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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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두 형사는 방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둘이 다 앉지 않았다. 나는 아

직도 멍청하니 곰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만  돌아가도 됩니다)하고 어부가  무표정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

다.(수고했습니다.)

  (돌아가도 된다구요?)하고 나는 어리벙벙해서 되물었다.

  (이젠 질문이 끝났어. 끝났다구)하고 문학이 말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달라졌다구요)하고 어부가 말했다. (이 이상 당신을  여기에 

붙잡아 둘 수가 없게 됐소. 그러니 돌아가도 되오. 수고하셨소.)

  나는 완전히 담배 냄새에 절어버린 쟈켓을 입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언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떻든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돌아가버리는  게 좋

을 성싶었다. 현관까지 문학이 전송해 주었다.

  (보시오. 당신이 무혐의라는 건, 어젯밤에 이미 알고 있었소)하고 그는 말했다. 

(감식과 해부 결과가  나와서, 당신하곤 전혀 관련성이 발견되지 않았거든.  남아 

있던 정액의 혈액형도 달랐고, 당신 지문도  나오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은 무엇

인가 숨기고 있었지. 그래서 두어본 거요. 그걸 볼 때까지 좀더 들추어보려고 말

야.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건 우리들로선 알 수 있거든.  육감이란 말이야. 직

업적인 육감. 그 여자가 누구인지,  힌트 정도는 갖고 있겠지요? 하지만 무슨 이

유에선가 그걸 숨기고  있어. 안 될 일이야. 우린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구. 프로

니깐 말야. 도대체 사람 하나가 살해당했단 말야.)

  (미안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또 와줘야 하게 될지도 모르겠는 걸)하고 그는 포켓에서 성냥을 꺼내어, 성냥

개비로 손톱 거스러미를  누르면서 말했다. (일단 한다고 하면, 우리들은  끈질기

단 말야.  이번엔 옆에서 변호사가  나오더라도 꼼짝도 안할  만큼 확고부동하게 

준비해 죽겠어.)

  (변호사?)하고 나는 물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벌써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욕조에  더운 물을 채우고, 천천히 거기에 몸을 담그었

다. 이를 닦고, 수염을  밀고, 머리를 감았다. 온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지독

한 장소였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꼭 뱀굴이었다.

  욕탕에서 나오자 나는 컬리프라워를 삶아, 그것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아

더 플라이속이 카운트 베이스 오케스트라를 경음악으로 노래하는 레코드를 들었

다. 반성없이 화려한  레코드. 16년전에 샀었지. 1967년. 16년  동안 들어왔다. 그

래도 싫증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나는 좀 잠을 잤다. 잠깐  어디론가 갔다가, (뒤로 돌아갓)을 해서 

되돌아오는 것 같은 잠이었다. 30분인가 그 정도의 잠이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

니, 아직 한 시였다. 나는 수영복과 타월을  백에 넣어 가지고, 스바루를 타고 센

다가야의 실내 수영장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를 충분히 헤엄쳤다. 그리고 나니 

그제서야 인간다운 기분이 생겼다. 식욕도 좀 생겼다.

  나는 유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녀는 있었다. 가까스로 경찰에서 해방됐

단다, 하고 나는 말했다. 거 잘 됐네요, 하고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점심은 먹

었느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먹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아침부터 슈크림 두 

개를 먹었을  뿐,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여전히 형편없는 식생활이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마중하러  가겠다, 뭐 좀 먹으러  가자구, 하고 나는 말했다. 

응,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스바루를 타고 바깥 정원을 돌아, 회화관 앞 가로수 길을 지나, 아오야마

일가로부터 노기신사로 나섰다. 하루  하루 봄 기운은 짙어지고 있었다. 내가 아

카사카 경찰서에서 이틀동안을  취조당하고 있는 동안에도, 바람의  감촉은 온화

해지고, 나무들의 이파리는  눈에 보이게 푸르름을 더하고, 햇빛은 둥글둥글해지

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도시의 소음마저  아트 파머의 프류겔  혼처럼 우아하게 

들렸다. 세계는 아름답고,  배도 고팠었다. 관자놀이 안쪽의 일그러진  형상을 한 

응어리도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현관 벨을 누르자,  유키는 이내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오늘은 데이빗 

보위의 트레이너 셔츠를 입고, 그 위에다 가죽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겐버스 천

의 숄더 백에는 스트레이 캣과 스트리 던과  컬쳐클럽의 배지가 붙어 있었다. 기

묘한 배합이었으나, 글쎄 아무려면 또 어떠랴 싶었다.

  (경찰은 재미있었어요?)하고 유키는 물었다.

  (지독하더구나)하고 나는 말했다. (보이 조지의 노래하고 같을 만큼 지독했어.)

  (흐응)하고 그녀는 감동없이 말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배지  사줄테니까, 자꿔 달면 어때?)하고 나는 숄더백의 

컬쳐 클럽 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묘한 사람)하고 그녀는 말했다. 말하기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우선  그녀를 제대로 된 가게로  데리고 가서, 홀 호이트의  빵으로 만든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와, 야채 샐러드를 막이고,  참하고 신선한 우유를 마시게 

했다. 나도 같은  것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맛난 샌드위치였다. 소스가 담백하

고, 고기가 부드럽고,  진짜 호스래디쉬 머스터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미각에 기

운이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식사라고 한단 말이다.

  (자 이제부터 어디로 갈까?)하고 나는 유키에게 물었다.

  (쯔지도)하고 그녀는 말했다.

  (좋아)하고 나는 말했다. (쯔지도로 가자꾸나. 하지만 어째서 쯔지도라지?) (아

빠네 집이 있거든)하고 유키가 말했다. (아저씨를 만나고 싶대.)

  (나를?)

  (그 사람,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두 번째 커피를 마시면서 고개를 저었다. (뭐 나쁜 사라미알곤 말하지 않

았어. 하지만 유키네  아빠가 어째서 일부러 나를 만나고 싶다지?  네가 내 이야

기를 아빠한테 했나?)

  (그래요. 전화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경찰에  끌려가서 귀가시켜 주지  않아서 

곤란을 당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빠가 잘 아는 변호사한테  경찰에 당신

에 대해 문의를 하게 했지요.  그 사람 그런 교제가 넓데요. 상당히 현실적인 사

람이니깐.)

  (옳거니)하고 나는 말했다. (그랬었구나.)

  (도움이 됐겠죠?)

  (도움이 됐어. 참으로.)

  (아빠는 말했지만,  경찰에선 당신을 잡아둘  만한 권리는 없었대요.  귀가하고 

싶다면 당신은 언제라도 자유로이 귀가할 수 있었죠, 법률적으로는.)

  (알고 있었어, 그 점은)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죠? 인제 돌아갑니다 하고.)

  (까다로운 문제야)하고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에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을 벌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보통이 아니네요)하고 그녀는 두 손으로 빰을 괴고 말했다. 말하기엔 여러 가

지가 있다.

  우리는 스바루를  타고 쯔지도까지 갔다. 오후  늦은 시각이라서, 도로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숄더  백에서 갖가지 테이프를 꺼내서 틀었다.  봅 마리의 <엑소

더스>로부터 스틱스의 <미스터  로봇>까지, 실로 각양각색의 음악이 차안에 흘

렀다. 재미난 것도  있는가 하면, 시시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경치와 

같은 것이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자꾸자꾸 지나가버린다.

  유키는 거의 입을 열지 않은 채 시트에  느슨히 기대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대시보드에 있던 나의 선글라스를 집어들어, 그것을 끼고, 도중에서 버지니아 슬

림을 한 개비 피웠다. 나도 잠자코 운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기어를 자주

자주 바꾸면서 훨씬 앞쪽 노면을 내다보고 있었다.  교통 표지판 하나 하나를 조

심스레 체크했다.

  이따금 그녀가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지금 열세  살이라는 게 말이다. 그녀의 

눈에는 갖가지 일들 모두가 신선하게 비치리라. 음악이며 풍경이며 사람들이. 나 

역시 옛날에는 그랬다.  내가 열세 살 때, 세계는 훨씬  단순했다. 노력은 당연히 

보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말은 보증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아룸다움은 그곳

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혼자 있을 때

의 자신을 믿을 수 있었지만, 당연한 일이지만  대개의 경우 혼자 있지는 못했었

다.

  가정과 학교라는 완강한 테두리 속에 갇혀서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초조한 

나이였다.나는 여자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순조롭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하고 

거의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재치가 없는 소년이었다. 

선생이나 부모가  강압으로 밀어붙이는 가치관에 이의를  말하고 반항하려 했지

만, 이의를 제기할 말이 제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거나 솜씨 있게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거나 척척 되어 가는 고혼다 군과는  전혀 반대 입장

에 놓였다. 하지만, 나는 사물의 신선한 모습을  볼 줄은 알았다. 그것은 정말 멋

진 일이었다. 냄새가  제대로 풍겼고, 눈물은 진실로  훈훈했으며, 여자아이는 꿈

처럼 아름다웠으며,  로큰롤이었다. 영화관의 어둠은 우아하고  친밀했으며, 여름

밤은 끝없이 그윽하고 관능적이었다. 그러한 초조한  나날을 나는 음악과 영화와 

책과 더불어 지냈다. 샘  쿡이랑 리키 넬슨의 유행가 가사를 암송하면서 지냈다.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열세 

살 때였다. 그리고 고혼다  군과는 같은 과학 실험반에 있었다. 그는 여자아이들

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성냥을  그어 가스 버너에다 우아하게 쏘옥 불을 당기

곤 했다.

  어째서 그가 나를 부러워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보라구)하고 나는 유키에게 말을 걸었다. (양가죽을 걸치고 있던 사람의  이야

기를 들려주지 않을래? 너 어디서 그 사람을 만났지?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만

났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그녀는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고, 선글라스를 벗어서 대시보드에  되올려 놓았

다. 그리곤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우선 먼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겠어

요?)

  (좋아)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얼마동안 술 취한  다음날 아침 모양 어둑어둑하고 구슬픈 필콜린스의 

유행가에 맞추어 허밍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선글라스를 집어들고  안경대를 만

지작거렸다. (저어, 전에  당신이 훗카이도에서 내게 말했죠? 지금까지  데이트한 

여자아이 중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고요.)

  (분명 그렇게 말했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거 정말인가요? 아니면 내 비위를 맞춰주기 위한 것이었나요? 솔직하게  말

해주면 좋겠어요.)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까지 몇 사람쯤하고 데이트했지요?)

  (2백명쯤.)

  (설마)하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게는 그만한  인기는 없다구,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어느 편인가  하면 

아주 국지적이야.  폭이 좁아서, 범위가 크지  못하거든. 고작 열대  명쯤이 아닐

까.)

  (고것밖엔 안 돼요?)

  (한심한 인생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어둡고, 축축하고, 좁고.)

  (국지적)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같은 인생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른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지. 아직 너무 어리니까. (열댓 명)하고 그녀는 말했

다.

  (대개)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34년의 보잘것없는 인생을 되돌아

보았다.

  (대개 그 정도. 글쎄 많아야 고작 스무 명쯤 될까.)

  (스무 명이라)하고 유키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튼, 그중에서 내가 

가장 예쁘다, 그 말이죠?)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예쁜 사람하곤 별로 교제하지 않았나요?)하고 그녀는 물었다. 그리고 구 개비

째 담배에다 불을 당겼다.  교차점에 순경의 모습이 보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빼

앗아 창밖에다 버렸다.

  (제법 예쁜 여자아이하고도 데이트를 했지)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유키 쪽이 거 예쁜 걸. 거짓말 아니라니까. 이런 말 이해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유키의 아름다움은 독립해서  기능하고 있는 아름다움이야. 

다른 아이들하곤 전혀 다르지.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차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 

바깥에서 보이기도 하고,  차에서도 냄새가 나. 전에도  말했지만, 여자가 어려서

부터 지나치게 담배를 피우면, 이담에 커서 생리 불순이 된다구.)

  (바보스럽게)하고 유키는 말했다.

  (양가죽울 쓴 사람 이야기를 좀 해봐)하고 나는 말했다.

  (양사나이 말이죠?)

  (어떻게 알았지, 그 이름을?)

  (당신이 말했잖아요. 요전 번 전화에서 양사나이라고요.)

  (그랬던가?)

  (그랬어요)하고 유키는 말했다.

  도로는 정체해 있어서, 나는 두 번이나 신호 대기에 걸렸다.

  (양사나이 이야기 좀 해줘. 어디서 양사나이를 만났지?)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구요. 단지  문득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 걸요. 당신을 보고 있다가요. 그리고 가늘게 쭉 뻗은 머리칼을 손

가락에다 돌돌  말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양가죽을 쓴 사람이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색을 말이죠. 당신을 그 호텔에서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구요. 그래서 그렇게 입밖에 내어 말해본 거예요. 거기 대해 특별하게 뭔가 알고 

있다는 게 아니에요.)

  나는 신호 대기를 하는 동안,  그 일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생각할 필

요가 있다. 머리에 태엽을 조일 필요가 있다. 조일 대로 꽈악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하고 나는 유키에게  물었다. (말하자면  유키한테는 

그 모습이 보였다 그 말이 아니겠어. 그 양사나이의 모습이 말야?)

  (표현이 잘 안 되네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 말하면 될까? 그 양사나이

라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분명하게 떠오른다는 게  아니고요. 알겠어? 뭔가 이렇

게, 그런 것을 본 사람의 공기처럼 이쪽으로 전달되는 거라고요. 그건 눈에 보이

는 것이 아니야.  눈에는 안보이지만, 난 그것을 느끼고, 형태를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정확한  형태는 아니고, '형태 비슷한 거'죠. 만약 

누구한테 그것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겐  뭔가 분간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즉 나밖엔 아무도 모르는  형태예요. 어째, 제대

로 설명을 못하겠어요. 우습지요. 그렇죠. 내가 하는 말 알 수 있어요?)

  (막연하게 밖엔 알 수 없는 걸)하고 나는 선글라스 다리를 깨물고 있었다.

  (예컨대, 이런 게 아닐까?)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유키는 내 속에 있는,  혹은 

내게 달라붙어서 존재하고 있는 감정이나 사념을  느끼고, 그것을 예컨대 상징적

인 꿈처럼 영상화할 수 있다. 그말인가?)

  (사념?)

  (강렬하게 생각된 것 말이지.)

  (그렇군요, 그럴지도 몰라. 강렬하게 생각된 것-하지만 그것뿐이 아니죠. 그 강

렬하게 생각된 일을 만들어낸 것, 그런 물건을  있죠. 그 아주 강력한 무엇. 생각

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고 하면 좋을지, 그런  물건이 있으면 난 그걸 느껴버리거

든요. 감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내 나름으로 보죠. 하지만 꿈처

럼은 아니고요. '텅 빈 꿈'. 그래요, 그런 거. 텅 빈 꿈이에요. 거기엔 아무도 없지

요.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죠. 왜  그 TV의 콘트라스트 말이죠,  그걸 굉장히 

어둡게 할 때와 마찬가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든요.하지만 거기엔 누군가 있

지요.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요. 그걸 느낀단  말예요. 거기에 있는 건 양가죽을 

뒤집어 쓴 사람이구라요. 악인은 아니에요. 하지만  보이진 않죠. 불에 쬐인 종이

에 나타난 그림처럼, 그건  거기에 있죠. 보이진 않지만, 알 수 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인단 말예요.  형상이 없는 형상이에요.) 그녀는 혀를 찼다. (형

편없는 설명이죠?)

  (아니야, 유키는 잘 설명했어.)

  (정말?)

  (아주)하고 말했다. (유키가 말하려는 그것은 알 듯하다구. 내가 그것을 이해하

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야.)

  거리를 빠져나와 쯔지도의 바다로 나서 나는 소나무숲 옆의 주차 공간의 하얀 

선 속에 차를 세웠다. 다른 차는 거의  없었다. 좀 걷자고 나는 유키에게 말했다. 

기분 좋은 4월의 오후였다. 거센 바람도 없고 파도도 잔잔했다. 마치 먼 바다 쪽

에서 누군가 살며시 시트를 흔들고  있는 듯 자잘한 파도가 밀려왔다간 다시 밀

려가곤 했다. 조용하고 규칙적인 파도였다. 서퍼는  그만 단념하고 뭍에 올라, 젖

은 수트를 입은 채 백사장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쓰레기를 태우는 모

닥불의 하얀 연기가 거의 직선적인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왼편에는 에노시마

가 신기루처럼 어슴푸레 흐려 보였다. 커다란 검정  개가 생각이 깊은 얼굴로 물

가의 오른쪽에서 왼편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나갔다. 

먼 바다에는 몇 척인가 어선이 떠 있고, 그  상공을 하얀 소용돌이 모양 소리 없

이 갈매기 떼가 날고 있었다. 바다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졌다.

  우리는 해안의 보행자 도로를 산책했다. 조깅하는  사람들이랑 자전거를 탄 여

고생들이랑 엇갈리면서 후지사와 쪽을 향해 한가하게  걷다가, 적당한 곳에서 백

사장에 앉아 둘이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흔히 그런 걸 느끼게 되나?)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가끔씩. 가끔씩 밖엔 안  느끼죠. 그런 걸 느끼는 상대란 그렇게 많진  않거든

요. 아주 조금뿐,  하지만 되도록 그 일은 생각지 않으려고  하거든. 무엇을 느낄 

것만 같아지면  이내 닫아버리도록 하거든요.  대개 그런 경우란  느낌으로 알게 

되니깐요. 닫아 버리면, 깊게는 느끼지 않아도  되거든요,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

지로. 감각을 닫아버리는 거죠.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죠. 무엇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보이진 않아.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아

도 돼. 그래. 영화  같은 데서 무서운 게 나올 것만 같으면  눈을 감아버리죠. 그

것과 마찬가지죠.그것이 지나가버릴때까지 감고 있지요. 가만히 말이죠.)

  (어째서 감아버리지?)

  (싫으니까 그러죠)하고  그녀는 말했다. (예전엔-좀더  어렸을 적엔-감지 않았

죠. 학교서도 말예요,  무엇을 느끼면 그걸 말로  했어요. 하지만 그러면, 모두가 

언짢아하지 뭐예요. 예컨대 말이죠.  누군가 다칠 것만 같다고 느끼겠죠. 그래서, 

동무한테 '쟤가 다칠 거야'하고 말하면, 결국  그애가 어김없이 다치고 말지 뭐예

요. '유령'이란 서릴 들은 적도 있다구요.  그런 소문이 떠돌았대요. 그래서 난 굉

장히 다친 셈이죠. 그래서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죠. 아무한테도 아

무 말도 안 하는 거죠. 보일 듯하면 싸악 자기를 닫아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내 경우엔 닫지 않았잖아?)

  그녀는 으쓱 어깨를 움츠렸다.  (어째 돌연한 것 같았어요. 경계를 할 틈도  없

었는 거료. 돌연  훌쩍, 그 이미지 같은  게 떠올랐겠죠. 맨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말이죠. 호텔 바에서. 내가 음악을  듣고 있다가......아무 거면 어때요. 듀란 듀

란이건 데이빗 보위건...... 응,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을 때란 그렇죠. 별로 경계

를 하지 않아요. 여유롭고 그래서 음악이란 좋은 거죠.)

  (예지능력이 있단 말일까?)하고 나는 물었다. (예컨대 그, 다칠 것을 미리 안다

든가, 그런 건?)

  (글쎄 어떨지. 그런  것하곤 또 좀 다르지 않을까. 난  예지 하는 건 아니겠고. 

거기에 있는 걸 다만 느껴 알아챌 뿐예요. 하지만 그 무엇이랄까, 무엇인가 일어

나자면 일어나기 위한 분위기  같은 게 있겠죠. 이해가 가요> 예컨대 철봉을 하

다가 다치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방심이랄까  과신이랄까 그런  것이 있겠지요? 

들떠 가지고 제멋에 겨워 있다든가. 그러한 감정의 파도 같은 것이, 나한텐 굉장

히 민감하게 느껴진단 말예요. 그리고 이건  위태위태해, 하는 생각이 들죠. 그렇

게 되면 텅빈  꿈 비슷한 게 훌쩍  튀어나오죠. 그것이 튀어나오면...... 일어나죠. 

보인다구요. 하지만 이젠 아무 말도 안해. 무슨 말을 하면 모두들 나를 유령이라

고 부르니까. 그저  보는 거예요. 여기서 이  사람은 화상을 입은 게 아닐까하고

요. 그러면 화상을 입거든요. 하지만 나로선 아무  마로 할 수 없거든요. 그런 건 

비참하지 뭐예요. 닫아버리면  자기 자신이 미워지지 말지요. 하니까  닫지요. 닫

아버리면 자기 자신이 미워지지 않아도 되고요.)

  그녀는 한참동안 손에 모래를 쥐고 놀고 있었다.

  (양사나이는 정말로 있어요?)

  (정말로 있다구)하고 나는 말했다. (그 호텔 안에는 그가 살고 있는 장소가  있

단 말이야. 호텔 안에 또  다른 호텔이 있어. 그건 보통이론 보이지 않는 장소인 

거야. 하지만 그건  어김없이 거기에 남겨져 있어. 나를 위해  남겨져 있는 거야. 

그건 나를 위한 장소니깐 말이지. 그는 거기에 살아 있으면서, 나하고 여러 가지 

사물을 연결하고 있는 거야. 그건 나를 위한 장소이며, 양사나이는 나를 위해 일

하고 있어. 그가 있지 않으면, 나는 여러  가지 것들과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그가 그러한 것들을 관리하고 있거든. 전화 교환수처럼.)

  (연결한다?)

  (그래. 내가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무엇인가를 연결하려고  한다. 그가 그것을 

연결한다.)

  (잘 모르겠는걸.)

  나도 유키와 마찬가지로 모래를 움켜쥐고선, 손가락 사이로 떨어뜨렸다.

  (나로서도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양사나이가 나한테 그렇게 설명해 줬어.)

  (아직 옛적부터 양치기, 있었어?)

  나는 끄떡였다. (응, 옛적부터 있었어. 내가 어렸을 적무터. 나는  그걸 줄곧 느

껴왔었다구. 거기엔 무엇인가  있다고 말야. 하지만 그것이 양사나이라는 또렷한 

형태를 가지게 된 건, 그다지  전의 일이 아니지. 양사나이는 조금씩 조금씩  형

태를 잡게 돼았단 말이야. 내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말이지. 내가 그럴까? 나

로서도 알 수  없지. 아마 그럴 필요가  있어서 그랬겠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몰라, 거기에 대해  줄 곧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알 구가 없어.  바보스럽지 뭐

야.)

  (그 이야기, 다른 누구한테 이야기했어?)

  (아니,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런 거 이야기했자 아무도 믿지  않을 거고 말야. 

아무도 이해하지 않아. 게다가  나로선 제대로 잘 설명할 수가 없어. 유키한테라

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나도 제법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한 건 당신이 처음예요.  줄곧 잠자코 있었어

요. 아빠도 엄마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내가 먼저 이야기한 적은 없거든

요. 훨씬 어릴 적부터 그런  건 이야기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었거든요. 본능적

으로.)

  (서로 이야기해서 좋았어)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도 '유령조직'의 한 사람이에요)하고  유키는 모래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

다.

  차를 세운 데까지 걸어서  돌아오는 동안에, 유키는 학교 이야기를 했다. 중학

교가 얼마나 지독한 곳이었는가 하는 것을 그녀는 이야기했다.

  (여름 방학 때부터 줄곧 학교에 가지 않고 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공부가 

싫어서가 아니에요. 그저  그 장소가 싫은 거예요. 참을 수가  없는 걸요. 학교에 

가면 기분이 언짢아지면서 곧  토해버리는 걸요. 매일 매일 토했어요. 토하고 나

면 그 때문에 또 구박을 당하거든요. 여럿이 달려들어 구박한다구요. 선생님까지 

합세해서 구박하는 걸요.)

  (내가 동급생이었다면, 유키  같은 예쁜 아이는 절대로  구박하지 않을텐데 말

야.)

  유키는 얼마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예쁘니까 구박한다

는 경우도 있잖아요? 게다가 난  유명 인사의 자식이기도 하고. 그런 아이란, 굉

장히 애지중지 되든가,  아니면 굉장히 구박을 받든가, 그 어느  한 쪽이죠. 모두

들하고 제대로 사귈 수가 없거든요. 난 언제나 긴장해 있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보세요, 늘상 마음을 닫아버릴 수 있도록  하고 있어야 하찮겠어요? 하지만 그런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거든. 내가 노상 그런  식으로 쭈뼛거리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 말예요. 쭈뼛쭈뼛해 하면,  '미끼;로 보이나 봐요. 그래서 구박하는 거죠. 굉

장히 징그러운 방식으로 말이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징그럽게요. 굉장히 창피

한 짓을 하거든요. 그런 짓을 어떻게 하느냐,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그런 짓. 글

쎄......)

  나는 유키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쓰잘데없는 거 

잊어버리려므나. 학교 같은 거 억지로  갈 건 없다구.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면 

돼. 나도 잘 알고 있지. 그건 형편없는  곳이야. 언짢은 놈이 커다란 얼굴을 하고 

있겠지. 시시한 교원이  뽐내고 있겠지. 명백히 교원의 80퍼센트까지는 무응력자 

아니면 세디스트야. 또는  무능력자이자 새디스트야.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 가지

고, 그걸 징그러운 방식으로 학생들한테 내던지지. 무의미한 세세한 규칙이 너무

나 많아. 사람이 개성을 압살하다시피하는 시스템이 돼 있어서, 상상력의 부스러

기도 없는 바보 같은 놈이 좋은 성적을 받거든.)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이지. 학교라는 게 얼마나 시시한  곳이냐 하는 데 대해선 한 시간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지.)

  (하지만 의무 교육이에요, 중학교는.)

  (그런 건 누군가 딴  사람이 생각할 일이지, 유키가 생각할 일이 아니야.  모두

가 유키를 구박하는 그런  장소에 가야 할 의무란 아무것도 없어  전혀 없어. 그

런 걸 싫다고 할 권리는 유키에게 있는  거야. 큰 소리로 '싫다'하고 말하면 그만

이야.)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 앞은 어떻게 되죠? 줄곧 이런 일의 되풀이에요?)

  (나도 열세 살 때엔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지)하고 나는 말했다.  (이런 

식 그대로의 인생이 계속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야. 하지만 그렇진 않아. 어떻게

든 되지 않는다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좀더 크게 되면  사랑도 하게 돼. 

브래지어도 선물 받게 되고,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지게 되고.)

  (아저씨란 사람, 바보 같군)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보세요 요즘

의 열세 살  짜리 여자아이들은 다들 '브래지어'쯤은 갖고 있어요.  아저씬 반 세

기쯤 늦었잖아요?)

  (에게게)하고 나는 말했다.

  (응?)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러곤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저씬 바보야.)

  (그럴지도 몰라)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앞에 서서 차 있는 데까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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