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 거대한 개미무덤 같은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일을 얻는다는 것은
그다지 곤란한 작업이 아니다. 물론 그 일의 종류며 내용에 대해서 군소리만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사무실을 가지고 있을 무렵 편집 일과는 곧잘
관련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잘한 문장도 내 손으로 쓰곤 했었다. 그러한
업계의 관계자 몇몇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유기고가로서 나 한 사람 몫의
생활비를 벌어 들이는 것쯤은 뭐 간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원래 나는 그다지
생활비가 들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나는 예전의 수첩을 꺼내어 몇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내게 어떤 할 만한 일거리는 없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정상 얼마동안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가능하면 다시 일을 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다. 그들은 이내 몇 가지 일을 내게 제공해 주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개는 홍보용 잡지나 기업 팜플렛의 공백을 메우는 기사를
만드는 일이었다. 아주 겸손하게 말하면, 내가 쓰게 된 원고의 절반은 전혀
무의미해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그런 것이었다. 종이와 잉크 낭비.
하지만 나는 아무 생각도 않고, 거의 기계적으로 착착 성실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처음엔 업무량이 별 대수로운 것도 없었다. 하루 두 시간 가량 일을
하고, 나머지는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고 했었다. 꽤 많은 영화를 보았다. 3개월
가량 그런 식으로 나는 느슨하게 해나갔다. 일이야 어떻든, 얼마간은 사회와
관련을 갖고 있다 싶어서 나는 안도하는 심정을 가질 수 있었다. 내 주위의
상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가을로 접어든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업무
의뢰가 돌연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내 방 전화는 끊일 새 없이 울리고,
우편물의 양도 늘었다. 나는 업무 협의를 위해 숱한 사람과 만나고, 함께 식사를
했다. 그들은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일거리를
주겠노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일감의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았고,
돌아오는 일감은 닥치는 대로 떠맡았다. 기한 전에 제대로 완성해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글씨도 깨끗했다. 일 솜씨도 꼼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적당하게 할 것도 성실하게 했고, 대가가 낮아도 싫은 얼굴 빛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오전 두시 반에 전화가 걸려와서 어떻게든 여섯
시까지는 4백자 원고지 20장을 써 달라(아날로그 식 시계의 장점에 대하여, 또는
마흔 세살 여성의 매력에 대하여, 또는 헬싱키 도시-물론 가본 적은 없다.-의
아름다운에 대하여)는 그런 주문을 받으면, 틀림없이 다섯 시 반에는 해냈다.
고쳐 쓰라고 하면 여섯 시까지는 고쳐 썼다. 평판이 좋아지는 건 당연했다. 눈을
치우는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눈이 내리면 나는 그것을 효율성 있게 길 옆으로
치웠다. 치는 대로 거침없이 체계적으로 처리해 나갈 따름이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이건 인생의 낭비가 아니냐고 생각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종이와 잉크가 이만큼 낭비되고 있으니, 내 인생이 낭비되었다 해도 군소리를
할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우리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선 낭비가 최대의 미덕인 것이다.
정치가는 그것을 내수의 세련화라고 부른다. 나는 그것을 무의미한 낭비라고
부른다. 사고 방식의 차이다. 하지만 비록 사고 방식의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떻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인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방글라데시나 수단에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따로 방글라데시에도 수단에도
흥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일을 계속 했다. 그러는 동안 홍보지뿐
아니라, 일반 잡지 일의 의뢰도 오게끔 되었다. 웬일인지 여성지의 일이 많았다.
인터뷰 일이며, 사소한 취재 기사를 직접 쓰게끔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홍보지에 비교해 특별히 일거리로서 재미나다는 건 아니었다. 내가 인터뷰하는
상대는 잡지의 성격상, 태반이 예능인이었다.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보아도
도장을 찍은 듯 똑같은 대답밖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대답할지는
질문하기 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심할 때엔 먼저 매지저가 나를 불러 놓고는,
어떤 질문을 하겠느냐, 미리미리 알려 달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질문의 대답은 처음부터 전부 척척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그 열 일곱
살 짜리 여자 가수에 대해 정해진 이외의 질문을 하면, 옆에 있는 매니저가
[그런 건 이야기가 다르니까 잘 대답할 수가 없다]
하고 참견을 했다. 어이구, 이 여자아이는 매니저 없이는 10월의 다음은 몇
윌인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나는 때때로 진지하게 걱정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건 물론 인터뷰랄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되도록 면밀한 조사를 했고, 남이 좀처럼 하지 않을 그런 질문을 생각했다.
구성에 세밀하게 신경을 썼다. 그런 일을 한댔자 특별히 평가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서 따스한 말 한마디 들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열심히 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나로선 제일 편했기 때문이다. 자기 훈련.
얼마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손가락과 머리를 실제적인-그리고 되도록
무의미한-사물에 대해 혹사하는 일. 사회 복귀. 나는 그때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정기적인 일거리를 몇 가지인가 맡은
데다가, 불시에 뛰어드는 일거리도 많았다.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일거리는
반드시 내게로 돌아왔다. 문제점을 지닌 꽤 까다로운 일거리도 반드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 사회 속에서는 도시 변두리의 폐차장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떤 일의 형편이 잘못 되면, 모두 내게로 그것을 버리러 왔다.
누구나가 잠들어버린 으슥한 한밤에. 덕분에 나의 저금 통장의 숫자는 내가
그때까지 본 적도 없는 듯한 액수로 부풀어올랐으며, 너무나 바빠서 그것을
사용할 틈도 없었다. 스바루 레오네를 싼 값으로 양도받았다. 유행이 한물 간
모델이었지만, 별로 많은 거리는 주행하지 않았고, 카 스테레오와
에어컨디셔너까지 달려 있었다. 그런 것이 있는 차를 탄다는 건 난생 처음의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아파트는 도심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부야
근처로 이사를 했다. 창문 바로 앞이 고속도로라 얼마간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것만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어지간히 쓸 만한 아파트였다. 일 관계로 서로
알게 괸 몇몇 여자아이와 동침했다. 사회복귀. 나는 내가 어떤 여자아이와
동침하면 좋은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와 동침할 수 있으며 누구와
동침할 수 없는가도 알고 있었다. 누구와 동침해선 안 되는지도. 나이가 들면
그런 것을 자연히 알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어디가 끝낼 때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부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다. 아무도 상처받게 하지 않았고,
내쪽도 상처 받지 않았다. 저 조여 매는 듯한 마음의 떨림이 없을 뿐이었다.
내가 제일 깊이 관계한 것은, 예의 전화국에 근무하는 여자아이였다. 그녀와는
어딘가의 연말 파티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 둘이 다 술이 취해 있어서, 농담을
주고받고 의기투합해서, 내 아파트에 가서 동침했다. 그녀는 머리가 좋고 다리가
아주 예쁜 아이였다. 우리는 중고차 스바루를 타고, 여러 곳으로 드라이브도
갔다. 그녀는 마음이 내킬 때에 나에게 전화를 걸고선, 자러 가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처럼 한 걸음 나간 관계가 된 상대는 그녀뿐이었다. 그런 관계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의
어떤 종류의 유예 기간 비슷한 것을, 우리는 둘이서 조용히 공유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오랜만에 마음 편안한 나날이었다. 우리는 다정하게 서로 껴안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요리를 만들고, 생일에는 선물을
교환했다. 우리는 재즈클럽에 가서 칵테일을 마셨다. 우리는 말다툼도 한 번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끝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사라져 갔다는 것은 내속에 예상
이상의 상실감을 가겨왔다. 얼마 동안은,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모두가 차례차례 사라져가고,
나만이 연장된 유예 기간 속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인생. 하지만 그것이 내가 공허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마음 밑바닥으로부터는 그녀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그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녀와 둘이
있으면, 나는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온순한 기분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는 그녀를 요구하고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귀,
나는 그 사실을 명백히 인식했다. 그렇지, 결국은 그녀의 옆에 있으면서도 나는
달 위에 있었던 것이다. 옆구리에 그녀의 젖무덤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내가
짐심으로 구하고 있었던 것은 좀도 다른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나는 4년이
걸려 어떻게든 나 스스로의 존재의 평행성을 되찾았다. 나는 주어진 일을 하나
하나 착착 처리해 왔고, 사람들은 나에게 신뢰감을 가져 주었다. 그토록 많지는
않았다 해도, 몇몇 사람은 내게 호의 비슷한 것을 가져 주었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것만 가지고선 모자랐던 것이다. 전혀 모자랐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시간을 들여서 겨우 출발점에 되돌아와 섰을 뿐인 것이다. 서른 넷이 되어
나는 다시금 출발점에 되돌아온 셈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은가? 생각할 것까지도 없었다. 무엇을 하면 좋은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결론은 훨씬 전부터 딱딱한 구름처럼 내 머리 위에
빠끔하게 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만 실천으로 옮길 결심을 할 수가 없어서,
하루 또 하루하고 미루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루카 호텔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출발점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그녀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이루카 호텔로 이끈, 그 고급 창녀 여자아이를. 왜냐하면 키키는 지금 내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그녀는 이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임시 변통의 이름이었다 해도 그렇다. 그녀의 이름은 키키라고
한다. 나는 그 이름을 뒤에 가서 알게 된다. 그 사정은 뒤에 가서 자세히
쓰겠지만, 나는 이 단계에서 그녀에게 그 이름을 부여키로 한다. 그녀는 키키인
것이다. 적어도, 어떤 기묘한 좁은 세계 속에서 그녀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키키가 출발점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다시 한
번 이 방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 나가버린 자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이 방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떻든 해보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짐들을 정리하고, 우선 급한 대로 마감이 절박해 있던
일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해 버렸다. 그리고 예정표에 써 있던 일들을 전부
취소했다.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 사정으로 아무래도 산 달간 도쿄를
떠나있게 되었다, 하고 말했다. 몇몇 편집자는 투덜투덜 불평을 말했지만, 내가
그런 짓을 하는 건 이것이 처음이었고, 일정도 아직 훨씬 앞의 일이었으므로,
그들로서도 이제부터라면 어떻게든 손을 쓸 방법은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다들
양해해 주었다. 한 달 후에도 어김없이 돌아와 다시 일을 할 테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를 타고 홋카이도로 향했다. 1983년 3월 초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그 전장 이탈은 한 달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