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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예전의 공동 경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수화기에 나와서 내 이름을 묻고는 다시 다른 사람이 나와서 내 이름을 묻고,
그러고나서야 겨우 그가 나왔다. 바쁜 것 같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건 거의
1년 만이었다. 그를 의식적으로 회피했던 건 아니다. 다만 단순히 이야기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대해 줄곧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결국 그는 나에게 있어선(그리고 나는 그에게
있어선) <이미 통과해버린 영역>에 속해 있었다. 내가 그를 거기에 밀어 넣은
건 아니다. 그가 스스로 거기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고, 그 두 갈래 길은 웬만해선 교차하지 않았다. 그것뿐이었다.
건강한가, 하고 그가 물었다. 건강해,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 삿포로에 와
있다고 하자 춥지 않느냐고 그는 물었다. 춥다고 나는 대답했다. 하는 일은
어떠냐고 나는 물었다. 너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나는 말했다. 요즘은 별로
마시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쪽은 지금 눈이 내리고 있는가 하고 그는
물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한바탕 그런 예의
바른 주고 받기가 있었다.
[그건 그렇고 좀 부탁할게 있어]
하고 나는 말을 꺼냈다. 나는 훨씬 이전에 그에게 한 가지 빌려준게 있었다.
그도 그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고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렇게 늘
남에게 부탁 같은 것을 하는 인간은 아닌 것이다.
[좋아]
하고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예전에 함께 업계 기관지에 관계된 일을 한 적이 있었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한 5년 전 일인데 말이야, 기억하나?]
[기억하고 있어.]
[그 관계의 라인은 아직 살아 있는가?]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별로 활발하다곤 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건 살아 있어.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거기에 한 사람, 왜 업계의 이면에 굉장히 소상한 기자가 있었잖은가. 이름은
잊었지만. 그 마르고, 항상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던 남자. 그와 연결될 수
있을까?]
[아마 할 수 있겠지. 그래 무엇을 알고 싶나?]
나는 그에게 돌핀 호텔의 스캔들 기사에 관해 대충 이야기했다. 그는 주간지
이름과 발매 날짜를 메모했다. 그리곤 대 돌핀 호텔이 생기기 전에 거기에
있었던 소 돌핀 호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고
했다. 우선, 왜 새로운 호텔이 <돌핀 호텔>이라는 이름을 인계했는가? 그리고
소 돌핀 호텔의 경영자는 어떠한 운명을 더듬었는가? 스캔들은 그후 어떠한
진전을 보였는가? 그는 그것들을 전부 메모하고는 전화통 앞에게 읽어내렸다.
[이거면 되나?]
[그거면 돼]
하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급할 테지?]
하고 그가 물었다.
[미안 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연락을 취하도록 해보겠어. 그쪽 전화번호를 알려
주게.]
나는 호텔의 전화번호와 룸 넘버를 알려 줬다.
[그럼, 뒤에]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호텔의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했다. 로비에 내려와 보니, 카운터에 예의 그 안경을 쓴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는 로비의 구석쪽 의자에 앉아서 얼마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쁜 듯이 일하고 있었고, 나의 존재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알아채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느 쪽이건
상관 없었다. 나는 다만 그녀의 모습을 잠깐 보고 싶었을 뿐인 것이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저 아이와 함께 자려고 생각했으면 잘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용기를 갖게 할 필요가 있었다. 10분 가량 그녀를
바라보고 엘리베이터로 15층까지 올라가 방에서 책을 읽었다. 오늘도 하늘은
잔뜩 흐려 어둠침침해 있었다. 아주 조금만 햇빛이 비치는 종이상자 속에서
지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몰라 밖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았고, 방안에 있으면 책을 읽는 정도밖엔 할 일도 없었다. 잭 런던의
전기를 마지막까지 읽어버리고는 스페인 전쟁에 관한 책을 읽었다. 길게 길게
늘어진 저녁녘 같은 하루였다. 늦추고 당기고 하는게 없다. 창밖의 잿빛에
조금씩 검정이 섞여들더니 이윽고 밤이 되었다. 음울함의 질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었다. 세계에는 두 가지 색깔밖엔 색깔이 존재하지 않았다. 회색과 흑색.
그것이 일정 시간을 두고 왔다갔다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나는 룸 서비스에게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샌드위치를 한 개씩 천천히 먹고,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 마셨다. 맥주도 역시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할 일이 없으면
여러 가지 일을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하게끔 된다. 일곱 시간만에 공동
경영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연락이 됐어> 하고 그는 말했다.
[힘들었지?]
[그럭저럭]
하고 그는 좀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아마도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대충 간단하게 알려 주지. 우선 첫째로, 이 문제는 이젠 완전히 뚜껑이 닫혀
버린 상태야. 뚜껑이 닫히고 끈으로 묶여 금고 속에 들어가 있지. 아무도 이젠
다시 파헤치려 하지 않아. 끝난거야. 스캔들은 이젠 존재하지 않는거야. 정부
부서든가 시청에서 2,3명 드러나지 않는 인사 이동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대수로운 건 없어. 아주 작은 조정 같은 거지. 그 이상은 아무도 접촉할
수가 없어. 검찰청도 약간은 움직였지만, 확실한건 아무것도 잡지 못했어. 여러
가지로 까다로운 줄이 얽혀 있어. 다루기 어려운 거야. 그래서 알아내기가
어지간히 힘들었어.]
[이건 개인적인 일이고 누구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겠어.]
[상대에게도 그렇게 말해 뒀어.]
나는 수화기를 든 채 냉장고까지 가서 맥주를 꺼내. 한 손으로 마개를 열고 한
손으로 컵에 맥주를 따랐다.
[하지만 집요한 것 같은데, 섣불리 손을 내밀었다간 다친다구]
하고 그는 말했다.
[이건 굉장히 큼 사건이야. 어째서 자네가 이런 일에 물렸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깊이 빠져들지 않는게 좋겠어. 사정은 있겠지만 좀도 조용하게 신분에
걸맞는 인생을 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나처럼이라고까진 말하지 않겠지만.]
[알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기침을 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예전의 돌핀 호텔은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을 당했지. 깨끗하게 물러섰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러질 않았어. 대세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야.]
[그런 타입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흐름을 깨닫지 못한 거야.]
[여러 가지 몹쓸 일을 당했지. 예컨대 폭력배가 몇 명인가 호텔에 줄곧
묵어대면서 하고 싶은 짓은 다 했어. 법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이를테면 겁을
주는 친구가 로비에 늘 앉아 있다가 누가 들어오면 노려보는 거야. 알겠지,
그런거? 하지만 호텔측은 웬만해선 까딱도 하지 않았지.]
[알 만하군]
하고 나는 말했다. 이루카 호텔의 지배인은 온갖 인생의 불행에 길들여져 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최후에 가서 돌핀 호텔은 기묘한 조건을 내놓았어. 그리고 그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물러서겠다고 말했지. 상상해 보라구, 어떤 조건인지?]
[모르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생각해 보라니까. 조금쯤은]
하고 그는 말했다.
[그건 자네의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되는 것이니까.]
[돌핀 호텔이라는 이름을 인계한다는 조건?]
[나쁜 이름은 아니니까. 안 그래? 돌핀 호텔 나쁜 이름은 아냐.]
[글세 그렇군]
하고 나는 말했다.
[게다가 에이 그룹은 새로운 호텔 체인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야, 때마침. 이제까지의 중상급의 체인이 아닌 최고급의 체인을
말이야, 그리고 그 이름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지.]
[돌핀 호텔체인]
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그렇지. 힐튼이라든가, 하아야트라든가에 필적하는 고급의 체인이야.]
[돌핀 호텔 체인]
하고 나는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인계되고, 확대된 꿈.
[그래서 예전의 돌핀 호텔의 경영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건 아무도 모르지]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맥주를 또 한 모금 마시고, 볼펜으로 귓불을 긁었다.
[나갈 때에 아무튼 상당한 돈을 얻었으니까 그걸로 무엇인가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알아볼 길이 없어. 통행인 같은 구실만 하는 인물이니까.]
[으음, 그렇겠지]
하고 나는 수긍했다.
[대략 그런 정도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것만을 알았어. 그 이상은 알 수 없었어. 됐는가?]
[고마워. 큰 도움이 됐어]
하고 나는 감사를 표했다.
[응]
하고 그는 다시 기침을 했다.
[돈을 썼나?]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아니]
하고 그는 말했다.
[한번 밥을 먹이고, 긴자의 클럽에나 데리고 가서, 소개비를 주는 정도면
되겠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전부 경비로 빠지니까. 무엇이건
경비에서 빠지거든. 회계사도 좀더 경비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야. 그러니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만일 긴자의 클럽에 가고 싶다면 이번에 한번
데리고 가지. 경비로 빠지니까. 어차피 가본 적이 없을 테지?]
[술이 있고, 여자가 있지]
하고 그는 말했다.
[저번에 갔어]
하고 그는 신통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난 다음에, 나는 공동 경영자에 대해 좀 생각해 보았다. 나와 같은
나이로 이미 배가 나오기 시작한 사내. 책상에 몇 종류나 약을 넣어두고, 선거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내. 아이들의 학교에 대해 골치를 앓으며, 노상 부부
싸움을 하며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가정을 사랑하고 있는 사내. 심약한 데가
있고, 때때로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어김없이 착실한
일을 하는 사내. 여러 가지 의미에서 건실한 사내. 우리는 대학을 나와서부터
콤비가 되어 오랫동안 잘 해왔다. 작은 번역 사무실로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일의 규모를 확장해 갔다. 우리는 애초부터 그다지 친근한 친구랄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마음이 맞는 데가 있었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말다툼 한번 한적이 없었다. 그는 좋은 환경에서 자란 온화한 사람이었으며,
나는 또한 말다툼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소의 차이야 있었지만 서로 존경하면서
함께 일을 계속해 왔었다. 하지만 결국은 우리는 가장 좋은 시기에 헤어졌던
것이다. 내가 갑작스럽게 그만두고 나서도 그는 나 없이도 제법 잘 하고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없어진 뒤로 오히려 잘 하고 있었다. 일의 업적도 순조롭게
신장되고 있었다. 회사도 커졌다. 새로이 사람을 써서 그들을 잘 부리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혼자가 되면서부터 오히려 안정돼 있었다. 아마도 내 쪽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 속의 무엇인가가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건전치는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없어지고 나서부터
오히려 훨씬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치켜 세우고 달래고 하면서
사람을 제법 잘 부렸고, 경리 보는 여자아이에게 쓰잘 데 없는 농담도 하고,
하잘 것 없다 싶으면서도 한껏 경비를 쓰고, 누군가를 긴자의 클럽으로 데리고
가서 접대도 한다. 가령 나와 함께 있었다면, 그는 긴장해서 그런 일을 순순히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늘 내 눈을 의식하고 이런 걸 하면 내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내인 것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가 내 옆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별로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지만. 그
친구는 혼자가 되어서 오히려 잘 된 것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요컨대 그는 내가 없어짐으로써, 그 연륜에 상응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륜상응]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연륜상응]
하고 입밖에 내어 말해 보았다. 입밖에 내고 보니, 그건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홉시에 다시 한번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가 걸려올 만한 데는 전혀
없었고, 당초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음향인지는 잘알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였다. 나는 네 번째 벨소리에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선생님, 오늘 로비에서 저를 말끄러미 보고 있었죠?]
하고 프런트의 여자아이가 말했다. 목소리로 보아 별로 화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가워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였다.
[보고 있었지]
하고 나는 수긍했다.
[일할 때에 그런 식으로 보고 있으면 긴장해요, 전, 굉장히. 덕분에 잔뜩
실수했어요. 선생님이 보고 있는 동안에.]
[이젠 안 보지]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스스로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아가씨를 보고 있었어. 그렇게까지
아가씨가 긴장할 줄은 몰랐어. 이제부턴 조심해서 보지 않도록 하겠어. 지금
어디에 있지?]
[집이에요. 이제부터 목욕을 하고 잠을 잘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숙박을 연기했나 보죠?]
[응. 볼일이 좀 연장돼서]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식으로 날 바라보거나 하지 말아요. 그런 일 당하면
곤란해요.]
[이젠 보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 나 좀 너무 긴장해 있는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글세, 모르겠는데. 그런 건 개인차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누구나
타인이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많건 적건 긴장하는 게 아닐까. 특별히 신경 쓸
건 없어. 그리고 난 가끔씩 무의식적으로 무엇을 너무 물끄러미 응시하는
경향이 있어. 여러 가지를 물끄러미 보는 거야.]
[어째서 그런 경향이 있죠?]
[경향이라는 건 설명하기가 어렵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서 안 보도록 하겠어. 하는 일을 실수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녀는 내가 한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잘 자요]
하고 나는 말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목욕을 하고 열한 시 반까지 소파에서
책을 읽었다. 그 뒤 옷을 입고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긴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았다. 현관의 제일 끝 깊숙한 곳에 종업원용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종업원용 엘리베이터는 대개 일반객의 눈에는 띄지 않게
끔 되어 있었지만 감추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비상 계단이라는 화살표 쪽으로
걸어갔더니 객실 번호가 없는 문이 몇몇 줄서 있고, 그 한 모퉁이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숙박객이 잘못해서 타지 않도록 <하물 전용>이라는
팻말이걸려 있었다. 나는 얼마동안 그 앞에서 상황을 엿보고 있었지만,
엘리베이터는 내내 아래층에 머물러 있는 채였다. 이 시각에는 이미 이용자가
거의 없는 것이다. 천장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직히 흐르고 있었다. 폴
모리아의 <사랑은 물빛>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보았다.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문득 잠이 깬 듯 그 고개를 치켜들고 위로 올라왔다. 층
표시의 디지털 숫자가 1, 2, 3, 4, 5, 6, 그렇게 상승했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것은 접근해 왔다. 나는 <사랑은 물빛>을 들으면서 그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 누군가 있으면 숙박객용 엘리베이터와 오인했다고 하면
된다. 호텔 숙박객이란 어차피 노상 오인만 하기가 일쑤이니까. 11, 12, 13, 14,
그렇게 그것은 상승했다.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포켓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15라는 데서 숫자의 상승은 머물렀다. 그리고 일순의
틈이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문이 쓰윽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굉장히 조용한 엘리베이터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저 천식환자
같은 예전의 이루카 호텔의 엘리베이터와는 너무도 다르다. 나는 안에 들어서서
16버튼을 눌렀다. 문이 소리도 없이 닫히고 희미한 이동의 감각이 있고, 다시
문이 열렸다. 16층이었다. 하지만 16층은 그녀가 말하던 것 같은 암흑은
아니었다. 제법 불빛이 켜있고 천장에서는 여전히 <사랑은 물빛>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는 시험삼아 16층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았다. 16층은 15층과 꼭 같은 구조였다. 복도는 꼬불꼬불 구부러졌고,
어디까지나 객실이 계속되고, 그 사이에 자동판매기를 모아놓은 공간이 있고, 몇
대인가 숙박객용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문 앞에 룸서비스한 저녁 식사의 접시가
몇몇 내놓인 채로였다. 카펫은 짙은 적색이고, 부드럽고 양질이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음악이 퍼시 페이스
오케스트라의 <여름날의 사랑>으로 바뀌었다. 나는 끝까지 걸어가선 중간까지
되돌아와 숙박객용 엘리베이터로 15층에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은
일을 되풀이해 보았다. 종업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16층에 올라가 여전히
불빛 환한 지극히 당연한 플로어를 앞에 했다. <여름날의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단념하고 다시 15층으로 내려와 브랜디를 두 모금 마시고 잠을
청했다. 날이 밝자 검정빛이 잿빛으로 변화해 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무얼 하면 좋을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ㅡ여전히. 나는 눈 속을 던킨 도너츠까지 걸어가서 도너츠를 먹고, 커피
두 잔을 마시고, 신문을 읽었다. 신문에는 선거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영화관에는
여전히 보고 싶은 영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꼭 한편, 나의 중학교 때의
동급생이 배우가 되어 조역으로 출연한 영화가 있었다. <짝사랑>이란 타이틀의
청춘 영화로, 한창 인기 상승의 두상 가수가 공연하는 청춘물이었다. 나의
예전의 동급생이 어떤 역을 맡아 할 것인지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예상할 수가
있었다. 근사하게 생기고 젊고 이해심이 많은 선생역을 하는 것이다. 늘씬하게
키도 크고, 스포츠도 만능이고, 여학생들은 이름을 불리우기만 해도 실신
하리만큼 그를 동경하고 있다. 그런데 그 주역의 여자아이 역시 그를 동경하고
있다. 그래서 일요일에 쿠키를 만들어 선생의 아파트로 갖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극히 보통의, 좀 마음이 약한
남자아이... 아마 그런 줄거리일 게다. 생각하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배우가 되고서 얼마동안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몇 편인가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그러다가 전혀 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어느
영화나 영화로서 전혀 재마가 없었고, 그는 언제나 도장을 찍은 것처럼 똑같은
역할밖엔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사하게 생기고, 스포츠에 만능이고,
청결하고, 다리가 긴 역할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대학생 역이 많았고, 그 다음에
선생이라든지 의사라든지 젊은 엘리트 샐러리맨이라든지 하는 역이 많아졌다.
하지만 맡는 역은 언제나 똑같았다. 여자아이들이 그를 동경해서 소동을 부리는
역인 것이다. 이가 깨끗해서, 방긋 웃으면 내가 보아도 인상이 깊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뭐페리니라든지
탈코프스키 같은 것밖엔 보지 않는다는 그런 진지하고 속물근성 있는 영화팬은
아니지만, 그가 나오는 영화는 너무나 보잘것이 없었다. 줄거리는 뻔한데다가
대화도 진부하고 돈도 들이지 않아서, 감독도 포기하고 만 것 같은 작업을 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배우가 되기 전부터 참으로 그러한
타입의 사내였다. 인상은 좋다. 그러나 실체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5년간 그와 같은 학급이었다. 실험실에서는 같은 테이블을 사용했었다.
그래서 가끔씩 이야기도 했다. 예전부터 꼭 영화 그대로 묘하게 인상이 좋은
사내였다. 여자아이에게 이야기를 걸면, 다들 황홀해하는 눈매를 했다. 과학실험
때에도, 여자아이들은 다들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그에게 물었다. 그가 제법 우아한 손놀림으로 가스 버너에 불을 켜면, 다들
올림픽의 개회식이라도 보는 눈매로 그를 보고 있곤 했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건 누구 한 사람 알아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성적도 좋았다.
언제나 반에서 1등 아니면 2등이었다. 친절하고, 성실하고 , 건방진 구석이 전혀
없었다. 어떤 옷을 입건 청결하고 깔끔해서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을 때 조차 품위 있었다. 소변을 보고 있는 모양새가
기품있어 보이는 사내란 좀처럼 없다. 물론 스포츠도 만능이었고, 학급
위원으로서도 유능했다. 학급에서 제일 인기가 있는 여자아이와 사이가 좋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선생도 그에게 열중했고,
부모들의 참관일이 있으면 어머니들이 다들 그에게 열중했다. 그런 타입의
사내였다. 하지만 나는 도통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통 알 수가 없었다.
영화와 꼭 같았다. 그런 영화를 이제 새삼스레 돈을 들여 보러 갈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신문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눈 속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로비를 지날 때에 프런트 쪽을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휴식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비디오게임이 있는 코너에 가서 팩맨과 갤럭시를 몇
게임씩 했다. 잘 돼 있긴 하나 신경질적인 게임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호전적이다. 하지만 소일거리는 된다. 그리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쓰잘 데 없는 하루였다. 책읽기가 싫증나자 창 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하루종일 계속 내렸다. 아니 이토록 눈이 잘도 내려 쌓이는 구나, 하고 감탄할
만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열두 시가 되자 호텔의 카페테리아로 가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방에 돌아와 책을 읽고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혀 쓰잘 데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침대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네
시에 노크 소리가 났다. 열어보니 그녀가 서 있지 않는가. 안경을 쓰고 라이트
블루의 블레이저 코트를 걸친 프런트의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조금 열린 문
사이로 납작한 그림자나 되는 것처럼 쓰윽 방안에 들어서더니 잽싸게 문을
닫았다. <이런 걸 들키면, 나 모가지예요. 이 호텔은 그런 일에 굉장히
엄격하거든요>하고 그녀는 밀했다. 그녀는 한번 주욱 방안을 둘러보고는 소파에
앉더니 스커트의 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그리곤 한번 숨을 쉬었다.
[휴식 시간이에요, 지금]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뭐 좀 마시겠어? 난 맥주를 마시겠어.]
[괜찮아요. 별로 시간이 없어요. 저, 선생님은 방안에 틀어박혀서 하루종일 무얼
해요? 특별히 하는게 없어. 시간만 보내고 있지. 책도 읽고 눈도 보고 하면서]
하고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컵에 따르면서 말했다.
[무슨 책?]
[스페인 전쟁에 관한 책. 시작에서부터 끝나기까지 소상히 써있어. 여러 가지
시사하는게 많아.]
스페인 전쟁이라는 건 정말 여러 가지 시사를 많이 담고 있는 전쟁인 것이다.
옛날엔 제법 그러한 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보세요, 이상하게 생각지 말아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상하게?]
하고 나는 되물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다니, 말하자면 아가씨가 여기 왔다는 데 대해서?]
[네.]
나는 컵을 들고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이상하게는 생각지 않아. 좀 놀라긴 했지만, 와 줘서 기뻐. 따분하기도 했고,
이야기 상대도 필요했거든.]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서더니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소리도 없이 쓰윽 벗고는,
주름이 집히지 않게끔 라이팅 데스크의 의자등에다가 걸었다. 그리곤 걸어서 내
곁으로 오더니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앉았다. 상의를 벗고 나니, 그녀는 어딘지
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여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하얀 블라우스는 말끔하게 다림질해 있었다. 한 5분 정도를
그녀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은 채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눈이 거리의 음향을 빨아들이면서 언제까지나 내리고 있었다.
음향이라는게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쳐 있어서 어디선가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나는 받침대 같은 것이다. 나는 그녀가 지쳐
있다는 데에 대해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처럼 젊고 예쁜 여자아이가
그렇게 지친다는 건 불합리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합리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았다. 피로라는 것은
미추나 연령과는 관계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나 지진이나 벼락이나
홍수처럼. 5분이 지나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내 곁에서 떨어지더니 윗도리를
집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윗도리를 걸치자 그녀는 다시 좀 긴장해서
서먹서먹해서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그 16층에서 이상한 일을 당했을 때의 그것 말인데]
하고 나는 물었다.
[그때 무슨 보통 때와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나?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이나
타고나서?]
그녀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하는 듯했다.
[글쎄요. 어쨌던가? 별로 다른 일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아요.]
[뭐 여느 때와는 다른 이상한 조짐 같은 건 없었어?]
[보통이었어요]
하고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상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주 보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어
문이 열리자 캄캄절벽이었어요. 그것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오늘 어디서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안 됐지만, 오늘은 좀 약속이 있어서요.]
[내일은 어때?]
[내일은 수영 학교에 가요.]
[수영 학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고대 이집트에도 수영 학교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 거 몰라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거짓말이죠?]
[정말이야. 내가 하는 일 관계로 한 번 자료를 조사해본 적이 있거든]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정말이라고 해서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
[고마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이 쓰윽 밖으로
나갔다. 그것이 그날의 유일한 쓸 만한 일이었다. 하찮은 일이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사람들조차 나날의 하찮은 사건에서 기쁨을 찾아내면서 하찮은 인생을
보내고, 그리곤 죽어가지 않았던가. 수영을 배우기도 하고, 미라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쌓여 온 것을 사람들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