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들은 오후 세 시 지나서 찾아왔다. 둘이 함께 왔다. 내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에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욕의를 걸친 채 문을 열 때까지 초인종은 여덟 번
이나 울렸다. 신경질이 피부를 찌르고 드는 것 같은 울림이었다.
내가 문을 열고 보니, 남자 둘이 서 있었다. 하나는 사십대 중반이고, 또 하나
는 나하고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편이 키가 크고,
코에 상처 자국이 있었다. 아직 봄무렵인데도 햇볕에 꽤나 그을려 있었다. 어부
와 같은 그을림이었다. 괌의 해변이라든가 스키장에서 그을린 그런 류의 것은
분명 아니다.
머리칼은 보기만 해도 빳빳하고, 손이 징그럽게 컸다. 그는 회색의 오버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젊은 편은 키가 크고, 머리칼이 제법 같은 한편 눈이 가늘고 날
카로웠다. 한 10년 전의 문학 청년 같게 보였다. 동인지의 모임에서 이마의 머리
칼을 쓸어 올리면서 (역시 미시마라구) 그런 소리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
겼다.
예전에, 대학의 학과에도 이런 작자가 몇몇 있었다, 이 작자는 감색스텐 칼라
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어느 쪽이나 그다지 패셔너블하다곤 할 수 없는 검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길에 떨어져 있었다면 비켜서 지나고 싶을 그런 물건
이었다. 싸구려인데다가 그것도 너무 신어서 낡아버렸다. 어느 쪽 '신사'도 내가
특별히 적극적으로 친구가 되고 싶을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어부'와 '문학'이라
고 나는 우선 급한 대로 이름을 붙였다.
문학이 코트의 포켓에서 경찰 수첩을 꺼내어 아무 말 없이 내게 보였다. 영화
장면 같군, 하고 나는 느꼈다. 나는 그때까지 경찰 수첩 같은 건 본 적이 없었지
만, 얼핏 보아 그것은 진짜 같게 느껴졌다. 낡은 폼이 가죽 구두 낡은 폼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코트의 포켓에서 꺼내어 내밀자, 어쩐지 동인지의
강매를 당한 기분이었다.
(아카사카 서 사람이오)하고 문학이 말했다.
나는 끄떡였다.
어부는 오버코트의 포켓에 두 손을 밀어 넣은 채 한 마디도 말을 떼지 않았
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문 어귀에 한쪽 발을 놓고 있었다. 문이 닫히지
않도록. 맙소사, 정말로 영화 같군.
문학은 수첩을 포켓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한차례 내 모양새를 점검했다. 머
리칼은 축축히 젖은 채로, 욕의 밖에 걸치지 않았겠다. 초록의 레노마 상표인 욕
의 바드로브. 물론 라이센스 생산이긴 하지만, 등 허리를 돌려대면 분명 '레노마'
라고 씌어 있겠다. 샴푸는 웨터. 창피해 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상대
방이 무슨 말이건 뻥긋하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실은 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하고 문학이 말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가능하시다면 서까지 가주실 수 없을까요.)
(물어보겠다니, 무엇에 대해서?)하고 나는 질문해 보았다.
(그건 다시 나중에, 그때 가서 말씀 드리겠습니다)하고 상대방은 말했다. (다만
말씀을 듣는 데에 여러 가지로 형식이라든지 서류라든지 그런 것이 필요하므로,
되도록이면 서까지 가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옷 갈아입어도 되겠지요?)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물론이죠, 어서)하고 문학은 표정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아주 평탄한 목
소리이고, 아주 평탄한 표정이었다. 고혼다 군이 형사응 한다면, 한층 더 사실적
이고 한층 더 솜씨 좋게 할 수 있는데,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현실이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다.
내가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 둘은 문을 열어놓은 채 문이 어귀에
서 있었다. 나는 늘 입는 블루진에 회색의 스웨터를 입고, 트위드의 쟈켓을 걸쳤
다. 머리를 말려 빗고, 지갑과 수첩과 키 홀더를 포켓에 넣고, 창문을 닫고, 가스
밸브를 잠그고, 전기를 끄고, 부재자 전화의 스위치를 온으로 했다. 그리고 감색
톱사이더를 신었다. 그 둘이는 내가 구두 신는 것을 신기한 듯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부는 아직도 문 어귀에 한쪽 발을 들여놓은 채로 였다.
아파트의 입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눈에 띄지 않게끔 패트럴카가 세워져
있었다. 극히 보통의 패트롤카로, 운전석에 제복의 경찰관이 앉아 있었다. 어부
가 먼저 타고, 그 다음에 내가 타고, 마지막으로 문학이 탔다. 그런 것도 영화
장면 그대로였다. 문학이 문을 닫자, 차는 이윽고 출발했다.
도로는 붐비고 있었는데, 패크롤카는 경적음 따위도 울리지 않고 서서히 달렸
다. 차 타는 기분은 택시와 대충 같았다. 미터기가 없을 뿐이었다. 달리는 시간
보다는 멈춰 있는 시간이 더 많고, 덕분에 주위의 운전수들은 내 얼굴을 모두
다 힐끔힐끔 엿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부 쪽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
미 앞쪽을 보고 있었다. 문학쪽은 풍경묘사의 연습이라도 하듯 까다로운 표정으
로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묘사를 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
다. 필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어휘들을 사용한 어두운 묘사일 게다.
(개념으로서의 봄은 암흑의 조류와 더불어 치열하게 찾아왔다. 그 찾아옴은 도
시의 간격에 메말라 붙은 이름도 모를 사람들의 정념을 흔들어 깨우고, 그것을
불모의 유사대로 소리도 없이 흘러 밀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문장을 닥치는 대로 모조리 퇴고해 나가고 싶었다. '개념으로서의
봄'이란 무엇이냐? '불모의 유사'란 무엇이냐? 하지만 도중에서 싱거워져서 그만
ㄷ다. 시부야 거리는 여전히 빤들빤들한 어릿광대옷 같은 꼴을 한 멍텅구리 같
은 중학생으로 덮여 있었다. 정념도 유사도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에 도착하자, 나는 2층의 취조실로 끌려갔다. 조그마한 창문이 있는 2평
남짓한 넓이의 바이었다. 창문으로는 거의 햇빛이 들지 않았다. 이웃 건물과 너
무나 근접해 있는 탓일 게다. 방안에는 책상이 하나 있고, 사무의자가 둘, 그리
고 비닐 시트의 보조용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벽에는 이 이상 심플하게는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의 시게가 걸려 있었
다. 그것뿐이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력도 걸려 있지 않으며, 그림도
걸려 있지 않다. 서류장도 없다. 꽃병도 없다. 표어도 없다. 다기 세트도 없다.
책상과 의자와 시계가 있을 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재떨이용 펜접시가 놓였고,
가장자리 쪽에 서류철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방안에 들어서자 코트를 벗고 접어서 보조 의자 위에 놓고, 그리고 나
를 철제사무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나의 맞은편에 어부가 앉았다. 문학은 좀 떨
어진 곳에 서서, 수첩을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얼마 동안 둘이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 어젯밤, 무얼 보고 있었소?)하고 한껏 사이를 두었다가 어부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어부가 말을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어젯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젯밤은 어떤 밤이었지? 어젯밤과 그저께 밤과 그 전날 밤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인 것이다. 나는 한참 동안
잠자코 생각하고 있었다. 떠올리기에 시간이 걸린다.
(당신 말이야)하고 어부가 말했다. 그리고 헛기침이 했다.
(법률적인 걸 이것 저것 말하자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구요. 다만 단순히 간단
한 걸 묻고 것뿐이란 말이오. 어제 저녁 때부터 오늘 아침까지 무얼 하고 있었
나. 간단한 일이 아니겠소. 대답해 준대서 손해 볼 거 없지 않소?)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요)하고 나는 말했다.
(생각해보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 거요? 바로 어제 일이란 말이오. 작년 8월
의 일을 물어보고 있는 건 아니잖소.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텐데)하고
어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야, 하고 말할까고도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필경 그러한 기억의 일시적 결락같은 건 그들에겐 이해되지 않을 게다.
머리가 돌았나 하고 생각되기가 십상이다.
(기다리겠소)하고 어부는 말했다. (기다릴 테니 천천히 생각해내시구려.) 그러
곤 그는 윗도리의 포켓에서 세븐 스타를 꺼내어 빅크의 라이터로 불을 당겼다.
(당신도 피우겟소?)
(필요 없소)하고 나는 말했다. 첨단의 도시 생활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브루터스>에 써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은 그런 것엔 아랑곳없이 맛있다는 듯이
담배를 피웠다. 어부는 세븐 스타를 피우고, 문학은 쇼트 호프를 피웠다. 둘이
다 줄담배 골초에 가까웠다. 그들은 <브루터스>따위는 읽지 않는 것이다. 전연
유행과는 담쌓은 사람들인 것이다.
(5분 기다리겠소)하고 문학이 여전히 표정이 없는 평탄한 소리로 말했다. (그
러는 동안 어떻게 좀 제대로 떠올려 주시지 않겠소. 어젯밤, 어디서 무엇을 했었
는지.)
(하니까 말야, 이 사람 인텔리란 말야)하고 어부가 문학 쪽을 향해서 말했다.
(조사해 보니 전에도 취조 받은 적이 있어. 틀림없이 지문이 등록돼 있지 않겠
나. 학생 운동, 공무 집행 방해, 서류 송검. 이런 것에 이골이 났단 말야. 법률에
도 자세하고, 헌법에서 보장된 국민의 권리라든지 그런 걸 제법 소상하게 알고
있어. 이제 곧 변호사를 부르라고 발언할 테지.)
(하지만 우리들은 임의 동행을 해 가지고, 극히 간단한 질문을 하고 있을 뿐이
란 말이오)하고 문학이 사뭇 놀랐다는 모양으로 어부에게 말했다. (뭐 체포 하라
든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요. 질 모르겠는 걸. 변호사를 부를 이유 같
은 건 아무것도 없겠지요? 어째서 그런 까다로운 생각을 하는 거죠? 이해하기가
힘들구먼.)
(그래서 말야, 난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다만 단순히 경찰이 싫은 게 아닐까.
경찰이라고 이름이 붙는 건 어쨌든 무엇이건 생리적으로 싫은 거야. 패트롤카로
부터 교통 순경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해선 죽어도 협력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하고 어부가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구요. 빨리 대답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깐.
실제적인 사고 방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필시 제대로 응해 주겠지요. 그리
고 말이죠. 어젯밤에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만 가지고선 변호사를 불
렀댔자 오진 않았거든. 변호사님만 해도 바쁘시니깐 말이야. 인텔리라면 그런 정
도는 알고 있다구요.)
(그건 그래)하고 어부는 말했다. (그런 걸 제대로 알고 계시다면, 서로간에 시
간 절약을 할 수 있다 그 말씀이거든, 우리들도 바쁘겠다, 이 사람도 바쁠 테지.
오래 끌면 서로간에 시간 낭비일 쁜더러 피곤해지지. 이게 제법 피곤해진단 말
야.)
(자)하고 어부가 말했다. (어떻소, 뭐 좀 떠올리셨소?)
떠올려지지 않았으며, 떠올리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아마 떠올
려지겠지.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떠올려지지 않는다. 기억이 끊어진 채 되돌아오
지 않는단 말이다. (무슨 일인지, 우선 사정을 알고 싶은데요)하고 나는 말했다.
(사정을 알지 못하고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소. 사정을 알지 못하면서, 불리한
말은 하고 싶지 않소. 그리고 우선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 질문을 하는 것이 사
람으로서의 예의가 아니겠소. 당신들의 소행은 전연 예의에 맞지 않소,)
(불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소)하고 문학이 문장을 검증이나 하듯 되풀이했다.
(예의에 맞지 않소)라고
(그러니까 인텔리라잖어)하고 어부가 말했다. (사물을 보는 눈이 뒤트려져 있
는 거야. 경찰을 싫어한단 말이야. <아사히신문>을 구독하면 <세카이>를 읽고
있는 거야. 신문 같은 거 구독도 안하며 <세카이>도 읽지 않소)하고 나는 말했
다. (어떻든 무슨 이유로 내가 여기로 연행됐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짓궂게 굴고 싶거든 좋을 대로 짓궂게 굴어봐요. 이쪽은 어차피
한가하거든. 시간 따위는 얼마든지 있다구.)
두 형사는 힐끗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사정을 알려 주면 질문에 대답해 주겠다, 이거요?)하고 어부가 말했다.
(아마)하고 나는 말했다.
(이 사람에겐 무의식적인 유머 감각이 있군 그래)하고 문학이 팔짱을 끼면서
벽 위쪽을 보고 말했다. (아마, 라고 말야.)
어부가 콧등 옆으로 곧바로 난 생채기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무슨 칼자
국 흉터 같았다. 흉은 제법 깊어, 둘레의 살이 몹시 옥죄어 있었다.
(저 말씀이죠)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들, 바쁘단 말이오. 빨리 이걸 해결하고
싶단 말씀이오. 우리들도 이걸 하고 있는 건 아니라오. 되도록이면 저녁 여섯 시
에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느긋이 밥을 먹고 싶소. 우리들은 당신한테 별 원
한도 없고, 의도적인 것도 없소. 당신이 어젯밤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는지 그
걸 말해 준다며, 그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소. 꺼림칙한 데가 없다면 알려
줘서 나쁠 것도 없지 않겠소? 아니면 무슨 꺼림칙한 데가 있어서 말하지 못하는
거요?)
나는 테이블 위의 유리 재떨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문학이 수첩을 탁 치고서 포켓에 밀어 넣었다, 한 30초 동안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부가 또 세븐 스타를 입에 물고 불을 화난 듯 세게 당겼다.
(대단한 배짱이야)하고 어부가 말했다.
(인권옹호위원회라도 불러?)하고 문학이 말했다.
(여보게, 이런 거 인권도 아무것도 아니라구)하고 어부가 말했다.
(이런 건 인권도 아무것도 아니라구)하고 어부가 말했다.
(이런 건 시민의 의무란 거야. 시민은 경찰의 수사에 가능한 한 협력하지 않으
면 안된다고 제법 법률에도 써 있단 말야. 당신이 좋아하는 법률에도 제법 그렇
게 써 있고 말야. 어째서 그렇게도 경찰을 싫어하오? 당신도 경관에게 길을 물
어본 일쯤은 있겠지? 도둑이 들면 경찰에 전화도 하겠고? 상부상조가 아니겠소.
어째서 이런 간단한 일도 협력해 주지 않소. 참으로 간단한 형식적 질문이 아니
오? 어젯밤, 당신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가? 까탈부릴 것 없이 빨리 끝내버립
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도 다음으로 나갈 수 있어. 당신도 집으로 돌아가고,
만사 오케이 아니겠소. 그렇게 생각지 않소?)
(우선, 사정을 알고 싶은데요)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문학이 포켓에서 화장지를 꺼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어부는 책
상 서랍에서 플라스틱 잣대를 꺼내어, 손바닥을 찰싹 찰싹 두드렸다.
(당신, 알고 있기나 해?)하고 문학이 화장지를 책상 옆의 휴지통에 내버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자꾸자꾸 악화시키고 있단 말이오.)
(알겠나, 지금은 1970년은 아니란 말이야. 당신하고 여기서 반권력 놀이를 하
고 있을 겨를은 없단 말이오)하고 진저리 난다는 듯이 어부가 말했다. (그런 시
대는 말야, 끝났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당신도 모두가 이 사회에 꽉 묻혀져 있
단 말이오. 권력이고 반권력이고 없단 말이야, 이젠. 아무도 그런 사고는 하지
않거든. 커다란 사회란 말이야. 풍파를 일으킨들, 좋을 건 아무것도 없는 거요.
시스템이 말이지. 꽉 맞도록 돼버렸단 말이오, 이 사회가 싫다면 가만히 대지진
이라도 기다리는 거지. 구덩이라도 파고서, 하지만 지금 여기서 제아무리 버틴다
해도 아무런 득도 없다구, 서로간에. 소모일 뿐이야.인텔리라면 그런 것쯤 아실
텐데 그래?)
(그건 그래, 우리도 좀 피곤해서 말투가 어지간히 거칠었던 지도 몰라. 그랬다
면 잘못했어. 사과한다구)하고 문학이 수첩을 또 팔락팔락 넘기면서 말했다. (하
지만 말이지, 우리도 피곤하다구. 계속 근무증이란 말일세. 어젯밤부터 거의 잠
을 못 자고 있어. 어린 것들의 얼굴을 벌써 닷새나 못 보고 있어. 제대로 밥도
못 먹었고, 당신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구. 거기에 당신이 나와 가지고 버티기만 하면서 아무 대답을
해 주지 않는 거야. 그야 신경질도 나겠지. 아시겠소? 당신이 자신의 입장을 악
화시키고 있다는 건 말이지, 결국 우리도 피곤하면 자꾸자꾸 기분이 언짢아진다
는 그거란 말이야. 간단히 끝낼 수 있을 것도 간단히 끝낼 수 없게 되지. 일이
뒤틀려지거든. 물론 당신이 의뢰할 만한 법률은 있어. 국민의 권리도 있어. 하지
만 그런 걸 운용하는 건 시간이 걸리지. 시간이 걸리는 동안, 당신은 불쾌한 꼴
을 당할지도 몰라. 법률이라는 건 굉장히 혼잡한 것이라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니깐 말이지. 아무래도 현장의 운용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은 있긴 있거든. 이해
해 주겠나, 그런 거?)
(오해하면 곤란하지만, 뭐 위협하는 건 아닐 구)하고 어부가 말했다. (충고하고
있는 걸세, 우리는. 우리들도 당신이 불쾌한 꼴을 당하고 하고 싶지는 않거든.)
나는 잠자코 재떨이를 보고 있었다. 재떨이엔 아무런 표시도 붙어 있지 않았
다. 그저 낡고 지저분한 유리 재떨이었다. 처음엔 투명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이
미 그렇지는 않았다. 부유스름하게 흐리고, 구석에는 담배진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것이 몇 년쯤 이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10년
쯤 놓여져 있었겠군, 하고 나는 상상했다.
어부는 잠시동안 플라스틱 잣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좋겠지요)하고 그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사정을 설명하지요. 사실은 우리들
에게도 질문하는 절차라는 게 있는 것이지만, 당신 쪽에도 말할 게 있는 게 같
으니, 지금은 거기에 따릅시다. 지금 같은 경우엔.)
그리고 잣대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서류철을 집어, 팔락 팔락 넘기고 봉투를
손에 집어, 거기에서 큰 사진을 꺼내 내 앞에다가 밀어내듯하며 내놓았다. 나는
그 세장의 사진을 손에 집어들고 보았다. 흑백의 실제적인 사진이었다. 그것이
예술적인 목적에서 찍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진엔 여자가 찍혀 있었다. 우선 처음은 알몸의 등허리를 보이고 침대에 엎
드려 있는 사진이었다. 팔다리가 길고, 엉덩이가 탄탄해 보였다. 머리카락이 부
채처럼 펼쳐져서 목부터 위를 덮고 있었다. 다리는 약간 벌어져, 음부가 보이는
듯했다. 손은 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여자는 잠자는 것처럼 보였다. 침대의
특징이랄 것은 없었다.
두 번째는 좀더 사실적이었다. 여자는 위를 쳐다보는 자세였다. 유방과 음모와
얼굴이 보였다. 손과 다리는 똑바로 '차렷' 자세가 되어 있었다. 여자가 죽어 있
다는 점에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눈을 뜨고, 입가가 묘하게 굳어 일그러져
있었다. '메이'였다.
나는 세 번째의 사진을 보았다. 얼굴을 업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메이'였다.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대단하거나 화려하진 않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무감동이라고나 해야 할 것을 몸에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목 둘레에 싸악싹 문
질러댄 자국과 같은 줄이 희미한 게 나 있었다. 입속이 바싹바싹 마르고, 침이
제대로 삼켜지지 않았다. 손바닥의 피부가 근질거려 왔다.
메이. 그녀의 멋지던 섹스. 우리는 아침까지 걸려서 즐겁게 <제설작업>을 하
고, 다이어 스트레이츠를 듣고, 그리고 커피를 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죽어버렸
다. 지금은 이미 있지 않다. 나는 고개를 젓고 싶었다. 하지만 젓지 않았다. 나는
세장의 사진을 포개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부에게 돌려주었다. 그 둘
이는 내가 사진을 보고 있는 모양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얼
굴로 나는 어부의 얼굴울 보았다.
(그 여자엔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요?)하고 어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하고 나는 말했다. 만일 내가 알고 있다고
한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고혼다 군이 이에 말려들게 된다. 그가 나하고 메이
의 연결고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를 말려들게 해선 아니된다. 어
쩌면 그도 이 사건에 이미 말려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나로선 알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래서 고혼다 군이 내 이름을 불고, 내가 메이하고 동침했다는
사실을 이미 불었다고 한다면, 나는 어지간히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나는
거짓 진술을 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얼렁뚱땅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험이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내 편에서' 고혼다 군 이름을
끄집어 낼 수는 없단 말이다. 그하고 나하고는 입장이 다르다. 그런 짓을 했다간
큰 일이 난다. 주간지가 뛰어온다.
(다시 한 번 자알 보고요)하고 어부가 느릿느릿하고 함축성 있는 어투로 말했
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 다시 한 번 잘 보고, 그리고 답변해 주세요. 어때
요, 이 여자 본 적이 있어요? 거짓말만은 하지 말고요. 우리는 프로라서, 누구나
거짓말을 하면 거짓말이라는 건 금방 들킨다구요. 경찰성에서 거짓말을 하면, 이
건 일이 커집니다. 알겠지요?)
나는 다시 한 번 시간을 들여 세 장의 사진을 보았다. 외면하고 싶었으나, 외
면할 수는 없었다.
(모르겠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죽었군.)
(죽었군(하고 문학이 되풀이했다. (굉장하게 죽었어. 확실히 죽었어. 진짜 죽었
어, 보면 알거든. 우린 그걸 보았다구요. 현장에서. 미녀였지. 알몸으로 죽어 있
었거든. 미녀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지. 하지만 죽고 말면 말이지, 미녀고 뭐
고 별로 관계가 없거든. 알몸이란 것도 관계없고 그저 그런 송장이지. 내버려두
면 썩어가지. 피부가 망가지고 뒤집혀서 썩은 살덩이가 튀어나오지. 고약한 냄새
가 나고, 벌레가 끓고 당신 그런 거 본 적이 있소?) (없어)하고 나는 말했다. (우
린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구요. 그게 거기까지 가면, 미녀였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다구. 다만 살덩이가 썩어 있을 뿐. 썩은 스테이크 고기나 다름없지. 그 냄
새를 맡으면 좀 얼마동안은 밥 먹을 수가 없거든. 우린 프로지만, 그 냄새만은
맡으면 좀 얼마동안은 밥 먹을 수가 없거든.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나면, 이번엔
뼈다귀만 남게 되지. 여기까지 가면 냄새는 없지. 죄다 온통 깡말라 있지. 새하
얗고, 아주 깨끗하지. 뼈다귀란 깨끗해서 좋다구. 그래, 그것이, 어떻든, 이 여자
는 거기까지 가지 않았어. 뼈다귀까지도 가지 않았고, 썩지도 않았어. 그저 죽었
을 뿐. 그저 딱딱할 뿐. 미녀였다는 것다는 건 분명해. 살았을 때 저러한 미녀하
고 차분히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는 걸. 하지만 알몸뚱이보고 있어도 아무
느낌이 없어. 이미 죽어 있으니까. 우리들과 송장이란 건 전연 달라요. 송장이란
건 말이야, 석상과도 같은 거란 말씀이야, 이렇게 분수령이 있는데, 거길 한 걸
음이라도 넘으면 제로가 되거든. 완전한 제로가 되는 거지. 그 다음은 분신이 되
기를 기다릴 뿐. 하지만 미녀였지. 가엾게시리. 살았더라면 훨씬 나은 미녀로 있
을 수 있었는데 말야. 누군가 죽였단 말이야. 안 될 노릇이지. 이 여자에게도 살
권리가 있었단 말이야. 아직 스무 살 남짓하단 말야. 누군가 스타킹으로 목을 졸
랐지. 여간해서 갑자기 죽어간다는 걸 알 수 있거든. 어째서 내가 이런데서 죽어
야 한다니, 하고 생각하지. 좀 더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산소가 적어져서 질식
해 간다는 걸 느끼게 되거든. 머리가 멍해진다. 소변을 갈기고 만다. 어떻게든
살아나려고 발버둥친다. 하지만 힘이 모자란다. 서서히 죽어간다는 꼴이 별로 좋
지 않군 그래. 우린 그녀에게 그런 꼴로 죽게 한 범인을 잡고 싶다 그거야. 잡지
않으면 안된단 말씀이야. 이건 범죄란 말이야. 그것도 대단히 악질적인 범죄야.
힘이 있는 자가 폭력적으로 힘이 약한 자를 주였단 말이야. 그건 용서할 수 없
는 일이지. 그런 걸 허용하게 된다면, 사회의 근저가 흔들리고 말어. 범인을 잡
아가지고 처벌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임무이다. 그러지 않으면, 범인은 또
딴 여자를 죽일지도 몰라.)
(이 여자는 어제 낮 즈음에 아카사카의 고급 호텔의 더불 룸을 예약해 가지고,
다섯 시에 혼자서 들었어)하고 어부가 말했다. (나중에 남편이 온다고 말했어.
이름과 전화는 가짜였고 돈은 선불이었지. 여섯시에 룸 서비스로 저녁식사 일인
분을 시켰어. 그때엔 혼자였어. 일곱시엔 쟁반을 복도에 내놓았었지. 그리고 '깨
우지 마시오' 표시를 문앞에 붙여두었지. 이튿날 열두시가 체크 아웃 시간이었거
든. 열두시반에 프런트 담당이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 문에는 아
직고 '깨우지 마시오' 표시가 걸려 있었고, 노크했지만, 응답은 없었어. 호텔 종업
원이 곁쇠로 문을 열었어. 여자가 알몸으로 죽어 있었지. 첫 번째 사진과 같은
모양으로, 남자가 온 장면은 아무도 보지 못했어. 맨윗층에 레스토랑이 있는데,
다들 쉴새없이 엘리베이트로 왔다갔다하고들 있지. 출입이 심하단 말이야. 때문
에 이 호텔은 흔히 밀회 장소로 이용되고 있어. 꼬리가 잡히지 않거든.)
(핸드백 속엔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하고 문학이 말했다. (면
허증도, 수첩도, 신용 카드도 없었지. 현금 카드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 의복
에는 이름의 약자도 붙어 있지 않고. 있는 건 오로지 화장 도구하고 3만엔 남짓
들어 있는 지갑하고, 피임약뿐. 그밖엔 아무것도 없어. 아니지. 꼭 하나가 있었
어. 지갑의 제일 안쪽 좀 알기 힘든 곳에 말이지, 명함 한 장이 들어 있지 뭔가.
바로 당신 명함이 말야.)
(진짜, 모르겠어?)하고 어부가 다짐하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되도록이면 경찰에 협력해서, 그녀를 살해한 잡아주
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우선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것을 생각지 않으면 안되
는 것이다.
(그럼, 당신이 어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겠소? 이거면 우
리들이 당신한테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 사정 청취하고 있는 이유를 알았겠
지요?)하고 문학이 말했다.
(여섯 시에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그리고 책을 읽고, 술을 몇 잔 마시고,
열두시 전에 잤소)하고 나는 말했다. 나의 기억은 그제서야 회복되고 있었다. 필
시 '메이'의 시체 사진을 본 탓일 게다.
(그러는 동안에 누군가 만났소?)하고 어부가 질문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소. 줄곧 혼자였으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전화는 어땠소? 누군가 전화는 걸어오지 않았소?)
(아무한테도 걸려오지 않았소)하고 나는 말했다. (아홉시 전후해서 한 번 걸려
왔지만, 부재자 전화를 해두었기 때문에 받지 않았소. 나중에 물어봤더니 일 관
계의 전화였소.)
(어째서 집에 있으면서 부재자 전화로 해두었지?)하고 어부가다 다그치듯 물
었다.
(지금 휴가중이라서 일 관계자하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오)하고 나
는 말했다.
그들이 그 전화의 상대방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고 싶어하기에 나는 알려 주었
다.
(그래서, 혼자 저녁을 먹고 나서 내내 책을 읽고 있었소?)하고 어부가 질문했
다.
(먼저 접시를 치유고 나서 책을 읽었소.)
(어떤 책?)
(믿지 않을 시도 모르겠지만, 카프카의 <심판>)
어부는 종이에다가 카프카의 <심판>이라고 섰다. 그가 글자인지도 몰랐으므
로 문학이 가르쳐 주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는 확실히 카프카의 <심판>에
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열두 시까지 읽고 있었다고 했겠다)하고 어부
는 말했다. (술도 마시고 있었다고.)
(저녁에 우선 맥주, 그 다음엔 브랜드.)
(얼만큼 마셨지요?)
나는 상기해 보았다. (캠 맥주가 두 개, 그 다음엔 브랜디를 병으로 4분의 1가
량. 복숭아 통조림도 먹었고요.)
어부는 그것을 전부 종이에 메모를 했다. '복숭아 통조림도 먹었다.' (그밖에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생각해 보겠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까.)
나는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참으
로 사소한 특징이 없는 밤이었던 것이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특징이 없는 조용한 밤에 '메이'는 누군가에게 스타킹으로
교살되어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나지 않소, 하고 나는 말했다.
(보라구, 심각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구)하고 문학이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
했다. (당신, 지금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있다니까.)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불리하고 어쩌고 가 없소. 아시겠소)하고 나는
말했다. (난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 명함쯤은 일 관계자들에게 얼
마든지 주고 다니지요. 어째서 그 여자가 내 명함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그렇대서 내가 그 여자를 죽였다 곤 할 수 없지 않아요?)
(전연 관계가 없는 명함이라면 일부러 지갑 구석 쪽에 소중히 한 장만을 갖고
있거나 하진 않겠지요)하고 어부가 말했다. (우리들은 두 가지 가설을 가지고 있
소. 우선 첫째로 이 여자는 당신들 업계의 관계자이며, 호텔에서 남자와 밀회를
하고, 필경은 그 상대방 남자가 백속의 꼬리가 잡힐 것들을 깡그리 가져가버린
거요. 다만 명함만은 지갑의 제일 안쪽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거지. 둘
째로, 이 부류는 꼬리가 잡힐 만한 휴대하지 않거든. 일류 호텔을 이용하는 그
것. 이 부류는 꼬리가 잡힐 만한 건 휴대하지 않거든. 범인은 이상자일지도 모
른다. 이 두 가지 선을 생각할 수 있겠소? 어떻소?)
나는 잠자코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든 간에, 당신의 명함이 키가 돼 있어. 어떻든 지금 같아선 우리들에겐
그것밖엔 단서랄 것이 없거든)하고 어부가 볼펜 대가리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
면서 타이르듯이 말했다.
(명함이라는 건 이름을 인쇄할 것뿐인 종이 쪽지지)하고 말했다. (증거고 뭐고
될 턱이 없지. 그것만 가지고선 아무 입증도 할 수 없어.)
(지금 같아선 그렇지)하고 어부는 말했다. 그는 계속 볼펜 대가리로 테이블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그것만 가지고선 아무 입증도 되지 않는다, 바로 그것입니
다. 지금 감식반이 그 방과 유류품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사체 해부도 있고, 내
일이면 좀더 여러 가지가 판명됩니다. 어떻게 연결됐느냐가 알아집니다. 그때까
지 기다리는 수밖에. 기다리지요. 기다리는 동안에 당신한테도 좀더 여러 가지를
상기해 주기를 바라고 싶소. 혹은 하룻밤 걸릴지도 모르지만, 철저하게 하겠습니
다. 차분히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로 생각이 되살아나는 일도 나오게 될지도
몰라.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처음부터 고쳐합시다.명백하게 어제 하루 있었던 일
을 상기해 주시오. 아침에서부터 하나 하나 순번으로.)
나는 벽의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사뭇 재미없다는 듯이 다섯 시 십분을 가리
키고 있었다. 나는 그때 돌연 유키와의 약속을 상기했다.
(전화를 빌려주시겠소?)하고 나는 어부에게 말했다. (다섯 시에 누구하고 만날
약속을 했답니다. 중요한 약속이오. 연락하지 않으면 곤란해요.)
(여자아이?)하고 어부가 물었다.
(그래요)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구개를 끄떡이고 전화를 내 쪽으로 돌려서 내밀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
어 '유키'의 전화번호를 찾아보고 다이얼을 돌렸다. 세 번째 신호음이 가자 그녀
가 받았다.
(용건이 생겨서 가지 못한다 그거겠죠?)하고 유키는 앞질러서 말했다.
(사고가 났어)하고 나는 설명했다. (내 탓은 아니야.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경찰에 연행돼 가지고 취조를 받고 있어. 아카사카 서에 있어. 설명하자면
길어지는데, 아무튼 간단하게 풀려날 것 같지 않아.)
(경찰? 뭘 한 거요. 도대체?)
(아무것도 안했어. 살인 사건의 참고인으로 불려 나왔다구. 말려든 거야.)
(바보스럽게)하고 유키는 무감동하게 말했다.
(분명 그래)하고 나도 인정했다.
(물론 내가 죽인 건 아니지)하고 나는 말했다. (난 여러 가지로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하지만,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고. 사정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이
야. 여러 가지로 질문을 받고 있어. 하지만 아무튼 너한텐 미안하게 됐어. 머지
않아 어김없이 봉창을 할 테니까.)
(진짜 바보스러워)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러곤 탕 하고 때려부수듯 전화를 끊
었다.
나도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를 어부에게 돌려주었다. 둘 이는 나하고 유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특별히 얻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하
지만 만일 내가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와 데이트 약속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
다면, 그들은 필시 나에 대한 의혹을 한층 더 깊게 할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
다. 필시 이상 성욕자나 무엇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사회 일반의 서른네 살의
남자는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나의 어제 하루의 행동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캐물었으
며, 그것을 서류로 만들었다. 편지지 같은 종이에 두꺼운 종이를 밑받침하고서
볼펜으로 또박꼬박 글씨를 적어 넣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서류였다. 시간과
노력의 낭비였다. 거기엔 내가 무엇을 먹었으며, 어디에 갔느냐가 실로 극명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저녁 식사로 먹은 전골 만드는 법까지도 설명했다. 하지만 그
들에겐 그런 농지거리는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가지 한가지 꼼꼼히 그것을
적어놓았다.꽤나 두툼한 서류가 되었다. 참으로 무의미한 서류.
여섯 시 반에 그들은 근처 음식점에서 도시락을 주문해 주었다.그다지 좋은
도시락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다지 좋은 도시락이라곤 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인
가 하면 잡다한 음식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고기경단이라든가 포테이토 샐러드
라든가, 어묵 삶은 꼬치 등 그런 것이 들어 있었다. 양념도 너무 진했다. 야채절
이는 인착색료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부나 문학이나 똑같은 것을 사뭇
맛있게 먹고 있었으므로, 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먹어치웠다. 긴장해서 식사도
목구멍을 넘기지 못한다고 생각될까 보아 괘씸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자, 문학이 싱겁고 미지근한 차를 갖다 주었다. 차를 마시면서 그
들 둘이는 또 담배를 피웠다. 비좁은 방안은 연기로 자욱해졌다. 눈이 아려오고,
윗도리에까지 니코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차 마시는 시간이 끝나자, 질문이 다시 시작했다. 끝장 나지 않는 무의미한 행
위의 축적이었다.<심판>을 어느 언저리로부터 아는 언저리까지 읽었느냐든가
몇 시경에 파나마로 갈아입었느냐라든가, 그러한 시시한 것 말이다.
나는 카프카 소설의 줄거리를 어부에게 설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은 그다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스토리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 일상적이었
는지도 모른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은 과연 21세기까지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인가, 하고 문득 나는 걱정스러워졌다. 어떻든간에, 그는 <심판>의 줄거리까지
서류에 적어 넣었다. 어째서 그런 것을 일일이 물어서 서류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나로선 전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로 프란츠 카프카적이었다.
나는 차츰 싱거운 느낌이 들면서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곤해졌다. 머
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세세하고, 너무나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들은 참을성이 있었고, 온갖 사상의 틈새를 찾아내 가지고선 그것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에 대한 나의 답변을 용지에다가 자잘하게 써넣어 갔다. 가
끔가끔 무슨 글자인지 몰라서, 어부가 문학에게 물었다. 그들은 그러한 작업에는
전연 따분해하지 않는 것만 않았다. 필시 피곤하기는 했겠지만, 결코 수고를 덜
하려 들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어딘가에 흠이 없을까 해서 귀를
기울이고, 눈빛을 반짝이곤 했다. 가끔씩 어느 쪽인가 밖에 나가고, 5-6분이 지
나서 돌아오곤 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끈질긴 사람들이었다.
여덟 시가 되자 질문하는 담당이 어부에게 문학으로 바뀌었다. 어부는 미상불
팔이 피곤한 듯일어선 채 기지개를 펴기도 하고, 손을 흔들기도 하고 목을 돌려
보기도 하곤 했다. 그러곤 또 담배를 피웠다. 문학도 질문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한 개비 담배를 피웠다. 환기가 나쁜 방안에는, 마치 웨더 리포트의 스테에지처
럼 온 방안에 흰 연기가 자욱히 서려 있었다. 이것 저것 잡다한 음식과 담배연
기. 나는 밖으로 나가 한껏 심호흡을 하고 싶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나는 말했다.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막다른 데서
왼쪽, 하고 문학이 말했다. 나는 천천히 소변을 보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돌아왔
다. 변소에서 심호흡을 한다는 것도 이상야릇한 일이었고, 사실 그다지 기분 좋
은 것은 못 되었다. 하지만 살해당한 메이 생각을 하면 군소리는 할 수 없는 노
릇이었다. 적어도 나는 살아있단 말이다. 적어도 나는 호흡을 할 수 있단 말이
다.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문학이 질문을 다시 시작했다. 그날 밤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에 대해 그는 자세히 질문했다. 어떤 관계인가? 어떤 일로 관련을
가졌는가? 어떤 용건이 있어서 걸어왔는가? 어째서 뒤미처 곧 전화를 하지 않았
는가? 어째서 그렇게 긴 휴가를 가졌는가? 그만한 경제적 여유는 있는가? 세금
신고는 마쳤는가? 그런 여러 가지 세세한 것을 물었다. 내가 답변을 하면, 그는
그것을 어부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들여서 깨끗한 해서체로 용지에 써넣었다.
그런 작업에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지, 나로선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에게는 일상적인 작업일는지
도 모른다. 프란츠 카프카적으로, 혹은 또 그들은 나를 파김치가 되게 하여, 그
럼으로써 진실을 끄집어내려고 일부러 이러한 쓰잘데없는 사무 작업을 밑도 끝
도 없이 계속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확실히 그 목적을 이룩한 것이다. 나는 파김치가 다 되고, 따분해 가지고, 질문
받은 건 전부 확실히 답변하게끔 되어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어
서 끝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열한 시가 되어 서도 그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끝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열 시에 어부가 방에서 나갔다가 열한 시에 돌아왔다. 선잠을 자고 왔는
지, 눈이 좀 발그레했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씌어진 서류를 체크했다. 그
리곤 문학과 교대했다. 문학은 커피 석잔을 가져왔다. 인스턴트 커피였다. 게다
가 설탕과 크림마저 듬뿍 넣어진 것이었다. 잡다한 음식.
나는 이제 따분할 대로 따분해 있었다.
열한 시 반에 피곤하고 졸리고, 이제 이 이상은 아무것도 지껄일 수가 없다고
나는 선언했다.
(안 되겠군) 하고 문학은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깍지끼고선 우드득 우드득 꺽
는 소리를 내면서 사뭇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이거 굉장히 급한 일이고, 수사
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랍니다. 죄송합니다만 되도록이면 힘을 내어 끝까지 해버
리고 싶은 데요.)
(이런 질문들이 중요하다 곤 믿어지지 않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쇄말적인 것이 나중에 가서 제법 도움이 된답니다. 쇄말적인 것이 사
건을 해결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반대로 쇄말적인 것을 소홀히 했다가 후
회한 예도 몇몇 있습니다. 어떻든 이건 살인 사건이니까요. 사람 하나가 죽은 것
아닙니까. 우리들도 진지하답니다. 미안하지만 참고 협력해 주시오. 솔직히 말해
서 말이죠, 하려고만 들면 중요참고인으로서 당신의 구치허가를 받을 수도 있습
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서로간에 귀찮은 일이 많아지거든. 안 그렇소? 잔뜩
서류가 필요해지고, 융통도 없게 되고. 하니까 여기서 좀 순탄하게 합시다. 협력
해 준다면, 그런 거친 조치는 취하지 않겠소.)
(졸립거든, 가면실에서 한잠 자는 게 어떻겠소?)하고 어부가 옆에서 참견했다.
(누워서 한잠 푹 자면 또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지.)
나는 끄떡였다. 어디라도 좋다. 이렇게 못 견딜 방에 있는 것보다는 어디건 나
을 것 같았다.
어부가 그 가면실을 데려다 주었다. 음산한 복도를 걸어서, 한층 머 음산한 계
단을 내려가, 또 복도를 걸었다. 모든 것에 음산히 배어든 것 같은 장소였다. 그
가 말하는 가면실이란 건 유치장이었다.
(여기는 나로선 유치장 같기만 한데요)하고 나는 아주 메마른 미소를 띠고 말
했다. (만약에 내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죠.)
(여기밖엔 없다오. 미안하지만)하고 어부는 말했다.
(농담 말라구. 난 집에 가겠소)하고 나는 말했다. (내일 아침 다시 오겠소.)
(아니오. 잠그지 않을 테니)하고 어부는 말했다. (보시오, 부탁합시다. 오늘 하
루만 참아달라구요. 유치장이라도 잠그지 않으면 보통의 방 아니겠소.)
나는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는 게 차츰 귀찮아졌다. 이젠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하긴 유치장이라도 잠그지 않으면 보통의 방이 아닌가. 어떻든 나는 몹
시 지쳐 있었고, 몹시 졸렸다. 누구하고도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아무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 딱딱한
침대에 드러누웠다. 정다운 감촉이었다. 촉촉한 매트리스와 싸구려 모포, 변소의
냄새. 절망감.
(잠그지 않을 테니까)하고 어부는 문을 닫았다. 덜커덩!하고 몹시 차가운 소리
가 났다. 잠그건 안 잠그건, 제법 차가운 소리가 난다.
나는 한숨을 쉬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누군가 어디선가 코고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굉장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들려오
는 갓 같기도 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지구가 가고 올 수 없는 여러 개의
자잘한 절망적인 층으로 갈라져 있어서, 그 근접한 층의 어디선가부터 흘러나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그런 소리였다. 서글픈 듯도 하고, 손이 닿지 않는, 그리고
현실적인 소리였다.
메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젯밤 네 생각을 떠올리고 있
었단 말이다. 그때 너는 아직 살아 있었는지, 또는 이미 죽어 있었는지, 어느 쪽
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튼 그때 네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지. 너하고 동침
했던 때의 일을, 네 옷을 천천히 벗기고 있었을 때의 일을. 그건 참으로, 무엇이
라면 좋을까, 동창회 같았단 말이다. 온 세계의 태엽이 풀린 것처럼 나는 느슨해
있었지. 그런 일이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지.
하지만 말이야, 메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지금 같아선 아무것도
없어.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모두가 아주 연
약한 인생을 보내고 있단 말이야. 나로선 고혼다 군을 스캔들에 밀어 넣고 싶진
않단 말이야. 그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내야. 그가 매춘부와 동침하
고 살인 사건의 참고인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게 된다면, 그 이미지
의 세계는 엉망이 되고 만단 말이야. 프로그램에서도 상업광고에서도 빠지게 될
지도 모르거든. 하잘것없다고 하면 하잘것없지. 하잘것없는 이미지이고, 하잘것
없는 세상이기도 해. 하지만 그는 나를 친구로서 신용하고 대접해 주었어. 하니
까 나도 그를 친구로서 대접한다. 그것은 신의의 문제란 말이야.
메이, 염소의 메이. 나는 너하고 둘이 있어서 아주 즐거웠어. 너하고 자는 게
아주 즐거웠었어, 꼭 동화 같았어. 그것이 너에게 위안이 되는지 어떤지는 나에
겐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너에 대해선 줄곧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 우리들은
둘이서 아침까지 제설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게지. 관능적 눈 치우기. 우리는 이미
지의 세계에서, 경비를 써가면서 서로 껴안았던 것이다.
곰의 '푸우'와 염소의 '메이' 목졸리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웠겠지. 아직 죽고 싶
진 않았겠지. 필시. 하지만 나로선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옳은 것인지 어떤지,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나로
선 이렇게 할 수밖엔 없다구. 그것이 나의 생존 방식이란 말이야. 시스템이란 말
이야.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잘 가거라, 염소의 메이,
적어도 너는 이제 두번 다시는 죽지 않아도 된다.
(잘 자거라)하고 나는 말했다.
(잘 자거라.)
사고가 메아리쳤다.
(어쩜!)하고 메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