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6)

       20

  그러고서 며칠  동안은 별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매일 몇몇 건  일 관계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나는 줄곧  부재자 전화 음성을 넣어둔 채 응답하지 않았다. 

나의 인기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식사를  직접 해 먹고, 시부야  거리로 나가서 매일  한 번씩<짝사랑>을 

보았다. 봄방학이었으므로 영화관은  만원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제법  붐비고 있

었다. 관객은 거의 고교생  아니면 중학생이었다. 참다운 성인 관객이라곤 나 하

나뿐이었다. 그들은 주연의 여자아이나, 우상인 가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영화관

으로 찾아온 것이지, 영화의 줄거리나 질이 어떤가  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

었다. 그들은 예의 스타가  등장하면 와아 와아 목청을 돋구어 아우성을 쳐댔다. 

야견 수용장 같은  소란이었다. 스타가 등장하지 않을 떼엔, 다들  꿍적 꿍적, 부

스럭 부스럭 소리를  내어 무엇을 먹거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저 ㅅㅅㅅㅅ거야

아) 또는 (너어구나아) 하고들 소리를 지르곤 했다. 영화관을  통째로 불태워버리

면 속시원하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짝사랑>이 시작되자, 나는 타이틀의  크레딧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분명 키

키라는 이름이 조그맣게 들어 있었다.

  키키가 나오는 장면이  끝나자마자, 나는 영화관에서 나와 거리를 서성거렸다. 

언제 나와 대략  같은 코스였다. 하라주쿠로부터 신궁구장,  아오야마 묘지, 오모

테산도, 진탄빌딩, 시부야. 도중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는 수도 있었다.

  지상엔 확실히 봄이 와 있었다. 정다운 봄의 냄새가 났다. 지구는 참을성 있게 

태양의 주위를 계속 공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신비, 나는 겨울이 끝나고 이

렇게 같은 봄 냄새가 나는 것일 까고. 매년  매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이 냄새가 

난다. 아주 미묘하고 희미한 냄새이긴 하지만, 언제나 같다.

  거리에는 선거 포스터가 넘쳐  있었다. 어느 것이고 다 추악한 포스터였다. 선

거 연설의 차량도 돌아  치고 있었다. 무슨 말들을 지껄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

다. 그저 시끌시끌할  뿐이다. 나는 키키 생각을 하면서, 그런  거리 거리를 계속 

걸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조금씩 자신의 발이 움직임을 되찾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발걸음이 가볍고, 확실해졌으며, 그럼에  따라서 머리의 움직임도 이전엔 

없었던 예민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은 앞으로 나가고 있단 말이다. 

나는 목적을 가졌으며, 그럼으로써 극히 자연스럽게  걸음걸이를 터득해 왔던 것

이다. 나쁘지 않은 징후였다.  춤춘단 말이다, 하고 나는 느꼈다. 이것 저것 생각

해도 소용없다.  어떻든 제대로 스텝을 밟고,  자신의 체계를 유지할  것. 그리고 

이 흐름이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주의 깊게 계속 주시할  것. '이쪽 세계'에 

머물러 있을 것.

  삼월 하순의 너덧새가 그런 식으로 아무  일없이 흘렀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나는  쇼핑을 하고, 부엌에서 조촐한  식사를 준비하고, 영화관에 

가서 <짝사랑>을 보고, 긴  산책을 하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부재자 전화를 플

레이백 해보았으나, 들어 있는  건 일에 관한 용건의 관한 용건의 전화뿐이었다. 

밤에는 혼자서 책을 읽고 술을 마셨다. 날마다 비슷비슷한 되풀이었다.

  이럭저럭하는 중에 엘리어트의 시와 카운트베이시의 연주로 유명한 사월이 찾

아왔다. 밤중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노라면, 염소 메이와의 섹스가 문득 떠올랐

다. 제설 작업. 그것은 기묘하게 독립된 기억이었다. 어디에도 연결돼 있지 않다. 

고혼다 군에게도, 키키에게도,  그 아무것에도 연결돼 있지  않다. 그것은 굉장히 

사실적인 꿈인 것처럼 느껴졌자. 자잘한 데까지 생생하게 떠올려지는 데도, 어떤 

의미에선 현실보다도 선명한데도,  결국은 아무것에도 연결돼 있지  않는 사실적

인 꿈. 하지만 그것은 나에겐 아주 바람직한 사건인 것처럼 여겨졌다. 아주 한정

된 형태로서의 마음의  사귐. 둘이서 힘을 합쳐 가지고 환상이건  이미지이건 그

것을 존중한다는 것. (괜찮아요, 우리들 모두 친구이니까)하는 그런 미소. 캠프의 

아침. 어쩜!

  키키는 고혼다 군과 어떤  모양으로 잤을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그녀도 역시, 

메이와 마찬가지로 고혼다  군에게 굉장히 섹시한 서비스를 해주었을까? 그러한 

서비스는 그 클럽에 소속한  여자아이들 모두가 직업상의 기본 기술로서 터득한 

노하우일까, 아니면 그건 어디까지나 메이의 개인적인  것일까? 나로선 알 수 없

다. 고혼다 군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나하고 살고  있었을 때, 키키는 섹스에  대해선 수동적이었다. 내가 껴안으면 

그녀는 거기에 따뜻하게  응대해 주었지만, 결코 자진해서 요구하거나, 적극적으

로 무엇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의 포옹을 받았을 때, 키키는 몸의 힘을 빼

고, 아주 느슨해 가지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섹스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느슨한 그녀를 껴

안고 있는  것은 멋들어진 일이었으니 말이다.  부드러운 몸뚱이와, 편안한 숨쉼

과, 따뜻한 성기와.  나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녀가 누구에겐가-예컨

대 고혼다  군에게 -적극적인 완숙한 성적  서비스를 한다는 건, 나로선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나에게 상상력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창녀라는 것은 사생활과  영업용의 섹스를 어떻게 분간해서 사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나에겐 어림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고혼다 군에게도 말한 것처럼, 이제

까지 창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키키와는 잤다. 

키키는 창녀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말할  것도 없고 창녀로서 키키와  잔 게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키키와  잤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창녀로서의 메

이와는 잤지만, 개인으로서의 메이와는 잔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 두 경우를 대

조해 본다 하더라도, 아마  의미가 없을 게다. 집착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

려운 문제였다.

  도대체 섹스라는 것은  어디까지가 정신적인 것이고, 어디부터가  기술적인 것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실상이고 어디부터가 연기일까? 충분한 전희

는 정신적인 것일까, 아니면 기술적인 것일까?  키키는 정말로 나와의 성교를 즐

기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그 영화 속에서 정말로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일

까? 아니면  고혼다 군의 손가락에 등허리를  애무당하고 정말로 도취해 있었던 

것일까?

  실상과 이미지가 혼란돼 있었다.

  예컨대 고혼다 군. 그의  의사로서의 모습은 그저 그런 이미지에 불과하다. 하

지만 그는 진짜의사보다는 훨씬 의사다워 보인다. 신뢰감을 가지게 한다.

  나의 이미지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일까?

  (춤추란 말이야)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그것도 잘 추란 말이야, 다들 감탄할 

만큼.)

  다들 감탄할 만큼, 이라면  나에게도 역시 이미지랄 것은 있는가 보다.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다  나의 이미지에 감탄하는 것일까?  아마 그렇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나의 실상에 감탄하거나 한단 말인가?

  졸렸다. 나는  개수대에서 컵을 씻고, 이를  닦고서 잤다. 눈을  뜨니 다음날이 

와 있었다. 하루 하루가 지나갔다. 벌써 사월이다. 사월의 초순. 트루만 카포티의 

문장처럼 섬세하고, 변하기 쉽고, 다치기 쉽고, 아름다운 사월 초순의 나날. 나는 

아침나절에 기노쿠니야에 가서,  싱싱한 야채를 샀다. 커피 콩도  샀다. 샌드위치

를 만들기 위한 훈제 상어도 샀다. 된장과 두부도 샀다.

  집에 돌아와서 부재자 전화의 플레이 백  해보니, 유키로부터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재미도 흥미도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열두 시에 다시  한 번 전

화해 볼 테니 집에 있으라구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탕 하고 전화를 끊었다. 탕 

하고 전화를 끊은 건 그녀에게 있어선 일종의 보디 랭귀지 같은 것이리라.

  시계는 열한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뜨겁고 진한 커피

를 끓였다.  그것을 마시면서 방바닥에 앉았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의 

신간을 읽었다. 벌써 10년쯤 전부터 그런 거 그만 사려고 생각은 했었지만, 신간

이 나오면  그만 사고 만다.  타성이라고 해버리기에는 10년이라는  것이 너무나 

긴 세월이다. 열두 시 오분에 전화가 걸려왔다. 유키였다.

  (안녕하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주 안녕하구요)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 뭘 하고 있죠?) 그녀는 말했다.

  (슬슬 점심을 만들까 하던 참이야. 싱싱한 상치하고 훈제 상어하고 면도날처럼 

얇게 썰어서 얼음물에 헹궈낸 양파하고 호스래디쉬 머스타드를 사용해서 샌드위

치를 만든다구. 기노쿠니야의 버터 프렌치가 훈제  상어의 샌드위치엔 질 맞는단 

말야. 잘만 하면  고베의 데르타데센 샌드위치 스탠드의 훈제 상어  샌드위치 비

슷한 맛이 나지. 잘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나 목표가 있고, 시행 착오가 있어

야 사물은 비로소 이룩되는 법이지.)

  (바보스러워.)

  (하지만 맛있지)하고 나는 말했다.

  (거짓말 같거든, 꿀벌한테 물어봐도 좋아.  클로버 꽃한테 물어봐도 좋아. 정말 

맛있다니까.)

  (뭐예요, 그거? 꿀벌하고 클로버 꽃이라는 건?)

  (예를 들면 그렇단 말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맙소사)하고 유키는 한숨 섞인 말로  말했다. (아저씬 좀더 어른이 되잖구. 이

젠 서른네 살이죠? 내 눈으로 봐도 좀 바보스러워요.)

  (사회화하라는 건가, 네가 말하는 건?)

  (드라이브 가고 싶어요)하고 그녀는 나의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오늘  저녁

은 시간이 나요?)

  (날 것 같아) 나는 생각한 다음에 말했다.

  (다섯 시에 아카사카의 아파트로 마중하러 와요. 장소는 기억하겠죠?)

  (기억하고 있어) 내가 말했다.  (그래 이것 봐, 그때부터 줄곧 거기에 있니,  혼

자서?)

  (네. 하코네  같은 데 돌아가서 아무것도  없는 걸요. 아무튼 산꼭대기에  있는 

텅 빈 집인 걸요. 그런 데로  혼자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여기 있는 게 더 재미

나요.)

  (엄마는 어떻게 됐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니?)

  (모르겠는 걸. 엄마가 뭘  하는지 연락한 번 없는 걸. 아직도 카트만두가  아닐

까? 그래서 말했잖아요. 그 사람의  일은 전연 신용할 수가 없다고요. 언제 돌아

올지 그런 거 모른다구요.)

  (돈은 어떻게 하고 있지?)

  (돈은 걱정  없어요. 현금 카드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거든요. 엄마의  현금 

카드를 지갑에서 한 장 꺼내 뒀어요. 그 사람 그런 거한 장쯤 없어져도, 전연 알

아채지 못하거든요. 나도 자기 방위하지 않음 죽고 마는 걸요. 그 사람은 비정상

이니깐요, 그 정도는 당연하죠, 뭐. 안 그래요?)

  나는 대답을 회피하고 멍청한 대꾸를 했다. (제대로 밥은 먹고 있나?)하고

  (먹고 있죠. 무얼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안 먹음 죽어버리잖아요?)

  ('제대로 된 걸' 먹고 있느냐 말이야.)

  유키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며 맥도날드며  데

일리 퀸이며 인스턴트 음식 그런 거. 그밖엔 따끈따끈한 도시락.....)

  잡종 인스턴트 음식.

  (다섯 시에 마중하러 가겠어)하고 나는 말했다. (뭐 좀 그럴싸한 걸 먹으러  가

자구. 그건 식생활로선 너무 너무 형편없어. 사춘기의 소녀는 좀더 제대로 된 걸 

먹어야 해. 그런 생활을 오래  계속하다간 어른이 된 다음 생리 불순이 돼. 어떻

게 되건 네 마음대로지  뭐냐구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생리 불순이 되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애먹게 되지. 주위 사정도 생각해야 해.)

  (바보스럽게)하고 작은 소리로 유키가 말했다.

  (보라구, 그런데 만일 싫지 않으면 너의 그 아카사카 맨션의 전화번호를 좀 알

려 주지 않겠니?)

  (어째서?)

  (그런 일방적인 통화라는 건 정당하지 않단 말이야. 넌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

어. 난 너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해. 넌 마음 내키면  나한테 전화를 걸어오지만, 

난 마음이 내켜도 너한테  전화 걸 수가 없어- 불공평하지 뭐냐.  그리고 오늘처

럼 만날 약속을 했다가, 여차할 때에 갑자기  예정이 바뀌었을 때에 연락이 닿지 

않게 된다면 불편하지 뭐냐.)

  그녀는 잠시 곤혹스러운  듯이 콧소리를 좀 냈으나, 결국은 번호를  알려 주었

다. 나는 수첩 주소록  난에 적힌 고혼다 군 연락처 아랫  칸에 유키의 전화번호

를 메모했다.

  (하지만 간단히는 예정을 바꾸거나 하지 말아요, 응)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런 

적당주의인 상대자는 엄마 하나면 충분하니깐.)

  (걱정 마. 난 간단히 예정을 바꾸거나 하진 않아. 거짓말이 아니라구. 배추흰나

비한테 물어봐도 좋구, 클로버한테 물어봐도 좋아. 나만큼 꼬박꼬박 약속을 지키

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어.  다만 세상엔 돌발 사고라는 게 있단 말이야. 예상

도 하지 못한 일이  갑작스레 일어나거든. 세계는 넓고 복잡하니까. 어떤 경우엔 

내 힘이 넘치는  일이 생겨날지도 모라. 그럴  때에 너한테 연락이 닿지 않으면, 

아주 곤란하지. 내가 하는 말은 알아듣겠지?)

  (돌발 사고)하고 그녀는 말했다.

  (청천벽력)하고 나는 말했다.

  (일어나지 않음 좋겠네요)하고 유키는 말했다.

  (참말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김없이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