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그걸 또 조금 마셔도 괜찮을까요?" 하고 유키는 나의 피나 코
라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아." 하고 나는 말하고, 잔을 바
꾸었다. 유키는 빨대로 2센티미터 가량의 피나 코라다를 마셨다. "맛있어
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제 들렀던 바와는 약간 맛이 다른 것 같아여."
나는 웨이터를 불러 피나 코라다를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째로 유키에게 주었다. "모두 마셔도 돼." 하고 나는 말했다. 저녁 때마
다 나와 함께 지내고 있으면, 일주일 만에 너는 일본에서 피나 코라다에
제일 밝은 중학생이 될거야."
풀장 한켠에서는 풀 사이즈의 댄스 밴드가 (프레네시)를 연주하고 있었
다. 나이가 많은 클라리넷 연주자가 도중에 긴 독주를 하였다. 아트 쇼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솔로였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정장을 한 10여 쌍의 늙
은 부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풀의 밑바닥으로부터 떠오르는 조명이, 그
들의 얼굴을 환상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춤을 추고 있는 노인들은 매우 행
복해 보였다. 그들은 온갖 세월을 보낸 끝에, 이 하와이에 겨우 당도한 것
이다. 그들은 우아하게 발을 움직이며, 제대로 스텝을 밟고 있었다. 사내들
은 허리를 곧추 세우고 반듯한 자세로 움직이고, 여자들은 빙그르르 원을
그리며 롱 스커트 자락을 부드럽게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
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웬지 내 마음을 안정시
켰다. 아마 노인들의 흡족한 듯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곡이 (문 그로우)로 바뀌자, 그들은 서로 살며시 볼을 접근시켰다.
"또 졸리는군." 하고 유키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 혼자서 똑바로 걸어갈 수 있었다. 진보하고 있다.
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와인과 잔을 거실로 가져와서, TV를 켜고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놈들을 높이 매달아라)를 보았다. 또 크린트 이스트
우드다. 그리고 여전히 미소짓지도 않는다. 나는 와인 석 잔을 마실 동안
영화를 보고 있었지만, 도중에 점점 졸려와서 그만 TV를 끄고, 욕실로 가
서 이를 닦았다. 이로써 하루가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다. 보람이 있는 하루
였을까? 그렇지도 않다. 그저 보통이다. 아침에 유키에게 서핑을 가르쳐 주
고, 또 서프 보드를 사 주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E.T)를 관람했다. 그리
고 할레크라니의 바에서 둘이서 피나 코라다를 마시고, 우아하게 춤을 추
는 노인들을 구경했다. 유키가 술에 잔뜩 취하고, 나는 그녀를 호텔로 데리
고 돌아왔다. 그저 보통의, 좋든 싫든 하와이적인 하루였다. 그러나 어쨌든
이로써 하루가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그처럼 간단히 끝나지는 않았다.
내가 T셔츠와 팬티만 입고 침대로 들어가, 전기를 끄고 5분도 지나기 전
에 문앞의 초인종이 울렸다. 원, 또 무슨 일이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시계
는 열두 시 조금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머리맡의 전등을 켜고, 바지
를 입고 방문 쪽으로 나갔다. 내가 그리로 갈 때까지 벨이 두 번 더 울렸
다. 유키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밖에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찾아온이가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찾아온이가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
었다. 하지만 찾아온 이는 유키가 아니었다. 알지 못하는 젊은 여자였다.
"하아이네."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아이." 하고 나도 반사적으로 말했다. 얼핏 보기에 여자는 동남 아시
아계인 듯했다. 타일랜드나 필리핀이나 베트남... 나는 미묘한 인종적 차이
를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쪽이다. 예쁜 여자였다. 몸집이 작고,
피부색이 까무잡잡하며, 눈이 크다. 그리고 윤기가 나는 핑크색의 매끄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백이나 구두도 모두 핑크색이었다.
왼손의 손목에 팔찌처럼 커다란 핑크색의 리본을 감고 있었다. 마치 무슨
선물처럼. 도대체 왜 손목에 리본 따위를 감고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문에 손을 대고,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준이라고 해요." 하고 그녀는 약간 사투리가 섞인 영어로 말
했다.
"네, 준." 하고 나는 말했다.
"안에 들어가도 돼요?" 하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뒤쪽을 가리키며 물
었다. "잠깐 기다려." 하고 나는 당황하여 말했다. "아가씨는 아마 방을 잘
못 찾아온 모양이군 아가씨는 누구를 찾아 온 거겠지?"
"저어, 기다려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백 속의 메모를 꺼내어 읽었다.
"이스터..을요."
나였다. "나야, 그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잘못 찾아온 게 아니잖아
요."
"잠깐 기다려요." 하고 하고 나는 말했다. "이름은 확실히 맞아요. 하지만
나 어떻게 된 건지 통 이해할 수 없어. 아가씨 누구요, 대체?"
"아무튼 좀 안에 들어가게 해주지 않겠어요? 여기에 서서 이야기를 하면
모양이 좋지 않아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안에 들어가 손 들엇, 꼼짝마 하고 위협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확실히 방의 입구에서 이러니 저러니 승강이를 하고 있는 동안에, 옆방
의 유키가 깨어나 나오기라도 하면 일일이 번거로울 것 같았다. 나는 그녀
를 안에 들어오도록 했다. 될 대로 되라지.
준은 안에 들어오자, 내가 권하기도 전에 곧 소파에 편히 앉았다. 무엇을
마시겠는가고 나는 물었다. 당신과 같은 거면 좋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진 토닉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대담하게 포개고 맛있는 듯이 진 토닉을
마셨다. 예쁜 다리였다.
"이봐요, 준, 아가씨는 왜 나를 찾아왔지?"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오라고 해서요." 하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익명의 신사가요.
그분이 돈을 치렀어요. 일본에서. 당신을 위해. 아시겠죠, 어떻게 된 건지?"
마키무라 히라쿠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게 그가 말하고 있던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손목에 핑크색의 리본을 감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
는 내게 여자를 아겨주면 유키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으리라. 실리적이다.
실로 실리적이다.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유순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묘한 세상이다, 모두들 나에게 여자를 아겨주고...
"아침까지의 몫은 이미 다 받았어요. 그러니까 둘이서 실컷 즐겨요. 내
몸은 썩 좋아요."
준은 다리를 들어 핑크색의 하이힐 샌들을 벗고는, 바닥에 섹시하게 휙
던졌다.
"이봐요, 미안하지만 그건 할 수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왜요, 당신은 동성연애자예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런 게 아니라, 그 돈을 치른 신사와 나 사이에 사
고 방식의 차이가 있어. 그래서 너하고는 잘 수가 없어. 사리의 문제야."
"하지만 돈은 이미 지불돼 있고, 되돌려 받을 수는 없어요. 게다가 당신
이 나하고 퍼크하든 말든, 그러한 걸 상대방은 알 수 없어요. 내가 국제 전
화로 그 사람에게 보고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분명히 그와 세 번 퍼크했습
니다' 하고 말예요. 그러니까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예요, 그건. 사리고
뭐고 없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진 토닉을 마셨다. "해요." 하고 준은 단순
히 말했다. "기분 좋아요, 그거." 나로선 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여러 가
지를 설명하곤 하는 일이 점점 귀찮아졌다. 그런대로 평범한 하루가 겨우
끝나고 침대에 들어가, 불을 끄고 막 잠이 들려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데 알지 못하는 여자가 갑자기 찾아와 그걸 하자고 한다. 지독한 세상이다.
"이봐요, 진 토닉을 한 잔씩 더 마시지 않겠어요?"하고 그녀가 내게 물
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엌으로 가서 2인분의 진 토닉을 만들어 가
지고 왔다. 그리고 라디오를 켰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자세로 있었다. 하드 로큰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사이코." 하고 준은 일본어로 말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내게 기대
면서 진 토닉을 훌쩍훌쩍 마셨다. "어렵게 생각하면 안 돼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프로예요. 이 일에는 당신보다 내가 더 밝아요. 거기엔 사리
고 뭐고 없어요. 그러니까 내게 모든 걸 맡겨요. 이건 그 일본인 신사와는
이미 관계가 없는 문제예요. 이 일은 그로부터 이미 떠나 버렸어요. 이미
나하고 당신 두 사람의 문제예요."
그리고 준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정말 모
든 게 귀찮아졌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만일 내가 창부를 데리고 자면서 안
심할 수 있다면, 그건 그런대로 상관 없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렇게 승강
이를 하고 있을 바엔 차라리 해버리는 게 낫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껏해
야 섹스인 걸. 발기하여 삽입하고, 사정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오케이, 하자."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야죠."하고 준은 말했다. 그리고 진 토닉을 다 마시고, 빈 잔을 테
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난 오늘은 몹시 피곤해. 그러니까 지나친 일은 하나도 할 수 없
어."
"맡겨줘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해드릴 테니까.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돼요. 다만 처음에 두 가지 일만은 해주셔야겠어요."
"뭐지?"
"방의 불을 끄는 일과, 리본을 풀어주는 일."
나는 불을 끄고, 손목의 리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침실로 갔다. 불을
끄자, 창밖의 방송용 안테나 탑이 보였다. 탑의 꼭대기에선 붉은 불빛이 명
멸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하드 로큰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디
오에서는 하드 로큰롤이 계속 흘러나오고는 있었지만, 틀림없는 현실이다.
준은 간단히 원피스를 벗고, 이어 내 옷을 벗겼다. 메이만은 못할지라도,
그녀 역시 기교적인 창부이며, 그 기교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녀
는 손가락이나 혀 따위를 사용하여 나를 적절하게 발기시키고, 포리너의
곡에 맞추어 온전하게 사정으로 이끌었다.
밤이 갓 시작되어, 달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어때요? 좋았죠?"
"좋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진 토닉을 한 잔씩 마셨다.
"준." 하고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넌 어쩌면 지난 달엔 메이라
고 부르지 않았어?"
준은 즐거운 듯이 하하하 하고 하고 웃었다. "재미있군요. 난 조크를 좋
아해요. 다음 달엔 줄리라고 부르나요. 8월엔 오지."
농담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지난 달
에는 메이라는 아가씨를 데리고 잤었다고. 하지만 물론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녀는 또 프로
페셔널하게 나를 발기시켰다. 두 번째. 나는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거
기예 그냥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모든 걸 해 주었다. 솜씨 좋은 가솔
린 스탠드 같았다. 차를 세우고 키를 건네주면, 급유로부터 세차나 공기압
체크, 오일 점검, 유리창 닦기, 재떨이 청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을 해
준다. 이러한 걸 과연 섹스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그러니까 어쨌든 모든
게 끝난 것은, 두 시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여섯 시 가까이 되어 깨어났다. 라디오는 아침까지 켜진 채로 있었
다. 밖은 이미 환하게 밝고, 일찍 일어난 서퍼가 이미 해안에 픽업 트럭을
내다놓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서는 벌거벗은 준이 몸을 오그리고 깊이 잠
들어 있었다 바닥에는 핑크색의 옷과 핑크색의 구두와 핑크색의 리본이 놓
여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끄고,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일어나요." 하고 나는 말했다. "사람이 와요. 어린 소녀가 아침 식
사를 하러 온다구. 미안하지만 네가 있으면 곤란해."
"오케이, 오케이." 하고 그녀는 말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로
백을 집어들고 욕실로 가서 이를 닦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옷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나, 좋았죠?" 하고 그녀는 입술 연지를 백에 집어넣고는 물림쇠를 잠갔
다. "그래, 다음 번은 언제로 해요?"
"다음 번?"
"3회분을 지불받았어요. 그러니까 아직 두 번 더 남아 있어요. 언제가 좋
아요? 아니면 기분이 바뀌도록 나 아닌 다른 아가씨로 하겠어요? 그래도
좋아요. 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까. 남자들은 여러 종류의 아가씨와
자고 싶어하죠?"
"아냐, 물론 네가 좋아." 하고 나는 말했다 달리 말할 방법도 없다. 3회
분. 틀림없이 마키무라 히라쿠는 내 몸으로부터 정액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뽑아내려는 것이겠지.
"고마워요. 그럼 또 봐요, 바이바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유키가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러 올 때까지 컵들을 모두 깨끗이 씻
어 치우고, 재떨이를 씻고, 시트가 구겨진 것을 펴놓고, 핑크색의 리본을
휴지통에 버렸다. 이만하면 됐으리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유키는 방에 들
어오자 마자 약간 이마를 찌푸렸다. 방안의 무엇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굉장히 눈치가 빠르다. 무엇인가를 추측하고 있다. 나는 모르는 체
하고 휘파람을 불면서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커피를 만들고, 토스트를 굽
과, 과일을 깎았다. 그리고 식탁으로 날랐다. 유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
위를 힐끗힐끗 둘러 보면서 차가운 우유룰 마시며 빵을 먹고 있었다. 내가
말을 걸어도 통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북하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방안에 진지하다 못해 냉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긴장된 아침 식사가 끝나자, 그녀는 테이블 위에 양 손을 올려놓고, 가만
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주 진지한 눈이었다. "이봐요, 여기에 어젯밤 여
자가 왔었죠?" 하고 유키는 말했다. "잘 알아 맞히는데."하고 나는 아무렇
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선뜻 말했다.
"누구예요, 대체. 이 근방에서 아가씨를 낚아왔어요?"
"설마. 그런 짓은 하지 않아. 난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은 걸. 상대방이
제 멋대로 찾아왔어."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잖아요."
"거짓말이 아냐. 나는 네게 거짓말은 하지 않아. 정말로 상대방이 제멋대
로 찾아온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모든 걸 분명히 설명했다. 마키
무라 히라쿠가 내게 아가씨를 주선해 주었다는 것. 내 성욕을 충족시켜 두
면 유키의 몸이 안전하리라고 마키무라 히라쿠가 생각했으리라는 것.
"이거야 원." 하고 말하며 유키는 깊이 안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왜 그
분은 언제나 그 따위 쓸모없는 생각만 할까. 왜 그처럼 엉뚱한 짓만 하고
있을까. 정말로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
는 주제에, 그처럼 소용없는 일에는 생각이 잘 미쳐요, 엄마도 엄마지만 아
빠도 그와는 다른 면에서 머리가 돈 사람 같아. 언제나 엉뚱한 짓을 하여
일을 망가뜨려버려요."
"확실히 네 말이 맞아. 정말 엉뚱해." 하고 나는 동의했다.
"하지만 아저씨께서는 왜 방 안에 들어오게 했어요? 방안에 들어오게 했
죠, 그 여자를?"
"들어오게 했어. 사정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녀와 이야기 할 필요가
있었어."
"하지만 설마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겠죠?"
"그게 그처럼 단순하지도 않아."
"설마."하고 말하기 시작하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적당한 표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볼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 사정을 설명하면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아무튼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양 손으로 볼을 감쌌다. "믿어지지 않아."하고 아주 자
고 메마른 목소리로 유키는 말했다. "아저씨가 그런 짓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처음에는 물론 거절할 작정이었어."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
아저씨가 그런 짓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처음에는 물론 거절할 작
정이었어."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것 저것 생각하기가 귀찮아졌어.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네 부모는 확실히 일종의 강인함을 갖고 있어. 어머
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요. 그것을 이정하느냐의 여부를 떠난 스타일이라는 걸 갖고있어 존경
은 할 수 없어도 무시할 수는 없어. 말하자면 그렇게 해야 네 아버지의 마
음이 놓인다면 괜찮다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나빠보이지 않는 아가씨였
어."
"하지만 그건 너무 심해요."하고 유키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아저씨에게 여자를 안겨 준 거예요.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에요. 그릇되고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확실히 그랬다.
"확실히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에요." 하고 유키는 되풀이했다.
"그래." 하고 나는 인정했다.
아침 식사를 한 다음에, 우리는 보드를 가지고 해변으로 나갔다. 그리고
또 쉐라톤의 앞바다로 나가, 점심 때까지 서핑을 했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
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거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제 뭍으로 돌아가 점심 식사를 하자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
다. 방으로 가서 무엇을 만들어 먹겠는가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럼 밖에서 가볍게 먹자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는 포트 데
라시의 잔디밭에 앉아 핫도그를 먹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유키는 콜라
를 마셨다. 그녀는 아직도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미 세 시간 동안
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음에는 거절할 거야." 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마치 허공의 틈이라도 바라보듯이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30초쯤 가만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햇볕에
깨끗이 그을은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다음에?"하고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음이란 무슨 뜻이에
요?"
나는 마키무라 히라쿠가 2회분을 더 선불해 놓았다고 설명해주었다. 그
리고 두 번째는 모레 밤이라고. 그녀는 주먹으로 잔디를 몇 번 두드렸다.
"믿어지지 않아요. 정말 바보짓들이야."
"특별히 감싸려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말하자면 내가 남자고, 네가 여자니까." 하고 나는 설명했다.
"알겠어?"
"정말로, 정말로 바보짓들이야." 하고 그녀는 울먹일 듯한 목소리로 말했
다. 그리고 제 방으로 들어가, 저녁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낮잠을 자고, 부근의 수퍼마켓에서 사온 (플레이보이)를 읽
으면서 베란다에서 일광욕을 했다. 네 시경부터 구름이 모습을 나타내며
서서히 하늘을 뒤덮다가, 다섯 시가 지나면서부터는 격렬하고 본격적인 스
콜이 들이닥쳤다. 이 기세로 한 시간쯤 더 퍼부으면, 섬이 몽땅 남극까지
떠내려가 버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격렬한 비였다.
이토록 격렬히 퍼붓는 비를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5미터 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해변의 야자나무 이파리들은 미친 듯이 요동
을 치고, 아스팔트 도로는 눈깜짝할 사이에 강물처럼 되어 버렸다. 몇 명의
서퍼가 우산 대신 보드를 머리위에 받쳐 들고 창문 밑을 빠른 걸음으로 지
나갔다. 이윽고 천둥이 울리기 시작했다. 알로하 타워 부근의 바다 위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나는 창문을 닫고, 부엌에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저녁 식사로 무엇을 만들까 하고 생각했다.
한 번 더 천둥이 울렸을 때에 유키가 살며시 방으로 들어와, 부엌구석
쪽의 벽에 기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커피 컵을 집어 들고, 그녀
를 데리고 거실로 가서 소파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유키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마 천둥 치는 소리를 싫어하는가 보다. 왜 아가씨들은 모두
천둥 치는 소리나 거미 따위를 싫어할까? 천둥은 약간 시끄러운 공중의 방
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미도 특수한 것 말고는 해롭지 않은 작은 벌
레다. 한 번 더 창백한 섬광이 번쩍였을 때. 유키는 내 오른팔을 두손으로
꼭 잡았다.
10여 분쯤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스콜과 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는 내 오른팔을 잡고, 나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천둥 소리는 멀
어져 가고, 비가 멎었다. 구름이 흩어지면서, 해질녘의 태양이 모습을 드러
내었다. 나중에는 사방에 연못 같은 웅덩이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야자나
무 잎에 묻은 물방울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힌 물결을 일으키고, 비를 피하고 있던 관광객들도 다시 슬
슬 해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무
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고 돌려보냈어야 했어. 하지만 그때는 피로해 있었
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어. 나는 아주 불완전한 인간이야. 불완전하고,
노상 실패하거든. 하지만 배워. 두 번 다시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다
고 결심하지. 그래도 똑같은 과오를 두 번씩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왜 그럴까? 간단해. 왜냐하면 내가 어리석고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그러한
때에는 역시 약간은 스스로를 혐오하게 돼. 그리고 똑 같은 과오를 세 번
은 저지르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지. 조금씩 향상되어가. 조금씩이지만 그래
도 향상은 향상이야."
유키는 오랫동안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는 내 팔로부터
손을 떼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밖의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내
가 한 말을 그녀가 듣고 있었느냐의 여부도 알 수 없었다. 해가 지고 해변
에 나란히 늘어 선 가로등에 하얀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비가 멎은 다음
의 해질녘은 공기가 신선하고 빛이 선명했다. 검푸른 저녁 하늘을 배경으
로 방송국의 높은 안테나가 솟아 있고, 그 꼭대기의 붉은 불빛이 심장의
고동처럼 규칙적으로 천천히 명멸하고 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의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리고 몇 개의 크래커를 먹으면서 나는 정말로
조금씩이나마 향상되어가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별로 자신은 없었다. 잘
생각해 보면 전혀 자신이 없었다. 열여섯 번쯤 계속해서 똑같은 과오를 저
지를 일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자세로서는 그녀에
게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거실로 돌아오자 유키는 아직도 똑같은 모습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다리를 오그리고 양 손으로 껴안는 듯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고집스런 표
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문득 결혼 생활을 생각해 내었다. 그러고 보니 결
혼하고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이 여러 번 있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몇 번이고 아내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러
한 때에는 아내 역시 내가 말을 걸어도 몇 시간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그토록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일까 하고 나는 곧잘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닌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
나 그러한 때에는 참을성 있게 사과하고 설명하면서 그 상처가 아물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거듭함으로써 우리의 관계는 향상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마 향
상되지는 않았었나보다.
그녀가 내게 마음의 상처를 입힌 일은 한 번밖에 없었다. 단 한번이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어울려 집을 나가 버렸다. 그때뿐이다. 결혼 생활-그건
아주 기묘한 것이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소용돌이와도 같은 거야, 딕
노스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옆에 앉자 잠시 후에 유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
았다.
"용서한 건 아니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우선 화해하는 것뿐이에요.
그건 정말로 그릇된 일이었고 나는 큰 쇼크를 받았어요. 알겠어요?" "알았
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 식사를 했다. 나는 새우와 강
낭콩을 사용하여 필라프를 만들고, 삶은 계란과 올리브와 토마토를 사용하
여 샐러드를 만들었다. 나는 와인을 마시고 그녀도 와인을 약간 마셨다.
"너를 보고 있으면 이따금 아내가 생각나." 하고 나는 말했다.
"아저씨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다른 남자와 어울려 집을 나간 부인 말예
요?"하고 유키가 말했다.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하와이.
그로부터 며칠 동안은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낙원 같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런대로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나는 준이 찾아왔을 때 정
중히 거절하였다. 감기가 들었는지 열이 있고 기침도 난다(콜록콜록), 얼마
동안은 도저히 그런 것을 할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택시비라고 말하면서 또 10달러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안됐군요.
건강이 회복되면 이리로 전화를 줘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백 속의 샤프펜
을 꺼내어 전화 번호를 적었다. (바이)하고 그녀는 말하고 허리를 흔들면서
돌아갔다.
나는 유키를 어머니에게 몇 차례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는 외팔 시인
딕 노스와 둘이서 해변을 산책하거나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곤 했다. 그는
헤엄을 썩 잘 쳤다.
유키와 어머니는 그 동안에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유키는 이에 대해서는 아
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특별히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렌트카로 그녀를
마카하까지 보내주고, 딕 노스와 잡담을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서퍼를 바
라보거나 맥주를 마시고 소변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그녀를 호
놀룰루로 데리고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딕 노스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낭독하는 것을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시의 내용까지는 물론 알 수 없었지만, 꽤 능숙한 낭독이었다. 리듬
이 아름답고 정감이 깃들어 있었다.
갓 현상하여 아직 젖어 있는 아메의 사진을 본 적도 있다. 하와이 사람
들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보통의 포트레이트지만, 그녀
가 찍으면 어느 얼굴이나 모두 생기가 돌며, 생명의 핵 같은 것을 부각시
키고 있었다. 남국의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우아함이나 비천함,
섬뜩한 느낌을 주는 혹독함이나 삶의 기쁨 따위가 사진으로부터 직접 전달
되어 왔다. 강한 힘이 느껴지면서도 조용한 사진이었다. 재능이 있다고 나
는 생각했다. "나와도 다르고 당신과도 다르다."고 딕 노스는 말했다. 옳은
말이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내가 유키를 돌보아 주고 있는 것처럼, 딕 노스는 아메를 돌보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가 훨씬 더 본격적이었다. 그가 청소를 하고, 세탁
을 하고, 요리를 만들고, 물품을 구입하고, 시를 낭독하고, 농담을 하고, 따
라다니며 담뱃불을 꺼주고, 이를 닦았는가고 물어보고, 탠팍스를 보충하고
(나는 그가 물품을 구입할 때 한 번 동행한 적이 있다.), 사진을 파일하며,
타이프 타자기를 사용하여 정확한 그녀의 작품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는 이를 모두 외팔로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많은 일을 하고도
자신의 창작에 돌리기 위한 시간이 그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엾은 사나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를 동정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
았다. 유키를 돌보아 주는 대가로, 아버지는 내게 비행기 요금과 호텔값을
치러주고, 또 여자까지 안겨 주고 있다. 어느모로 보나 엇비슷하다.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 날에는, 우리는 서핑 연습을 하거나, 수영
을 하거나, 별로 하는 일 없이 해변에서 뒹굴거나, 쇼핑을 하거나, 렌트카
로 섬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다. 밤이 되면 우리는 산책을 하고, 영
화를 보고, 할레크라니나 로열 하와이안의 가든 바에서 피나 코라다를 마
셨다. 나는 틈이 나는 대로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휴식을 ㅊ
하면서 손가락 끝까지 곱게 햇볕에 그을렸다. 유키는 힐튼의 부티크에서
열대의 정열적인 꽃 무늬의 새로운 비키니를 샀는데, 이를 몸에 걸치면 하
와이에서 태어나 성장한 소녀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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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핑 기량도 상당히 향상되어, 나로선 도저히 포착할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파도를 능숙하게 탔다. 또한 스톤즈의 테이프를 몇 개 사가지고, 매일
되풀이해 듣고 있었다. 내가 음료수 따위를 사러 갈 때에 유키를 혼자 해
변에 남겨두고 가면, 온갖 사내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유키
는 영어를 할 수 없었으므로, 그러한 사내들을 100퍼센트 무시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면, 그들은 모두 "실례했다."고 말하며(혹은 더 지독한 말을 하
고) 가버렸다. 그녀는 까무잡잡하고, 아름답고, 건강했다. 그리고 긴장을 풀
고 쉬면서 매일을 즐기고 있었다.
"이봐요, 남자는 그토록 강하게 여자를 갖고 싶어지나요?" 하고 어느날
해변에 누워 있을 때 갑자기 유키가 내게 물었다.
"그래. 그 강도에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원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남자
라는 것은 여자를 갖고 싶어하게 되어 있어. 섹스에 대해서는 대개 알고
있겠지?"
"대개 알고 있어요." 하고 유키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성욕이라는 게 있어." 하고 나는 설명했다. "여자하고 자고 싶어하는 거
지. 자연스러운 일이야. 종족 보존을 위해-."
"종족 보존 따위에 대해 묻고 있지 않아요. '보건' 시간의 강의 같은 소
리는 하지 말아요. 그 '성욕'에 대해 묻고 있어요. 그게 어떤 것인가를."
"이를테면 네가 새라고 하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일을, 굉장히 기분이 좋으므로 아주 좋아한다고 하자. 하지만 여러 가지 사
정 때문에 자주 날을 수가 없어. 날씨나 풍향이나 계절에 따라 날을 수도
있고 날을 수 없을 때도 있거든. 하지만 날을 수 없는 날이 계속되면, 힘도
남아 돌고 초조해져요. 자신이 부당하게 깎아내려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왜 날을 수 없을까 하고 화도 나고 말야. 이러한 느낌을 알 수 있겠
어?"
"알 수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언제나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그럼 얘기는 간단해. 그게 성욕이야."
"전번에는 언제 하늘을 날았어요?" 지난 번에 아빠가 안겨준 여자를 만
나기 이전에는?"
"지난 달 말경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즐거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언제나 즐거워요?"
"반드시 그렇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불완전한 생물이 둘이 모여
하는 일이니까, 언제나 잘 될 수만은 없지. 실망하는 때도 있어. 기분 좋게
날고 있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치는 수도 있어."
"음."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었
다. 아마 새가 하늘을 날면서 한눈을 팔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치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는가 보다.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그렇게 설명해도 되는 것이
었을까? 어쩌면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의 소녀에게 그릇된 얘기를 해
준 게 아닐까? 하지만 괜찮겠지, 어차피 성장하면 저절로 알게 될 일이니
까.
"하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점점 잘 되어갈 확률이 향상되지." 하고 나는
계속 설명했다. "요령을 알게 돼. 그러나 대체로 이에 비례해서 성욕 자체
는 서서히 감소되어 가지. 그러한 거야."
"비참해." 하고 유키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정말." 하고 나는 말했다.
하와이.
도대체 지금까지 며칠 동안이나 나는 이 섬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날짜
의 관념이라는 게 머리 속에서 완전히 소멸되어 있었다. 어제 다음이 오늘
이고, 오늘 다음이 내일이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가며 되풀이되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어 달력의 날짜
를 계산해 보았다. 여기에 온지 이미 열흘이 되어 있었다. 4월도 점차 하순
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내가 우선 휴가로 정한 1개월은 이미 지나가버렸
다.
어찌 된 셈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려져 있다.
완전히 풀려져 있다. 서핑과 피나 코라다로 보낸 나날. 그건 그런대로 나쁘
지 않다. 하지만 나는 원래 키키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모
든 게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 연줄을 따라, 흐름을 추적하여 왔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틈엔지 이 모양이 되어 버렸다. 기묘
한 사람들이 잇따라 나타나, 사물의 흐름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그 덕
분에 나는 지금 이렇게 야자나무 그늘에서 열대 음료를 마시면서 카라파나
를 듣고 있다.
어디서든 흐름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에가 죽었다. 피살되었다.
경찰이 왔다. 그렇지, 메이의 사건은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고혼다
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몹시 피로하여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
다. 그는 나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하고 있었을까?
어쨌든 모든 게 어중간한 채로 방치되어 있다. 그렇게 방치된 채로 내버려
둘 수는없다. 슬슬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떠날 수가 없었다. 이는 유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도 오랜만에 긴장으로부터 해방된 나날이었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
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매일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살결을 햇볕에 태우고 헤엄을 치고, 맥주를 마시고, 스톤즈나 블루
스 스프링스틴을 들으면서 섬 안을 드라이브하였다. 달빛어린 해변을 산책
하고, 호텔의 바에서 술을 마셨다.
물론 그러한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턱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
다. 하지만 그저 단순히 거기서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여유롭고,
유키도 마냥 여유로워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내가 스스로 "자,
이제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고, 그것이 내 자신에 대한 변명이
되기도 했다.
2주일이 지났다.
나는 유키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해질녘의 다운타운이었다. 도
로의 교통이 정체되어 있었지만, 특별히 급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면서 길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르노 전문
의 영화관이나 슬리프트 숍, 아오자이 옷감을 팔고 있는 베트남인의 양복
점, 중국 식품점, 헌책방, 중고 레코드 가게 따위가 쭉 이어져 있었다. 어느
가게 앞에서는 두 노인이 테이블과 의자를 내다놓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이었다. 길모퉁이에는 여기저기 멍한
표정의 사나이들이 할 일 없이 서 있었다. 재미있는 거리다.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가게도 있다. 하지만 여자가 혼자 걸어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다운타운을 벗어나 항구로 다가가면, 무역 회사의 창고나 사무실 등이
많다. 거리의 모습도 휑뎅그렁하여 서먹서먹한 느낌을 준다. 회사일을 끝내
고 귀가를 서두는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커피숍은 군데 군데 글자가
떨어진 채로 네온을 켜고 있다.
(E.T)를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유키가 말했다.
좋아, 저녁 식사를 한 다음에 보러 가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E.T)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E.T 같았으
면 좋았을 걸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집게 손가락 끝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건드렸다.
"안돼, 그렇게 해보아도 거긴 치유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때였다.
그때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머리 속의 상념에 일격을 가했다. 머리속에
서 쾅 소리를 내면서 무엇인가가 이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
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순간에는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쪽의 카마로가 몇 번이고
날카로운 경적을 울리다가, 옆을 통과할 때에 창문을 통해 내게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그렇다, 나는 무엇인가를 본 것이다. 지금 거기서, 매우 중
요한 것을.
"이봐요, 왜 그래요, 갑자기? 위험하잖아요." 하고 유키가 말했다. 아마
그렇게 말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았다. 키키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틀림 없다, 나는 지금 거기서 키키를 목격한 것이다. 이 호놀룰루의 다운타
운에서. 왜 이런 데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키키였다. 그녀는
나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내 차의 옆쪽을-손을 뻗치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그녀는 지나간 것이다.
"유키야, 창문을 모두 닫고 문을 잠가라.밖에 나오면 안 돼. 누가 말을
걸든 열지 말아라, 곧 돌아올 테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잠깐 기다려요. 싫어요, 혼자 이런데-."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한길을 달렸다. 도중에 사람들과 부딪쳤지만,
그러한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키키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붙잡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2블록
이나 3블록쯤 달렸다. 달려 가면서 나는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을 생각해 내
었다. 푸른색의 원피스와 하얀 숄더 백이 보였다. 해질녘의 거리 속에서 하
얀 숄더 백이 그녀의 보조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운타운의 번화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로 쪽으로 나가자
갑자기 통행인들이 불어나, 나는 잘 달릴 수 없게 되었다. 체중이 어떻게든
조금씩 나는 키키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그녀는 그저 계속 걸어가고 있었
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통의 속도였다. 뒤를 돌아다보거나 한눈을
팔지도 않고, 버스를 타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은채 그저 곧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상하게도 거
리는 별로 좁혀지지 않았다. 신호는 한번도 그녀를 정지키시지 않았다. 마
치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신호는 계속 푸
른색이었다. 나는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차에 치일 뻔하면서 한 번은 붉
은 신호가 커져 있는데도 한길을 급히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그녀와의 거리를 20미터 정도로 좁혀갔을 무렵에, 그녀는 갑자기
길을 왼쪽으로 꺽었다. 나도 물론 뒤따라 왼쪽으로 꺾었다. 인기척이 없는
좁은 길이었다. 별로 시원치 않은 낡은 사무실 빌딩이 양쪽에 늘어서고, 도
로에는 더럽혀진 라이트밴이나 픽업 트럭 따위가 주차해 있었다.
길에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거기에 멈
춰선 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봐, 어찌 된 거야, 넌 또 사라져 버렸나?
하지만 키키는 사라져 버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대형 트럭게 가려져 일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보도 위를 똑같은 걸음걸이로 계속 걸어
가고 있었다. 점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하얀 숄더
백이 허리께에서 흔들이처럼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키키!" 하고 나는 큰소리로 와쳤다.
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도달한 듯했다. 그녀는 나를 힐끗 돌아다 보았
다. 키키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우리 사이의 거리는 떨어져 있고, 해
질녘이어서 가로등도 제대로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길이었다. 그래도 그
게 키키임을 나는 확신할수 있었다. 틀림 없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미소까지지어 보인 것이다.
하지만 키키는 멈춰 서지 않았다. 그녀는 힐끗 돌아다보았을 뿐이었다.
보조도 늦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계속 걸어가다가, 길가에 늘어선 사
무실 건물 중의 한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20초쯤 늦게 그 속으로 들
어갔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복도의 막다른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은
이미 닫혀져 있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그 바늘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그 바늘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늘
은 안타까우리만큼 천천히 돌아가다가, 8이라는 번호의 자리에 흔들리면서
뚝 멎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가 이윽고 생각을 바꾸어 가까이에 있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도
중에 양동이를 손에 들고 있는-빌딩의 관리인처럼 보이는-백발의 사모아
사람과 마주쳤다. 나는 하마터면 그를 밀쳐 쓰러뜨릴 뻔했다.
"이봐요, 어딜 가요?" 하고는 그는 내게 물었지만, "나중에." 하고 나는
말하고, 그대로 계단을 뛰어 놀라갔다. 먼지 냄새가 나고, 인기척이 없는
빌딩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내 구두 소리만이 무척 크게 복도에 울려퍼졌
다. 사람이 있을 듯한 기미가 통 보이지 않았다. 8층의 복도에 이르러, 나
는 우선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복도
를 따라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사무적인 7,8개의 방문이 늘어서 있을 뿐
이었다. 방문들에는 각기 번호와 사무실의 이름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나는 방문에 부착된 명찰을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내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무역 회사나 법률 사무소, 치과 의사의
치료실 따위이며, 어느 명패나 모두 낡아 빠지고 더럽혀져 있었다. 명패에
씌어진 이름마저 낡아빠지고 더러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무실들은 모두 번창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시원치 않은 거리
에 있는 시원치 않은 건물의, 시원치 않은 층에 늘어서 있는, 시원치 않은
사무실들로 여겨졌다. 나는 한 번 더 천천히 차례로 명패들의 이름을 살펴
보았지만, 키키와 결부될 만한 명패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망연
자실하여 가만히 거기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나
지 않았다. 빌딩은 폐허처럼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윽고 무슨 소리가 들렸다. 하이힐의 뒤축이 딱딱한 바닥을 밟는 소리
였다. 그 구두 소리는 천장이 높고 인기척이 없는 복도에, 기기하게 느껴지
리만큼 커다랗게 메아리쳤다. 그것은 마치 태고의 기억과도 같은-무겁고
메마른-음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음향은 나의 '지금의' 존재를 약간 뒤흔
들어 놓았다. 갑자기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해서 바짝 말라버린 거대
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떤 연유로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버린 것이다.
구두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서, 그것이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를 나
는 잠시 동안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른쪽의 복도 끝에서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