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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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네다에서 짐을 찾은 다음, 나는 유키에게 집은 어디냐고 물었다. 

  "하코네" 하고 유키는 말했다.

  "꽤 멀군"하고 나는  말했다. 벌써 밤 여덟  시도 지나 있었고, 이제부터 

택시를 타든 어떻든 간에,  하코네로 돌아가기엔 좀 힘들 것 같았다. "도쿄

에 아는 사람은 없나?  친척이라든가, 친한 사람이라든가. 그런 사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런 사람은 없지만, 아카사카에 아파트가  있어요. 작은 아파트지만, 엄

마가 도쿄에 가면 사용해요. 거기 묵으면 돼요. 아무도 없으니까."

  "가족은 없나? 어머니 외엔."

  "없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와 엄마 둘뿐."

  "흠" 하고 나는 말했다.  어쩐지 까다로운 듯한 가정이었는데, 그건 나와

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나 있는  데까지 택시로 가서 함께 저녁

을 어디서 먹자구. 그 다음에 내가 차로 너를  아카사카의 아파트까지 보내

주지. 그러면 되겠지?"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택시를 불러서  시부야의 내 아파트까지 갔다. 그리고 유키를  현관

에서 기다리게 하고,  방으로 혼자서 돌아와 짐을 두고 권의주의풍의  옷차

림이 아닌 보통의 옷모양으로 갈아입었다. 보통의 운동화에  보통의 가죽잠

바와 보통의 스웨터. 그리고서 스바루에 유키를 태우고, 차로 가면 15분 가

량의 거리에 있는 이탈리언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다.

  나는 라뷔오리와 야채샐러드를  먹고, 그녀는 봉고레의 스파게티와  스금

치를 먹었다. 그리고 생선 프리트 미스트를 한 접시  주문해서 둘이서 나누

었다. 프리트는 꽤  많은 양이었는데, 그녀는 굉장히  속이 비어 있었던 듯 

테라미즈마저 먹었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맛있었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어디에 음식맛이 좋은 가게가 있다든가, 그런 것만은 잘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맛좋은 음식점을 찾아  다니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유키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래서 잘 알지"  하고 나는 말했다. "프랑스에 꿀꿀  코를 끌면서 땅밑 

버섯을 찾아내는 돼지가 있는데, 그것과 같아."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취미를 가질 수가 없어, 도저히. 아무런 의

미가 없는 일이야.  맛좋은 음식점을 찾아내 잡지에 내어 모두에게  소개하

지. 이곳으로 가시오,  이런 걸 먹으시오. 하지만 어째서 일부러  그런 일을 

해야 하지? 다들 제멋대로 저  좋은 걸 먹고 살면 되지 않아. 안 그래?  어

째서 타인에게 음식점 지시까지 일일이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째서 

메뉴의 선택법까지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말이지, 

그런 데서 소개를  받는 음식점이란, 유명해짐에 따라서 맛도 서비스도  자

꾸자꾸 떨어지게 돼. 십중  팔구는 말야.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야. 무엇을 찾아내선 그걸 하나 하나 

점잖게 경멸해 가는  거야. 새하얀 것을 찾아내어 때투성이로 만들어  가는 

거야. 그것을  사람들은 정보라고 부르지. 그런  일에 이젠 진절머리가  나. 

자신이 하고 있으면서도."

  유키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말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진기한  생

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하지만 하고 있잖아요?"

  "직업이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서 나는 돌연 맞은편에  앉아 있

는 게 열세 살쯤 되는  여자아이라는 것 생각했다. 정말, 나란 인간은 도대

체 이런 조그만 여자아이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가자구" 하고  나는 말했다. "이제 밤도  늦었고, 그 아파트까지  보내줄

게"

  스바루를 타자, 유키는  그 주위에 굴러 있는 테이프를 집어들어  카스테

레오에 꽂았다.  내가 만든 올디즈의 테이프였다.  나는 혼자서 운전하면서 

곧잘 그런 걸 듣고 있는  것이다. 포 톱스의 <리치 아웃 아일비 데>. 도로

가 한산해서 아카사카까지는  금방이었다. 나는 유키에게 아파트의  위치를 

물었다. 

  "가르쳐 주고 싶잖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어째서지?" 하고 나는 물었다.

  "아직 들어가고 싶잖으니깐."

  "보라구, 벌써 밤 열 시가 지났어" 하고 나는 말했다. "길고 지루한  하루

였어. 이젠 개처럼 자고 싶어."

  옆자리로부터 유키는 말끄러미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앞쪽  노면

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을 줄곧 왼쪽  뺨에 느끼고 있었

다.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거기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으나, 그 

시선은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한동안 나를  응시하고나서, 그녀는 시선을 

반대편 창 밖으로 돌렸다.

  "나 자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아파트로 가도 혼자이고, 좀더 드라

이브 해보고 싶어요.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제 한 시간만. 그리고 집으로  가서 푹 자는 겨

야. 그러면 되겠지?"

  "그러면 돼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도쿄 거리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이런 짓을 하

고 있으니까 점점 대기가 오염되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소음이 늘고, 사람

들의 신경이 곤두서고, 지하  자원이 고갈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유키는 머

리를 시트에 기대고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밤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카트만두에 있다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하고 그녀는 고단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돌아올 때까진 혼자겠군."

  "하코네로 돌아가면 가정부 아줌마가 있지만" 하고 그녀는 말했다.

  "흠, 이런 일이 흔히 있나?" 하고 나는 물었다.

  "날 내동댕이치고 가버리는  그런 일? 흔해요. 그  사람, 사진 일로 이내 

머리가 꽉 차버려요. 악의는 없지만, 그런 사람이예요.  요컨대 가지 일밖엔 

생각지 않아요. 내가 있다는 걸 잊어버려요. 우산과  같이. 단순히 잊어먹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서 훌쩍  어딘가로 가버리곤 하죠. 카트만두에 가고 싶

다 하면, 그 일밖엔 머리에  남지 않는 거예요. 물론 뒤에 반성하고 사과는 

하지만, 이내 또 같은  짓을 해요. 변덕쟁이라서 나를 훗카이도로 데려가서

는, 거기 까진 좋지만  매일같이 난 호텔 방에서 워크맨만 듣고  엄마는 거

의 돌아오지 않아 나 혼자  밥을 먹으면서... 하지만 이젠 체념했어요. 이번

만 해도  1주일이면 돌아온다고 했지만,  믿거나 말거나예요. 카트만두에서 

또 어디로 갈지 알 게 뭐예요."

  "어머니 이름은 무어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이름을 말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들어본적 없

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아메라는 이름으로  직업상의 이름을 따로 갖고 

있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아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줄곧. 

그래서 내  이름을 유키라고 했어요.  바보스럽다고 생각 안해요?"  아메는 

알고 있었다. 누구든 그녀에 대해  알고 있다. 매우 유명한 여류 사진 작가

이다. 다만 매스컴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본명조차 거의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고  싶은 일밖엔 하지 않는

다. 기행으로  알고 알려져 있다. 공격적이고  예리한 사진을 찍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의 아버지는 그 소설가인가? 마키무라 히라쿠, 분명 그래."

  유키는 어깨를  움추렸다. "그 사람 그래도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예요. 

재능은 없지만."

  나는 유키의 부친이 쓴  소설을 예전에 몇 권인가 읽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에 쓴 두 권의  장편과 한 권의 단편집은 나쁘지 않았다.  문장도 시점

도 신선했다. 그래서  책은 웬만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도 문단의  총아 

같은 존재가 되었다. TV니  잡지니 하는 여러 곳에 얼굴을 내밀고  사회의 

온갖 사상에 관해 의견을 말했다. 그리고 당시 신진  작가였던 아메와 결혼

했다. 그것이 그의 절정이였다. 

  그 뒤가 형편이 없었다. 특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돌연 그는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쓴  두세 권의 글은 어

쩌지도 못할 '물건'이었다. 비평가도 혹평했고, 책도  팔리지 않았다. 그로부

터 그는 뒤집듯이  스타일을 바꾸었다. 예리한 청춘 소설의 작가로부터  돌

연 실험적 전위작가로  전향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없음에는  다름

이 없었다. 문체도  프랑스 전위소설 언저리의 부분 부분을 가져와서  꿰맞

춰 놓은 것  같은 섬뜩한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상상력의 파편조차 없는, 

새것 좋아하는 몇몇 평론가가 그것들을 칭찬했다. 하지만  한 2년이 지나자 

비평가들도 역시 이건 글렸다, 싶었던지 입을 다물게 되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떻든 

그의 재능은 최초의 3권으로 완전히 고갈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래

도, 문장만은 그런대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거세당한 개가 과거의 기억을 

따라 암캐의 냄새를 맡듯,  문단의 주변을 어정거리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아메는 그와는 이혼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메가 그를 단념하

고 만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일반의 정설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키무라 히라쿠는 그대로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모험 작가라고 

떠벌이며 새로운 분야에 손을 댔다. 1970년대 초반의  무렵이다. 전위에, 행

동과 모험. 그는 세계의 비경을 돌며 거기에 관해 문장을 썼다. 에스키모와 

함께 해표를 잡아먹기도 하고, 아프리카에서 원주민과 생활하기도 하고, 남

미의 게릴라 취재도  했다. 그리고는 서재형의 작자들을 맹렬한 어조로  비

난했다. 

  처음엔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10년이나 같은 짓을 하고  있는 

동안에-뭐 당연한 일이지만-다들 거기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도대체 세

계의 그토록 많은 모험의 씨가 있을 턱이 없다.  리빙스턴이나 아문젠의 시

대는 아닌 것이다.  모험의 길은 엷어지고, 문장만이 호들갑스러워졌다.  그

리고 사실 그것은  모험조차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대부분의 '모험'에는 

코디네이터라든가 편집자라든가 사진작가라든가가 줄줄이 동행했었다.  TV

가 관련되면, 거기에 열 명 가량의 스태프와 스폰서가 붙었다. 연출도 있었

다. 나중이 되면 될수록  연출이 불어났다. 그것은 업계의 사람이라면 누구

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토록 악한  사람은 아닐 게다. 하지만  재능이 없었다. 그 딸이 

말하듯. 

  우리는 그 작가인 아버지에 관해선 그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유키

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나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

다. 우리는 얼마동안  말없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핸들을 잡고 앞을 

주행하는 불루의 BMW의 테일 램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키는 솔로먼 버

크에 맞추어 부츠 끝으로 리듬을 잡으면서 거리 풍경을 보고 있었다. 

  "이거 좋은 차군요" 하고 조금 뒤에 유키는 말했다. "무슨 차죠?"

  "스바루" 하고  나는 말했다. "중고의 구식  스바루. 일부러 칭찬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그다지 없지만."

  "잘 모르지만, 타고 있으면 어쩐지 친밀한 느낌이 들어요."

  "아마도 그건 이 차가 내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게야."

  "그렇게 하면 친밀한 느낌이 들게 돼요?"

  "조화성" 하고 나는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와 차가 서로 도와주고 있는 거야. 간단하게  말해 내가 이 공간에 들

어가지. 나는 이 차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면 여기에 그런 공기가 

생겨. 그리고 차도 그런 공기를 느끼게 돼. 나도 기분이 좋게 되고 차도 기

분이 좋게 돼."

  "기계도 기분이 좋게 돼요?"

  "물론, 되지"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 하지만 기계도 기

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해. 이론적으로는  해명되지 않지만, 

경험적으로 말해서 그래. 틀리없이."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과는 달라. 이런 건  말이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감정이거든 인간에  대한 감정이란 건 그것과는 달라. 상대에게  맞춰

서 늘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어. 흔들리거나 망설이거나,  부풀거나, 꺼지거

나, 부정되거나, 상처를  입기도 해. 대개의 경우 의식적으로 통할  수는 없

어. 스바루를 대하는 것과는 달라."

  유키는 그에 관해 한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과는 서로 통하지 못했

었나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통해 있다고  난 줄곧 생각하고 있었어" 하

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 아내는  그렇게 생각지 않었어.  견해의 차이. 

그래서 어디론가 가버리는 편이 차라리 빨랐던가봐."

  "스바루처럼은 잘 되지 못했던가 보죠?"

  "말하자면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맙소사, 도대체 열세 살짜리 여자

아이를 상대로 하는 이야기란  말인가, 이것이. "저 나에 대해선 어떻게 생

각하죠?" 하고 유키는 물었다.

  "나는 아직 너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몰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또 내 왼쪽 뺨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러다가 왼쪽  뺨에 구멍이 뻥 뚫

리지나 않을까 싶었다. 그토록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알겠어,  하고 나는 생

각했다.

  "넌 내가 여태껏 데이트한 여자아이 중에선 아마 제일 예쁜 여자아이 일

거야." 하고 나는  내 시선 정면의 길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아니지, 아마

가 아냐. 틀림없이 제일예뻐. 내가 열다섯이라면, 확실히  너와 사랑을 했을 

거야. 하지만 난  이제 서른넷이니, 그렇게 간단하게 사랑은 하지  않아. 이 

이상 더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  스바루 편이 더 쉬워. 그런 정도로 말하면 

될까?"

  유키는 이번에는 평온한  시선으로 나를 잠시 동안 보고 있었다.  그리곤 

"이상한 사람" 하고 말했다. 유키에게 그런  소리를 듣자 나는 내가 정말로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악의는 없을 게다. 하지

만 유키의 그런 소리를 들으니 꽤 사무치는 것이다.

  열한시 십오 분에 나는 아카사카로 돌아왔다.

  "자, 어쩌지" 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에는 유키는 제대로  나에게 그 아파트의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붉

은 벽돌을  사용한 아담한 밴션이데,  노기신사 가까이의 조용한  길거리에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차를 멈추고 엔진을 껐다.

  "돈 말인데" 하고 그녀는 시트에  앉은 채 조용히 말했다. "비행기삯이라

든가, 식사대라든가  그런 거."  "비행기표는 어머니가  돌아와서 돌려주면 

돼. 그 이외의   것은 내가 내겠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제몫내기  데이트

는 안해. 비행기표만으로 좋아."

  유키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움추리더니 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씹고 

있던 껌을 화분 속에다 버렸다.

  "고마워, 천만에" 하고  나는 혼잣말로 소리를 내어 예절  바르게 대화를 

해 보았다. 그리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유키에게 주었다. "어머니가 돌

아오면 이걸 줘. 그리고  만일 혼자 있다가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이

리로 전화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줄 테니까."

  그녀는 얼마동안 내 명함을  손가락으로 집어들고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

다. 그리곤 코트의 포켓 속에 쑤셔 넣었다.

  "이상한 이름"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뒷좌석으로부터 무거운  슈트케이스를 끌어내어 그것을 엘리베이터

에 실어 4층까지 운반했다. 유키는  숄더 백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나는 슈트케이스를 안에다 넣었다.

식당을 겸한 부엌과 침실과  욕실만 있는 구조였다. 건물은 아직 깨끗하고, 

방안은 모델룸처럼 제법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식기니 가구니 전기 기구는 갖출 대로 갖춰져 있었고,  어느 것이나 세련

되고 값나가는 것 같았지만, 생활의 냄새랄 것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

떻든 돈을 주고 전부를 사흘 동안에 구색 맞춰 사들였다고나 할 그런 격이

었다. 취미는 좋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엄마가 어쩌다 사용할 뿐예요"  하고 유키는 내 시선을 좇은 다음에 말

했다. "엄마는요  그곳에 스튜디오를 갖고  있어서 도쿄에 있을 때엔  거의 

거기서 살다시피 하고 있어요. 거기서 자고 거기서 밥 먹고 하면서. 여기론 

어쩌다가 돌아올 뿐."

  "과연" 하고 나는 말했다. 바쁜 듯한 인생이다.

  그녀는 모피 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 가스 스토브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버지니아 슬림 갑을 가져다가 한 가치 입에 물고 종이 성

냥을 조용히 켜서 불을 당겼다. 열세 살의 여자아이가  담배를 피운다는 건 

좋지 못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 살갗도  거칠어진

다. 하지만 그녀의 담배 피우는 모습은 흠잡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프로 끊어낸 것 같은  엷고 예각

적인 입술에 필터를 살짝 물고 불을 켜서 당길 때에 길다란 속눈썹이 자귀

나무 잎사귀처럼 서서히  아름답게 덮어졌다. 이마에 흘러떨어진  가느다란 

앞머리가 그녀의 작은 몸놀림에 맞추어 부드럽게 흔들렸다. 완벽했다.

  열다섯 살이었다면 사랑에 빠졌어,  하고 나는 새삼 느꼈다. 그것도 봄의 

눈사태와도 같은 숙명적인 사랑에. 그리하여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지독히 

불행해져 있을 게다. 유키는 내가 옛날에 알고 있었던  어느 여자아이 생각

을 나게 했다. 내가  열셋이던가 열네 살 무렵에 좋아하게 되었던  한 여자

아이의 생각을. 그 당시에 느꼈었던 절절한 심정이 문득 되살아났다.

  "커피나 뭣 좀 마실래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늦었으니까 이제 돌아가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담배를 재떨이에 놓고 일어서서 나를 문께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

었다.

  "담배불과 스토브를 조심해" 하고 나는 말했다.

  "아빠같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시부야의 아파트에 돌아와 나는 소파에 뒹굴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우편함에 들어 있던  너댓 통의 편지를 체크했다. 어느것이나 별로  대수롭

지 않은 일 관계의  편지였다. 읽는 건 전부 뒤로 미루고 개봉만 한  채 테

이블 위에 내동댕이쳤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몹시  신경이 

흥분해 있어서 제대로 잠이 들  것 같지가 않았다. 기 하루였구나, 하고 나

는 생각했다. 길게 길게 늘어졌던  하루. 하루 종일 제트 코스터를 타고 있

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도대체 며칠  동안이나 삿포로에 있었단 말일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뿐. 수면  시간이 혼란돼 있었다. 하늘은  벌어진 틈새도 없이  회색이었다. 

사건과 날짜가 온통  뒤섞여져 있었다. 우선 프런트 담당의 여자아이와  데

이트를 했다. 옛날의 동료에게 전화를 해서 돌핀 호텔에  관한 조사를 하게 

했다. 양사나이와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영화관에 들어가 키키와 고혼다가 

나오는 영화를 봤다. 열세 살 예쁜 여자아이와 둘이서  비치 보이즈를 합창

했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왔다. 모두 며칠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내일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일 생각할 수 있는 일은 내

일 생각하자. 

  나는 주방으로 가서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라서, 아무것도 넣지 않은  스

트레이트로 그냥 마셨다.  그리고 반쯤 남아 있던  그래커를 몇 개 먹었다. 

크래커는 내 머리 속처럼이나 습기를 머금고 눅눅했다.  정다운 모다네아즈

가 다정한 토미 도오시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낡은 레코드를 작은 소리로 

틀었다. 내  머리처럼이나 약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소음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폐는 끼치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 완결돼 

있다.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내 머리처럼. 

  웬일이세요, 하고 내 머리 속에서 키키가 말했다.

  카메라가 빙그르르 회전했다.  고혼다의 단정한 손가락이 그의  등허리를 

상냥하게 기어다니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숨겨진 수로라도 찾아다니듯. 

  웬일일까, 키키? 나는 분명 어지간히 혼란되어 있다. 나는 예전만큼 자신

에게 자신을 갖지 못한다. 애정과 중고 스바루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가? 

나는 고혼다의 단정한 손가락에 질투하고 있다. 유키는  어김없이 담배불을 

껐을까? 어김없이 가스 스토브의 스위치를  껐을까? 아빠 같애. 정말. 자신

에게 자신을 갖지 못하겠다. 그리고 나는 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코끼리

의 무덤 같은  곳에서 이런 식으로 투덜투덜  혼잣말을 하면서 늙어버리게 

된단 말인가?

  하지만 모든 것은 내일이다. 

  나는 이를 닦고, 파자마로 갈아입고, 그리곤 잔에 남아 있던 위스키를 다 

마셨다. 침대에 들어가려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나는 잠시 동안 방 한가운

데에서 서서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결국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금방 스토브를 껐어" 하고 유키가 말했다. "담배불 처리도 했어.  그러면 

되지요? 안심돼요?" 

  "그러면 됐어" 하고 나는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잘 자" 하고 나는 말했다. 

  "저어" 하고 유키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두었다. "당신은  삿포로

의 그 호텔에서 양모피를 걸친 사람을 보았겠지요?"

  나는 금이 간 타조 알을 품고  있는 그런 꼴로 수화기를 가슴에 안고 침

대에 걸터앉았다. 

  "난 알 수  있어요. 아저씨가 그걸 봤다는 걸.  줄곧 잠자코 있었지만 알 

수 있어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넌 양사나이를 만났어?" 하고 나는 물었다.

  "으응" 하고 유키는 애매하게 말하고는, 킁 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이야긴 또 다음에, 다음에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죠. 오늘은 

이젠 졸려."

  그리고 그녀는 찰칵 전화를 끊었다.

  관자놀이가 아팠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다시 위스키를 마셨다. 내 몸은 

어쩔 수도 없이 흔들려대고만 있었다. 제트 코스터는 소리를  내고 다시 움

직이기 시작했다. "연결돼 있어"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연결돼 있어" 하고 사고가 메아리쳤다.

  이것 저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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