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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혼다 군과 나는, 그의 메르세데스를 타고, 아자부의 뒷골목에 있는 어
느 바로 술 마시러 갔다. 거기 카운터의 구석 쪽에서 우리는 칵테일을 몇
잔씩 마셨다. 고혼다 군은 술이 센 듯, 아무리 마셔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말투에나 표정에나 변화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 이 이
야기 저 이야기를 했다. TV방송국이 얼마나 시시한가에 대해서. 감독이 얼
마나 머리가 나쁜가에 대해서. 구토를 할 것만 같은 상스러운 탤런트들에
대해서. 뉴스 쇼에 나오는 엉터리 평론가에 대해서. 그의 이야기는 퍽 재미
있었다. 표현이 생생하고 관찰은 신랄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내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했다. 자네는 어떤 인생을
더듬어 왔을까, 하고. 그래서 나는 내 이생을 대충 대충 끄집어내어 말했
다. 대학을 나와 가지고, 동료하고 사무소를 열고 광고랑 편집일을 했다는
것. 결혼했다가 이혼했다는 것. 하는 일은 잘 돼갔지만, 사소한 일로 해서
그곳을 그만두고, 지금은 자유기고가를 하고 있다는 것. 대단한 금액은 되
지 않지만, 어차피 돈을 사용할 겨를도 없다는 것... 대충 대충 이야기하고
보면, 그것은 평온한 인생 같게도 느껴졌다. 어쩐지 나의 인생같지가 않았
다.
그러는 중에 바가 조금씩 붐비어서 이야기하기가 힘들어졌다. 그의 얼굴
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축들도 있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구" 하고 고혼다 군은 일어섰다. "바로 가까운 데이고,
아무도 없다구. 술도 있고."
그의 맨션은 바로부터 두세 번 모퉁이를 돌아선 곳에 있었다. 그는 메르
세데스 운전수에게 이젠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훌륭한 맨션이었다. 엘리
베이터가 두 개가 있고, 그 중 한 개에는 전용의 키가 필요했다.
"이 맨션은 이혼하고 집을 쫓겨났을 때에 사무소에서 사주었던 거야" 하
고 그는 말했다. "유명한 영화배우가 여편네한테 쫓겨나 빈털터리로 싸
구려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말씀이 아니거든. 이미지가 망가진단 말야. 물
론 내가 집세는 물고 있지. 형식으로선 내가 사무소로부터 여기를 임대 받
고 있는 셈이지. 집세는 경비에서 빠진다구. 그거 참 편리한거야."
그의 방은 맨 위층에 있었다. 널찍한 거실과 방 두 개, 게다가 부엌이 딸
려 있었다. 베란다가 있고, 거기서 도쿄 타워가 뚜렷하게 보였다.
가구의 취미는 나쁘지 않았다. 단순하고 청결하고 보기만 해도 값져보였
다. 거실 방바닥은 마루바닥인데, 그 위에 크기가 다른 페르시아 융단이 여
러 장 깔려 있었다. 어느 것이나 고상한 디자인이었다. 소파는 크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너무 부드럽지도 않았다. 커다란 관엽식물 화분이 몇 개
인가 시각적인 효과가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천장으로부터 드리워진 펜던
트 조명과 테이블 위의 스탠드는 현대인 분위기가 나는 것이었다.
장식품은 적었다. 사이드보드 위에 명나라 때 것으로 보이는 접시가 몇
개 진열돼 있을 뿐이다. 방안은 티끌 한점 없이 정돈돼 있었다. 아마 파출
부가 매일 청소를 하고 가는 것이리라. 테이블 위에는 건축 잡지가 놓여
있었다.
"좋은 방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촬영에 쓸 만하겠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느낌도 드는군"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다보면서 말했
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부탁하면 다들 이렇게 되지. 촬영 현장처럼 되
거든. 사진이 잘 받거든. 가끔씩 벽을 두드려 본다구. 종이로 발라붙인 벽
이 아닌가하고 말야, 생활의 냄새랄 것이 없거든. 겉보기뿐이란 말일세."
"그럼, 자네가 생활의 냄새를 내면 되잖어."
"문제는 생활이 없다는 걸세." 하고 그는 무표정한 소리로 말했다.
그는 B&O의 플레이어에 레코드를 얹고, 바늘을 내렸다. 스피커는 정다
운JBL의 P88이었다. JBL이 신령스러운 스타디오 모니터를 세계에 흩뿌리
기 이전의 시대, 아직 스피커가 정상적인 소리로 울리고 있던 시대의 멋들
어진 제품이었다. 그가 걸어놓은 것은 봅 쿠퍼의 낡은 LP였다.
"무엇이 좋지? 무엇을 마실래?" 하고 그가 물었다.
"아무거나. 자네 마시는 걸 마시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보드카와 토닉 워터의 병 몇 개와 아이스 페일에다
가 그득한 얼음과 절반으로 자른 레몬을 세 쪽,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우리는 시원하고 청결한 웨스트 코스트재즈를 들으면서 레몬 맛을
한껏 풍기는 보드카 토닉을 마셨다. 확실히 생활의 냄새란 것이 희박하군,
하고 나는 느꼈다. 무엇이 어떻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희박하단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희박하대서, 특별히 부자유스러운 건 없는 것 같았다. 요
컨대 사고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나로선 그것은 아주 안락한 방이었다. 나
는 기분 좋은 소파 위에서 느슨해져서 술을 마셨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었지" 하고 고혼다 군은 유리잔을 얼굴 위에 치
켜들고 천장의 불빛에 비쳐보면서 말했다.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의사도 될 수 있었지. 대학 때는 교직 과정도 이
수했었지. 일류 회사에 취업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됐어.
이런 생활, 묘한 거야. 눈앞에 카드가 주룩 줄지어 있었어. 어느 걸 집을
수도 있었지. 어느 걸 집거나 잘 될 것만 같았어. 자신은 있었어. 그래서
되려 고를 수가 없었어."
"카드 같은 거 본 적도 없었지"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고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아마 농담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는 두 번째 술을 유리잔에 따르고 레몬을 꾹 짜고는, 껍질을 쓰레기통
에 던져버렸다.
"결혼만 해도, 하다 보니 그렇게 됐지. 나하고 여편네는 영화에서 공연을
하면서, 어느 틈엔가 가까워졌지. 로케이션에서 함께 술도 마시고, 차를 빌
려 가지고 드라이브도 하고 말이야. 영화가 끝난 후에도, 몇 번인가 데이트
를 했지. 주위에서도 우리는 잘 어울리는 커플이고, 결혼을 할 거라고들 생
각했었지. 결국 물 흐름에 밀리듯 결혼했었지. 자네로선 이해가 안 갈지 모
르지만, 여긴 정말 좁은 세계란 말이야. 뒷골목 안의 연립에서 살고 있는
거나 다름 없다구. 한번 물 흐름이 형성되기만 하면, 그건 완전히 현실적인
힘을 띠게 된단 말일세.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선 정말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 그 아이는 내가 이 인생에서 손에 넣은 것 중에선 제일 알찬 것의
하나였지. 결혼하고나서 난 그 사실을 인식했어. 그리고 나는 어김없이 그
녀를 내것으로 만들려고 했지. 하지만 글렀어. 내가 진정으로 그것을 골라
잡으려고 들면, 그것은 달아나고 만단 말이야. 여자도 그렇고, 배역도 그렇
고, 저쪽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나는 최고로 잘 다룰 수가 있어. 하지만
나 스스로 요구하면, 모두 다 내 손가락 사이로부터 쓰윽 빠져 달아나고
만단 말일세."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둡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하고 그는 말했다.
"난 그녀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어. 그저 그것뿐이야. 가끔씩 이렇게 생각
한다구. 내가 배우를 그만두고, 그녀도 배우를 그만두고, 둘이서 한가하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말야. 패셔너블한 맨션도 필요없어.
마세라티도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착실한 일과 조그마한 가정이
있으면 그걸로 돼. 어린애도 갖고 싶고,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하
고 어느 목로집에 들러선 술을 마시며 불평을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
면 그녀가 있다. 월부로 시빅이나 스바루를 산다. 그런 생활, 잘 생각해 보
면 내가 바라고 있는 건 그러한 생활이었단 말일세. 그녀가 있어주기만 한
다면, 그걸로 돼. 하지만 글렀어. 그녀는 그것과는 다른 걸 바라고 있어. 가
족들이 다 그녀한테 기대하고 있어. 어머니는 전형적인 무대위의 인생이고,
아버지는 철저한 수전노란 말야. 오빠는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어. 아우놈은
늘 문제만 일으키고 있어서, 그 뒤치닥거리에 돈이 들고, 여동생은 가수로
서 한창 인기가 나는 중이었거든. 도저히 빠질 수가 없지. 그리고 그녀 자
신도 서너 살 때부터 그러한 가치관에 단단히 뿌리 박혀 있었고 줄곧 아역
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왔겠다, 조작된 이미지 속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나
나 자네하곤 전혀 다르지. 현실 세계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일세. 하지
만 아주 마음이 깨끗한 여자야. 굉장히 깨끗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지. 나로
선 그걸 알 수 있어. 하지만 글렀어. 어쩔 수도 없어. 보게나, 알겠어. 난
지난 달에 그녀하고 잤단 말일세."
"헤어진 부인하고?"
"그래. 이상하잖아?"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 하고 나는 말했다.
"이 방에 왔단 말일세. 어째서 왔는지는 모르겠어. 전화가 걸려왔는데,
놀러 가도 좋으냐고 하지 않겠어. 물론 좋다고 했지. 그래서 둘이서 예전처
럼 술을 마시고, 이야길 하고, 그리고 잤지. 굉장히 좋았다구. 그녀는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하더군. 난 당신하고 다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말했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빙그레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
고 있을 뿐이었지. 나는 평범한 가정 이야기를 했어. 아까 자네한테 이야기
한 그런 거 말일세. 그녀는 역시 빙그레 웃으면서 듣고 있을 뿐이었어. 하
지만 사실은 그런 건 전연 듣고 있지 않았던 거야. 처음부터 듣고 있지 않
았단 말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전연 반응이라는 게 없단 말이야. 그녀는
그저 쓸쓸해서 누군가의 포옹을 받고 싶었던 게야. 공교롭게 그 상대가 나
였을 뿐이란 말이야. 심한 말인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단 말일세. 그녀는
나나 자네하곤 전연 다르단 말이야. 누군가의 힘으로 해소해야 할 쓸쓸한
감정이 인 거야. 누군가가 해소해 주기만 하면 된단 말일세. 그러면 끝나는
거지. 거기서부터 더는 나가지 않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
레코드판이 다 돌아 음악이 끝나고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는 바늘을 떼
고,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자를 부를까?"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난 아무래도 괜찮아. 자네 좋을대로 하자구" 하고 나는 말했다.
"돈을 주고 여자와 잔 적은 있나?" 그가 물었다.
없다, 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 없었는 걸"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고혼다 군은 어깨를 움추리고, 거기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밤은 나하고 사귀는 게 좋지" 하고 그는 말했다.
"키키하고 함께 왔던 여자아이를 부르겠어. 그녀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몰라."
"자네 하자는 대로 하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설마 이건 경비로
빠지진 않겠지?"
그는 웃으면서 유리잔에 얼음을 넣었다. "믿지 않을는지 모르겠지만, 빠
진다구, 그게. 그런 시스템으로 돼 있거든. 파티 서비스 회사라는 간판이고,
제법 정확한 그러면서도 좀 화려한 영수증을 끊어준단 말일세. 조사를 한
다 해도 간단하게 알 수 없는 복잡한 장치로 돼 있거든. 그리고 여자하고
잔다는 일이 바로 접대비가 된다, 굉장한 세상이 됐지."
"고도 자본주의 세계"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아이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나는 문득 키키의 참 좋은
귀를 생각하고, 고혼다 군에게 키키의 귀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그는 나를 보았다. "아니, 본 적이 없
는 걸. 본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귀가 어떻단 말이지?"
별 것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아이 둘이 찾아온 것은 열두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그 하나는 고혼
다 군이 "대단해"라고 표현한, 키키하고 콤비를 짜고 있던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확실히 '대단한' 여자였다. 어딘가에서 문득 만나 그때는 서로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줄곧 만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던 것 같은,
그런 타입의 여자아이였다. 남자의 영원한 꿈을 일깨워 주는 것 같은 그런
여자아이. 몸치장이 요란하지가 않았다. 기품이 있다. 그녀는 트렌치 코트
밑에 녹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지극히 보통의 울 스
커트. 장신구는 조그마하고 심플한 귀거리뿐이었다. 품격이 있는 여자 대학
의 4년생이란 느낌이었다.
또 한 사람의 여자아이는 시원한 색깔의 원피스를 걸치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창부가 있다는 사실은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있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역시 아주 매력적인 아이였다. 손발이 날렵하
고,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였다. 지난 주에 줄곧 괌으로 수영하러 가 있었
다고 했다. 짧은 머리칼을 다시 머리핀으로 단정하게 고정시켰다. 그녀는
은 브래스래트를 달고 있었다. 몸놀림이 활달하고, 살갗이 매끄러운 육식수
처럼 우아하게 꽉 죄어져 있었다.
그네들을 보고 있자니까 나는 문득 고교 시절의 동창회가 떠올랐다. 정
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어느 쪽 타입의 여자아이건 하나쯤씩은 어김없이
동창회에 있는 법이다. 예쁘장하고 품위가 있는 여자아이와 활동적이면서
도 규율이 있는 느낌을 주는 매력적인 여자아이. 꼭 동창회 같구나, 하고
나는 느꼈다. 동창회가 끝난 다음, 긴장이 풀린 다음, 마음 맞는 끼리끼리
가 2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싱겁기 짝이 없는 연
상이지만, 참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고혼다 군이 편안하다는 의미가 무
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이전에 그 어느 쪽과도 함께 잔 적이 있는 듯, 여자아이들도 그도
격의 없이 인사를 했다. "여어"니 "잘 있었어?" 하는 그런 느낌. 고혼다 군
은 나를 중학교 동급생이며, 현재는 글쓰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
개했다. 잘 봐 주세요, 하고 여자아이들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요, 다들 친구인 걸요, 하는 느낌의 미소였다. 현실 세계에선 그다지 흔히
볼 수 없는 종류의 미소다. 잘 봐 주시오, 하고 나도 말했다.
우리들은 방바닥에 앉기도 하고, 소파에 뒹굴기도 하고, 브랜디 소다를
마시고, 조 잭슨이랑 알렌 파슨즈 프로젝트의 LP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이
야기를 했다.
제법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우리는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으며, 여자아
이들도 즐기고 있었다. 고혼다 군은 안경을 낀 쪽 여자아이를 상대로 치과
의사 연기를 보여 주었다. 확실히 잘했다. 진짜 치과 의사보다도 치과 의사
다웠다. 재능이다.
고혼다 군은 안경을 낀 여자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소근거리는 소
리로 무슨 이야기인지를 했으며, 여자아이가 가끔씩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
러는 중에 화려하고 대단한 쪽 여자아이가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 와서
는 내 손을 잡았다. 제법 멋진 냄새가 났다. 가슴이 꽉차고 숨이 막힐 듯한
냄새였다.
정말 동창회 같구나, 하고 나는 느꼈다. 그 무렵에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
만, 사실은 당신이 좋았다구요. 어째서 날 유인해 주지 않았죠? 남자의, 소
년의 꿈. 이미지. 나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코끝으로 내 귀 밑을 더듬었다. 그 다음엔 내 목에다 입술을 대고, 부드럽
게 빨았다.
문득 알고 보니, 고혼다 군과 또 하나의 여자아이의 모습은 이미 뵈지
않았다. 필시 베드룸으로 갔을 게다. 조금만 더 불빛을 어둡게 하겠어? 하
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벽의 조명 스위치를 찾아서 끄고, 조그만 테이블
스탠드의 불빛만을 그냥 뒀다. 알고보니 레코드 대신 밥 딜런의 테이프가
걸려 있었다. 곡은 <잇 올오버 나우, 베이비 블루>였다.
"천천히 벗겨 줘요" 하고 그녀가 귀밑에서 속삭였다. 나는 하라는 대로
그녀의 스웨터랑 스커트랑 블라우스랑 스타킹을 천천히 벗겨 주었다. 나는
벗겨준 것들은 반사적으로 접어놓으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곤 그만뒀다.
그녀도 내 옷을 벗겼다. 아르마니의 넥타이랑, 리바이스의 블루진이랑,
티셔츠를. 그리고 조그만 브래지어와 팬티 바람으로, 내 앞에 섰다.
"어때요?" 하고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멋지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아주 예쁜 몸매를 하고 있었다. 아름
답고, 생명감이 넘치고, 청결하고, 섹시했다.
"어때요. 멋지죠?" 하고 그녀는 물었다. "좀더 자세히 표현해 주세요. 잘
표현한다면 굉장히 친절하게 해 드릴게."
"옛날 생각이 나게 해. 고교생 시절"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잠시동안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나
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좀 독특하네요"
"서툰 대답이었나?"
"전혀"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내 옆으로 와서, 내가 삼십 사년의
인생에서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것 같은 있을 해 주었다. 섬세하고 대담하
고 좀 간단하게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하지만 누군가가 생각해낸
것이란 말이다. 나는 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고,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그
것은 내가 이제껏 경험한 그 어느 섹스와도 다른 것이다.
"나쁘지 않죠?" 하고 그녀가 내 귀밑에서 속삭였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것은 멋들어진 음악처럼 마음을 위무하고, 육신을 상냥하게 풀어주었
으며, '시간'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거기에 있는 것은 세련된 친밀감이었으
며, 공간과 시간과의 평온한 조화이며, 한정된 형태에서의 완벽한 커뮤니케
이션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경비로서 빠진단 말이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밥 딜런은 무엇인가를 노래 부르고 있
다. 무엇이었더라, 이건? <하드 레인>이다. 나는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그녀는 힘을 빼고 내 팔 속에 들어왔다. 밥 딜런을 들으면서 경비로 대단
한 여자아이를 껴안는다는 것은 어째 좀 이상한 것이었다. 정겨운 1960년
대에는 이런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스위치를 누르면
모든 것은 꺼지고 만다. 3D의 성적 이미지. 섹시한 오데코롱 냄새와, 부드
러운 살갗의 감촉과, 뜨거운 입김.
내가 정해진 코스를 어김없이 더듬어 사정하고 나서 이윽고, 우리는 둘
이서 욕실에 가서 몸을 씻었다. 그리고 커다란 목욕 타월 바람으로 거실로
돌아와 브랜디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다이어스트레이츠인지 뭔지 하는 음악
을 들었다.
어떤 글 쓰고 있죠, 하고 그녀는 물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의 내용을 대
충 설명했다.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쓰는 것에 따라
서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하고 일이란, 이를테면 문화적 제설 작
업이란 말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하고 있는 건 관능적 제설 작업이라
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곤 웃었다. 보세요, 다시 한 번 둘이서 제설 작업을
하지 않을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융단 위에서 섞이었다. 이번엔 굉장이 간단하게, 그리
고 천천히. 심플한 형태를 취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어떻게 하면 나를 기쁘
게 해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을까,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커다랗고 길다란 욕조 속에 둘이서 나란히 드러누워서, 나는 그녀에게
키키에 대해 물어보았다.
"키키" 하고 그녀는 물었다. "다정한 이름이네요. 당신 키키를 알고 있어
요?"
나는 끄덕거렸다.
그녀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후욱 하고 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젠 있지 않아요. 그 사람 돌연 사라졌대요. 우린 제법 사이가 좋
았더랬어요. 가끔씩 둘이서 함께 쇼핑을 가기도 하고요, 술도 마시고 했죠.
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돌연 없어져버렸죠. 한 달 전이던가, 두 달 전이던
가. 하지만 그런 거 그닥 드문 일 아니잖아요? 이런 직업이란 퇴직원 낼
필요도 없고, 그만두고 싶으면 잠자코 훌쩍 그만둬버리거든요. 그녀가 없어
져버렸다는 건 유감이에요. 하지만, 하는 수 없지요. 걸 스카우트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길고 깨끗한 손가락으로 나의 아랫배를 만지고 살며
시 페니스를 건드렸다. "키키하고 자본 적 있어요?"
"예전에 얼마동안 함께 살았었지. 한 4년 전에."
"4년 전이라" 하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퍽도 옛날 이야기 같군요. 4
년 전엔 난 아직 얌전한 여고생이었어요"
(어떻게 좀 키키하고 만날 수 없을까?)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어려운 걸요. 정말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단 말예요. 지금도 말한 것처럼 그저
없어져버렸는 걸요. 마치 벽 속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단서랄 것 하나 없고, 찾
을래야 찾을 방도도 없을 것 같아. 당신 키키의 지금도 좋아해요?)
나는 탕 속에서 몸을 느리게 펼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도 키키를
좋아하는 걸까?
(모르겠는 걸. 하지만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난 아무래도 그녀하고 만나지 않
으면 안 되겠어. 키키가 날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어. 줄곧 그
녀의 꿈을 꾸어대고 있거든.)
(별일이야)하고 그녀는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나도 가끔씩 키키의 꿈을 꾸어요.)
(어떤 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듯 미소를 머금었을 뿐이었다. 술을 마시
고 싶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거실로 돌아와 방바닥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술을 마셨다. 그녀는 내
가슴에 기대고, 나는 알몸인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있었다. 고혼다 군과 그의 상
대 여자아이는 잠들어버렸는지 전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보세요, 믿지 않을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신하고 이렇게 하고 있는 거 즐거워
요. 정말이에요. '직업'이니 '연기'니 그런 것과 관계없이 즐거운 거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이거 믿어줄래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믿는다구)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이러고 있으면 아주 즐거워. 편안하고 여유
롭다구. 어쩐지 동창회 같아.)
(당신도 역시 독특해)하고 그녀는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키키말이지만)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도 알지 못한단 말인가. 그녀의 주소라
든가, 본명이라든가, 그런 거?)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 그런 거 거의 얘기하지 않는 걸요. 다
들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고 산다구요. 키키라든가 말야. 나는 메이. 또 한 아이
는 마미. 다들 가나가나의 두 글자예요. 사생활 같은 거, 다들 알지 못하며, 그런
건 묻지 않거든요. 상대방이 저 자신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묻지 않거든요, 예
의상. 사이는 좋아요, 제법. 함께 놀러가기도 하고. 하지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
지 알지 못하죠. 나는 메이이고, 그녀는 키키일 뿐이거든. 우리들에겐 현실은 없
단 말예요. 우리들은 그 뭐랄까, 그저 그런 이미지예요. 허공에 떠 있는 거죠. 두
둥실. 이름 같은 거 환상에 붙여진 그저 그런 기호이죠. 구래서 우리들도 되도록
이면 서로의 이미지를 존중하려고 해요. 그런 거 이해돼요?)
(이해되지)하고 나는 말했다.
(손님중에 우리들한테 동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건 아니거든요. 돈 때문
에만 이런 일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들도 이러고 있을 때, 제법 즐기고
있단 말예요. 우리네 클럽은 엄밀한 회원제라서 손님의 질도 좋겠다. 다들 우리
들을 즐겁게 해주고요, 우리들도 그 이미지의 세계를 즐기고 있거든요.)
(즐거운 제설 작업) 나는 말했다.
(그래, 즐거운 제설작업)하고 말했다. 그리곤 내 가슴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가끔가끔 눈 던지도 하고.)
(메이)하고 나는 말했다. (예전에 진짜 메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있었지. 내
사무소 옆 치과 의사에게서 접수를 보고 있었지. 훗카이도의 농가 출신의 여자
아이였지. 염소 메이라고 다들 불렀었지. 살갗이 검고 여위었었지만. 좋은 아이
였어.)
(염소 메이)하고 그녀는 되풀이했다. (당신 이름은요?)
(곰의 푸우)하고 나는 대답했다.
(동화 같네요.) 그녀는 말했다. (최고. 염소 메이하고 곰의 푸우.)
(동화 같군)하고 나도 말했다.
(키스해줘)하고 메이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했다. 멋진 키스였다.
정다운 키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몇 잔 째인지 모르게 브랜디 소다를 마시고,
폴리스의 레코드를 들었다. 폴리스, 또 시시하기 짝이 없는 밴드 명칭. 어째서
폴리스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
안에, 그녀는 내 팔 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고 말았다. 내 팔안에서 잠들어 있
을 때의 메이는 이미 대단한 여자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나 있
는 그기 보통의 다치기 쉬운 소녀처럼 보였다. 동창회 같군, 하고 나는 또 생각
했다. 시계는 벌써 네시를 지나고 있었다.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염소 메이와 곰의 푸우. 그저 그런 이미지. 경비로 빠져지는 동화. 폴리스. 또
다시 기묘한 하루. 연결될 듯하면서도 연결되지 않는다. 염소 메이와 서로 알게
되었다. 그녀와 잤다. 썩 좋았다. 나는 곰의 푸우가 되었다. 관능적 제설작업. 하
지만 어디에도 당도하지 못했다.
내가 부엌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자니까, 나머지 세 사람이 잠에서 깨어 밖으
로 나왔다. 아침 여섯 시 반이었다. 메이는 욕의를 입었다. 마미는 고혼다 군의
베이드리의 파자마 윗도리만을 걸치고, 고혼다 군은 아랫도리를 걸치고 있었다.
나는 블루진에 티셔츠를 입었다. 우리들은 넷이서 식탁을 둘러싸고 커피를 마셨
다. 빵도 구워 버터랑 마말레이드와 함께 먹었다. FM에 <바로크음악을 그대에
게>가 걸려 있었다. 헨리 퍼셀 캠프의 아침 같았다.
(캠프의 아침 같군)하고 나는 말했다.
(어쩜!)하고 메이가 말했다.
일곱시 반에 고혼다 군은 전화로 택시를 불러 여자아이를 돌려보냈다. 돌아갈
때, 메이는 나에게 키스했다. (만일 잘 되가지고 키키를 만나거든 내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해주세요, 네)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슬쩍 그녀에게 명함을 건
네주고, 만일 무엇이건 알게 된다면 전화를 걸어 달라고 했다. 그녀는 그러겠노
라고 했다.
(또 기회가 닿으면 함께 제설 작업해요)하고 메이는 한쪽 눈을 감고 말했다.
(제설 작업?)하고 고혼다 군이 말했다.
둘이만 남자, 우리는 다시 한 잔씩 커피를 마셨다. 내가 커피를 끓였다. 나는
커피 끓이는 솜씨가 있다. 소리도 없이 태양이 솟아오르고, 도쿄 타워가 눈부시
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까, 예전의 네스카페의 광고를 떠올렸
던 것이다.
착실한 사람들은 회사며 학교를 향해 서두르고 있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우리
는 그렇지 않았다. 대단히 프로페셔널한 여자아이와 하룻밤을 즐기고, 멍청하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필경 이제부터 푹 잠을 자리라. 좋아하건 싫어하
건 어떻든,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우리들은-나와 고혼다 군은 -극히
보통 세상의 생활 양식으로부터는 벗어나 있었다.
(오늘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고혼다 군이 머리를 내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자겠어.) 내가 말했다. (특별한 스케줄은 없어.)
(난 이제부터 한잠 자고, 낮에 누구를 만나. 의논할 게 있거든)하고 그는 말했
다. 그리고 얼마동안, 우리는 잠자코 또 도쿄 타워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재미있었어?)하고 고혼다 군이 물었다.
(재미있었어)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훌쩍 사라져버렸대. 자네 말대로. 단서랄 것도 없
고. 제대로 된 이름마저 알지 못해.)
(나도 영화회사 축들에게 키키 소식을 좀 물어보겠어)하고 그는 말했다. (잘하
면 뭣 좀 알게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는 약간 입술을 찡그리고, 스푼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차망)하고
여자아이들이라면 말할 게다.
(보게, 그런데 자넨 키키를 만나 가지고,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지?) 그가 물
었다. (옛정을 회복하겠다든가, 그런 건가? 아니면 회포를 물겠든가 그것뿐?)
(모르겠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나로서도 알 수 없다. 만나서 어떻게 할지
는 만나고 나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고혼다 군은 그의 티 한점 없는 다색 마세라티로 나를 시
부야의 아파트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택시로 돌아가겠노라 했지만, 그는 가깝
다면서 끝내 바래다주었던 것이다.
(가까운 동안에 또 전화해서 불러내도 괜찮을까?)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하고
이야기를 하니 즐거웠어. 나한텐 제대로 이야기할 만한 상대가 없단 말일세. 자
네만 괜찮다면, 가까운 동안에 또 만나고 싶은데 말야. 그래도 좋을까?)
(물론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스테이크와 여자아이에 대한 고맙다는 말
을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말이 없어도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