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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도 대개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었다. 아침에 우리들은 또 같은 방에 모
여서 셋이서 묵묵히 맛이라곤 조금도 없는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빵이었다. 그리고 나서 문학이 나에 전기 면도기를 빌려주었다. 나
는 전기 면도기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별수없이 그걸로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질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잘것없는 쇄말적인 질문. 합법적인 고문.
낮까지 그것이 태엽 장치를 한 달팽이 모양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낮까지에 그
들은 질문할 수 있는 만큼은 전부 질문하고 말았다. 질문거리도 그제서야 다해
버린 것 같았다.
(대략 이 정도겠지요)하고 어부가 볼펜을 책상 위에 놓고서 말했다. 두 형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숨을 쉬었다. 아마
그들은 여기에 붙들어 두기 위해 시간 벌기를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넘겨짚었
다.
아무려면 살해당한 여자의 지갑 속에 명함 한 자이 들어 있었기로서니 구치허
가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비록 나에게 유효한 알리바이가 없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싱겁기 짝이 없는 카프카적인 미로 속에다가 나를
붙들어두고 있는 것이다. 지문이니 사체해부니 하는 결과가 나와서, 내가 범인인
지 아닌지가 명백해지기까지, 하잘것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떻든 이제 질문은 끝난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목욕
을 하고, 이를 닦고, 제법 단정하게 수염을 깎는다. 제대로 커피를 마신다. 제대
로 식사를 한다.
(자, 이제)하고 어부가 등을 펴고 탁탁 허리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슬슬 점심
이라도 먹을까요.)
(이젠 질문도 끝난 것 같으니, 난 집에 가겠소)하고 나는 말했다.
(그게 글쎄 그렇게만 할 수도 없답니다)하고 어부가 거북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요?)하고 나는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하는 성명이 필요하거든요.)
(좋아요. 서명합시다.)
(그러기 전에 우선 내용이 틀림이 없는지 읽고서 확인해 주시오. 한 줄 한 줄
확실히.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깐.)
나는 30장 또는 40장이 되는 차곡히 써넣어진 사무용 괘지를 천천히 주의 깊
게 읽었다. 한 20년이나 지나면 이런 문장에도 혹은 풍속 자료적인 가치는 있게
될지도 모르겠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병적이랄 만큼 세밀하고, 실
증적이다. 연구자의 도움은 될 것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34세의 독신 남성의
생활이 어느 정도 역력히 떠올라 온다. 평균적 남성이랄 순 없다 하더라도, 그런
대로 시대의 눈이요, 잣대이긴 하다. 하지만 이제 경찰서의 취조실에서 읽고 있
노라니 깐 그저 따분해질 뿐이었다. 다 읽어내는 데에 15분이 걸렸다. 하지만 그
런 대로, 이걸로 끝난단 말이다. 이것만 다 앍고 서명하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단
말이다. 읽고 나자 나는 책상 위에 대고 일부러 큰소리로 종이갈피를 맞추었다.
(좋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좋습니다. 내용에 이의는 없어요. 서명하지요. 어
디다 서명하면 됩니까?)
어부는 손가락 사이에서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문학 쪽을 보았다. 문학은
라디에이터 위에 놓은 쇼트 호프 갑을 집어, 거기서 한 개비를 끄집어내어, 입에
물고, 불을 당기곤, 얼굴을 찡그리며 그 연기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쩐지 몹시
언짢은 예감이 들었다. 말이 죽어가고 있고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답니다)하고 문학이 아주 느릿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프
로가 아마추어에게 설명할 때의, 마치 어린애에게 타이르듯한 어투였다. (이런
서류는 말입니다. 자필이 아니고선 안된답니다.)
(자필?)
(즉 말이죠? 이걸 다시 한 번 고쳐 써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 말씀입니다. 당신
이. 자기 손으로. 그러지 않으면 법률적으로 유효하지 않답니다.)
나는 그 사무용 괘지 묶음에 눈길을 보냈다. 나에겐 화낼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화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건 그릇된 일이다. 하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책상이라도 두드리고 싶었다. 너희들에게 이런 일을 할 권리는 없다. 나
는 법률에 의해 보호된 시민이란 말이다, 하고. 나는 일어나서 서슴없이 집으로
돌아와버리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그것을 말릴 권리가 그들에게 없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지쳐 있어서,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
다. 무슨 주장이라도 할 양이면, 차라리 하라는 대로 무엇이나 해주리라 하는 기
분이 되어 있었다. 그러는 편이 마음 편할 듯싶었다. (어설퍼졌어)하고 나는 생
각했다. (지쳐서 어설퍼졌어)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 예전엔 좀더 진지하게 화를
냈었다. 잡다한 음식부스러기든 담배 연기든 전기면도기든 간에, 그런 것쯤에 신
경도 쓰지 않았었다. 나이를 먹은 탓이다. 마음이 약해졌어.
(못하겠어)하고 나는 말했다. (이젠 지쳤어. 집에 돌아가겠어. 돌아갈 권리가
있다구. 아무도 막을 수 없어.)
문학이 으르렁거리 듯한, 하품을 하는 듯한 애매한 소리를 냈다. 어부는 천장
을 쳐다보면서 볼펜대가리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톡톡톡.톡, 톡톡.톡톡.톡, 그
런 식으로 리듬에 변화를 주어 두드렸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이야기가 까다로워지는군)하고 메마른 소리로 어부가
말했다. (좋았어.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구치허가를 받겠다. 강제적으로 구치해
가지고 취조하겠다. 그렇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점잖게는 굴지 않는다구. 그래,
좋다구, 그러는 편이 이쪽도 하기가 쉽지. 어때, 그렇지?)하고 그는 문학에게 물
었다.
(좋으실대로)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구치허가가 나오기까지는 나는 자유요.
집에 있을 테니까, 나오거든 마중하러 와주시오.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 집으로
가겠소. 여기 있으면 기분이 울적해.)
(구치허가가 나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구속할 수 있다구)하고 문학은 말했다.
(그런 법률은 이미 있었다구.)
육법전서를 갖다가 보여달라고 말할 까라고도 생각했으나, 거기서 내 에너지
도 다해버렸다. 저편이 공갈로 그러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거기에 맞서기엔 나
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알겠소)하고 나는 체념하고 말했다. (하라는 대로 쓰지요. 그 대신 전화를 걸
게 해주시오.)
어부가 전화를 내쪽으로 밀었다. 나는 유키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아직도 경찰에 있어)하고 나는 말했다. (밤까지 걸릴 것 같아. 하니까 오늘도
그쪽엔 갈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하지만.)
(아직도 있어요?)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바보스럽지)하고 나는 그 소리를 듣기 전에 나 먼저 말했다.
(정당하지 못하네요)하고 유키는 말했다. 사물에 대해선 여러 가지 말하는 방
법이 있다.
(뭘하고 있어, 지금?)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저 빈둥빈둥하고 있을 뿐. 나뒹글
면서 음악 듣고, 잡지나 그런 거 읽고, 케이크를 먹고, 그런 거요.)
(흐응)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튼 여기서 나가게 되면 전화하겠어.)
(나오게 되면 좋겠네요)하고 유키는 평탄한 소리로 말했다.
두 형사는 또 내 전화의 대화를 가만히 귀를 기울여서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특별히 얻을 건 없었던 것 같다.
(그럼, 그래, 어떻든 점심 먹기로 하자구)하고 어부는 말했다.
점심은 국수였다. 젓가락으로 집어서 들어올리기만 해도 끊어져버릴 정도로
불은 국수였다. 환자용의 유동식 비슷했다. 불치병의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둘
이는 제법 맛난 듯이 먹었으므로, 나도 그렇게 했다. 국수를 다 먹고나자, 문학
이 또 미적지근한 차를 가져왔다.
오후는 흐리디흐린 피은 강물처럼 고요히 흘러갔다. 시계 소리가 재깍째깍 방
안에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씩 옆방의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저
다만 사무용 괘지에다 글자를 쓰고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두 형사는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가끔씩 둘이서 복도로 나가 작은 소리로 쑤군대곤 했다.
나는 책상에 마주앉아 묵묵히 펜을 놀리고 있었다. 쓰잘것 없는 문장을 왼쪽
에서 오른쪽으로 베껴가고 있었다. (나는 여섯 시 십오 분경에 저녁 식사를 하기
로 하고, 우선 냉장고에서 꼬냑을 꺼내 가지고......) 순수한 소모. (어설퍼졌어)하
고 나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굉장히 어설퍼졌어. 하라는 대로하고 있어. 아무
대꾸도 안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뿐은 아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분명 조금은 어설퍼지긴 했다.
그러나 제일 문제되는 것은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그것이다. 그래
서 버티지 못한단 말이다. 내가 하고 있는 건 참으로 옳은 것일까? 나는 고혼다
군을 비호하는 대신, 모든 것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거짓말
이건, 별로 기분 좋은 것이 못된다. 비록 친구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에게 타이를 수는 있다. 비록 무엇을 한다하더라도 메이가 살아날 수 없는
모릇이라고.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버틸 수는 없
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서류를 베껴 쓰고만 있었다. 장시간에 걸쳐 잔글씨를 써
대는 건 어지간히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차츰차츰 손목의 맥이 풀려온다.
팔꿈치가 무거워진다.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머리가 멍해
지면서 이내 글씨가 잘못된다. 잘못되면 줄을 긋고, 거기에 손도장을 찍는다. 기
분이 울적해진다.
저녁에 또 도시락을 먹었다. 식욕은 거의 없었다. 차를 마셨더니 위장이 메스
꺼웠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나로서도 형편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결과는 안 나왔소?)하고 나는 어부에게 물어보았다. (지문이라든가 유
류품이라든가 사체 해부의 결과 같은 건?)
(아직 안 나왔는걸)하고 그는 말했다. (좀더 시간이 걸리지.)
열 시까지 걸려서 이제 다섯 장만하면 되는데, 그것이 나의 능력의 한계였다.
이 이상은 이제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하겠다, 고 나는 느꼈다. 그래서 그렇게 말
했다. 어부가 다시 나를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나는 거기서 푹 잠이 들었다. 이
를 닦을 수 없다는 것도, 옷을 갈아입을 수 없다는 것도, 이젠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아침이 되어 또 전기 면도기로 수염을 밀고,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그
리고 이제 다섯 장을 썼다. 그리곤 한 장한 장에 또박또박 서명을 하고 손도장
을 찍었다. 그것을 문학이 체크였다.
(이걸로 이제 해방시켜 주겠지요?)하고 나는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질문에 답변해 준다면, 돌아가도 좋아요)하고 문학이 말했다.
(걱정 마시오, 간단한 질문이니까. 조금만 보충하고 싶은 게 생각났으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그리고 또 서류로 꾸민다 그거겠지요, 물론?) (물론이지
요)하고 문학은 대답했다. (유감이지만 관청이란 건 그런 곳 아니겠소. 서류가
전부지요. 서류와 인감이 없이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지요.)
나는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관자놀이 속에 꾸덕꾸덕한 이물이 들
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어디선가로부터 들어와서, 머리 속에서 부풀어
올랐단 말이다. 이젠 와서 이미 끄집어낼 수는 없다. 손쓰는 게 늦었네요. 조금
만 일렀더라면 간단하게 끄집어낼 수 있었겠는데요. 참 안됐네요.
(걱정 마시오. 그렇게 시간은 걸리지 않습니다. 곧 끝납니다.)
내가 새로운 쇄말적인 질문에 힘없이 답변하고 있노라니까, 어부가 방으로 돌
아와서, 문학을 불러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둘이서 수군수군 선 채 이야기를 하
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등대기에 기대어 목을 치켜들고, 방안의 천장 구석
에 얼룩처럼 말라붙은 검은 곰팡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곰팡이는 마치 시체 사
진의 음모처럼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벽의 금간 데를 따라, 프라스코 그림
처럼 스며든 점이 아래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그 곰팡이에는 이 방에 드나든
숱한 인간들의 체취랑 땀이 스며들어 있는 것같이 나에겐 느껴졌다. 그러한 것
들이 몇 십년이나 걸려서 이런 음산한 곰팡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고 보니 퍽도 오래토록 바깥 풍경을 보지 못했었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음악도 듣지 못했다. 지독한 장소다. 여기서는 온갖 수단을 써서 인간의 자아며
감정이며 자부심이며 신념이며를 압살하려고 든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남지 않
도록 심리적으로 짓이겨대고, 개미굴 같은 관료적 미로 속을 이리저리 끌고 다
니고, 사람이 품는 불안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태양의 광선을 멀리하
고, 부스러기 같은 음식을 먹게 한다. 불쾌한 땀을 흘리게 한다. 그런 식으로 해
서 곰팡이가 생겨난다.
나는 책상 위에다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눈을 감고 눈 내리는 삿포로 거리
를 생각했다. 거대한 한 돌핀 호텔과 거기 프런트 담당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했
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프런트에 서서 저 광채 나는 영업적 미소
를 입가에 떠올리고 있을까? 나는 지금 여기서부터 전화를 걸어 그녀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쓰잘 데 없는 농짓거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이름도 알지 못한단 말이다) 전화
를 걸 방도가 없다. 귀여운 여자아이였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특히 그녀가 일
하고 있는 모습이 훌륭했다. 호텔의 요정. 그녀는 호텔에서 일하기를 좋아한단
말이다. 나하곤 다르다. 나는 일하는 것을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규칙
적인 일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녀는 하는 일 자체
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게 되면 그녀는 어딘지 연약해 보인다. 불
안정하고 다치기 쉬워 보인다. 나는 그때, 그녀와 동침하려고만 생각했었던들 동
침할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동침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하고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살해되거나 하기 전에.
그녀가 어딘가에 사라지고 말거나 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