햄에그를  굽는 지글거리는 냄새와, 토스터가 끊기는 탁 소리에 그만 

참을 수가 없어서, 과감하게 침대를 박차고 빠져나오는 거예요.]

 [좋아. 해보자구]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나는 색다른 인간은 아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평균적인 인간이란곤 

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러나 색다른 인간도 아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지극히 

성실한 인간인 것이다. 매우 직선적이다. 화살처럼 직선적이다. 나는 나로서 

극히 필연적으로, 극히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자명한 

사실이어서, 타인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전혀 

관계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나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우둔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계산이 빠르다고 생각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려면 어떤가. 게다가 <실제 이상으로>라는 표현을, 내가 파악한 나 자신의 

상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나는 어쩌면 

현실적으로 우둔하며, 어쩌면 계산이 빠르다. 그것은 뭐 어느 쪽이건 좋다.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오해라는 것은 없다. 사고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따로, 그 한편에서, 내 안의 

그 <성실함>에 끌리는 인간이 있다. 아주 수효가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존재한다. 그들 그녀들과 나는 마치 우주의 어두운 공간에 뜨는 두 개의 

유성처럼 극히 자연스레 연결되고, 그리고 떨어져 간다. 그들은 내게로 와서 

나와 관계하고, 그리고 어느 날 가버린다. 그들은 내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아내도 된다. 어떤 경우엔 대립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든간에, 

다들 내 곁에서 사라져 간다. 그들은 체념하고, 혹은 절망하고, 혹은 

침묵하고(수도 꼭지를 비틀어도 이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져 

간다. 내 방에는 두 개의 문이 달려 있는데 하나가 입구이고 하나가 출구다, 

호환성은 없다. 입구로는 나갈 수가 없고, 출구로는 들어올 수가 없다. 그건 

뻔한 일이다.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간다. 어느 누구는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기 위해 나갔으며, 어느 누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나갔다. 

어느 누구는 죽었다. 남은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재를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 사라져 간 

삼들을. 그들이 입에 담은 말들이랑, 그들의 숨소리랑, 그들이 읊조린 노래가 

방의 이 구석 저 구석에 티끌처럼 떠돌고 있는 게 보인다. 그들이 본 나의 상은 

아마도 꽤 정확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나 

있는 데로 곧장 찾아와서는 , 그리곤 얼마 후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들은 내 

안의 성실함을 인정하고, 내가 그 성실함을 유지해 가려고  하는 내 나름의 

성실성-이 밖의 표현을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다-을 인정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고도 했으며, 마음을 열려고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마음 

착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지는 못했다. 가령 줄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 가능한 것은 전부 했다. 나도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잘 되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사라져 갔다. 

그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욱 괴로운 일은, 그들이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서글프게 방을 나가는 일이었다. 그들이 몸 안의 무엇인가를 한 

단계 마멸시켜 가지고 나가는 일이었다. 나로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묘한 

이야기지만, 나보다는 그들 쪽이 더 많이 마멸시킨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그럴까? 어째서 언제나 내가 남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언제나 내 

수중엔 마멸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럴까? 알 수 

없다.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무엇인가 결여돼 있는 것이다. 어느날 업무 협의를 하고 돌아와 보니, 우편함에 

그림 엽서가 들어 있었다. 우주 비행사가 우주복을 입고 달의 표면을 걷고 있는 

사진의 그림 엽서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써 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엽서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젠 우리는 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고 그녀는 적고 있었다.

 [ 저는 아마 가까운 장래에 지구인과 결혼하게 될 것 같으니까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데이터 부족으로 회답 불가능. 취소 키를 눌러 

주시오. 화면이 흐려진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제 서른네 살이다. 언제까지 이것이 계속될 것인가? 나는 

서글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책임인 것이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서도 

알고 있었고, 나로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조그마한 기적을 찾고도 

있었던 것이다. 하찮은 계기로 해서 근본적인 전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것을. 그러나 물론 그러한 것은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나가버렸다. 그녀가 없게 되어 나는 쓸쓸한 심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 쓸쓸함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쓸쓸함을 제법 잘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내장으로부터 검은 액체가 듬뿍 짜내어져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세면실 거울 앞에 서서, 이게 나 

자신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게 너다. 네가 너 자신을 마멸시켜 온 것이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너는 마멸된 것이다, 하고. 내 얼굴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지저분하고,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비누로 

천천히 얼굴을 씻고, 로션을 피부에 문지르고, 그 다음에 다시 손을 천천히 

씻고, 새 타월로 손과 얼굴을 말끔히 닦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캔맥주를 

마시면서 냉장고 정리를 했다. 시들어 빠진 토마토를 버리고, 맥주병들을 

가지런히 해놓고, 용기들을 바꾸어놓고, 사올 물건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새벽녘에 나는 혼자서 멍청하니 달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고 생각했다. 나는 이윽고 또 어디선가 다른 여자와 해후하게 될 게다. 

우리들은 유성처럼 자연스레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헛되이 

기적을 기대하며, 시간을 갉아먹으며, 마음을 마멸시키며, 헤어져 가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