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36)

  15

  나는 영화관 좌석에 깊숙히 몸을 묻고 코 앞에서 양 손의 손가락을 깍지

 끼고 여느 때와 꼭 같은 질문을 나 자신을  향해 했다. 그럼, 이제부터 어

 떻게 하면 좋은가?

  언제나의 질문.  하지만 침착하게 앉아서 차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해야 할 일. 

  연결의 혼란을 해소할 것. 

  확실히 무엇인가 혼란되어 있다.  그건 틀림이 없다. 키키와 나와 고혼다

 가 서로 얽혀 있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

 지만, 아무튼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풀어 헤쳐 놓지 않으면 안  된다. 현

 실성의 회복을 통한 자기 회복. 어쩌면 이것은 연결의 혼란이 아니라 그것

 과는 관계없이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연결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든 나로서는 이  선을 더듬어갈 수밖엔 없을 거 같다.  이 실

 이 끊기지 않게끔 주의 깊게 더듬어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실마리인 것

 이다. 어떻든 움직일 것. 멈춰서지 말 것. 계속 춤을 출 것. 모두가 감탄할 

 만큼 잘 출 것. 

  춤을 추는 거야, 하고 양사나이가 말한다. 

  춤을 추는 거야, 하고 사고가 메아리친다. 

  어떻든간에 도쿄로 돌아가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이상 여기에 있어

 도 별 수 없다. 내가 이루카 호텔을 방문한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했다. 

 도쿄로 돌아갈 태세를 바로잡고 그 이음새를 끌어당겨 보자.  나는 코트의 

 지퍼를 올리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머플러를 코 위까지  뚤뚤 말아

 감고 영화관을 나섰다. 눈은 더욱더 심하게  내려, 앞도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거리 전체가 냉동된 사체처럼 절망적으로 굳게 얼어붙어 있었

 다. 

  나는 호텔에 돌아오자 전화를 걸어 오후 제1번 하네다행을 예약했다. 

  "눈이 심해서, 직전에  사서 혹 늦어지거나 결항하게 될지도 모릅니다만, 

 좋으신지요?"하고 예약 담당의 여성이 말했다.  괜찮다고 나는 말했다. 돌

 아가리라고 결정했으니 한시 빨리  도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짐을 꾸리고 아래로 내려와서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카운터에 가서 

 안경을 낀 그녀를 렌트카의 데스크로 불렀다. 

  "갑작스레 용건이 생겨서,  도쿄로 돌아가게 됐어" 하고 나는  서둘러 말

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하고  그녀는 영업적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갑작스레 돌아가겠다고  발설함으로써 

그녀는 좀 상처를 입었으리라고 나는 느꼈다. 상처 입기 쉬운 것이다. 

  "저어" 하고 나는  말했다. "또 올 거야. 가까운 시일  안에, 그때 둘이서 

천천히 식사라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자구, 아가씨에게  확실히 이

야기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도쿄로 가서 여러 가지  일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돼. 단계적 사고.  전향적인 자세. 종합적 전망. 그런 것

들이 내게 요구되고 있어. 그런  것들이 끝나면 다시 여기로 오겠어. 몇 개

월이 걸릴지도 몰라.  하지만 어김없이 돌아오겠어. 왜냐하면, 여기는  나에

겐... 즉 뭐라고 할까, 특별한 장소인 것만  같기 때문이야. 그러니 조만간에 

여기로 돌아오겠어."

  "흐흥" 하고 그녀는 부정적으로 말했다. 

  "흐흥" 하고 나는 긍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마도 내가 하는 말은 바

보스럽게 들리겠지."

  "그렇지는 않아요." 하고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몇 개월이  될지도 

모르는 앞 일이 잘 생각나지 않을 뿐예요."

  "그렇게 먼 일은 아닐  거야. 또 만난다구. 나와 아가씨 사이에는 무엇인

지 상통하는  데가 있으니까" 하고  나는 그녀를 설득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설득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지 않아?" 하고  나는 물었

다. 

  그녀는 볼펜 머리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을 뿐, 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비행기로 돌아가나요, 갑자기"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럴 작정이야. 날아 주기만 한다면 말야. 하지만 이런 날씨여서 어떻게 

될지 확실한 건 알 수 없어."

  "다음 비행기로  돌아간다면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들어주겠어

요?"

  "물론."

  "실은 열세 살의  여자아이가 혼자서 도쿄로 돌아가야만  해요. 어머니가 

용건이 생겨서 먼저 어딘가로 가버렸어요. 그래서 그 아이  혼자서 이 호텔

에 남겨졌어요. 미안하지만, 그 아이를 고이 도쿄까지 데리고 가 주지 않을

래요" 짐도 제법 있고, 혼자서 비행기를 태우는 것도 걱정되고."

  "잘 모르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어머니가 아이를 혼자 내동댕이치고 어딘가로 가버린거야? 그건 

경우에 어긋나잖 아."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니까  엉망인 사람이죠. 유명한 여성 사진

작가라지만, 좀 이상한 사람이예요.  아이 일은 잊어버리고. 그래요, 예술가

라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그걸로 머리가 꽉 차버린다지 뭐예요. 나중에 생각

이 나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어요. 아이를 거기에 두고 왔으니, 적당

히 비행기에 태워서 도쿄로 돌려보내 달라구요."

  "그런 건 자신이 하면 되잖아."

  "그런 건 난 몰라요. 어쨌든 앞으로 1주일, 일 때문에 아무래도 카트만두

에 있어야 한다면서요. 게다가 그 사람 유명한 사람이고  우리 호텔의 고객

이기도 해서, 그렇게 함부로  할 수도 없거든요. 그녀는 공항까지만 데려다 

주면 그 다음은 혼자서  돌아갈 수 있다고 마음 편한 소리를  하지만, 그렇

게도 할 수 없잖아요?  여자아이겠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저도  굉

장히 곤란해져요. 책임 문제도 있고."

  "맙소사"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나서 나는 문득 생각난  것을 말해보

았다. "으음, 그  아이 어쩌면 머리칼이 길고,  록 가수의 트레이너를 입고, 

워크맨을 늘 듣는 여자아이 아닌가?"

  "그래요. 아니, 잘 알고 있잖아요."

  "맙소사"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항공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나와 같은 항공편의 좌석을 예약했

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의 방에 전화를 걸어, 함께 돌아갈 사람을 찾았으니

까, 짐들을 꾸려 곧  내려오라고 말했다. 걱정 마, 잘 알고 있는  확실한 사

람이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다시 보이를 불러, 그녀의  방으로 

짐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곤  호텔을 서비스 리무진을 불렀다. 쾌활하고 아

주 솜씨가 좋았다. 유능했다. 아주 솜씨가 좋은데,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일이 좋다고 했잖아요. 취향에 맞아요."

  "하지만, 야유를 받으며 흥분을 하던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또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건 또 별개예요. 농담 

받거나 야유를 받는 거, 별로 좋지가 않아요. 예전부터,  그런 일 당하면 굉

장히 긴장해요, 난."

  "저어, 아가씨를 긴장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반대

야. 난 좀더 여유를 갖게  하고 싶어서 농담을 하는 거야. 쓸데없고 무의미

한 농담일지도 모르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노력해서 농담을 하는 거야. 물

론 때에 따라선 나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상대가 재미있어 하지 않는 수도 

있어. 하지만 별로  악의는 없어. 뭐 아가씨에 대해 웃고  있는 건 전혀 아

냐. 내가 농담을 하는 건 나로선 그런게 필요하기 때문이야."

  그녀는 약간 입술을 오무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덕 위에 올

라서서 홍수가 물러간  흔적을 바라보는 그런 눈매였다. 그리고 그녀는  한

숨을 쉬는 듯한, 콧소리를 내는 듯한, 복잡한 소리를 내었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 명함 주실 수 없어요? 한 여자아이를 맡긴 체면상 하는 말인데요."

  "체면상" 하고 나는 우물거리면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

네주었다. 나는 명함쯤은 갖고 있다. 응당 명함쯤은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

고 12명쯤 되는  사람에게 충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걸레라도  보는 

눈으로 말끄러미 그 명함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 이름은?"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다시 만날 때에 알려 드릴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가운데 손

가락으로 안경 다리를 만졌다. "만일 만나게 된다면."

  "물론 만나게 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초생달처럼 담담하고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10분 후에 여자아이가 보이와 함께 로비로 내려왔다.  보이는 샘소나이트

의 커다란  슈트게이스를 들고 있었다. 독일산  세퍼트가 선 채로 한  마리 

들어갈 만한 커다란  슈트케이스였다. 확실히 이런 물건을 열세 살의  여자

아이에게 들려서 공항에 내동댕이칠 수는 없었다. 

  그 여자아이는 오늘을 '토킹 헤드'라고 쓰인 트레이너  셔츠을 입고, 통좁

은 블루진과 부츠를 신고,  그 위에 고급스러운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전에 본 것과 똑같이 그 여자아이에게서는 투명하리 만큼 기묘한 아름다움

이 느껴졌다. 아주 미묘한-내일 사라져도 우습지 않을 것만 같은-아름다움

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보는 자에게 어떤 종류의 불안정한  감정을 

일으키게 할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일 

것이다. "토킹 헤드즈"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은 밴드 이름이었

다. 케라웍의 소설 한 구절과 비슷한 이름이었다. 

  "이야기를 건네는  머리가 내 곁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몹시 

소변이 마려웠다. 소변을 보고 오마고 나는 '이야기를  건네는 머리'에게 말

했다."

  반가운 케라웍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여자아이는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생긋 웃지도 않았다. 

눈썹을 찌푸리듯 하고 나를 보고, 그리곤 안경을 낀 여자아이를 보았다. 

  "괜찮아.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겉보기 만큼 나쁘진 않아" 하고 나는 덧붙였다. 

  여자아이는 다시 나를 보았다. 그리곤 뭐 할 수 없지, 하는 듯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할 입장은 아니야, 하는  듯이. 그래서 나는  그녀에 

대해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스크루지 영감님. 

  "걱정하지 마. 괜찮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  아저씬 농담도 잘하고, 

재치 있는 말도  해 주고, 여자아이에겐 친절해. 게다가 이  언니의 친구야. 

그러니 괜찮아, 그렇지?"

  "아저씨 아냐. 아직 서른 넷이야. 아저씨라니 너무 지독하군."

  하지만 아무도 내가 하는  말 같은 건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아

이의 손을 잡고 멈춰선 리무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보이는 샘

소나이트를 벌써 차  속에 집어 넣고 있었다.  나는 내 백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아저씨',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하다. 

  공항행 리무진을 탄  사람은 나와 그 여자아이뿐이었다. 날씨가 너무  나

쁘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어디를 향해도 눈과 얼음밖에 보이지 않았다. 꼭 

극지 같다. 

  "그래, 너, 이름은 뭐지?" 하고 나는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여자아이는 말끄러미 나를 보았다. 그리고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어이

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무엇인가 찾는 것처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향해도 눈밖엔 보이지 않았다. "유키" 하고 여자아이는 말했다. 

  "유키?"

  "이름"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 유키."

  그리곤 여자아이는 워크맨을 포켓에서  꺼내 개인적인 음악 속에 잠기었

다.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내 쪽은 전혀 쳐다보지를 않았다. 

 지독하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유키라는 건 그 아

이의 진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땐,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즉석에서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이름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약간 거부감도 느꼈다. 

그 아이는 가끔 포켓에서 껌을 꺼내 혼자 씹고 있었다.  나에겐 단 한 개도 

권하지 않았다. 나는 별로 껌 따위는 씹고 싶지 않았지만, 의례적으로 권해

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한 이런저런 일로 나는  어쩐지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나이를 먹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옛일을 생각했

다. 내가 그 아이의 나이 무렵이던 당시의 일을. 그러고 보니 나도 그 무렵

엔 록 레코드를 수집하고 있었다. 45회전의  싱글판을. 레이 찰즈의<떠나거

라, 잭>이니, 리키  넬슨의 <트레블링 맨>이니, 브렌다 리의 <올  얼론 앰 

아이>, 그런 걸 백 장 정도  가사를 다 외울 만큼 매일 되풀이해서 들었었

다. 

  나는 머리  속에서 시험삼아 <트레블링 맨>의  가사를 떠올리고 노래를 

불러 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아직도 가사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어쩔 수도  없는 시시한 가사였지만, 노래를  불러 보니 제법 술술 

나왔다. 젊은  시절의 기억력이란 대단한 것이기도  하다. 무의미한 일들을 

참으로 잘 기억하고 있다. 

  And the China doll

  down in old Hongkong

  waits for return

  토킹 헤드즈의 노래와는 확실히 매우 다르다. 시대는  바뀐다-타아아아임

즈 아 체에에인징...  

  나는 유키를 대합실에 혼자 놔두고, 공항 카운터로 가서 표를 샀다. 나중

에 정산할 생각으로, 두 사람 몫 요금을 내 크레디트  카드로 지불했다. 탑

승까지 앞으로 한 시간이 남았었지만, 아마 좀더 늦어지게 될 것이라고 담

당자는 말했다. "안내 방송이 있을테니까 잘 들어 주세요" 하고 그녀는 말

했다. "아무튼 지금대로라면 시계가 너무 나쁩니다."    

  "날씨가 좋아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예보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만, 몇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어요" 하고 

그녀는 따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같은 말을 2백 번 정도 했던  것이다. 뭐, 

누군들 따분하지 않겠는가. 

  나는 유키에게로 돌아와 눈이 그치지  않아 비행기가 좀 늦어질 것 같다

고 말했다. 그 아이는  내 얼굴을 힐끗 보고 나서 "흐흥"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짐은  체크인 하지 말고 그냥 두자구. 한번 체크

인 하면 빼내기가 귀찮게 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좋을 대로" 하는  얼굴을 그 아이는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잠시 동안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그렇게 재미있는 장소도 아니

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점심은 먹었나?"

  그 아이는 끄덕였다.

  "커피ㅅ에라도 가지 않겠어? 뭣  좀 마실까? 커피나 코코아나 홍차나 주

스나, 뭣이든"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글쎄요" 하는 얼굴을 그 여자아이는 했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 

  "그럼 가자구" 하고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샘소나이트를 밀고, 그 아이

와 함께 커피ㅅ으로 갔다. 

  커피ㅅ은 붐비고 있었다. 어느  비행편이나 출발이 늦어버린 듯, 다들 한

결같이 지쳐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시끌시끌한 가게 안에서, 나는 

점심 대신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부탁하고 유키는 코코아를 마셨다.

  "저, 며칠 동안 그 호텔에 묵고 있었지?" 하고 나는 물었다.

  "열흘" 하고 그 여자아이는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머니는 언제 떠났지?"

  그 아이는  잠시동안 창 밖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사흘전" 

하고 말했다. 꼭 초보 영어 회화 레슨이라고 하고 있는 꼴이었다.

  "학교는 봄방학인가, 줄곧?"

  "학교는 안 가요, 줄곧. 그러니까  내버려둬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포켓

에서 워크맨을 꺼내고, 헤드폰을 귀에다 꽂았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신문을 읽었다. 아무래도  요즈음 나는 여

자아이를 화나게만 하고 있다. 왜일까?  운이 나쁜 걸까, 아니면 좀더 근본

적인 원인이 있는 걸까?

  아마 운이 나쁠  뿐이다, 하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신문을 내쳐 

읽어버리고는 포크너의 <울림과 분노>의 문고판을  가방에서 꺼내 읽었다. 

포크너와 필립 K딕의 소설은, 신경이  어떤 종류의 피곤함을 느낄 때에 읽

으면 매우 잘 이해가  된다. 나는 그런 시기가 오면 반드시  어떤 소설이든 

읽기로 하고 있다. 그밖의 시기에는 거의 읽지 않는다. 도중에서 유키는 한 

번 세면실로 갔다. 그리고 워크맨의 전지를 갈아넣었다. 30분 뒤에 실내 방

송이 있었다. 하네다 행 비행편은 네 시간 늦게  출발한다는 실내 방송이었

다. 날씨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맙소사, 여기서 

앞으로 네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가. 

  하지만 뭐 별 수 없다.  그런 건 처음부터 경고되어 있었던 것이니까. 좀

더 전향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물을 생각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명확한 사고의 힘.  5분 동안 신중하게 생각하자,  좀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번득였다. 잘  돼 나갈지도 모르겠고,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시끄럽고 담배 냄새가  고리타분한 곳에서 멍청하니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나는 유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해 놓고, 공항

의 렌트카 회사의 카운터로  갔다. 그리고 차를 빌려달라고 했다. 카운터의 

여직원은 곧  수속을 해주었다. 카 스테레오가  달린 카롤라 스프린터였다. 

나는 마이크로 버스로 렌트카 사무실까지 옮겨가 거기서 카롤라의 키를 받

았다.

  사무실은 공항에서 차로  10분 가량의 거리에 있었다. 새 스노우  타이어

가 달린 백색의 카롤라였다. 나는  그 차를 타고 공항까지 되돌아 왔다. 그

리고 커피ㅅ으로 가서 유키에게 "이제부터 세 시간 가량 이 주위를 드라이

브해 보자" 하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이  오지 않아요. 드라이브라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일 거예요" 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도대체 어디

로 가죠?"

  "어디로도 안 가. 차를  타고 달릴 뿐"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큰  소

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지. 음악을 듣고 싶겠지.  실컷 들려 줄게. 워크맨만 

듣고 있으면 귀가 나빠져."

  그녀는 글세 하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가 자 가자, 하고 일어

서자 그 아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왔다.

  나는 슈트케이스를  메어올려 트렁크에 집어  넣고, 눈이 퍼붓는  도로를 

천천히 어디랄 것도 없이  차를 몰았다. 유키는 숄더 백 속에서  카세트 테

이프를 꺼내어 카스테레오에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데이빗 보위가 <차이

나 걸>을 부르고 있었다.  그 다음엔 필 코린즈,  스타쉽, 토마스  돌비, 톰 

페티 앤 하트 브레이커즈,  홀 앤 오츠, 톰프슨 츠인즈, 이기포프, 바나나라

마, 그러한  십대 전반의 여자 아이들이  아주 보통으로 들을 법한  음악이 

줄곧 계속되고 있었다. 스톤즈가 <고잉 투 아고고>를 불렀다. "이 곡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예전에 이라클즈가 불렀어. 스모키 로빈슨과 미

라클즈. 내가 열 다섯 아니면 열 여섯 살 무렵."

  "히이" 하고 유키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고잉 투 아 고고" 하고 나도 곡에 맞춰서 불렀다.

  그 다음에 폴 매카트니아와 마이클 잭슨이 <세이  세이 세이>를 벌렀다. 

도로를 달리고 있는 차는  얼마 안 되었다.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

다. 와이퍼가 사뭇 귀찮다는  듯이 창에 달라 붙은 눈조각을 스럭  스럭 스

럭 훑어내고  있었다. 차 안은 따뜻하고  로큰롤은 유쾌했다. 듀란듀란마저 

유쾌했다. 나는 제법 느슨해져서 가끔씩 테이프에 맞춰  노래하면서 일직선

으로 내달렸다. 유키도 얼마간은 기분이 편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그 90분

짜리 테이프를 다 듣고 나자  내가 렌트카 사무실에서 빌려온 테이프에 눈

을 돌렸다.

  "그거 뭐?" 하고  그 아이는 물었다.  올드팝의 테이프라고  나는 대답했

다. 공항에 돌아오기까지의 도중에 틈틈이 내가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거 

듣고 싶어요" 하고 그 아이는 말했다. 

  "마음에 들지 어떨지 모르겠다. 모두 낡은 거라서"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요, 아무거나.  요 한 열흘  동안 줄곧 같은  테이프만 듣고 있었어

요."

  그래서 나는 그  테이프를 세트했다. 먼저 샘 쿡이 <원더풀  월드>를 불

렀다. "난 역사 같은 건  잘 모르지만... " 좋은 노래다. 샘 쿡, 내가 중학 3

학년 때에 총을 맞아  죽었다. 버디 호리 <오 보이>. 보디  호리도 죽었다. 

비행기 사고. 보비 다링<비욘드  더 시>. 보비 다링도 죽었다. 엘비스 <하

운드 덕>. 엘비스도 죽었다. 마약에 절어서. 모두 죽었다.  그 다음엔 척 베

리가 노래  했다. <스위트 리틀  식스틴>. 에디 콕란 <서머타임  브루스>, 

에브리 브러더즈 <일어나라, 수지>.

  나는 가사를 기억하고 있는 부분만을 함께 불렀다.

  "잘 기억하고 있네요" 하고 유키가 감탄한 듯 말했다.

  "그야 그렇지. 나도  예전엔 너만큼 열심히 록을 들었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네 나이 때에 말야. 매일 라디오에  매달리고, 용돈을 모아 레코드

를 샀지. 로큰롤. 이 세상에 이만큼 멋진 건  없다고 생각했어. 듣고 있기만 

해도 행복했었지."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듣고 있지. 좋아하는  곡도 있고. 하지만 가사를 암송할 만큼 열

심히 듣지는 않아. 예전만큼은 감동하지 않아."

  "왜 그래요?"

  "왜 그럴까?"

  "가르쳐 줘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적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렇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아주 적거든 무엇이든 그래. 책이나, 영화나, 콘서트나, 정

말로 좋은 건 적거든. 록 뮤직만 해도 그렇지. 좋은 건 한 시간동안 라디오

를 들어도 한 곡 정도밖에 없어. 나머진 대량 생산의 찌꺼기 같은 거야. 하

지만 예전엔 그런 거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 무엇을 듣건 제법 재미있었어. 

젊었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게다가 사랑을 하고  있었어. 시시한 것에

도,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떨림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어. 내가 하는 말 알

겠어?"

  "어딘지 모르게" 하고 유키는 말했다.

  델 봐이킹즈의 <캄 고 위드 미>가 걸렸기에, 나는  잠시 동안 그것을 함

께 합창했다. "따분하지 않아?" 하고 나는 물었다.

  "으응, 나쁘지 않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도 말했다.

  "지금은 사랑을 안 해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좀 깊이 생각했다. "어려운 질문인데"  하고 나는 말

했다. "유키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나?"

  "없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싫은 녀석은 잔뜩 있지만."

  "기분은 알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음악을 듣고 있는 편이 즐거워요."

  "그 기분도 알겠어."

  "정말 알아요?" 하고  말하고, 유키는 의아한 듯 눈을 가늘게  하고 나를 

보았다. "정말 알아"하고 나는 말했다. "모두들 그것을 도피라고 불러. 하지

만 뭐 그건 그걸로 좋아.  내 인생은 내것이고 네 인생은 네것이야. 무엇을 

구하느냐만 명백하다면, 너는  너 좋을 대로 살면  좋은 거야. 남이 뭐라고 

하건 알 게 뭐야. 그런  녀석들은 왕악어에게 먹혀 죽으면 되는 거야. 나는 

예전에 , 너만한 나이에  그렇게 생각했었어.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건 어쩌면 내가 인간적으로 성장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라. 아

니 어쩌면 내가 영원히 옳은  것인지도 몰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 쉽게 해

답이 나오지 않거든."

  지미 길머 <슈거 색>. 나는  이빨 틈새로 휘파람을 불며 운전했다. 도로

의 왼편에는 드넓은 평지가  새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수수하고 조그마한, 

나무로 만든 커피ㅅ이지만, 에스프레소  커피가 너무나 맛있어." 좋은 노래

다. 1964년.

  "그런데" 하고 유키가 말했다. "아저씬,  좀 이상한 것 같아. 남들이 그렇

게 말 안 해요?"

  "흐흥" 하고 나는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결혼했어요?"

  "한 번 했었지."

  "이혼했어요?"

  "그래,"

  "어째서?"

  "아내에게 버림 받았지."

  "정말, 그거?"

  "정말이야. 아내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서  함께 어딘가로 가버린 거

야."

  "가엾어라" 하고 유키는 말했다.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부인의 마음은 알 것 같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어떤 식으로?" 하고 나는 물었다. 

  유키는 어깨를 움츠리곤 아무 말도 않았다. 나도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

다.

  "저어 껌 씹을래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고마워. 하지만 됐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조금씩 사이좋게 되면서, 비치 보이즈의 <설빈 USA>의 백 코러

스를 둘이서  계속했다. "inside-outside-USA" 라든가,  그러한 간단한  것. 

하지만 즐거웠다.

  <헬프 미 론다>도 둘이서 불렀다.  나도 아직은 버려진 건 아니다. 나는 

스크루지 영감은 아닌  것이다.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눈은 차츰  약해지게 

되었다. 나는 공항으로 되돌아와 키를 렌트카의 카운터에 돌려주었다. 그리

고 짐을 체크인하고, 3분 후에  게이트로 들어갔다. 비행기는 결국 다섯 시

간 늦게 이륙했다.

  유키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그녀의 잠든  얼굴은 

희한하게 예뻤다. 어딘지 비현실적인 재료로 만든 정밀한  조각상처럼 아름

다웠다. 누군가가 세차게 치면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종류의 아름

다움이었다. 스튜어디스가  주스를 가지고 와서, 유키의  얼굴을 보고 아주 

눈부신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진  토닉을 주무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시면서, 키키 생각을  했다. 

나는 머리 속에서 그녀와 고혼다가  침대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장

면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재생해 보았다. 카메라가 돌아가듯 이동했다. 키

키가 거기에 있었다. "뭐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뭐래요, 하고 사고가 메아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