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그녀의 부친이 말한 것처럼 꽤 좋은 편이었다. 물론 가구나 내장
디자인, 벽의 그림 따위는 세련된 '멋'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쾌적한 느낌을 주었고, 해변도 가까워 편리했다. 방이 10층에 있
었으므로, 조용하고 전망도 확 틔어 있었다.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일광욕을 할 수도 있었다. 부엌도 넓고
기능적이며 청결했다. 전자레인지로부터 접시닦이까지 제대로 갖추어져 있
었다. 옆에 유키의 방이 있는데, 그것은 내 방보다 작고, 부엌 대신 조그마
하고 아담한 간이 부엌이 딸려 있었다. 엘리베이터나 프런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외양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라디오를 산 다음에 나는 혼자서 부근의 수퍼마켓으로 나가 맥주와 캘리
포니아 와인, 과일, 주스 따위를 듬뿍 샀다. 그리고 우선 간단한 샌드위치
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식료품을 샀다. 그리고 유키와 둘이서 해변으로
나가, 나란히 누워 뒹굴며, 저녁 때까지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우리는 거의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몸을 이리저리
뒤척일 뿐이고, 그밖에는 별로 하는 일 없이 그저 지나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햇볕이 온통 아낌없이 지상에 내리쬐며 모래를 달구어댔다.
우아하고 부드로운 습기를 포함한 바닷 바람이 이따금 생각난 듯이 야자나
무 잎사귀를 흔들어대었다. 나는 몇 번이고 꾸벅꾸벅 졸고, 그리고 옆을 지
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나 바람 소리에 문득 깨어나며, 그때마다 나는 어
디에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하와이에 있다고 자신을 납득시키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땀이 햇볕에 그을리는 오일과 뒤섞여 볼을 타고 내
려와서, 귀 언저리에서 뚝뚝 지면으로 떨어졌다.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물
결처럼 몰려왔다 몰려가곤 했다. 이따금 그 소리에 서껴 자신의 심장의 고
동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 역시 지구의 거대한 영역 속의 하나라는 느낌
이 들었다.
나는 머리의 나사를 늦추고 긴장을 풀었다. 휴식 시간인 것이다.
유키의 얼굴 표정도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려 하와이 특유의 달콤하고, 미적미적한 공기에 접한 순간에 그것은 일
어났다. 그녀는 트랩을 내려서자마자 멈춰선 채 눈이 부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그리고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에는 이미 그녀의 얼굴을 엷은 막처럼 뒤덮고 있던 기색도 없었다. 머리칼
을 손으로 만지거나, 추잉껌을 구겨 버리거나, 의미도 없이 어깨를 움츠리
곤 하는 그녀의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동작들마저도 유연하고 자연스러
워 보였다. 반대로, 이 아이는 지금까지 정말 지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구
나, 하고 나는 실감했다. 그것은 지독할 뿐만 아니라 분명히 그릇된 생활인
것이다.
유키가 머리칼을 틀어올리고, 진한 색깔의 선글라스를 끼고, 작은 비키니
를 걸치고 해변에서 뒹굴고 있으면, 그녀의 연령을 잘 알 수 없었다. 몸매
자체는 아직 어린애지만, 그녀의 자연스럽고 어딘지 모르게 자기 완결적으
로 보이는 새로운 몸의 동작이, 그녀를 진짜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보
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손과 다리는 날씬하고 가늘지만 화사한 건 아니며
거기에는 뭔가 힘찬 것이 있었다. 그녀가 그 네 개의 수족을 마음껏 뻗치
면, 그 주위의 공간마저 사방으로 쭉 뻗쳐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지금
성장의 가장 다이내믹한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격렬하고
급속하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등에 오일을 발라 주었다. 우선 유키가 내 등에 오일을 발랐
다. 등이 굉장히 넓다고 그녀는 말했다. 등이 크다는 말을 들어본건 처음이
었다. 내가 발라주자, 유키는 간지러워하며 몸을 움츠렸다. 머리칼을 틀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희고 작은 귀와 목덜미가 보였다. 그리고 이는 나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해변에 엎드려 있는 유키는 이따금 나마저도 흠칫 놀랄만큼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목덜미만은 나이에 걸맞게 앳되고 거기에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대다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애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여성의 목덜미는 나이테처럼 차례로 나이
를 먹어 간다. 웬지 알 수 없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고 물어도 정확히 설
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소녀는 소녀와 같은 목덜미를 하고 있고,
성숙한 여성은 성숙한 목덜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몸을 햇볕에 천천히 태우는 거예요." 하고 유키는 그러한 일
에 밝은 사람처럼 내게 말하였다. "우선 응달에서 태우고, 잠시 양지로 나
가서 태우고, 또 응달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화상을 입은 것
처럼 되어 버리니까요. 화상으로 물집이 생기고 자국도 남아요. 아주 보기
흉해지거든요."
"응달, 양지, 응달 하고 나는 그녀의 등에 오일을 바르면서 흥겹게 복창
했다.
그리하여 하와이에서의 첫째날 오후에, 우리는 대체로 야자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FM의 디스크 자키가 진행하는 방송을 듣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바다에 들어가 헤엄을 치고, 바닷가의 스탠드 바에사 냉각 시킨 피나 코라
다를 마셨다. 그녀는 헤엄을 치지 않았다. "우선 휴식."하고 그녀는 말했다.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고, 마스터드아 피클을 듬뿍 곁들인 핫도그를 천천
히 먹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며 수평선이 토마토
소스처럼 붉게 물들고, 선셋 크루즈의 선박이 돛대에 불을 켜기 시작할 때
까지 거기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한 줄기의 햇살까지 음미하
려 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하고 나는 말했다. "해도 지고 배도 고프다. 조금 산책
을 하면서 제대로 만들어진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구. 고기가 연하고 토마
토 케찹이 넉넉해서 맛있게 구워지고 실로 엄청난 양파를 곁들인 진짜 햄
버거."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지만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드러누운 채로 웅크리
고 있었다. 마치 하루의 나며지 근사한 시간을 아끼며 소중히 여기는 의식
처럼. 나는 돗자리를 말아 들고, 라디오를 둘러메었다.
"괜찮아, 또 내일이 있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내일이 끝나면
모레가 있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튿날 아침, 유키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의 전화 번호밖에 알지 못했으므로, 내가 전화를 걸어 간단한
인사를 하고, 집의 위치를 물었다. 그녀는 마카하 부근에 있는 시골집을 빌
려 살고 있었다. 호놀룰루로부터 자동차로 30분쯤 걸린다고 그녀는 말했다.
아마 한 시간 조금 자날 무렵엔 찾아 뵐 수 있으리라고 나는 말해 두었다.
그리고 나는 부근에 있는 렌트카 사무실로 가서 미쓰비시 랜서를 빌렸다.
더할나위 없이 쾌적한 드라이브였다. 우리는 카 라디오를 크게 틀고, 창문
을 활짝 열어 젖힌 채, 해안에 연해 있는 고속도로를 시속 120킬로의 속력
으로 달렸다. 모든 곳에 빛과 바닷바람과 꽃의 향기가 차 있었다.
어머니는 혼자 살고 있는가고 나는 문득 마음에 걸려 물어보았다.
"설마." 하고 유키는 약간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사람이 혼자
소 그토록 오랜 동안 외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 턱이 없어요. 정말 비현
실적인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무슨 일을 통해나갈
수가 없어요. 내기를 해도 좋아요. 보이 프랜드와 함께 있을 거예요. 아마
잘생기고 젊은 보이 프랜드일 거야. 아빠하고 같아요. 아빠의 집에도 있었
죠, 그 매끄럽고 혐오감을 주는 동성 연애자인 보이 프랜드 말예요. 그 사
내는 틀림없이 하루에 세 번쯤 목욕을 하고, 두 번쯤 속옷을 갈아 입고 있
을 거예요."
"동성 연애자?" 하고 나는 물었다.
"몰랐어요?"
"아니 몰랐는데."
"어수룩하군요.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아빠에게 그
러한 취미가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동성연애자예요,
완벽한. 200퍼센트."
로큰롤 뮤직이 흘러나오자, 유키는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엄마는요, 이전부터 죽 시인을 좋아해요. 시인이나 시인 지망생인 젊은
이 말예요. 사진 연상 따위를 하고 있을 때에 뒤에서 시를 낭독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취미에요. 별난 취미야. 시라면 뭐든지 좋은 거예요. 숙명적으
로 끌리는가 봐. 그러니까 아빠도 시를 썼으면 좋았을텐데. 그 사람은 아무
리 재주를 부려도 시를 쓸 수는 없을 테고..."
이상한 가족이다. 하고 나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우주 가족. 행동파 작가
와 천재 여류 사진 작가와 영매적 소녀와 동성 연애자인 학생과 시인인 보
이 프랜드. 아이고 맙소사. 나는 이 환각을 일으키는 듯한 '확대 가족' 속에
서 대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별난
소녀의 시중을 드는 익살스러운 남자 수행원쯤 되는 셈일까. 나는 프라이
데이가 내게 보여준 - 호감을 주는 - 미소를 생각해 내었다. 이는 어쩌면
연대적인 미소가 아니었을까? 이봐, 관두라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건
일시적인 거야. 휴식시간인 거야. 알겠나? 휴가가 끝나면 나는 또 생업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그러면 이미 너희들과 놀고 있을 틈 같은 거 없다구, 이
건 정말 일시적인 거야. 본론과는 관계 없는 삽화 같은 거야. 곧 끝나. 그
다음에는 너희는 너희끼리 하면 돼. 나는 나대로 해나간다구. 나는 더욱 간
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세계가 좋은 거야.
나는 아메가 가르쳐준 대로 마카하 앞에서 고속도로를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 , 산을 향해 잠시 달렸다. 이 다음에 큰 태풍이 불어오면 지붕이 날
아가 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만들어진 집들이 도로 양쪽에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지만, 이으고 그것도 자취를 감추고, 알려준 대로 주택 단지의 문이 나
타났다. 수위실에 있는 인도 사람 같은 얼굴을 한 수위가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나는 아메의 집 번지를 대었다. 그는 전화를 걸어보고, 나에게 고
개를 끄덕이며 "좋아요, 들어가요." 하고 말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잘 가꾸어진 넓은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골프 카트 같은 것을 타고 있는 몇 사람의 정원사들이 묵묵히 잔디와 수목
을 손질하고 있었다. 부리가 노란 새의 무리가 잔디 위를 벌레처럼 깡충깡
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정원사들 중의 한 사람에게 유키 어머니의 주
소를 보여 주며 위치를 물었다. 저기요, 하고 그는 말하면서 간단히 손가락
으로 가르쳐 주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쪽에는 풀과 수목과 잔디가 보였
다. 새까만 아스팔트 도로가, 풀의 뒤쪽을 향해 커다랗게 커브를 이루고 있
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대로 차를 몰았다. 고개를 내
려갔다가 다시 고개를 올라간 지점에, 유키 어머니의 집이 보였다. 열대풍
의 분위기로 배열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현관 앞에 베란다가 있고, 처마 밑
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과일 나
22222222222222222222211
21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매를 맺고 있었다.
나는 차를 멈추고, 유키와 둘이서 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가 현관의 초인
종을 눌렀다. 풍경 소리가 졸리운 미풍에 유혹돠는 것처럼 이따금 메마르
고 작은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어 젖혀진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비발디의
음악 소리와 기묘하면서도 쾌적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15초쯤 지나자 문이
조용히 열리고, 사나이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햇볕에 잘 그을고 별로 키가
크지 않은 백인 미국인인데, 어깨 부분에서부터 왼쪽 팔이 없었다. 몸매가
다부지고 사려깊어 보이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색이 바랜 알로하 셔
츠에 조깅용 반바지를 입고, 고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
해 보였다. 잘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시인
으로서는 외양이 좀 강인한 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에는 강인한 시
인도 있을 것이다. 그다지 우스운 일이 아니다. 세계는 넓으니까.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유키를 바라보고, 또 나를 바라보고는 턱을 약
간 돌리며 미소지었다. "헬로." 하고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고 "안녕하세요."하고 일본어로 다시 말했다. 그리고 유키와 악수하고 나하
고 악수아였다. 그다지 강하지 않은 악수였다. "자,들어가요." 하고 그는 깨
끗한 일본어로 말했다.
그는 넓은 거실로 우리를 안내하여 커다란 소파에 앉게 하고는, 주방으
로 가서 프리머 백주 두 병과 콜라 한 병과 컵 세 개를 쟁반에 담아 가지
고 왔다. 나와 그는 맥주를 마시고, 유키는 음료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
고 그는 일어나 스테레오 앞으로 가서, 비발디의 볼륨을 낮추고 되돌아왔
다. 어쩐지 서머셋 모옴의 소설에 나올 듯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창문이
크고, 찬장에 선풍기가 달려 있으며, 벽에는 남양의 민예품이 장식되어 있
었다.
"그녀는 지금 사진 현상을 하고 있는 중이니가 10분쯤 지나면 올 겁니
다." 하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조금 기다려 줘요. 나는 딕이라고 합니다.
딕 노스. 그녀와 함께 여기서 살고 있어요."
"잘 부탁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일 나무들 틈사이로 파랗게 빛나는 바다가 보
였다. 수평선 위에는 원인의 두 개골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한 점의 구름이 외로이 떠 있었다. 구름은 움쩍도
하지 않고, 또 움직일 듯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어쩐지 완고해서
미혹한 느낌을 주는 구름이었다. 표백된 것처럼 새하얗고, 윤곽이 아주 뚜
렷했다. 부리가 노란 새들이 지저귀면서 이따금 그 루름 앞을 날아갔다. 비
발디가 끝나자, 딕 노스는 플레이어의 바늘을 들어 올리고, 외팔로 능숙하
게 레코드를 접어들어 레코드 자켓에 넣고는, 그것을 선반에 되돌려 놓았
다.
"우리 말을 잘 하시는 군요." 하고 나는 물었다. 그밖에는 특별히 할 얘
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딕 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 눈썹을 움직이며 눈을 감고, 그리고
미소지었다. "일본에 오래 있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입을 여는 데 시
간이 걸린다. "10년 있었어요. 전쟁 중에-베트남 전쟁 중에-처음으로 일본
에 갔는데 마음에 들어, 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우에
오지 대학이에요, 지금은 시를 쓰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젊지도 않고,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았
지만 역시 시인이다.
"그리고 일본의 하이쿠나 단가, 시 따위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하고 그는 덧붙였다. "어려운 작업이에요, 아주."
"그렇겠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맥주를 한 병 더 마시지 않겠는가고 내게 물었다. 마
시겠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맥주 두 병을 더 가져왔다. 믿어지지 않을 만
큼 우아하게 한 손으로 병마개를 따고, 그것을 컵에 따라 맛있는 듯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는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젓고
는 벽에 붙여져 있는 워홀의 포스터를 점검하듯이 차분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얘기지만."하고 그는 말했다. "세상에는 외팔의 시인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외팔의 피아니스트도 있습니다. 외팔의 투수도 있었어요. 왜
외팔의 시인이 없을까요? 시를 쓰는데는 팔이 하나든 셋이든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렇다고 나는 생각했다. 팔이 몇 개든 시를 쓰는 일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외팔의 시인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까?" 하고 딕 노스는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시에 관해선 거의 알지
못하고, 양팔을 온전히 갖고 있는 시인의 이름도 별로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다.
"외팔의 서퍼는 몇 명 있어요."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노를 움직이
는 작업을 발로 하는 거예요. 꽤 능숙 합니다만."
유키는 일어나 방안을 돌아다니며, 레코드함에 있는 레코드를 대충 살펴
보고는, 그녀가 좋아하는 게 없었는지 이마를 찌푸리며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악이 사라지자, 주위는 잠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조용
했다. 이따금 잔디 깎는 기계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 희미한 풍경 소리가 들렸다. 새도 울었다. 하지만 정적
은 압도적이었다. 무슨 소리가 나든, 그 소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
이 정적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집을 에워싸고 있는 수천 명의 '침묵의 사
나이'들이 투명한 무음 청소기로 소리를 모조리 흡수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 들었다. 조금 소리가 나면, 모두들 그리로 달려가 소리를 지워 버리는
것이다.
"조용한 곳이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딕 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중한 듯이 자신의 하나뿐인 손바닥을 내
려다보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조용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특히 나나 아메가 하고
있는 일과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조용함이 필요해요. 북적
거리는 곳은 질색이에요. 뭐라고 하던가-아, 저자거리 말이에요. 번화한 곳,
좋지 않아요. 어때요? 호놀룰루는 시끄럽죠?"
나는 특별히 호놀룰루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길어
져도 번거러울 것 같아 일단 그의 말에 동의해 두었다. 유키는 여전히 '시
시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밖의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카우아이는 좋은 곳입니다. 조용하고 사람도 적어요. 사실은 나는 카우
아이에서 살고 싶어요. 오아프는 좋지 않아요. 관광지 같고 자동차도 너무
많고, 범죄가 많아요. 하지만 아메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겁
니다. 1주일에 두세 번쯤은 호놀룰루 거리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기재 관계로 말예요. 여러 가지 기재가 필요 합니다. 그리고 오아프에 있어
야만 연락하기도 쉽고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그녀는 지금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생활하는 사람들을 찍고 있는 거예요.
어부나 정원사, 농부, 요리사, 도로 공사장의 인부, 생선 장수... 따위를 모
두 찍어요. 훌륭한 사진 작가입니다. 그녀의 사진에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재능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아메의 사진을 그다지 열심히 들여다본 적이 없지만, 이 말에도 일
단 동의해 두었다. 유키는 아주 미묘하게 킁킁거렸다.
그는 내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고 질문하였다.
자유기고가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내 직업에 흥미를 갖고 있는 듯했다. 아무 종형제의 종형제쯤 되는
사이의 동업자로 여겨진 모양이다. 무엇을 쓰고 있는가고 그는 물었다.
무엇이든, 하고 나는 말했다. 주문을 받으면 무엇이든 씁니다. 요컨대 눈
을 치는 일과 같은 거죠, 하고.
눈을 치는 일, 하고 그는 말하고,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에 대해 생각
하고 있었다. 아마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눈 치는 일
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해줄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그때 마침 아
메가 방에 들어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버렸다.
아메는 반소매 셔츠에 하얀 색깔의 구겨진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화
장도 하고 있지 않고, 머리는 잠자리에서 갓 일어난 것처럼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며, 내가 삿포로 호텔의 식당에
서 보았을 때와 똑같은 우아하고 호만한 분위기를 자아 내고 있었다. 그녀
가 방에 들어서면 순간적으로 그녀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존재라는 것을
모두가 실감하는 것이다. 설명도 없이, 일순간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유키에게로 가서, 그녀의 머리를 껴
안고 머리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실컷 휘젓고는 관자놀이에 코를 비벼
대었다. 유키는 별로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은 짓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항
하지는 않았다. 머리를 두세 번 흔들어, 머리칼을 본디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저 차갑게 선반에 놓은 꽃병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그녀의 아버지와 만나고 있을 때의 그 어쩔 수 없
는 무관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의 동작에서, 어색한 감
정의 흔들림 같은 것을 문득 엿볼 수 있었다. 이 모녀 사이에는 확실히 어
떤 마음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다.
아메(비)와 유키(눈). 확실히 너무 심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너무 심
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녀의 부친 말처럼 마치 일기 예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다면, 대체 어떤 이름을 붙였을까?
아메와 유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건강하냐?"라든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라는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딸의 머리칼을
휘젓고, 관자놀이에 코를 비벼댔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메는 내가 있는 곳
으로 와서 옆에 걸터앉은 다음 셔츠의 포켓에서 샐럼을 꺼내어 종이 성냥
으로 불을 붙였다. 시인은 어디서 재떨이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마치 타당한 장솨에 재치 있는 장식구를 삽입하는 것처럼, 아
메는 거기에 성냥개비를 버리고, 연기를 뿜어 내고는 코를 씰룩거렸다.
"미안해요. 일을 중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고 아메는 말했다. "중간에
손을 놓을 수 없는 성격의 일이에요. 일하기 시작하면 도리가 없어요."
시인은 아메를 위해 맥주와 컵을 날라왔다. 그리고 또 한 손으로 능숙하
게 병마개를 따고, 맥주를 컵에 따랐다. 그녀는 거품이 가라앉는걸 확인하
고는 절반을 죽 마셨다.
"그래, 당신은 언제까지 하와이에 있을 수 있어요?" 하고 아메는 나에게
물었다.
"알 수 없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정해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마 1주일 쯤일 겁니다. 지금은 휴가중입니다. 곧 일본에 돌아가 일을 시
작해야 하니까요...
"오래 있는 게 좋아요, 좋은 곳이에요." "네, 좋은 곳이죠." 하고 나는 말
했다. 아이고 맙소사,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듣고 있지 않는 모양이다.
"식사는 했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도중에 샌드위치를 먹고 왔습니
다." 하고 아메는 시인에게 물었다.
"우리는 틀림없이 한 시간 전에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고 나는 기억
하고 있는데요." 하고 시인은 천천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시간 전
은 열두 시 십오 분이니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점심 식사라고 부를 거
예요, 일반적으로."
"그럴까요?" 하고 멍한 얼굴로 아메는 말했다.
"그래요." 하고 시인은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녀
는 일에 열중하면 여러 가지의 현실적인 일들을 잊어 버립니다. 식사를 했
는지, 지금까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그러한 일들을 깡그리 잊
어버려요. 머리 속이 새하얘져 버리는 겁니다. 강렬한 집중력이에요."
이는 집중력이라기보다는 정신병의 영역에 속하는 사례가 아닐까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지만, 물론 그러한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나는 소파
위에서 예의 바르게 미소짓고 있었다.
아메는 잠시 멍한 눈으로 맥주잔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생각을
돌린 것처럼 그걸 집어들고 또 한 모금 마셨다. "이봐요, 하지만 그건 그렇
고, 시장하군요. 우리는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잖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
다.
"나는 불평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사실을 말한다면, 당신은 아
침 일곱 시 반에 커다란 토스트와 그레이프 후르츠와 요구르트를 먹었어
요." 하고 딕 노스는 설명했다. "그리고 아주 맛있다고 말했어요. 아침 식
사가 맛있는 건 인생의 커다란 기쁨의 하나라고 말예요."
"그랬던가요." 하고 아메는 말하고 콧등을 긁었다. 그리고 또 멍한 눈으
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이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히치코크의 영화 장면 같
다고 나는 생각했다. 점점 무엇이 뒤틀려 있는 건지 판단할 수 없게 되어
간다.
"하지만 아무튼 굉장히 시장해요." 하고 아메는 말했다. "먹어도 상관 없
겠죠?"
"물론 상관 없어요." 하고 시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당신의 배지
내 배가 아냐, 당신이 먹고 싶으면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먹으면 돼요. 식
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당신은 언제나 그래요. 일이 잘 되어가고 있
으면 식욕도 생겨요.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주겠소."
"고마워요. 그리고 함께 맥주도 한 병 더 갖다 주겠어요?"
"물론." 하고 그는 말하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당신은 점심 식사를 했어요?" 하고 아메는 또 나에게 물었다.
"아까 도중에 샌드위치를 먹고 왔습니다."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대답했
다.
"유키는?"
필요 없어요, 하고 유키는 간단히 말했다.
"딕과는 도쿄에서 만났어요." 하고 아메는 소파 위에서 다리를 포개고,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말은 마치도 유키를 향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가 카트만두에 가도록 권해
주었어요. 그곳은 영감을 불러일으켜 준다고 말예요. 카트만두는 좋은 곳이
었어요. 딕은 베트남에서 한쪽 팔을 잃었어요." 지뢰가 터져서. 바운싱 베
니라는 거예요. 우리말이 능숙하죠? 우리는 얼마 동안 카트만두에 있다가
하와이로 왔어요. 얼마 동안 카트만두에 있었더니 더운 곳으로 가고 싶어
졌지요. 그래서 딕이 이곳의 집을 발견해 주었어요. 여기는 그의 친구의 시
골집이에요. 손님용의 욕실을 암실로 꾸몄죠. 좋은 곳이에요."
이만큼 말하고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허리를
죽 폈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후의 깊은 침묵. 창밖에는
강한 빛의 입자들이 티끌처럼 떠돌며,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천천히 옮아가
고 있었다. 원인의 두 개골 같은 모양의 흰구름은 아직도 아까와 같은 모
습으로 수평선 위에 떠 있었다. 아메가 재떨이에 놓는 샐럼은 거의 손도
대어지지 않은 채 재떨이 속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딕 노스는 어떻게 한 손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빵
을 어떻게 자를까?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쥔다. 이건 당연하다. 그러면 빵을
어떻게 고정시킬까? 발 따위를 사용하는 것일까? 나로선 알 수 없었다. 혹
은 능숙하게 운을 밟으면 빵이 저절로 잘려지는 것일까? 그런데 왜 그는
의수를 달지 않는 것일까?
잠시 후에 시인은 쟁반에 아주 우아하게 배열된 샌드위치를 갖고 나타났
다. 오이와 햄으로 만들어진 샌드위치인데, 영국 풍으로 잘게 썰어 가지런
히 담겨져 있고, 올리브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매우 맛있어 보였다. 어떻게
이토록 능숙하게 자를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감탄했다. 그리고 그는 유리
컵에 맥주를 따랐다. "고마워요, 딕." 하고 아메는 말했다. 그리고 나를 돌
아다보았다. "그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요."
"외팔 시인을 대상으로 한 요리 콩쿠르가 있으면, 나는 절대로 1등을 할
겁니다."하고 시인은 한쪽 눈을 감으며 내게 말했다.
아메는 내게 하나 먹어 봐요, 하고 말했다. 나는 한 개를 집어 먹어 보았
다. 확실히 아주 맛있는 샌드위치였다. 어딘지 모르게 시적인 윤치가 감돌
고 있었다. 재료가 신선하고, 다루는 방식이 세련되어 있으며, 음운이 정확
했다. 맛있다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빵을 자르는지는 아
무래도 알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론 그러한 것을 물을 수가 없
다.
딕 노스는 부지런한 인물인 듯했다. 그는 아메가 그 샌드위치를 먹고 있
는 동안에, 또 부엌으로 가서 모두를 위해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아주 맛
있는 커피였다.
"이봐요.' 하고 아메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유키와 둘이 있으면 아무렇
지도 않아요?"
나는 그 질문의 의미를 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무
슨 의미인다고 나는 질문해 보았다.
"물론 음악 얘기에요. 그 로큰롤 음악. 당신은 그게 고통스럽지 않아요?"
"별로 고통스럽진 않은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걸 듣고 있으면, 난 머리가 아파와요. 30초도 참을 수 없어요. 도저히.
유키와 함께 있는 건 좋지만, 그 음악만은 견딜 수 없어." 하고 그녀는 말
하고, 집게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무척 한정되어 있어요. 바로크 음악이나 어
떤 종류의 재즈 따위. 민족 음악이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음악 따위. 그
러한 걸 좋아해요. 시도 좋아하죠. 조화와 조용함."
그녀는 또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내려놓
았다. 아마 그대로 담배 피우는 일을 잊어버리는가 보다고 나는 상상했는
데, 정말 그랬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그녀와 지냄으로써 인생과 재능을 소
모해 버렸다고 한 말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
는 주위의 사람에게 무엇을 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조정하기 위해, 주위로부터 조금씩 무엇인가를 부여하
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재능이라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
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
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화와 조용함. 그녀가 그것을 얻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다리나 팔을 그녀에게 내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관련이 없다고 외치고 싶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내가
우연히 휴가중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휴가가 끝나면, 나는 다시 '눈 치우
는 작업'으로, 즉 일상적인 일로 돌아간다. 이처럼 기묘한 상황은 곧 아주
자연스럽게 끝나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의 빛나는 재능 앞에
내놓을 것이라곤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자신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운명의 흐름의 작은 흐트러짐에 의해 여기에-이 이유도 알 수
없고 기묘한 장소에-일시적으로 밀려나 있을 뿐이다. 할 수 있다면, 나는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말 따위에는 귀도 기울
이지 않을 것디다. 이 '확대 가족' 속에서는 나는 아직 목소리도 없는 2등
시민인 셈이다.
구름은 아직 똑같은 형태로 수평선 바로 위에 떠 있었다. 거기에 배를 띄
우고 막대기를 쳐들면 닿을 듯한 거리였다. 거대한 원인의 거대한 두 개골.
어느 역사의 단층으로부터 이호놀룰루의 상공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우리
는 아마 동류일 거라고 나는 구름을 향해 말해 보았다.
아메는 샌드위치를 먹어버리고는 다시 유키가 있는 데로 가서 머리칼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유키는 무표정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있는 머리칼." 하고 아메는 말했다.
"이러한 머리를 나도 갖고 싶었는데. 언제나 윤기가 나고 반듯해. 내 머리
는 금방 헝클어져 버려. 손을 쓸 수가 없어. 그렇지, 아가씨?" 그리고 그녀
는 또 유키의 관자놀이에 코를 비볐다.
딕 노스는 빈 맥주 병과 쟁반을 치웠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실내악을 틀
었다. "맥주 들겠어요?" 하고 내게 물었다. 그만 마시겠다고 나는 말했다.
"이봐요, 난 여기서 유키와 둘이 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하고
아메가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안 이야기.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 그
러니까 딕, 그를 해안에 안내해 드리면 어떨까요? 한 시간쯤."
"좋습니다. 물론." 하고 시인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일어섰
다. 시인은 아메의 이마에 가벼이 입을 맞추고, 투박한 삼베로 만들어진 흰
모자를 쓰고는 녹색의 색안경을 끼었다. "우리는 한 시간쯤 산책을 하고
오겠어요. 천천히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는 내 팔꿈치를
잡고 "자, 갑시다. 멋진 해변이 있어요." 하고 말했다.
유키는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메는 세 가치째의 샐럼을 담배갑에서 꺼내었다. 그녀들을 뒤에 남겨두고,
나와 외팔의 시인은 방문을 열고, 숨이 콱콱 막힐 듯한 오후의 햇빛 속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