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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오랜만이군" 하고 고혼다 군이 말하는 소리는 아주 투명하고 명
쾌한 목소리였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으며,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으며, 긴장도 없으나, 그렇다고 너무 늘어져 있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완벽한 목소리. 그것이 고혼다 군의 목소리라는 건 일순
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한번 들으면 웬만해선 잊을 수 없는 종류의 목소
리였다. 그의 웃는 얼굴이랑, 청결한 잇속이랑, 쑥 빠진 콧줄기와 마찬가지
로, 그것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혼다 군의 목소리 같은 건 그때가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며, 떠올린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목소리는 조용한 한밤중에 잘 울리는 종이라도
친 것처럼 나의 머리 한구석에 매달려 있던 잠재적 기억을 일순에 또렷또
렷하게 되살려 놓았다. 대단하구나, 확실히, 하고 나는 느꼈다.
"난 오늘밤 집에 있을 테니까 이쪽으로 전화를 걸어 주시오. 어차피 아
침까지 자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그는 말하고, 전화번호를 두 번 되풀이
했다. "그럼 또" 하고 그는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국번으로 보아 나의 아
파트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말한 번호를 메모하
고 나서, 그것을 천천히 돌려보았다. 6회째의 콜에서 부재중이므로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취입해 주십시오, 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와 전화한 시간을 취입했다. 그리고 줄곧 여기 있겠노라고
말했다. 꽤 까다로운 세상이군.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가서, 샐러리를 씻었다. 잘게 썰어서 마요네즈를
끼얹어, 그것을 씹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까 전화가 걸려왔다. 유키한
테서였다. 지금 뭘하고 있어요, 하고 말했다. 부엌에서 샐러리를 씹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고 말했다. 비참하네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럴 정도
는 아니야, 나는 말했다. 더욱 비참한 건 얼마든지 있다.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할 뿐인 것이다.
"넌 지금 어디 있지?"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아직도 아카사카의 아파트"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제부터 어딘가 드라
이브 가지 않을래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는 걸"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중요한 전
화를 기다리고 있거든. 요 다음으로 하자구. 보라구, 그렇지, 어제의 이야기
인데, 양가죽을 뒤집어 쓴 사람을 넌 못 봤니? 그 이야기가 듣고 싶단 말
이야. 그거, 굉장히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다시 요, 다음" 하고 그녀는 한껏 찰칵 소리는 내어 전화를 매정하게
끊었다.
맙소사, 하고 나는 느꼈다. 그리고 한참동안 손에 든 수화기를 바라보았
다.
나는 샐러리를 다 씹고 나서, 저녁 식사로 무엇을 먹을까 생각했다. 스파
게티로 할까, 하고 생각했다. 마늘을 두 알 굵직하게 잘라서 올리브 오일로
볶는다. 그 다음에 빨간 고추를 통째 거기에 넣는다. 그것도 마늘과 함께
볶는다. 쓴맛이 나기 전에 마늘과 고추를 꺼낸다. 꺼내는 순간을 맞추기가
제법 까다롭다. 햄을 잘라서 거기에 넣고, 매콤해진 때까지 볶는다. 거기에
다 막 삶은 스파게티를 넣어 살짝 건져내가지고 잘게 다진 파슬리를 뿌린
다. 그리고나서 산뜻한 모짜레라치즈와 토마토 샐러드... 나쁘지 않지.
스파게티 국물을 막 끊이려는 참에 또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가
스를 끄고 전화기 앞으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어이, 오랜만이군"
하고 고혼다 군이 말했다. "반가운데. 건강한가?"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매니저가 말하던데, 무슨 용건이 있다면서? 설마 함께 또 개구리 해부
라도 하고 싶다, 그건 아닐 테지?" 그는 유쾌하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아니,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야. 그래서 바쁜 줄은 알면서도,
전화해 본 거야. 좀 이상한 이야긴데 말이지. 실은... "
"저 말이지, 지금 바쁜가?" 고혼다 군이 말했다.
"아니, 별로 바쁘진 않어. 시간이 남기에 저녁 식사를 만들까 하는 참이
야."
"거 마침 잘 됐군. 좋다면 밖에서 함께 저녁이라도 먹자구. 나도 마침 누
군가 밥 먹을 상대가 없을까 하고 찾고 있던 참이라네."
"하지만 괜찮을까? 갑자기 이런 식으로 전화해서. 말이지, 저어... "
"사양할 것 없잖아. 어차피 날마다 그 시간이 오면 배가 고프고, 좋건 싫
건 간에, 법은 먹어야 하잖아. 자네를 위해 억지로 밥 먹는 건 아니겠고.
천천히 식사하면서 술이라도 마시고 둘이서 옛이야기를 하자구. 옛친구들
과도 만나지 못했다구. 자네만 폐가 되지 않는다면 꼭 만나고 싶군. 폐가
된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할 이야기가 있는 건 이쪽이란 말이야."
"그럼 지금 자네한테로 갈게. 어디야, 거기?"
나는 주소와 아파트 이름을 말했다.
"응, 그렇다면 바로 우리 집 근처군. 한 20분이면 갈 수 있을 게야. 곧
나올 수 있게끔 준비하고 있으라구. 지금 제법 배가 고프단 말이야. 오래는
기다리지 못하겠어."
그렇게 하마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나서 고개를 기울였다. 옛
이야기?
나하고 고혼다 군 사이에 어떤 옛이야기가 있는지, 나로선 전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하고 그하고는 당시에 특별히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며,
이야기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었다. 그는 훌륭한 학급의 찬란한 엘리트
이고, 나는 어느 쪽이냐면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가 내 이름을 이제
껏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나로선 기적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옛이야기
란 도대체 무엇이냐? 이야기할 그 무엇이 있담? 하지만 그래 어떻든간에,
쌀쌀맞은 대접을 받기보다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대접을 받는 편이 훨
씬 좋았다.
나는 잽싸게 면도를 하고, 오랜지색 스트라이프의 셔츠 위에다 캘빈 클
라인의 트위드 재킷을 걸치고, 이전의 여자 친구가 생일날에 선물로 준 아
르마니의 니트 타이를 매었다. 그리고 갓 세탁한 블루진을 걸치고, 사서 얼
마 안 되는 새하얀 <야마하>의 테니스 슈즈를 준비했다. 그것은 나의 워
드로브 중에선 제일 멋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러한 '멋'을 이
해해 주면 좋으련만 싶었다. 나는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영화배우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럴 때에 어떤 복장을 하고 가
면 좋은 것인지 어림도 서지 않았다.
꼭 20분만에 그는 찾아왔다. 50세 안팎의 예절 바른 말씨를 쓰는 운전수
가 나의 방 문 벨을 누르고, 고혼다 군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운전수라면 메르세데스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메르세데스였
다. 꼭 모터보트 같다. 유리는 안이 보이지 않게끔 되어있다. 운전수가 찰
깍! 하는 기분 좋은 소라를 내며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고혼다 군이 있었다.
"어이, 반갑군" 하고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악수 같은 걸 하지 않
았으므로, 나는 굉장히 안도했다.
"오랜만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극히 보통의 V넥크 스웨터 위에다 감색 윈드브레이커를 걸치고, 낡
은 크림빛 코듀로이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구두는 색바랜 아식스의 죠깅
슈즈였다. 하지만 그의 옷매무새는 훌륭했다. 훌륭하지도 않은 복장인데도,
그가 입으면 아주 고상하고 기분 좋아 보이니 말이다. 그는 나의 복장을
빙그레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아주 멋지군" 그는 말했다. "취미가 좋은데."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영화 스타 같군" 그가 말했다. 야유가 아니라, 그저 그런 농담이었다.
내가 웃고, 그도 웃었다. 둘이 다 느슨했다. 그런 다음에 고혼다 군은 차칸
을 둘러보았다.
"어때, 굉장한 자동차 아닌가? 필요할 때에 프로덕션이 빌려주는 거지.
운전수까지 붙여서. 이러면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며, 음주 운전도 하지 않
고 안전하단 말일세. 그들한테도 그렇고, 나한테도 그렇고. 어느 쪽이나 다
행복해지거든."
"옳거니"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이런 거 운전하지 않지. 나는 좀더 작은 차를 좋아하거든."
"포르쉐?"
"마세라티."
"나는 그보다 좀더 작은 차를 좋아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시빅?"
"스바루."
"스바루" 고혼다 군은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탔었지. 내가 맨처음 샀던 차라구. 내 돈으로 샀지.
최초의 영화에 출연한 개런티로 중고를 샀단 말이야. 2편째로 주역에 버금
가는 역할이 붙었던 무렵이야. 곧 주의를 받았지. 너, 스타가 되려거든 스
바루 같은 거 타지 말라구. 그래서 다시 샀지. 그런 세계라구, 영화계란. 하
지만 좋은 차였어. 실용적이고. 값이 싸. 난 이게 좋아."
"나도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어째서 마세라티 같은 걸 탄다고 생각했지?"
"모르겠는 걸."
"경비를 사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하고 그는 좋지 못한 비밀을 털
어놓듯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매니저가 더욱 더 경비를 사용하라지
뭔가. 씀씀이가 부족하다는 걸세. 그래서 비싼 차를 사면 경비가 잔뜩 빠지
거든. 모두가 행복해진다구."
맙소사, 모두들 경비 이외의 것을 생각지 못한단 말인가?
"배가 고픈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두툼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 자
리를 함께 해 주겠나?"
알겠다고 내가 말하자, 그는 운전수더러 행선지를 말했다. 운전수는 잠자
코 끄덕거렸다. 고혼다 군은 내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짓고는, "자, 그럼" 하
고 말을 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만, 혼자서 저녁 식사 채비를 하
고 있다면, 자넨 필시 독신인 모양이군?"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결혼하고 이혼했지."
"그럼, 나하고 마찬가지야" 하고 그는 말했다. "결혼하고, 이혼했지. 그래
서 위자료는 물었나?"
"안 물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한푼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받지 않더라구."
"행운의 사나이로군." 그는 말했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나도 위자료는 물지 않았지만, 결혼 탓으로 빈털터리가 돼버렸지. 내 이
혼 이야기 조금은 알고 있나?"
"막연히"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4년이던가 5년 전에 인기 여배우와 결혼해서, 2년 남짓 지나서 이
혼을 했었다. 주간 잡지가 거기에 관해서 이러쿵 저러쿵 써댔다. 진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상대방 여배우의 가족과 그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정은 알려진 것 같았다. 흔히 있는 경우였다. 상대방 여배
우에게는 공 사 양면에 걸쳐 집요한 친척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반면 그는
'철부지' 로 자라나, 태평스레 혼자서 살아왔다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되어 나갈 리가 없다.
"묘한 이야기지. 엊그제까지 함께 과학 실험을 하고 있었나 했더니, 다음
에 만났을 때엔 어느 쪽이나 이혼 경험자로 돼 있다, 묘하다고 생각지 않
나?"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둘째 손가락 끝으로 눈두덩을 가볍게 문
질렀다. "그런데, 자넨 어째서 이혼하게 됐지?"
"간단하다구. 어느 날 여편네가 나가버렸단 말야."
"돌연?"
"그렇다구. 아무 말 없이. 돌연 나가버렸지. 예감조차 없었어. 집에 돌아
와 보니 없었어. 어딘가 쇼핑하러 갔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었지. 그래서 저
녁밥을 짓고 기다렸었지. 하지만 아침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어. 그 다음에
이혼 청구 용지가 날아들었지."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
런 말투는 자네를 다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자네는 나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해" 하고 그는 말했다.
"어째서?" 내가 물었다.
"내 경우, 여편네는 나가버리지 않았지. 내가 두들겨 맞고 쫓겨났단 말이
야. 말 그대로 말야. 어느 날 두들겨 맞고 쫓겨났지." 그는 유리창 너머로
물끄러미 먼 데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이야기라구. 하나에서 열까지 계획
적이었단 말이야. <사기>나 다를바 없었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것 저것
의 명의가 서슴없이 바뀌어 서지고 있었지. 그건 참 볼 만한 솜씨였어. 나
는 그런 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지. 나는 그 여자와, 같은 세무사한테
의뢰하고 있어서 아주 위임해버렸었지. 신용했었어. 인감도장만 해도, 증서
만 해도, 세금 신고에 필요하니까 맡기라고 하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맡겼다구. 나는 그러한 세세한 일은 질색이고 해서, 맡길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맡기고 싶었거든. 그런데 그 놈이 저쪽 친척들과 붙어 있었더란
말일세. 알고 보니 난 깨끗이 빈털터리가 돼 있었지. 뼈다귀마저 씹힌 꼴이
지 뭔가. 그리고 난 쓸모없게 된 개처럼 두들겨 맞고 쫓겨난 셈이지. 좋은
공부가 됐어." 그리고 그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나도 좀 어른이
되었지."
"벌써 서른네 살이야. 싫어도 모두 어른이 되지." 하고 나는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구. 바로 그렇지. 자네 말대로야. 하지만 인간이란 묘하다
구. 일순에 나이를 먹는단 말일세. 참말이지. 나는 예전엔 인간이란 건 1년,
1년 순번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고혼다 군은 내 얼굴
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듯 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렇진 않지. 인간은 일순
에 나이를 먹는다구."
고혼다 군이 데리고 간 곳은, 롭퐁기 변두리의 조용한 한 모퉁이에 있는,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운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현관에 메르세데스를 세우
자, 가게 안에서 매니저와 보이가 나와서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고혼다 군
은 한 시간 가량 지나서 와달라고 운전수에게 말했다. 메르세데스는 말귀
를 잘 알아듣는 거대한 물고기처럼, 소리도 없이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우리는 조금 깊숙한 벽쪽에 가까운 좌석으로 안내되었다. 가게 안은 화
려한 복장을 한 고객들뿐이었는데, 코듀로이 바지와 죠깅화의 매무새의 고
혼다 군이 제일 멋스럽고 맵시있어 보였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하지
만 어떻든 그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뜨인단 말이다. 우리가 안에 들어서자
고객들은 다들 눈을 들어 그의 쪽을 힐끔 바라 보았다. 그 잠깐 2초만 보
고 나서 사람들은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다. 그 이상 보는 것은 실례가 되
는 일인가 보다. 참으로 복잡한 세계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우선 스카치 워터를 주문했다. "헤어진 여편네들을
위하여"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위스키를 마셨다.
"어리석은 이야기 같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난 그 여자를 아직도 좋아
한단 말일세. 잊혀지지가 않아. 다른 여자를 좋아할 수가 없어."
나는 크리스탈 텀블러 안의, 굉장히 고상한 모양새로 쪼개진 얼음을 바
라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는 어떤가?"
"내가 헤어진 여편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것?" 하고 내가 물었
다.
"그래."
"모르겠는 걸"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난 그 여자가 가버리지 않기를 바
랐었지. 하지만 그 여자는 가버렸어. 누가 나쁜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그
건 일어나고 만 일이고, 이젠 기정 사실이란 말이야. 그리고 나는 시간을
들여서 그 사실에 익숙해지려고 해왔단 말이야. 그것에 익숙해진다는 이
외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해왔지. 그러니까 알 수 없다구."
"응" 하고 그는 말했다. "보라구, 이런 이야기는 자네한테 고통일까?"
"그렇진 않아" 나는 말했다. "이건 사실이란 말일세. 사실을 회피할 도리
가 없어. 그러니까 고통이 아니라잖어. 잘 알 수 없는 감각이지."
그는 딱! 하고 가볍게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그래, 그렇다구. 잘 알 수
없는 감각. 바로 그렇지. 인력이 변화해 버린 것 같은 감각. 고통일 수조차
없지."
웨이터가 왔다. 우리는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둘이 다 스테이크
는 중간 정도로 익힌 것과 두 잔의 스카치 워터를 주문했다.
"그렇지"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넨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다고 했겠다.
먼저 그걸 들어 두지. 술 취하기 전에 말이지."
"좀 이상한 이야기란 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기분 좋은 얼굴을 나에게 돌렸다. 잘 훈련돼 있기는 하지만, 불쾌감
을 주지 않는 웃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이야기라는 거 좋아한다구" 하고 그는 말했다.
"저번에 자네가 출연한 영화를 보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짝사랑>?" 그는 눈썹을 찡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형편없는 영
화. 형편없는 감독. 형편없는 각본. 여느 때나 다름없지. 그 영화에 관계한
축들은 모두 다 그 일을 잊어버리고 싶어하지."
"네 번 봤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허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돈을 걸어도
좋지만, 그 영화를 네 번 본 사람이란 어디에도 없다구. 이 은하계 우주의
어디에도. 무엇을 걸어도 좋아."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영화에 나와 있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곤
"자네 말고 말이야" 하고 덧붙였다.
고혼다 군은 둘째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 그리고 눈
을 가늘게 하고 나를 보았다.
"누구?"
"이름을 모른다구. 일요일 아침에 자네와 함께 자고 있는 배역의 여자아
이."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키."
"키키"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기묘한 이름이다. 딴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게 그 여자의 이름이라구. 적어도 아무도 그 이름밖엔 알지 못해. 우
리들의 조그만 기묘한 세계에선 그 여자는 키키라는 이름으로 통했고, 그
걸로 충분했었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여자한테 연락을 취할 수 있을까?"
"안 되지" 하고 그는 말했다.
"어째서?"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지. 우선 첫째로 키키는 직업적인 여배우가 아니
지. 그래서 이야기가 까다롭단 말일세. 배우라는 건 유명이건 무명이건, 모
두 어김없이 어느 프로덕션엔가 소속돼 있지. 그래서 곧 연락이 된다구. 그
들의 대부분은 전화통 앞에 앉아서 연락을 기다리지. 하지만 키키는 그렇
지 않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어. 그 여자는 공교롭게 그 영화에 나왔을
뿐이야. 완전한 파트 타임이란 말이야."
"어째서 그 영화에 나오게 됐지?"
"내가 추천했어" 하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가 키키한테 영화
에 나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래서 감독에게 키키를 추천했단 말일세."
"어째서?"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약간 입술을 찡그렸다. "그 아이한테 재
능 같은 게 있었거든. 그 뭐랄까, 존재감. 그런 게 있단 말일세. 느낀단 말
이야. 굉장한 미인이랄 것도 아니지. 연기력이 어떻구 저떻구 하는 것도 아
니지. 다만 그 아이가 있는 것만으로도 화면이 제법 잡힌다 그 말일세. 그
래서 영화에 내놓아 봤지. 결과는 좋았어. 다들 키키에 대해선 호감을 가졌
었지.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 장면은 잘 됐었지. 사실적이었어. 안 그
래?"
"그렇더군"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적이었어. 확실히."
"그래서, 난 그 아이를 그냥 영화의 세계로 넣으려고 했었지. 그 아이라
면 어지간히 해낼 줄 알았거든. 하지만 안 됐어. 꺼져버렸어. 이게 제2의
문제점이야. 그 아이는 꺼져버렸어. 연기처럼. 아침이슬처럼."
"꺼졌어?"
"응, 글자 그대로 꺼져버렸다구. 한 달쯤 전 일인데, 오디션에 오지 않았
더란 말야. 오디션에만 나오면, 그 새 영화에서 꽤 그럴싸한 배역이 붙게끔
공작해서 세트해 놓았는데 말이야. 시간에 늦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는데 말
이지. 하지만 결국 키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그걸로 마지막. 그뿐이란
말일세. 어디에도 종적이 없어."
그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서 웨이터를 부르고, 스카치 워터 두 잔을 더
주문했다.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자넨 키키하고 함께
잔 적이 있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응, 즉 말일세, 가령 내가 그 아이하고 잔 적이 있다고 한다면,
자넨 기분 상하게 될까?"
"상하지 않어"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았어" 하고 고혼다 군은 안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난 거짓말하는 게
질색이거든. 그러니까 명백히 말해 두겠어. 난 몇 번인가 그 아이하고 잤
어. 좋은 아이야. 좀 색다른 데가 있지만, 하지만 무엇인지 남에게 호소하
는 데가 있어. 여배우가 됐더라면 좋았을 걸. 좋은 데까지 갔을지도 몰라.
애석한 일이야."
"연락처는 알지 못하는가? 본명이라든지 그런 거?"
"안 되겠던 걸. 찾아낼 수가 없어. 아무도 알지 못해. 키키라는 것밖엔
모르지."
"영화회사의 경리부에 지불 전표가 있을 테지?" 하고 나는 말했다.
"개런티의 지불 전표. 그런 건 본명과 주소가 필요할 테지. '원천 징수'가
있으니까."
"물론 그것도 조사해 봤다구. 하지만 안 될 걸. 그녀는 개런티를 받지 않
았단 말이야. 돈을 받지 않았으니, 영수증도 없을 수밖에. 제로야."
"왜 돈을 받지 않았을까?"
"나한테 물어봤자 난처할 뿐이야" 하고 고혼다 군은 석 잔째 술을 마시
면서 말했다. "이름이라든가 주소라든가 알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모
르겠는 걸. 그녀는 수수께끼의 여자라구. 하지만 어쨌든 나하고 자네 사이
엔 세 가지 공통점이 생긴 셈이지. 첫째로 중학교 과학실험반이 같았다는
것. 둘째로 어느 쪽이나 이혼했다는 것. 셋째로 어느 쪽이나 키키하고 잤다
는 것."
얼마 후 샐러드와 스테이크가 나왔다. 훌륭한 스테이크였다. 그림에 그린
것 같이 정확하게 중간 정도로 익힌 고기였다. 고혼다 군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 식사를 했다. 그의 테이블 매너는 매우 편한 것이어서, 매너 교실
에선 도저히 좋은 점수는 받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함께 식사를 하기
엔 편했으며, 아주 맛을 즐기는 것 같았다. 여자아이가 본다면 '차밍' 하다
고 말할 게다. 그러한 몸놀림이라는 건 갑자기 터득하려고 한 대서 되는
것이 아니다.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넨 어디서 키키하고 알게 됐지?" 내가 고기를 썰면서
물어보았다.
"어디였었지?" 하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여자아이를 불렀
을 때에, 그녀가 따라왔었지, 여자아이라지만, 그래, 전화로 부른 여자. 알
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한 후로 말이지, 난 줄곧 그런 여자들하고 잠자리를 함께 했지. 번
잡하지 않거든. 풋내기는 마땅치 못하고, 동업자 상대는 주간잡지에서 써대
고 하니. 전화 한 통이면 와 주거든. 요금은 비싸다구. 하지만 비밀은 지켜
주지. 절대로 지켜 주지. 프로덕션의 작자가 소개해 줬단 말이야. 여자아이
들도 모두 좋은 아이야. 편하거든. 프로니까 말야. 하지만 닳지 않았지. 서
로 즐기고."
그는 고기를 썰어서 천천히 맛보면서 먹고, 술을 한모금 마셨다.
"이 집 스테이크 나쁘지 않지?" 하고 그가 물었다.
"나쁘지 않군." 내가 말했다. "더 나무랄 데가 없군. 좋은 집인데."
그는 끄덕였다. "하지만 한 달에 여섯 번쯤 오면 싫증도 나지."
"어째서 여섯 번이나 온단 말이지?"
"단골이니까 그렇지. 내가 들어서도 아무도 수선거리지 않거든. 종업원들
이 수군대지도 않고 말이야. 손님들도 유명인에게 익숙해 있으니까, 멀끔멀
끔 보지도 않거든. 고기를 썰 때에 사인해달라고 하는 일도 없고, 그런 집
이 아니고선 차분하게 식사도 할 수가 없단 말일세. 솔직한 이야기지만."
"피곤한 인생 같군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경비도 써야겠고 말이지."
"참말이야." 그가 말했다. "그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콜걸을 불렀다는 데까지야."
"그렇지" 하고 고혼다 군은 냅킨 가장자리로 입가를 닦았다.
"그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단골 여자아이를 불렀지. 그런데, 그 아이는
없었어. 그래서 딴 여자아이가 둘 왔었지. 어느 쪽이든 골라잡으라는 거 였
나봐. 나는 고급 손님이라서 말야. 서비스가 좋다구. 그중 하나가 키키였거
든. 어떡할까 했지만, 골라잡기가 귀찮아서, 두 아이와 함께 잤지."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기분 상하지 않겠나?"
"걱정 마. 고교 시절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고교 시절엔 나도 그런 짓은 안 했지" 하고 고혼다 군은 웃었다. "그래
어떻든, 그 두 아이와 잤다. 야릇한 짝맞추기였지. 게다가, 또 한쪽 여자아
이는 굉장히 화려하단 말야. 짜릿할 만큼 말야. 굉장한 미인인데, 몸뚱이
구석구석까지 돈을 들였어. 이거 거짓말 아니라구. 나도 이 세계에서 이런
저런 잘 생겼다는 여자들을 보아왔지만, 그 아인 그중에서도 제법 좋은 편
이지. 성격도 좋고 말이야. 머리도 나쁘지 않고, 그럴싸한 대화도 할 수 있
고. 그런데 키키 쪽은 그렇지 않단 말이야. 그닥 미인이랄 것도 아니지. 그
래, 예쁘긴 예쁘다구. 하지만, 그 클럽 아이들이란 말야, 다들 제법 반듯한
미인이라구. 그런데 그녀는 뭐랄까... "
"캐주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그거야. 캐주얼하단 말야. 참으로. 양복만 해도 보통 옷이겠다, 이
야기도 별도 하지 않겠다, 화장끼도 그닥 없겠다. 아무러면 어떠냐는 느낌
이고. 한데 묘한 일이지만 말야, 차츰 차츰 그녀한테로 마음이 끌리더란 말
이야 키키 쪽으로. 셋이서 하고 난 다음에, 모두 함께 방바닥에 앉아서 술
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 오래간만에 유쾌
하더군 학생 시절 같아서. 그런 식으로 느슨하고 여유로울 수 있다는 건,
내내 없었단 말야. 그 후로 세 사람이서 잤지."
"언제쯤의 일이지?"
"이혼하고 반 년 쯤 뒤의 일이니, 그렇군, 1년 반쯤 전의 일일까"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세 사람이서 잔 건 아마 다섯 번 아니면 여섯 번쯤 될
거라고 생각돼. 키키하고 단 둘이서 잔 적은 없군. 왜 그럴까? 자도 됐을텐
데 말이지."
"왜 그럴까?" 하고 나도 물었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다 놓
고, 또 집게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가볍게 대었다. 그것이 그가 무엇을 생각
할 때의 버릇인 것 같았다. 차밍, 하고 여자아이라면 말할게다.
"어쩌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몰라"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두렵다?"
"그 아이하고 단 둘이 되는 거 말일세"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그리
곤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었다. "키키의 안에는 말이지, 뭔가 사람을 자극
하고, 도발하게 하는 것이 있단 말이야. 적어도 나는 그러한 느낌을 갖고
있었단 말이야. 극히 막연하겠지만. 아니지, 도발이랄 건 아니지. 제대로 표
현할 수가 없어."
"시사하고, 이끄는... " 하고 나는 말했다.
"응, 그럴지도 몰라. 잘은 모르겠어. 내가 느낀 건 굉장히 막연하다는 것
이기 때문이야. 정확한 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어떻든 그녀하고
단 둘이 되는 건,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 사실은 그녀 쪽으로 훨씬
더 마음이 끌렸지만 말이야. 내가 하는 말, 어떻게 좀 이해가 되었을까?"
"알 것만 같애."
"요컨대 말이지, 키키하고 둘이서 잔다 해도, 난 편하지 못했을지도 모른
다 그 말일세. 그녀하고 관련을 가지면 나는 좀더 깊은 데까지 가지 않을
까 하는 느낌이 들었단 말일세. 어쩐지 말이야. 난 다만 편안하기 위해 여
자아이하고 자고 싶었을 뿐이거든. 그래서 키키하고 둘이선 자지 않았었지.
그녀에게 대해선 아주 호감을 가졌었지만 말야."
우리는 얼마동안 잠자코 식사를 했다.
"오디션에 키키가 오지 않았던 날에, 나는 그 클럽에 전화를 걸어 봤어."
잠시 후에 고혼다 군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리곤 키키를 대달라고 했
지. 하지만 그녀는 있지 않았어. 없어졌다고 하더군. 꺼졌단 말이야, 훌쩍.
어쩌면 내가 전화하더라도 키키는 없다고 하기로 했었는지도 몰라. 그건
알 수 없지.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어떻든 간에, 그녀는 내 앞
에서 사라져버렸지."
"웨이터가 와서 접시를 거두고, 식후에 커피를 갔다 드릴까요, 하고 물었
다.
"커피보단 술을 좀더 마시고 싶군"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자넨 어때?"
"그러자구"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넉 잔째의 술이 왔다.
"오늘 낮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겠다?" 하고 고혼다 군이 말했다.
모르겠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줄곧 치과 의사의 조수 노릇을 했었지. 배역 구실을 익히기 위해서지.
지금 TV의 연속 드라마에서 치과 의사 역을 맡고 있거든. 내가 치과 의사
이고 나카노 요시코가 안과 의사란 말이야. 두 병원이 같은 읍내에 있는데
말이지. 소꿉동무인데, 좀처럼 잘 어울려지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 흔히
있는 이야기지만, 어차피 TV드라마라는 건 다 흔히 있는 이야기 아닌가.
본 적이 있나?"
"본 적이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TV같은 거 보지 않거든, 뉴스밖엔. 뉴스도 주에 두어 번밖엔 보지 않
지."
"현명하군." 고혼다 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쓰잘 데 없는 프로야. 나 자신이 출연하지 않았다면 나도 절대로 안 보
지. 하지만 인기는 있어. 정말이지, 굉장히 인기가 있다구. 흔히 있는 이야
기라는 건 민주의 지지를 받거든. 매주 투서가 잔뜩 몰려들지. 전국의 치과
의사들이 편지를 보내온단 말이야. 손놀림이 다르다느니 치료법이 잘못됐
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하고 그러한 세세한 항의를 해온다구. 이러한 적당
주의의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신경질이 치민다느니 하고 말야.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 아닌가. 안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말야, 의사라든지 학교 선생님의 역이라면 언제나 나를 지명한
다 그 말씀이야. 의사역만도 수없이 했지. 해본 적이 없는 건 항문과 의사
정도이지. 그건 TV영상이 좋지 못하거든 수의사가지도 했지. 산부인과 의
사도 했지. 학교 선생님도 전체 교과를 했다구.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
만, 가정과 선생마저 했지. 왜 그럴까?"
"신뢰감을 가질 수 있어서 그렇지 않겠나?"
고혼다 군은 끄덕였다. "필시 말이지. 필시 그렇겠지. 예전에 중고차 세
일즈맨 역을 한 적이 있어. 한쪽 눈이 의안이고, 무척 넉살이 좋은 역이지.
나는 굉장히 그 역이 좋았지. 보람도 있었고. 잘 해냈다 싶었지. 하지만 글
렀어. 투서가 잔뜩 몰려들지 않겠나. 나한테 그런 역을 시키는 건 너무한
다, 가엾지 뭐냐고 말야. 나한테 이런 역을 시킨다면 이젠 그 프로그램 스
폰서의 상품은 사지 않겠노라고 그러지 않겠나. 뭐였더라, 그때의 스폰서
는? 라이온치약이라던가 그랬지 아마, 아니지 선스타였던가, 잊어버렸어.
하지만 어떻든 도중에서 내 역은 꺼져버렸다구. 소멸했단 말야. 제법 중요
한 역이었는데도, 자연소멸을 했지. 재미있는 역이였는데 말야... 그 후로
의사와 선생의 연속이라구."
"복잡도 한 인생이군 그래."
"혹은 단순하기도 한 인생" 하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글쎄,
오늘은 그 치과 의사한테서 조수 노릇을 하면서, 의료 기술 공부를 하고
있었지. 벌써 몇 번이고 거기에 다니고 있어. 기술도 퍽 향상됐어. 정말이
야. 선생님도 칭찬해 주시지. 사실 말이지 단순한 치료정도는 할 수 있게끔
됐어. 아무도 나라는 걸 알지 못해. 마스크하고 있으니깐 말야. 하지만 말
이지, 나하고 이야기하면 환자들은 모두가 굉장히 여유로워진단 말이야."
"신뢰감" 하고 나는 말했다.
"응"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나도 나 자신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그
러한 일을 하고 있을 때면, 나 자신도 굉장히 편안해진단 말일세. 나는 정
말로 의사라든지 선생님이라든지 적성이 맞지 않을까 하고 나 자신 곧잘
생각해. 현실적으로 그러한 직업에 종사했던들, 나는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있을 수 있었잖나 하고 말이지. 그건 별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단 말이야.
되려고 생각하면 될 수도 있었단 말이야."
"지금도 행복하잖나?"
"어려운 문제야"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그리곤 집게 손가락 끝을 이
번엔 얼굴 한복판에다 대었다. "요컨대 신뢰감의 문제란 말이야, 자네 말대
로. 자신이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지 어떤지 하는 것, 시청자들은 나를 신
뢰해 주지. 하지만 그건 허상이야. 그저 그런 이미지일 뿐. 스위치를 끊고
영상이 꺼져버리면, 난 제로야. 안 그래?"
"응."
"하지만 지금만 해도 연기하고 있는 자내라는 건 언제나 존재하고 있지
않나?"
"가끔가끔 몹시 지쳐버린다구, 그런 것에"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굉
장히 지치지. 두통이 난다고, 진짜 자기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게 되지. 어
느 것이 내 자신이고 어느 것이 등장 인물인지 말이지. 자기를 잃어버리는
수가 있어. 자기와 자기 그림자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게 돼버리지."
"누구든 많건 적건 그런 거야. 자네뿐만은 아니지"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 그건 알고 있단 말일세. 누구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
지. 다만 내 경우, 그러한 경향이 너무나 강하단 말이야. 그 뭐랄까, '치명
적이란 말이야'. 예전부터 줄곧, 솔직히 말해서 자네가 부러웠었지."
"내가?"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잘 모르겠는 걸. 도대체가
나의 어디가 부럽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데."
"그 뭐랄까, 자네는 늘 혼자서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
였어. 타인이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그런 건 별로 생각
지 않고, 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쉬운 식으로 하고 잇는 것처럼 보였어.
확고한 자기라는 것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는 스카치 워터가
담긴 잔을 약간 위로 치켜들고, 그것을 투시해보았다. "여보게, 나는 언제
나 우등생이었지. 철이 들 즈음부터 줄곧 그랬었단 말일세. 성적도 좋았지.
인기도 있었지. 겉보기도 좋았지. 교사들에게도 부모에게도 신뢰를 받았지.
언제나 학급의 리더였지. 운동도 능했지. 내가 배트를 휘두르면, 언제나 롱
히트가 된단 말이야. 그런 심정이란 알지 못하겠지?"
알지 못하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야구 시합이 있으면, 다들 나를 부르러 왔었지. 거절할 수도 없
었어. 변론 대회가 있으면, 반드시 내가 대표가 됐지. 선생님이 날더러 하
라고 했어. 거절할 수가 없었지. 하면 우승했어. 학생회장 선거가 있으면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지. 다들 내가 나설 줄로 알고 있단 말이야. 테스트
에서도 내가 좋은 성적을 얻을 주로 다들 예상하고 있었지. 수업중에 어려
운 문제가 나오면, 선생님은 대개 나를 짚어서 질문을 했지. 지각 한 번 하
지 않았지. 전혀 나 자신이라는 건 없는 거나 다름없었지. 다만 그저 그러
는 게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걸 해왔을 뿐이야. 고교 시절도 그랬었
지. 대동소이했지. 그렇지. 자네하고 고교가 달랐었지. 자네는 공립의 고교
로 가고, 난 사립의 수험교로 갔었거든. 난 고교 시절엔 축구부로 들어갔다
구. 수험교이긴 했지만, 축구부는 꽤나 강했었지. 조금만 잘했더라면 전국
대회에 나갈 뻔도 했었다구. 중학교 때하고 대개 같았어. 이상적인 고교생
이었었지. 성적도 좋겠다. 스포츠도 만능, 리더쉽도 있겠다. 인근의 여고 여
자아이들의 동경의 표적이었어. 연인도 있었다구. 예쁘장한 아이였지. 늘
축구 시합을 응원하러 와주었는데, 그래서 서로 알게 됐거든. 하지만 그건
하지 않았지, 페팅뿐. 그녀의 집에 놀러 가서, 부모가 없는 사이에 손으로
한단 말야. 서둘러 말야. 하지만 그걸로도 재미 있었어. 도서관에서 데이트
했지. 그림에 그린 것 같은 고교생이었지. NHK의 청춘물 같은 거."
고혼다 군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는 약간 양상이 달라졌지. 분쟁이 있었지. 전공투. 당
연히 내가 또 리더 격이 되었지. 움직임이 있는 곳, 반드시 내가 리더가 되
거든. 뻔한 일이야. 바리케이드를 봉쇄하고, 여자와 동거 생활 하고, 마리화
나를 빨고, 딥 퍼플을 듣고. 그 무렵, 다들 그런 짓들을 하고 있었지. 기동
대가 들어오고, 좀 유치장 신세도 졌지. 그리곤 할 일이 없어져서, 같이 살
던 여자를 따라 연극이라는 걸 해보았어. 처음엔 장난 삼아 했었지만, 하고
있노라니까 차츰 재미나지 않겠나. 신참이었지만, 좋은 역도 맡겨 주더군.
나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지. 무엇인가 연기한다
는 재간이 있었던가 봐, 자연 그렇게 됐지. 한 2년 하고 있노라니까, 제법
인기가 있어지더군. 그 무렵엔 제법 짓궂은 짓도 했지. 퍽도 술을 마셨고,
한껏 여자와 잤지. 하지만 다들 그 무렵엔 그런 짓들을 했었다구. 영화회사
사람이 와서, 영화에 나가보지 않겠냐고 하더군. 흥미다 있었으니까 나가
봤지. 나쁜 역은 아니었어. 다치기 쉬운 고교생 역이었지. 이내 다음 역이
왔겠지. TV에서도 요청이 왔어. 나머지는 뻔할 뻔자야. 바빠져서 극단을
그만 뒀지. 그만 둘 때에 당연히 옥신각신 한 번 했었지. 하지만 하는 수
없었어. 언제까지 전위연극을 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나. 난 좀더 크고 넓
은 세계에 흥미가 있었거든. 그리고 현재 요 모양이란 말일세. 의사와 교사
와 스페셜리스트. 광고엔 두군데 나가고 있어. 위장약과 인스턴트 커피. 이
것이 그 '크고 넓은 세계' 라는 셈이지."
고혼다 군은 한숨을 쉬었다. 아주 매력적인 시늉의 한숨이었는데, 그래도
한숨은 한숨이었다.
"그림에 그린 것 같은 인생, 그런 것 같지 않나?"
"그렇게 그림으로 그리지 못하는 사람도 잔뜩 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긴 말이지" 하고 그는 말했다. "행운이었다는 건 나 자신이 인정해.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것만 같은 느낌이야. 그래
한밤중에 문득 잠이 깨어 그렇게 생각하면, 난 참을 수 없이 두려워진단
말이야. 나라는 실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난 연신 내 앞에 돌아
오는 배역을 다만 그저 부족함이 없이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 아니냐 하는
느낌이 든다구. 나는 결국 주체적으로 어느 것 하나도 선택하지 못했어."
나로선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겠다는 느낌이었
다.
"너무 내 이야기만 하는 것 같군."
그렇지도 않다, 고 나는 말했다. "말하고 싶을 땐 실컷 말하는 게 좋다
구. 퍼뜨리진 않을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한다구." 고혼다 군은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난 처음부터 자네에 대해선 신용하고 있어. 어째선지는 몰라. 하지만 그
렇다구. 자네에게라면 이야기 할 수 있거든. 안심하고 말야. 누구한테나 이
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아니야. 거의 아무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구.
헤어진 여편네하곤 이야기했지 굉장히 솔직하게. 우리는 곧잘 이야기를 했
지. 우리는 잘해 나갔더랬어. 서로 이해도 했고, 서로 사랑하고도 있었지.
주의의 놈들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기까진 말야. 나하고 그녀하고 단 둘이
라면, 지금이라도 훨씬 더 잘돼 나갔을 거야. 하지만 그녀한텐 정신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데가 있었거든. 그녀는 딱딱한 가정에서 자라났거든. 가족
한테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었지. 자립하지 못했었지. 그래서 난... 아니지,
이야기가 너무 비약되는 것 같군.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네가 상대라면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그걸세. 다만,
내 이야기를 듣는 게 피곤하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란 말일세."
피곤하지 않다, 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과학 실험반 이야기를 했다. 늘 긴장해 있었다는 것. 꼬박꼬
박 실험을 제대로 잘 마치려고 했었다는 것. 그러는 동안, 내가 태연하게
내 신념대로 작업을 해내고 있는 모양이 부러웠었다는 것.
하지만 중학교의 과학 실험 시간에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하
는 건, 나로선 전연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이 부럽다는 것인지, 전
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건, 그가 굉장히 솜씨 좋게 작
업을 해내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버너에 불을 당기거나, 현미경
을 세트하는 동작이 아주 우아했다는 것. 여자아이들은 마치 기적을 목전
에 보고 있는 것처럼 말끄러미 그이 일거일동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 내가 태연하게 하고 있었던 건, 그가 어려운 것은 전부 해주었기 때문
이라는, 다만 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점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의 친지인 듯 싶은 사십 안팎의 옷매무새가 좋은 남자가
찾아와서, 그의 어깨를 탁 치고는, 어어, 이거 얼마만이냐, 고 했다.
번쩍번쩍하는 게 눈이 부시어 무심코 눈을 돌려버리고 싶을 만큼 멋들어
진 로렉스를 팔목에 끼고 있었다. 그는 최초에 5분의 1초 가량 핼긋 나를
보았는데, 나의 존재는 그저 그때뿐, 잊혀지고 말았다. 마치 현관 매트를
볼 때와 같은 그런 눈짓이었다. 비록 아르마니의 넥타이를 매고 있을지언
정, 내가 유명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로선 5분의 1초면 알 수 있다 말이다.
그와 고혼다 군은 얼마 동안 잡담을 하고 있었다. "요즘 어때?" 라든가,
"아니, 바빠서 말야" 라든가, "또 며칠 중에 골프치러 가고 싶군" 이라든가,
그런 식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서 로렉스사나이는 탁 하고 또 고혼다 군
의 어깨를 치고는 "그럼 또 보세" 하고 가버렸다.
그 남자가 가버리자 고혼다 군은 5밀리 가량 눈썹을 찌푸리고나서, 손가
락 두 개 치켜세우고 웨이터를 부르더니, 계산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계
산서가 오자 아무것도 보지 않고 거기에 볼펜으로 사인을 했다.
"사양할 것 없다구. 어차피 경비이니까" 하고 그는 말했다.
"이건 돈도 아니란 말이야. 경비라니까."
고맙게 잘 먹었다, 고 나는 말했다.
"잘 먹긴 뭘 잘 먹어. 경비란 말야." 그는 표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