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왔다. 나는 신발(테니스 슈즈) 소리를 죽이고, 빠른 걸음으로 그쪽으로
가 보았다. 구두 소리는 제일 끝에 있는 방문의 안쪽으로부터 들려오고 있
었다. 굉장히 멀리서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소리나는 곳이
방문의 안쪽임은 분명했다. 방문에는 명패가 붙어 있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까 내가 방문들을 모두 살펴보았을 때에는, 확실히 여기
예 명패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사무실이었는지 생각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거기에 어떤 명패가 붙어 있었다. 틀림 없다. 명패가
없는 방문이 있다면, 절대고 기억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꿈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꿈
일 턱이 없다. 모든 일이 분명리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하나하나 차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는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에 있다가 키키를 뒤쫓
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약간 뭔가 빗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은 든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나는 아무튼 그 방문을 노트해 보았다.
내가 노크하자, 구두 소리가 멎었다. 마지막 울림 소리가 공중에 흡수되
어 버리자, 주위는 다시 본래의 완전한 침묵에 뒤덮였다.
나는 30초쯤 그대로 방문 앞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구두 소리도 멎은 채로.
나는 손잡이를 잡고 마음껏 살며시 둘러보았다. 잠겨져 있지는 않았다.
손잡이가 가볍게 돌아가고, 희미한 삐걱 소리를 내며 방문이 안쪽으로 열
렸다. 안은 어둡고 바닥 청소용 세제 냄새가 약간 풍겼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가구도 없고 조명 기구도 없었다. 황혼 무렵의 희미한 빛이 방안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는 몇 장의 변색된 신문지가
떨러져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또 구두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네 발짝, 그리고 또 침묵.
소리는 오른편 위쪽으로부터 들려온 듯했다. 나는 방의 제일 안쪽으로
가서, 창가에 문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문도 잠겨져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계단이 나타났다. 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차가운 난간을 꼭 잡
고, 천천히 발밑을 확인하면서 캄캄한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급경사진 계
단이었다. 아마 여느 때는 사용하지 않는 비상용 계단인 모양이었다. 하지
만 그 계단의 위족에서 소리가 들린 것만은 분명했다. 계단을 다 올라가자
거기에 또 문이 있었다. 전등 스위치를 찾아보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데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손으로 더듬어 손잡이를 찾아내고, 그
것을 돌려 문을 열었다.
방안은 어두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건 아니지마, 그래도 무엇이 있는지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당히 넓은 공간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옥상 주택이거나 지붕 밑의 창고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상
상하였다. 창문은 하나도 없거나 혹은 있어도 닫혀져 있는 것 같았다. 높은
천장의 한가운데에, 몇 개의 작은 채광용 창문 같은 게 보였다. 그러나 달
이 아직 높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지는 않
았다. 어슴푸레한 가로등의 불빛이 굴절에 굴절을 거듭한 끝에 아주 약간
만이 그 들창으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시력에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나는 이처럼 기묘한 어둠 속에 얼굴을 내밀 듯이 하면서 "키키!"하고 한
번 불러보았다.
한참 기다렸지만, 반응은 없었다.
어떡하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어둡다.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나는 그대로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리
는 동안에 눈이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부슨 일이 새로이 전개될지도 모른
다.
얼마 동안이나 거기에 가만히 서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응꼬 웬지 알 수 없지마느
방에 스며드는 빛이 희미하나마 약간 더 밝아졌다. 달이 떠오른 것일까?
혹은 거리의 등불이 밝게 켜지기 시작한 것일까? 나는 방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방의 중앙을 향해 발밑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니기 보았
다. 내 운동화 바닥이 퍼석퍼석하고 무거운 소리를 냈다. 내가 아까 들었던
구두 소리와 같은- 깊이와 넓이가 혼탁된-기묘하게 비현실적인 음향이었
다.
"키키!"하고 나는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대답은 없다. 처음의 직감대로,
이는 굉장히 넓은 방이었다. 텅 빈 채 공기가 정지되어 있었다. 한가운데에
서서 빙 둘러보니, 구석 쪽에 가구 같아 보이는 것들이 더러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명확히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회색의 윤곽으로 미루어 보아
소파나 의자나 테이블이나 체스트 따위인 것 같았다. 이는 아무튼 기묘한
광경이었다. 가구가 전혀 가구 같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 현
실감이 결여되어 있는 점이었다. 방이 너무 넓은 데 비해 가구의 수가 압
도적으로 적ㅇ은 것이다. 원심적으로 확대된 비현실적 생활 공간.
나는 어딘가에 키키의 하얀 숄더 백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그녀의 푸른색의 원피스는 아마 이 방의 어둠 속에 묻혀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 숄더 백은 보이지 않았다. 소파나 의자 위에는 하얀 옷
감 같은 것이 구겨진 채로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아마 삼베로 만들어진
커버 따위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다가가 보니, 그건 옷감 따위가
아니었다. 뼈였다. 소파 위에는 두 개의 인골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다
완전히 제대로 갖추어진 인골이었다. 무엇 하나 결여되어 있지 않았다. 하
나는 크고, 또 하나는 몸집이 작았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의 자세대로 거
기에 걸터 앉아 있었다. 큰 쪽의 인골은 한쪽 팔을 소파의 등받이에 걸치
고 있었다. 작은 쪽은 양손을 가지런히 무릎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두 사람
은 자신들도 알아채지 못하는 동안에 죽어버린채, 그대로 육체룰 잃고 뼈
만 남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놀라우리만큼 희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
다. 모든 게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머무른 채 움직
이지 않는 것이다. 그 형사가 말한 것처럼, 뼈는 깨끗하고 조용한 것이다.
그들은 아주 완전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무서울 건 하나도 없다.
나는 방안을 한 바퀴 돌아다녀 보았다. 여러 의자 위에는 각기 인골이
앉아 있었다. 뼈는 모두 여섯 구였다.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완전한 인골이
며, 죽은 지 오랜 시간이 경과해 있었다. 모두 죽은 걸 알아 채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런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인골은 텔레비
전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물론 꺼진 채로 있었다. 하지만 그
는(그 크기로 미루어 보아 아마 남자이리라고 나는 상상했다) 그 브라운관
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곧바로 그리고 이어져 있었다. 허무의
영상에 못박혀진 허무의 시선. 테이블 앞에 앉은 채로 죽어버린 자도 있었
다. 테이블에는 아직 식기가 놓여진 채로 있었다. 식기 속에 들어 있는 것
은, 그것이 이전에 무엇이었든간에, 하얀 먼지로 변해 있었다. 침대에 드러
누운 채 죽어 있는 자도 있었다. 그 인골만이 불완전했다. 왼팔이 어깨 부
분부터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건 대체 무엇인가? 너는 대체 내게 무엇을 보여 주려 하고 있느가.
또 구두 소리가 울렸다. 구두 소리는 다른 공간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
다.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도
아닌 방향으로부터, 어느 곳도 아닌 장소로부터 그것이 들려오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이 방이 막다른 곳이었다. 이 방에서
는 어느 곳으로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한참 계속되다가
사라졌다. 이에 이어지는 침묵은 숨이 막히리 만큼 농밀했다. 나는 손바닥
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키키는 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들어온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니, 푸른
어둠 속에 여섯 구의 뼈가 어렴풋이 하얗게 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이
제 곧 쓰윽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할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곳을 나가 버
리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곳을 나가 버리면, 이내
텔레비전 스위치가 켜지고, 쟁반 속에는 따뜻한 요리가 되돌아오는 게 아
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방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와, 휑뎅그렁한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사무실은 아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바닥의 똑같
은 장소에 헌 신문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이 하얗게 빛나고, 보도
옆에 라이트밴과 픽업 트럭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주차해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해가 지고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먼
지 투성이의 창틀 위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명함만한 크기의 종이쪽지인데,
거기에는 전화 번호로 여겨지는 7개의 숫자가 볼펜으로 씌어져 있었다. 종
이나 잉크도 변색하지 않은 정도로 새것이었다. 번호는 통 기억에 없다. 뒤
집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씌어져 있지 않았다. 그냥 백지다.
나는 그 종이를 포켓에 집어넣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복도에 서서 또 한참 동안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게 사멸되어 있었다. 선이 끊어져 버린 전화기와도 같은 완전한 침
묵이었다.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침묵이었다. 나는 단념하고 계단을 내려왔
다. 홀로 나와, 아까 만났던 관리인을 찾아보았다. 거기가 대체 무슨 사무
실인가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잠시 거기
서 기다려 보았으나,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점점 유키의 일이 걱정이 되었
다. 대체 나는 얼마 동안이나 그녀를 방치해 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
다. 하지만 얼마 만큼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20
분쯤일까? 혹은 한 시간쯤일까? 어스름이 이미 밤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
고 별로 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에 그녀를 방치해두고 왔던 것이
다. 아무튼 돌아가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더 이상 여기에 있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나는 그 거리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급히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왔다.
유키는 잔뜩 지친 표정으로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내가 노크를 하자, 고개를 들어 창문의 잠금 장치를 젖혔다.
"미안해." 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왔었어요. 뭐라고 호통을 치거나 유리창을 두드리고, 차
를 흔들곤 했어요." 하고 그녀는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라디오
의 스위치를 껐다. "굉장히 무서웠어요."
"미안해."
그리고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일순 얼어 붙은 것처
럼 보였다. 눈동자가 갑자기 그 색깔을 잃고, 조용한 수면에 나뭇잎이 떨어
졌을 때처럼 표정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형성
하면서 천천히 약간 움지였다. "아니, 아저씨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왔어
요?"
"알 수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는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장
소로부터 들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발걸음 소리의 음향과 마찬가지로
깊이와 넓이가 혼탁되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천천히
땀을 닦았다. 내 얼굴 위의 땀이, 차갑고 단단한 막처럼 되어 있었다. "잘
알 수 없어. 대체 뭘하고 있었을까?"
유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며시 손을 뻗쳐 내 볼에 가져왔다. 그 손가
락 끝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그녀는 내 볼에 손가락을 댄 채, 냄새를 맡
을 때처럼 숨소리를 내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작은 코가 약간 부풀
었다가 고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1킬로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인
가를 보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일. 설명하려 해도, 누구
에게도 잘 설명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어요." 그녀는 몸을 기
대듯이 하면서 내 볼에 살며시 볼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10초나 15초쯤
그대로의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가엾어라."하고 그녀는 말했다.
"왜 그럴까?" 하고 나는 말하며 웃었다. 별로 웃고 싶지는 않았지만 웃
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사로운 보통 인간이야.
어느 편이냐 하면, 실제적인 인간이야. 그런데 왜 언제나 이토록 기묘한 일
에 끌려들어 버리는 것일까?"
"틀림 없어."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어요."
"난 잘 알 수 없어."
"무력감."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뭔가 거대한 것에 의해 휘둘려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어쩔 도리가 없는 경우와 같은 기분."
"그럴지도 몰라."
"그러한 때에는 어른은 술을 마셔요."
"정론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할레크라니의 바로 갔다. 풀장 쪽의 바가 아닌 실내 쪽의 바 였
다. 나는 마티니를 마시고, 유키는 레몬 소다를 마셨다. 세르게이라흐마니
노프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머리숱 적은 중년의 피아니스트가, 그
랜드 피아노를 향해 묵묵히 스탠다드 넘버를 치고 있었다. 손님은 아직 우
리 두 사람뿐이었다. 그는 (스타 더스트)를 치고, (밧 낫 포미)를 치고, (버
몬트의 달)을 쳤다.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별로 재미있는 연
주는 아니었다. 그는 그 무대의 마지막에 쇼팽의 프렐류드를 쳤다. 이는 꽤
멋진 연주였다. 유키가 박수를 치자, 그는 2밀리미터쯤 미소짓고 이어 어디
론가 사라졌다.
나는 그 바에서 마티니를 석 잔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 방안의 광
경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이는 사실적인 꿈처럼 느껴졌다. 흠뻑 땀에 젖
어 깨어나서, 아아 역시 꿈이었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한 광경이
었다. 하지만 이는 꿈은 아니다. 나도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고 있고, 유키
도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본' 것을. 풍화한 여섯 구
의 백골.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왼팔이 없는 백골은 딕 노스의
것일까? 그러면 나머지 다섯 구는 누구의 것인가?
키키는 내게 대체 무엇을 전달하려 하고 있는가?
나는 문득 생각이 나, 아까 창틀 위에서 발견한 종이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전화 박스로 가서 그 번호를 돌려 보았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신호 소리가 허무의 심연에 추를 드리우듯이 언제까지나 울리고 있었다.
나는 바의 의자로 돌아와 한숨을 쉬었다.
"비행기의 좌석이 예약이 되면, 나는 내일 일본으로 돌아가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어. 즐거운 휴가였지만, 이제 돌
아갈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일본에 돌아가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말야."
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부터 그녀는 이를 알고 있
었던 것 같았다. "좋아요, 내 일은 신경 쓰지 말아요, 아저씨가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면 돼요."
"넌 어떡하겠어? 여기에 남겠어? 아니면 나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겠
어?"
유키는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얼마 동안 엄마가 있는 데서 묵도록 하
겠어요. 아직 별로 일본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묵게 해달라고 하면 거
절하진 않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유리잔 바닥에 남아 있던 마티니를 홀짝 다들이
켰다.
"그럼 내일 마카하까지 자동차로 바래다 주겠어. 그리고 나도 마지막으
로 너의 어머니를 한 번 더 만나두는 편이 나을 것 같고."
그리고 우리는 알로하 타뤄 부근에 있는 씨푸드 레스토랑으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그녀는 러브스터를 먹고, 나는 위스키를 마신 다음
에 프라이드 오이스터를 먹었다. 그녀와 나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 머리 속은 아주 멍한 상태였다. 굴을 먹으면서 그대로 잠이 들어, 백골
이 되어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키는 이따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 "아저씨는
이제 돌아가 잠을 자는게 좋겠어요.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하고 내
게 말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고, 잠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켈레비전은 야구 중게를 하고 있었다. 양키즈와 오리온즈의 시합이었다. 하
지만 나는 특별히 시합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쩐지 텔레비
전을 켜두고 싶었을 뿐이다 뭔가 현실적인 것과 이어져 있다는 표지로.
나는 졸음이 돌 때까지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종
이쪽지에 씌어져 있던 전화 번호를 켜두고 싶었을 뿐이다 뭔가 현실적인
것과 이어져 있다는 표지로.
나는 졸음이 올 때까지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종
이쪽지에 씌어져 있던 전화 번호를 돌려 보았다. 역시 아무도 나오지 않았
다. 나는 열다섯 번이나 벨이 울리게ㅣ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또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을 응시했다. 윈필드가 배터박스에 들어
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머리에 걸려 있음을 알아 챘다. 무엇인가,
있다.
나는 텔레비전을 응시하면서 잠시 그 '무엇인가' 헤 대해 곰곰 생각해 보
았다.
무엇과 무엇이 유사하다. 무엇과 무엇이 이어져 있다.
설마,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나는 그 종이
쪽지를 집어 들고 방문 쪽으로 가서, 준이 거기에 적어둔 전화 번호 와 이
종이쪽지의 전화 번호를 대조해 보았다.
똑같았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이어져 있다. 그런데 나만
이 그 이음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날 아침에 나는 오후의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리고 가방을 챙기고, 자
동차를 몰아 유키를 마카하에 있는 어머니의 작은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나는 아침에 아메에게 전화를 걸어, 급한 용무가 생겨서 오늘 일본에 돌아
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다. 유키를 재울 만한 장
소는 있으므로, 이리로 데려다 줘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드물게 아
침부터 흐려져 있었다. 언데 또 스콜이 쏟아질지 알 수 없는 날이었다. 나
는 언제나처럼
해변에 연한 고속도로를 120킬로로 달렸다.
"패크맨 같아요." 하고 유키가 말했다.
"궈 같애?" 나는 되물었다.
"아저씨의 심장 속에 패크맨이 있는 것 같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패크맨이 아저씨의 심장을 먹고 있어요." 피피피픽 하고..."
"비유를 잘 이해할 수 없어."
"무엇인가가 침식해 들어가고 있어요."
나는 이에 대해 샹각하면서 한참 동안 운전을 계속하였다. "이따금 죽은
의 그림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아주 진한 그림
자야. 죽음이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팔을 쑥 뻗
쳐, 당장이라도 내 발목을 잡을 듯한 느낌이 드는 거야. 하지만 무섭지는
않아. 왜냐 하면, 그것은 '언제나' 나의 죽음이 아니지 때문이야. 그손이 잡
는 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발목이야. 하지만 누군가가 죽어갈 때마다
나의 존재가 조금씩 빗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돼 그럴까?"
유키는 잠자코 어깨를 움츠렸다.
"웬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언제나 죽음이라는 게 내 옆에 있어. 그리고
기회가 오면, 그것이 어느 틈사이로부터 문득 모습을 나타내거든."
"그게 당신의 열쇠가 아닐까요? 당신은 죽음을 통해 세ㅐ계왜 이어져
있는 거예요, 틀림없이."
나는 또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너는 나를 무척 낙담시키는구나." 하고 나는 말했다.
딕 노스는 내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정말 섭섭해하였다. 우리 사이에는
별로 공통점은 없었지만, 그런만큼 일종의 홀가분함은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의 시적인 현실성에ㅐ 대한 존경심 같은 걸 품고 있었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악수를 때에 문득 그 백골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정말로
딕 노스였을까?
"이봐요, 당신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하고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미소지으며 약간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중에 곧잘 생각했어요. 거
기에는 죽음의 방식이 정말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엔 별
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까다로운 일을 생각할 틈이 없어요. 전쟁할 때
보다 평화로울 때가 훨씬 더 분주해요." 그는 웃었다.
"하지만 왜 그런 걸 묻지요?"
별로 이유는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저 잠깐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라고.
"생각해 두겠어요. 이 다음에 당신을 만날 때까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아메가 나에게 함께 산책을 나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나란히 조
깅 코스를 천천히 걸어갔다.
"여러 가지로 고마워요." 하고 아메가 말했다.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요.
난 그런 걸 아무래도 잘 표현할 수 없지만. 하지만- 응, 그래요. 당신이 있
어준 덕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잘 되어간 듯한 느낌이 들어요. 당신이 중
간에 있어 주면, 웬지 일들이 원활히 풀려가요. 유키하고도 둘이서 여러 가
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조금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 듯하고, 이렇게 묵
으러 와주게도 되었고요."
"다행이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다행이군요' 라는 대사를 사용하
는 것은, 그밖에는 무엇 하나 긍정적인 언어 표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
고, 또 침묵이 부적당하다는 위기적 상황일 경우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물론 아메는 그러한 걸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과 만난 이후로 그 애도 정신적으로 꽤 안정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초조한 빛도 이전보다는 줄어들었고. 분명히 당신과 그애는 성격이
맞는가 봐요. 웬지는 알 수 없ㅇ지만, 어쩌면 당신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
이 있는지도 몰라요. 어떻게 생각해요?"
난 잘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학교에 다니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본
인이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지 않으면 안 보내도 되지 않느냐고 나는 말했
다. "아주 다루기 어려운 아이고 상처입기 쉬운 아이므로, 무리하게 억지로
무슨 일을 시키려 해도 소용 없으리라고 여겨져요. 그보다는 온전한 가정
교사를 두고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을 가르쳐 주는 편이 낫습니다. 주입식
의 수험 공부나 쓸모없는 클럽 활동, 무의미한 경쟁이나 집단의 억압, 위선
적인 규칙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애의 성격에는 맞지 않아여. 학교 따
위에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되는 거예요. 혼자서 해야만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보다는 그애만이 지니고 있는 재능을 발견하여 실
컷 뻗어나가게 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애에게는 뭔가 좋은 방향으
로 잘 뻗어 나갈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혹은 그러다가 스
스로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물론 보내면 됩니
다. 아무튼 그건 그애가 스스로 결정토록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아메는 잠시 잠자코 생각하고 있다가,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당신이 말하는 대로일지도 몰라요. 나도 전혀 단체적인
인간이 아니고, 변변히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으니까, 당신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어요."
"그걸 잘 이해할 수 있으면, 별로 생각해볼 필요가 없잖아요. 대체 무엇
이 문제였습니까?"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별로 무슨 문제 따위는 없어요. 다만 내가 그애에 대해 어머니로서의
확고한 자신을 가질 수 없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깨끗이 단념
할 수 없었어요. 상대가 뭐라고 말하든, 학교 따위에는 가지 않아도 괜찮다
고 말예요. 자신이 없으니까 무기력하게 생각하는 겁ㄴ니다. 역시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 말예요."
사회적으로,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결론이냐의 여부
는 알 수 없어요. 아무도 앞 일은 알 수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잘 되어가
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그애게 대해- 어머니로서든 친
구로서든간에-확실히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생활 환경에서 근실하게 나타
내줄 수 있다면,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경의 같은 것을 표시해줄 수 있다면,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경의 같은 것을 표시해줄 수 있다면, 눈치가 빠른 아
이니까, 그 다음에는 스스로 어떻게든 잘 해나갈 것입니다."
그녀는 짧은 반바지의 표렛에 손을 집어넣은 채 한참 동안 잠자코 걸어
갔다. "당신은 그애의 기분을 아주 잘 알고 있군요. 어째서일까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마느 물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유키를 돌보아준데 대한 어떤 보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답은 마키무라 히라쿠 씨로부터 이미 충분히 받았으므로,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나는 말했다. 지금도 과분할 정도라고.
"하지만 보답해두고 싶어요. 그이는 그이고 나는 나예요. 나는 나로서 당
신에게 보답하고 싶어요. 지금 해두지 않으면 나는 금방 잊어버리니까."
"그러한 건 잊어버려도 상관 없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길가의 베치에 걸터앉아, 셔츠의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웠다.
푸른 색깔의 샐럼 담배갑은 딴에 젖어 납작해져 있었다. 언제나 볼 수 있
는 새들이 언제나처럼 복잡한 음계로 울고 있었다.
아메는 그대로 잠자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긴 실제로 연기를 빨아
들인 건 두세 모금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
어 잔디밭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는 내게 시간의 사해 같은 것을 상기시
켰다. 그녀의 손 안에서 시간이 잇따라 죽어가며 불태워져 하얀 재로 변해
가는 것이다. 나는 새들의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아래쪽 길 위를 덜거덕거
리며 달려가는 카트 위에 앉아 있는 정원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마카하에 도착할 무렵부터 날씨가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하고 있
었다. 어딘가 멀리서 희미한 천둥 소리가 한 번 들려왔을 뿐이었다. 압도족
인 힘에 밀려나는 것처럼 두꺼운 회색의 구름이 잇따라 갈라지고, 다시 언
제나처럼 왕성한 빛과 열기가 지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반소매인 당가리 셔츠를 입고(일을 하고 있을 때에 그녀는 대개
이 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슴께의 포켓에는 볼펜과 펠트펜, 라이터, 담배
따위가 들어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채 강한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부심이나 더위도 특별히 마음에 걸리지 않는 듯했다. 아
마 더우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 증거로, 목덜미에ㅣ 땀이 흘러내리고, 셔츠
는 땀에 젖어 여기 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하지만 더위를 느끼지 않는 것
이다. 그것이 정신을 집중시킨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확산된 때문인지
나로선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러한 상태로 10분이 지났다. 순
간적인 시공간 이동과도 같은, 실체가 없는 10분간이었다. 그녀는 시간의
경과라는 현상에 통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녀
의 생활을 구성하는 요소들 속에는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지위가 매
우 낮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비행기를 예약해놓
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가 보겠어요." 하고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공항
에서 렌트카를 돌려주고 요금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되도록 이면 조금 일
찍 도착하고 싶어요."
그녀는 한 번 더 초점을 다시 맞추려는 듯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
다. 이는 이따금 유키가 보여 주는 표정과 아주 흡사했다. 현실과 타협해야
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이 모녀 사이에는 확실히 공통된 기질이나 성향이
있다고 나느 새삼스레 생각했다. "아아, 그렇군요, 시간이 없군요. 미안해
요. 알아채지 못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번씩 고개
를 좌우로 기울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느라고."
우리는 벤치에서 일어나, 왔던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출발할 때, 세 사람은밖에 나와 배웅해 주었다. 나는 유키에게 인스
턴트 음식을 이것 저것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입
술을 오므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딕 노스가 곁에 있으니, 그점은 안심해도
되겠지.
백미러에 나란히 비치는 세 사람의 모습은 아주 기묘했다. 딕 노스는 오
른손을 높이 쳐들어 흔들고, 아메는 팔짱을 낀채 멍한 눈으로 전방을 응시
하고, 유키는 옆쪽을 향해 샌들 끝으로 돌을 굴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불완전한 우주의 갖ㅇ자리에 남겨진 어중이 떠중이의 일가처럼 보였다. 조
금 전까지 나 자신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커브에서 왼쪽으로 핸들을 꺾자, 그들의 모습은 이내 미러로
부터 휙 사라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아
주 오랜만에.
혼자 있게 되는 것은 좋은 기분이었다. 물론 유키와 둘이서 있는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와는 관계없이, 혼자 있게 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무
슨 일을 하기 전에 누구와 상의할 필요도 없고, 실패해도 누구에게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우스운 일이 있으면 혼자 노담을 하고 혼자 킥킥거리며 웃
고 있으면 되었다. 아무도 "그러한 농담은 시시하다." 고는 말하지 않았다.
지루하면 재떨이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되었다. 내가 가만히 재떨이를 바라
보고 있어도, 아무도 "왜 재떨이 따위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고 묻지 않았
다. 좋든 싫든 나는 혼자 보내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혼자 있게 되자, 내 주위의 빛의 색깔이나 바람 냄새마저도 약간- 그러
나 확실히-변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 몸 안의 공
간이 다소간 넓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재즈 FM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어 콜만 호킨즈나 리 모건 따위를 들으면서 공항까지 유유히 운전하였
다.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던 구름은, 억지로 찢겨진 것처럼 흐트러져, 지
금은 구석 쪽에 약간씩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역풍이 야자나무 잎들을 흔
들면서, 그러한 구름 조각들을 천천히 서쪽으로 흘려 보내었다. 747이 은빛
의 쐐기처럼 격렬한 각도로 하늘에 빠져 들어 가는 게 보였다.
혼자 있게 되자, 나는 갑ㄴ자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머리 속에서 급속하게 중력이 변화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사고는
그러한 중력의 변화에 잘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멋있는 일이었다. 좋지 않은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여기는 하와이다, 제기랄, 무엇 때문에 생각에 잠겨야 한단
말인가' 나는 머리를 비우고 운전에 신경을 집중하면서, (스타피)나 (사이
드 와인더)에 맞추어 휘파람과 외풍의 중간쯤 되는 음색의 휘파람을 불었
다. 시속 160킬로의 속도로 언덕을 내려가자, 주위의 바람이 요란하게 윙윙
거렸다. 언덕길의 각도가 바뀌자, 태평양이 선명한 남빛으로 물든 채 시계
에 가득 퍼졌다.
이제,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로써 휴가는 끝났다. 아무튼 끝나게끔 되어
서 끝난 것이다.
공항 부근에 있는 렌트카 사무실에 차를 돌려주고, 카운터에서 탑승수속
을 마친 다음에,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공항의 전화 박스에서 그 수
수께끼의 전화 번호를 돌려 보았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아무도 나오지 않
았다. 언제까지나 신호 소리가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박스 안에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단념하고, 퍼스트 클
라스의 대합실로 가서 진 토닉을 마셨다.
도쿄,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도쿄를 잘 생각해낼 수 없었다.
시부야의 아파트로 돌아와, 집을 비운 동안에 배달된 우편물들을 대충
살펴보고, 녹음된 전화를 플레이백 해보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자질구레한 용건들 뿐이었다. 다음달치 원고에 대한 문의냐, 내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데 대한 불평, 새로운 주문 따위였다. 하지만 번거로워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일일이 변명을 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어
버릴 듯했고 그럴 바엔 차라리 변명할 것 없이 재빨리 일을 마무리지어 버
리는 편이 손쉽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번거로워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일일이 변명을 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어 버릴 듯했고 그럴
바엔 차라리 변명할 것 없이 재빨리 일을 마무리지어 버리는 편이 손쉽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러한 일을 하기 시작하면 그밖의 일에
손을 댈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일체 부시하
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다소의 도리는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고맙게도 현재는 돈걱정은 없고, 나중의 일은 그런대로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대체로 나는 지금까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상대가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일해온 것이다. 조금쯤은 내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대로 살아
가자, 내게도 그 정도의 권리는 있다.
그리고 나는 마키무라 히라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프라이데이가 나와,
곧 마키무라 히라쿠에게 연결해 주었다. 나는 대체적인 경과를 그에게 설
명하였다. 유키는 하와이에서 상당히 여유롭게 지내왔으며, 아무런 문제도
없어다고.
"좋아요."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에게 정말 감사하네. 내일이라도 아메
에게 전화를 하겠어요. 그런데 돈은 충분했나?"
"충분해요. 남았어요."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해요. 신경 쓰지 말아요."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 얘깁니
다."
"아, 그것 말이군." 하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건 대체 어떤 조직입니까?"
"콜걸의 조직이야. 그런 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잖은가. 자네도 그 여자
와 하룻밤 동안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니잖아?"
"아니,그게 아니라, 어떻게 도쿄에서 호놀룰루의 여자를 불러 줄 수 있어
요? 그 구조를 알고 싶은 거예요. 그냥 호기심으로."
마키무라 히라쿠는 잠깐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내 호기심의 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말하자면 국제적 속달 우편 같은 거지. 도쿄의 조직
에 전화를 걸어 호놀룰루의 어느 곳에 어느 날 몇 시경에 여자를 보내 달
라고 부탁해요. 그러면 그 도쿄의 조직은 계약이 되어 있는 호놀룰루의 조
직에 연락해서 그 시간에 여자를 보내 주거든. 나는 도쿄에 돈을 치르지.
도쿄는 커미션을 제하고 나머지 돈을 여자에게 건네줘요. 편리하잖아. 세상
에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있다구."
"그렇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온 세계의 어디서나 좋은 여자를 데리고
잘 수 있어. 도쿄에서 예약할 수 있다구. 그쪽에 가서 힘들여 찾을 필요도
없거 안전해요. 도중에 정부가 나타는 일도 없어. 게다가 경비로 처리돼."
"하지만 그조직의 저화 번호는 가르쳐줄 수 없겠죠?"
"그건 안 돼요. 절대 비밀이야. 회원에게만 중개해 주는데, 회원이 되려
면 굉장히 엄격한 자격 심사를 받아야 애요. 돈과 지위와 신용이 필요해요.
자네게게는 무리한 얘기야. 단념해. 내가 이 시스템에 관한 것을 자네게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만 해도, 이미 나는 외부의 사람에게 비밀을 엄수 해
야 한다는 규약을 깨뜨리고 있는 셈이야. 내가 이를 자네게게 가르쳐 주고
있는 건 단지 순수한 호의 때문일세."
나는 그 순수한 호의에 고맙다고 답례를 했다.
"하지만 좋은 여자였겠지?"
"그래요, 확실히."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았어. 좋은 여자를 보내도록 말해 두었거든."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무슨 이름이었나?"
"준." 하고 나는 말했다. "6월이라는 준."
"6월이라는 준." 하고 그는 되풀이했다. "백이었나?"
"백?"
"백인."
"아뇨, 동남 아시아계예요."
"이 다음에 호놀룰루에 갈 일이 있으면 시험해 봐야겠군." 하고 그는 말
했다.
그밖에 특별히 할 얘기는 없었으므로, 나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 나는 고혼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의 전화는 언제나처럼
'녹음 전화' 장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일본에 돌아왔으니 전화를 걸어 주
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해가 저물어,
나는 스바루를 몰고 아오야마 가로 물건을 사러 갔다. 그리고 또 기노쿠니
야에서 잘 재배된 야채를 샀다. 어쩌면 나가노의 산 속 부근에 기노쿠니야
출하 전용의 야채밭이 있을지도 모른다. 넓은 밭의 주위에는 아마 철조망
이 둘러쳐져 있을 것이다. '대탈주'를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철조망이다.
기관총이 딸린 감시탑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추나
샐러리에 대한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틀림 없이. 우리의 상상
을 초월한 비야채적인 훈련이.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야채를 사고, 고
기와 생선과 두부와 김치를 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혼다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던킨 도너츠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도서관에 가서
보름치의 신문을 살펴보았다. 물론 메이의 사건에 대한 수사의 진척 상황
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아사히와 마이니치, 요미우리 등의 3개지를
꼼꼼히 읽어 보았지만, 그녀의 사건은 단 한 줄도 보도되어 있지 않았다.
선거 결과와 레프첸코의 발언과 중학생의 비행 문제가 크게 다루어져 있을
뿐이었다. 비치 보이즈가 음악적으로 온당치 않다는 이유로, 화이트 하우스
에서의 콘서트가 취소되었다는 기사도 실려 있었다. 그릇된 일이다. 비치
보이즈가 음악적으로 온당치 않아 화이트 하우스에서 몰려난다면, 믹 재거
는 화형을 세 번 당한대도 이상한 일이 아닐테니까. 하지만 어쨌든 신문에
는 아카사카의 호텔에서 한 여자가 스타킹에 목이 졸려 살해된 사건에 대
한 기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이어 묵은 호의 잡지를 죽 읽어 보았다. 그 중의 하나에 메이의 피
살에 대한 한 페이지짜리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아카사카의 Q호텔/미녀 전
나 교살 사건' 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지독한 타이틀이다. 사진 대
신, 전문 화가가 사체를 보고 그린 듯한 얼굴 모습이 나와 있었다. 사체의
사진을 잡지에 실을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가만히 자세히 보면 그
그려진 여자는 메이를 닮았지만, 이는 내가 처음부터 그게 메이인 줄 알고
있기 때무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아무런 맥락도 없이 갑자기 그 그림을
보았다면 아마 그게 메이인 줄 알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확실히 얼굴
의 세밀한 부분은 비슷하게 잘 그려져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이 유사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그녀의 표저의 근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던
것을 전달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죽은 메이인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
이 희망하고, 환상을 품고, 사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우아하고 숙련
되고 화려하고 멋진 관는ㅇ적 생활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상을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침에 깨끗이 "좋다."고 말할 수 있
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 속의 메이는 실제보다 훨씬 궁상맞고 더러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메이가 죽어 버렸다는 것을 나는 새삼스레 실감할 수
있었다. 아주 완전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미 되돌아오지는 않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암흑의 허무 속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하면서, 나는 가슴 속에 딱딱하고 메마른 슬픔이 이는 것을 느꼈다.
기사도 그 그림과 마찬가지로 궁상맞고 더러운 문장으로 씌어져 있었다.
아카사카의 일류 호텔인 Q에서 20대 전반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가 스타
킹으로 목이 졸려 죽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여자는 나체이며, 신원을 나
타낼 만한 것은 무엇 하나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프런트에 알린 이름은 가명이며... 운운하고 씌어진 기사의 내용은 경찰
이 내게 가르쳐준 것과 대체로 동일했다. 다만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일
도 약간은 씌어져 있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매춘 조직에-관련지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기사의 말미에 씌어져 있었다. 나는 묵은 잡지들을 보관
소에 되돌려 주고, 로비의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왜 그들은 매춘 쪽에 수사를 좁히기로 한 것일까? 무슨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경찰에 전화를 걸어서 어부나 문학
을 불러내어, 그런데 그 일은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을 수도 없
다. 나는 도서관을 나와, 부근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고는 거리를 어슬
렁어슬렁 산책하였다.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
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봄의 공기는 막연하게 무거운 느낌을 주고, 또 피
부를 근질근질하게 만들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나는 메이지 신궁까지 걸어가서,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매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국제 속달 우편',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도쿄에서 주문을 하고 호놀룰루에서 여자를 데리고 잔다, 조직적
이다. 솜씨가 좋으며, 복잡미묘하게 되어 있다. 더러워 보이지 않는다. 매우
사무적이다. 아무리 의심스러운 것이라도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단순한 선
악의 척도로는 잴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거기에 그것의 독자적이며 독립된
환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환상이 생겨나면, 이는 순수한 상
품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고도 자본주의는 모든 틈새로부터 상품을 발
굴한다. '환상'-이것이 키 워드다. 매춘이든, 인신매매든, 계층간의 차별이
든, 개인 공격이든, 도착적 성욕이든, 무엇이든간에 예쁘게 포장하여 예쁜
이름을 붙이면 훌륭한 상품이 되는 것이다. 머지않아 세이부 백화점에서
카탈로그를 보고 콜걸을 주문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는 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
멍한 봄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자와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되도록 이면 삿로로의 그 유미요시와 자고 싶었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자신이 그녀의 아파트의 방문 틈새에 신발을 끼워넣어-
그 음울한 형사처럼-닫혀지지 않게 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하였다. "너는 나하고 자지 않으면 안 돼. 그렇
게 해야 해." 그리고 나는 그녀와 잘 것이다. 나는 우아하게 선물의 리본을
푸는 것처럼 그녀의 옷을 벗긴다. 코트를 벗기고, 한경을 벗기고, 스웨터를
벗긴다. 옷을 벗기자, 그는 메이가 되었다. "좋아요." 하고 메이가 말했다.
"내 몸 멋있죠?"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날이 밝았다. 그리고 옆에는 키키가 있었다. 고혼
다의 손가락이 키키의 등을 우아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면서,
유키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키키가 서로 껴안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고혼다가 아니라 나였다. 손가락은 고혼다의 것이었
다. 하지만 키키와 성교를 하고 있는 것은 나였다. "믿어지지 않아요.하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왜 그래요?" 하고 키키가 되풀이해 말했다.
백일몽.
와일드하고 혼잡하고 무의미한 백일몽.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자고 싶은 상대는 유미요시야.'
하지만 소용 없었다. 혼란되어 있었다. 연결이 뒤얽혀져 있는 것이다. 우선
그 뒤얽혀진 것을 어떻게든 해소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나는 아무것
도 손에 넣을 수 없다.
나는 메이지 신궁을 나와, 하라주쿠의 뒷골목에 있는, 맛있는 커피를 끓
여주는 찻집에서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유유히 걸어서 집으
로 돌아왔다.
저녁 때가 가까워질 무렵에 고혼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은 별로 시간이 없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오늘 밤에 자네와
만날 수 있겠자? 여덟 시나 아홉 시에, 그 무렵에."
"만날 수 있어. 한가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자구. 맞으러 가겠어."
나는 가방을 정리하여 여행 중에 받은 영수증을 한데 모으고, 마키무라
히라쿠에게 청구할 것과 내가 스스로 지불할 두 종유로 나누었다. 식비의
절반과 렌트카 요금은 그가 치르도록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유키의 몫으
로 구입한 물품(서프 보드, 라디오 카세트, 수영복 따위) 값도. 나는 메모에
그명세를 적고 봉투에 넣은 다음, 쓰고 남은 여행자 수표를 은행에서 현금
화하여 그것과 함께 이내 보낼 수 있도록 정리해 두었다. 나는 그러한 사
무적 처리를 아주 재빠르고 정확하게 하고 있다. 특별히 사무적인 작업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돈과 관련하여 번거로워지는 걸 싫어할 뿐이다.
정산을 끝내고는, 데친 시금치와 뱅어포를 무쳐서 살짝 식초를 치고 이
를 안주 삼아 기린표 흑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사토오 하루오의 단편소설
을 오랜만에 천천히 다시 읽어 보았다. 더할나위없이 기분 좋은 봄날의 저
녁 무렵이었다. 해질녘의 푸른빛이 투명한 브러시로 거듭 칠해져 가는 것
처럼 점차 진해지면서, 밤으 어둠으로 변해갔다. 책을 읽는 게 피로해지자,
스턴 로즈 이스트민이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작품 100의 트리오를 들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봄이 되면 이 레코드를 곧잘 듣곤 했다. 봄밤이 포함하
고 있는 일종의 슬픔이, 이 곡의 톤에 호응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느끼고
있었다. 가슴 속까지 푸르고 부드러운 어둠에 물들어 버릴 듯한 봄밤. 그리
고 눈을 감으면, 그 어둠 속의 깊은 곳에 하얀 인골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삶은 깊은 허무속으로 침잠하고, 뼈는 기억처럼 딱딱하게 내 앞에 놓여 있
었다.
고혼다는 여덟 시 사십 분에 그 마세라티를 타고 찾아왔다. 내 아파트
앞에 멈춰 서자, 마세라티는 장소에 통 어울리지 않게 보였다. 이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어떤 종류의 것은 어떤 종류의 것과 숙명적으로 어울리지 않
는 것이다. 그 거대한 메르세데스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는데, 마세라티 역
시 어울리지 않았다. 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각기 생활의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
고혼다는 일반적인 회색의 v네크 스웨터와, 푸른색의 남방, 그리고 평범
한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두드러져 보였다. 엘튼 존이
보라색 윗도리에 오렌지색의 남방을 입고 하이 점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내 방문을 노크하고, 내가 문을 열자 빙긋
웃었다.
"괜찮으면 방에 들렀다 가지 않겠어?" 하고 나는 권해보았다. 그가 내
방을 들여다보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하고 그는 어쩐지 부끄러운 듯이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괜찮으면
그대로 일주일쯤 묵어 가도 좋다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좋은 느낌을 주
는 미소였다.
좁은 방이었지만, 그 좁음이 그에게 어떤 감명을 준 듯했다. "그리워."
하고 그는 말했다. "예전에는 이러한 방에서 살고 있었던 적이 있어. 이름
이 알려지기 전에."
다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으면 언짢게 들렸을 테지만, 그가 말을 하니
까 순진하게 칭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내 아파트의 방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부엌과 욕
실, 거실, 침실 등이다. 모두 상당히 좁다. 부엌은 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약간 널찍한 복도하고 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우리라. 기다란 찬장과 2인용
식탁을 내놓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들여놓을 수 없다. 침실도 마찬가지여
서, 침대와 양복장과 작업용 책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거실은 가까스로
아무것도 놓지 않았다. 책꽃이와 레코드 함, 작은 스테레오 세트 따위뿐이
다. 의자도 없고 책상도 없다. 커다란 마리메코 방석 두 장이 있는데, 이를
대고 벽에 기대면 무척 기분이 좋다. 책상이 필요할 때는, 접게 되어 있는
책상을 벽장에서 꺼내어 사용한다.
나는 고혼다에게 방석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책상을 펴놓고 흑
맥주와 잔과 안주인 시금치를 내놓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슈베르트의 트리
오를 틀었다.
"근사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
렇게ㅐ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안주를 더 만들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귀찮지 않아?"
"귀찮지 않아. 간단해. 눈깜짝할 사이야. 대단한 건 없지만, 술아주 정도
는 만들 수 있을 거야."
"옆에서 보고 있어도 되나."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파.매실 무침을 만들고 가다랭이포(조미료)를 뿌리고, 미역과 새우
에 식초를 친 요리를 만들고, 고추냉이의 잎.뿌리를 잘게 썰어서 술지게미
에 절인 식품과 무즙에 반달 모양으로 쪄서 굳힌 식품을 곁들이고, 올리브
오일과 마늘과 소량의 이탈리아식 소시지를 사용하여 채친 감자를 볶았다.
오이를 잘게 썰어 즉석 김치를 만들었다. 어제 녹미채를 삶아 조리해둔 것
도 남아 있었고, 두부도 있었다. 양념으로는 생강을 듬뿍 사용하였다.
"근사해." 하고 고혼다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천재적이야."
"간단해. 모두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냐. 익숙해지면 금방 할 수 있어. 요
는 집에 있는 재료로 얼마만큼 만들 수 있느냐는 거지."
"천재적이야.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어."
"나는 치과 의사 흉내는 도저히 낼 수 없어. 사람마다 각기 나름대로 살
아가는 방식이 있어."
"맞아." 하고 그는 말했다. "이봐, 오늘은밖에 나가지 말고 여기서 쉬고
싶군. 괜찮은가."
"난 괜찮아."
우리는 흑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만든 안주를 먹었다. 맥주가 없어지자
카티 서크를 마셨다. 그리고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레코드를 들었다.
도어즈나 스톤즈, 핑크 프로이드 따위도 들었다. 비치 보이즈의 (서프즈
업)도 들었다. 60년대적인 밤이었다. 라빈 스푼플과 스리 독 나이트도 들었
다. 만일 진지한 우주인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시간 왜곡 현상
이 일어난 줄 알았으리라고 여겨진다.
우주인은 오지 않았지만, 열 시가 지나면서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조용한 비였다.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로 겨우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그런 형태의 비였다. 사자처럼 조용한 비.
밤이 깊어지자, 나는 음악을 틀지 안았다. 내 아파트는 벽이 튼튼한 고혼
다의 맨션과는 다르다. 열한 시가 넘어 음악을 틀고 있으면, 이웃에서 불평
들을 한다. 음악이 사라지자, 우리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면서 사자의 이야
기를 했다. 메이의 사건 수사는 그 이후로 별로 진척되고 있지 않은 듯하
다고 나는 말했다. 그건 알고 있다고 그도 말했다. 그 역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수사의 진전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두 병째로 카티 서크를 따고, 그 첫잔을 마실 때에 메이를 위해 건
배를 하였다.
"경찰은 콜걸 조직에 수사의 대상을 좁히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