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세라티." 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하지만 차종이
문제가 아녜요. 차종을 문제 삼고 있는 게 아녜요. 문제는 저 차예요, 저
차에는 뭔가 언짢은 분위기가 있어요. 그게 뭐라고 할까-나를 압박해요, 기
분이 나빠져요. 가슴이 죄어들고, 위 속에 이상한 게 처넣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요. 마치 솜 부스러기가 처넣어진 듯한 느낌이에요. 당신은 저 차에 타
고 있으면서 그렇게 느껴진 적이 없어요?"
"없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확실히 저 차에는 친숙해질 수 없
는 점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하지만 이는 내가 스바루에 너무 익숙해진
때문이리라고 생각해. 그래서 갑자기 다른 차를 타면, 잘 순응할 수가 없
어. 감정적인 거야. 하지만 이는 네가 말하는 ㅇ박감과는 또 다른 거겠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녜요. 아주 '특
수한' 느낌이에요."
"그것 말야? 언제나 네가 느끼고 있다고 말하던-." 나는 '영감'이라고 말
하려다 그만 두었다. 틀리군,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정신적 감응력? 아무튼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추잡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요, '그것.' 느껴져요." 하고 유키는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느껴지나? 저 차가." 하고 나는 물었다.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걸 분명히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간단
하지만요. 하지만 안 돼요.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아니니까. 나는
몽롱하고 불투명한 공기의 덩어리 같은 걸 느낄 뿐이에요. 무겁고 몹시 역
겨운 느낌이 들어요. 그게 나를 압박해요. 뭔가 아주 '그릇된 것이.' 유키는
무릎 위에 양 손을 내려 놓고, 알맞은 말을 찾고 있었다. "구체적인 건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릇된 것, 잘못된 것, 왜곡된 것이에요. 그 속에 있으면
굉장히 답답해요. 굉장히 공기가 무거워요. 마치 납상자 속에 처넣어져 바
다 속으로 침강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처음에는 지나친 생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참고 있었죠. 단지 내가 여행을 하고 갓 돌아와 피로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점점 더 지독해져
요. 저 차에는 두 번 다시 타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스바루를 되돌려 받아
요."
"저주받은 마세라티." 하고 나는 말했다.
"이건 농담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녜요. 아저씨도 저 차에는 너무 타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아요." 하고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길한
마세라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알았어. 네가 농담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님은 잘 알고 있어. 저 차에는 되도록 타지 않도록 하겠
어. 아니면 차라리 바다에 집어 넣는 편이 나을까?"
"할 수 있다면." 하고 유키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유키가 쇼크로부터 회복되기까지의 한 시간여 동아, 우리는 신가의 벤치
에 앉아 있었다. 유키는 팔꿈치를 세워 손으로 턱을 괴고, 가만히 눈을 감
고 있었다. 나는 눈앞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 때가 지난 무렵에 신사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노인들이나 어
린애를 데리고 온 어머니들, 목에 카메라를 드리운 외국인 관광객 따위였
다. 모두 수는 많지 않다. 이따금 외부의 일을 보는 영업 담당으로 보이는
회사원이 찾아와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검은 수트를 입고, 플라스틱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초점이 맞지 않는 멍한 눈으로 10분이나 15분
쯤 몸을 쉬고는 정처도 없이 떠나갔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시각에는 정상
적인 인간들은 모두 착실히 일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셨어?" 하고 나는 물었다. "너하고 함께 돌아 오셨
어?"
"응." 하고 유키는 말했다. "지금은 하꼬네의 집에 있어요. 그 외팔의 사
나이와 함께. 카트만두와 하와이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어요."
"넌 하꼬네로 돌아가지 않아?"
"나중에 마음이 내키면. 하지만 얼마 동안은 여기에 있겠어요. 하꼬네에
돌아가도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까."
"순수한 호기심으로 네게 한 가지 물어보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너는
하꼬네에 돌아가도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까 혼자 도쿄에 있겠다는 거지.
그러나 여기서 너는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저씨하고 놀고 있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허공에 매달려진 듯한 침묵이었다.
"멋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신의 말 같아. 단순하면서도 계시로 충만해
있어. 죽 둘이서 놀며 지낸다. 마치 낙원에 있는 것 같아. 나와 너는 가지
각색의 장미꽃을 꺽거나, 황금의 연못에 보트를 띄우고 물놀이를 하거나,
밤색의 복슬 강아지를 씻어주면서 나날을 보내지. 배가 고프면 위에서 파
파야가 떨어지고, 음악이 듣고 싶어지면, 천상에서 보이 조지가 두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말할 나위도 없이 멋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
하면, 나도 슬슬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언제까지나 너하고 놀면서 지낼
수는 없어. 그리고 너의 아빠로부터 돈을 받을 수도 없어."
유키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가 아빠나 엄마로부터 돈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처럼 지ㄱ은 표현은 하지말아요. 나 역시 이렇게 아저씨를 불러
내곤 하는 일이 때로는 무척 괴로워져요. 어쩐지 아저씨의 일을 방해하며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만일 아저씨가-."
"돈을 받으란 말인가?"
"그렇게 해주면, 적어도 나는 마음이 편해질 수 있죠."
"너는 알지 못하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든간에
직업적으로 너와 만나고 싶진 않아. 개인적인 친구로서 만나고 싶어. 네 결
혼식 때에 사회자로부터 '이 분은 신부가 열 세 살 때에 신부의 직업적인
남성 유모 노릇을 하던 분입니다' 하고 소개 받고 싶지 않아. 그러면 사람
들은 모두 '직업적인 남성 유모란 대체 무슨 뜻입니까?' 하고 질문할 것임
에 틀림없어. 그보다는 ' 이 분은 신부의 열세 살 때의 보이 프랜드였습니
다'하고 소개받고 싶어. 그편이 훨씬 모양이 좋아."
"어이가 없어." 하고 유키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난 결혼식 따위는
올리지 않아요."
"좋아. 나도 결혼식 따위에는 나가고 싶지 않아. 시시한 연설을 듣고, 잘
못 만들어진 벽돌 같은 케이크를 선물로 받는 일따위는 정말 싫어. 시간의
소모야. 내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어. 그러니가 이는 어디까지나 비유해서
한 이야기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친구는 돈으로는 살 수 없다. 경비
로는 더더욱 살 수 없다'는 거야."
"그러한 테마로 동화라도 써 보면."
"멋있어." 하고 나는 말하고 웃었다. "정말 멋있어, 너는 점점 대화의 요
령을 익혀 왔어. 좀더 능숙해지면 나하고 둘이서 익살스러운 재담을 훌륭
히 해낼 수 있어."
유키는 어깨을 움츠렸다.
"이봐요." 하고 나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진지하게 이야기 하자구. 만
일 네가 나오 함께 매일 놀고 싶다면, 매일 놀아도 좋아요. 특별히 일 따위
는 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시시한 일인 걸. 그런 건 어찌 됐든 상관 없어.
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해. '돈을 받고 노와 어울려 놀지는 않아.' 하와
이의 경우는 예외야. 그건 특별한 행사야. 여비도 내주고, 여자도 안겨주었
지. 하지만 덕분에 너의 신용마저 잃어가고 있지. 내 자신이 싫어졌더. 이
제 그러한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어. '종결이야.' 앞으로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아무도 쓸데없는 참견은 할 수 없어. 돈도 내놓을 수 없어. 나는
딕 노스와도 다르고, 비서인 프라이데이와도 달라. 나는 나이지, 누구에게
고용되어 있지도 않거든. 만나고 싶으니까 너하고 만나. 네가 나하고 놀고
싶다면, 나는 너하고 놀거야. 너는 돈 문제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
"정말 나하고 놀아줄 거예요?" 하고 유키는 발톱의 매니큐어를 바라보면
서 말했다.
"상관 없어. 나나 너도 세상으로부터 스르륵 흘러내리고 있는 거야. 새삼
스레 우려할 필요도 없겠지. 유유히 놀면서 지내면 돼요."
"왜 그토록 친절해요?"
"친절한 게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시작한 일을 도중에 그만둘 수 없
는 성격이야. 네가 나하고 놀고 싶다면, 흡족할 때까지 놀면 돼. 내가 너와
삿포포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것도 무슨 인연이야. 어울릴 바엔 마음이
흡족할 때까지 어울려요."
유키는 잠시 샌들 끝으로 지면에 작은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네모진 소
용돌이꼴의 도형이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저씨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이에 대해 약간 생각해 보았다. "끼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건 네가 염려할 게 못 돼. 그리고 결국 나 역시 너와 함께 있는 게 좋으니
까 함께 있는 거야. 의무적으로 어울리고 있는 게 아냐. 왜 그럴까? 왜 나
는 너하고 있는 것을 좋아할까? 나이 차이도 이토록 많고, 공통된 화제도
별로 없는데 말야. 이는 아마 네가 내게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기 때문일 거
야. 내 속에 죽 묻혀져 있던 감정을 상기시키는 거야. 내가 열세 살이나 열
네 살이나 열다섯 살쯤 되었을 무렵에 품고 있던 감정이야. 만일 내가 열
다섯 살이었다면, 너와 숙명적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을 거야. 이는 이전에
말했었지?"
"말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구." 하고 나는 말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이따금 그러한 감정이
되돌아오는 수가 있어. 그리고 옛날의 빗소리나 바람 냄새를 한 번 더 느
낄 수가 있어. 바로 가까이에 느끼는 거야. 그러한 건 나쁘지 않아. 그게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는, 너도 머지않아 알 수 있을 거야."
"지금도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그래?"
"나도 지금까지 많은 걸 상실해 왔는 걸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럼 이야기는 간단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10분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또 신사 안의 사람들의 모습
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아저씨밖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하
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래서 당신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거의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딕 노스는 어땠어?"
유키는 혀를 내밀며 점잖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형편없는 얼간이
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아.
결코 나쁜 사나이가 아냐. 너도 그건 이해해야 될 거야. 외팔인데도 그 주
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해 나가고 있고, 잘해 나가고 있으면서도 강요
하는 듯한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러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 그야 너
의 어머니에 비하면 스케일이 작을지도 몰라. 재능도 별로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는 너의 어머니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마 사랑하고
있을 거야.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이야. 요리 솜씨도 좋아. 친절해."
"그럴지도 모르지만, 얼간이에요."
나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키에게는 유키의 입장이 있고
감정이 있는 것이다. 딕 노스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이게 마지막이었다. 우
리는 하와이의 그 청정한 태양이나 파도, 바람, 피나 코라다 따위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였다. 약간 시장하다고 유키가 말하여, 부근에 있는 후르츠
팔러에 들어가 후루츠 파르페와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영화를 보러 갔다.
그 다음주에 딕 노스가 죽었다.
딕 노스는 월요일 저녁 때에 하꼬네의 거리로 물풍을 사러나가, 수퍼마
켓의 쇼핑백을 껴안고 밖으러 나오다 트럭에 치여 죽었다. 길에 나서자마
자 일어난 사고였다. 트럭 운전수도 왜 내리막길의 그토록 시야가 분명치
않은 곳에서 속도를 낮추지 않고 내달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고-마가
들었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고-말했다. 하긴 딕 노스 쪽에도 약간의
과실은 있었다. 도로의 왼쪽 방향을 약간 뒤늦게 확인한 것이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일본에 돌아오면, 곧잘 그러한 순간적 과오를 범한다.
자동차의 좌측 통행에 신경이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만 좌우
확인을 반대로 해버린다. 대부분의 경우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끝나지
만, 때로는 커다란 사고에 말려드는 수도 있다. 딕 노스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그 트럭에 걷어차인 다음,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라이트 밴에 치였다.
즉사였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우선 나는 마카하의 수퍼에서 물품을 사고 있던
딕 노스의 모습을 생각해 내었다. 솜씨좋게 물건을 고르고, 과일을 진지한
눈으로 살펴보며, 탄팩스 상자를 살며시 쇼핑 카트에 집어넣고 있던 그의
모습을. 가엾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마지막까지 불운한 사나
이였다. 옆의 병사가 밟은 지뢰가 폭발하여 왼팔을 잃은 사나이.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아메가 피우다 재떨이에 내려놓은 담뱃불을 끄고 다녔던 사
나이. 그리고 수퍼마켓의 쇼핑백을 껴안은 채 트럭에 치여 죽은 사나이.
그의 장례는 부인과 어린애가 있는 집에서 치러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메나 유키나 나도 거기에는 가지 않는다.
나는 고혼다로부터 돌려받은 스바루에 유키를 태우고, 화요일 오후에 하
꼬네까지 갔다. 엄마를 혼자 있게 해둘 수는 없으니까요, 하고 유키는 말했
다.
"그 분은 혼자서는 정말 아무 일도 못해요. 거들어 주는 아줌마는 있지
만, 나이가 많아 생각이 세심한 데까지 잘 미치지 못하고, 또 그이는 밤이
되면 돌아가 버리니까, 혼자 있게 해둘 수는 없어요."
"얼마 동안은 엄마하고 함께 있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길 안내 지도 책장을 아무렇게나
넘기고 있었다. "내가 지난 번에 그에 관해 심한 말을 했죠?"
"딕 노스 말야?"
"네."
"형편없는 얼간이라고 말했지."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지도책을 문에 부착된 포켓에 되넣어 놓고, 창틀에 한쪽 팔꿈치
를 대고는 가만히 전방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내게도 친절했고, 아주 잘해 주었어요. 서핑도 가
르쳐 주었어요. 외팔인데도 양팔이 있는 사람보다 더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엄마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죠."
"알고 있어." 나쁜 사나이가 아니었어."
"하지만 나는 심한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지 않고는 뱃길 수가 없었어. 네가
나쁜게 아냐."
그녀는 죽 앞을 향하고 있었다. 한 번도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열어
젖혀진 창문으로 들어요너ㅡ 초여름의 바람이, 그녀의 반듯한 앞머리칼을
풀잎처럼 흔들고 있었다.
"가엾지만, 그는 그러한 타입의 사람이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쁜 사
나이가 아냐.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할 만도 해. 하지만 이따금 품질이 좋은
휴지통처럼 다루어져, 온갖 사람들이 온갖 물건들을 거기에 집어던지고 가
거든. 집어던지기 쉬운 거야. 웬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경향이 갖추어져 있는가 봐. 너의 어머니가 잠자코 있어도 모두들
특별히 보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야." 범용함이란 흰 웃옷에 묻은 숙
명적인 얼룩과 같은 것이다. 한번 묻은 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불공평하군요."
"원리적으로 인생이라는 건 불공평한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심한 짓을 한 듯한 느낌이 들어요."
"딕 노스에 대해서?"
"네."
나는 한숨을 쉬며 차를 길가에 세우고, 키를 돌려 엔진을 껐다. 그리고
핸들로부터 손을 떼고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생각은 정말 쓸모없는 거이라고 나는 생각해." 하고 나느 말했
다. "후회할 정도면 너는 처음부터 제대로 공평하게 그를 대하고 있었어야
했어. 적어도 공평해지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했다구. 하지만 넌 그렇게 하
지 않았어. 그러니까 네게는 후회할 자격이 없어. 전혀 없어."
유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말이 좀 지나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느 다른 사람은 어떻든간에, 너만
은 그처럼 쓸모없는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알겠어, 어떤 종류의 일
을 입밖에 내서는 안 되는 거야. 입ㅈ에 내면 그건 거기서 끝나버려. 다시
몸에 깃들지 않아. 너는 딕 노스에게 한 일 후회해. 그리고 후회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어. 정말로 후회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돼. 하지만 만일 내가 딕
노스였다면 나는 네가 그처럼 간단히 후회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 입밖
에 내어 심한 짓을 했다고 타인에게 말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야. 이는
예의의 문제이며, 절도의 문제야. 너는 그걸 배워야 해."
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는, 관자 놀이를 손
가락 끝으로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잠들어 버린 것처럼 조용
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따금 속눈썹이 희미하게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입술
이 약간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몸안에서 울고 있는가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리를 내거나 눈물도 흘리지 않고 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열세
살짜리 소녀에게 너무 많은걸 바라고 있는 것일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그
리고 나는 그처럼 훌륭해 보이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인간일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상대가 몇 살이든,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
이든간에, 나느 어떤 종류의 일은 적당히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쓸모없
는 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유키는 똑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움쩌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손
을 뻗쳐 살며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네가 나쁜게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너무 편협한가 봐.
공평하게 보면 너는 썩 잘하고 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한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무릎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뿐이
었다. 더 이상은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훌륭하다.
"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되죠?" 하고 잠시 후에 유키는 말했다.
"아무 일도 안 해도 돼." 하고 나는 말했다. "말로 나타낼 수 없는걸 소
중히 하면 돼요. 그게 사자에 대한 예의야.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를 알
수가 있어. 남아야 할 것은 남고, 남지 않을 것은 남지 않거든 시간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 줘.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네가 해결하는 거야. 내 말
이 너무 어려운가?"
"약간." 하고 유키는 말하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확실히 어렵군."하고 나도 웃으며 인정했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은, 대부
분의 사람들에게는 우선 이해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대부분의 보통 사람
들은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
는 자신의 생각이 가장 옳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어. 구체적으로 알기 쉽게
말하면 이렇지. 사람이라는 건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거야. 사람의 생명이라
는 건,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월씬 더 취약한 거야. 그러니까 사람은
회한이 남지 않도록 사람과 접촉해야 해. 공평하게, 되도록 이며 성실하게.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간단히 울면서 후회하곤 하는 인
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유키는 무에 기대는 듯한 자세로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어려운 일처럼 생각되는 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려운 일이야, 아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시도해 볼 마한 가치
는 있어. 보이 조지처럼 노래가 서투른 뚱뚱보도 스타가 될 수 있었거든.
노력하기에 달렸어."
그녀는 약간 웃고,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하는 말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이해가 빠르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엔진을 걸었다.
"하지만 왜 그토록 보이 조지만을 누엣가시로 여길까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왜 그럴까."
"사실은 좋아하는 게 아녜요?"
"이 다음에 천천히 그점에 대해 생각해 볼께."하고 나는 말했다.
아메의 집은 큰 부동산 회사가 개발한 별장 지역 안에 있었다. 커다란
문이 있거, 문 가까이에 풀과 커피 하우스가 있었다. 커피 하우스 옆에는,
잡다한 인스턴트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미니 수퍼 같은 것도 있
었다. 그러나 딕 노스 간은 인간은 그러한 임시 변통의 간이 상점에서 물
품을 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데서 물건을 사고 싶지는 않
다. 길이 죽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어서, 내가 자만하는 스바루도 약간 숨
이 거칠어 졌다. 아메의 집은 그 언덕의 중턱에 있었다. 모녀 둘이서 살기
에는 꽤 큰 집이었다. 나는 차를 ㅏ세운 다음, 유키의 짐을 집어 들고 돌담
옆의 계단을 올라갔다. 경사면에 늘어선 삼나무들 사이로 오다와라의 바다
를 내려다볼 수있었다. 공기가 몽롱해 보이고, 바다는 봄날의 둔한 색채를
띠며 빛나고 있었다.
"아메는 양지바르고 넓은 거실 안을, 불이 붙여진 담배를 손에 든 채 돌
아다니고 있었다 커다란 크리스탈 유리 재떨이는, 꺾이거나 구부러진 샐럼
의 잔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누가 마음껏 숨을 내쉰 것처럼,
테이블 위에는 재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피우던 샐럼을 재떨이
에 던지고 유키에게로 가서, 그녀의 머리칼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녀는 현
상용 약품의 얼룩이 진 오렌지색의 특대 사이즈 트레이너 셔츠와, 색이 바
랜 블루진을 입고 있었다. 아마 죽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담배를 피우
고 있었나 보다. "굉장했어요." 하고 아메는 말했다. "정말 지독해. 왜 이토
록 지독한 일만 일어날까?"
정말 지독한 일이라고 나도 말했다. 그녀는 어제 일어난 사고의 전말을
들려주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어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혼란에 빠져 있
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게다가 거들어 주는 아줌마가 오늘은 열이 나서 못 오겠다는 거예요.
하필 이러한 때에. 왜 이런 때에 열이 날까? 어쩐지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아요. 경찰에서 찾아오지 않나, 딕의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지 않
나, 난 정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딕의 부인은 뭐라고 하던가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런데 무슨 소린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하고 아메는 한숨을 쉬
며 말했다. "그저 울고 있을 뿐이에요. 이따금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소근
거릴 뿐예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어요. 나 역시 이런 때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고... 안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집에 남아 있는 그의 짐을 되도록 빨리 그쪽으로 보내도록 하겠
다고 말했죠. 하지만 그 사람은 죽 울고 있을 뿐예요. 어쩔 도리가 없어
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소파에 기대었다.
"무얼 마시겠어요?" 하고 나는 물었다.
될 수 있으면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우선 재떨이를 비우고,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재를 걸레로 닦고,
코코아 찌꺼기가 달라붙은 컵을 내다놓았다. 그리고 부엌을 대충 정리하고,
물을 끓여 진한 커피를 만들었다. 부엌은 딕 노스가 일하기 쉽도록 잘 정
돈되어 있었지만, 죽은 지 하루도 못 되어 거기에는 뚜렷한 붕괴의 양상이
엿보였다. 싱크대 속에는 무질서하게 식기들이 처넣어져 있고, 슈가 포트의
뚜껑은 열려진 채로 있었다. 스테인레스 레인지에는 코코아가 잔뜩 달라
붙어 있었고 식칼은 치즈 따위를 자른 채의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가엾은 사나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그 나름의 질서를 열
심히 만들어 가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러한 것은 하루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눈깜짝할 사이다. 사람이라는 건 자신과 제일 어울리는 장
소에 그 그림자를 남기고 간다. 딕 노스의 그것은 부엌이었다. 그리고 그것
도, 가까스로 남겨진 그 불안정한 그림자도, 눈깜짝할 사이에 소멸되어 버
린다.
가엾게도,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 이외의 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내가 커피를 갖고 가자, 아메와 유키는 바싹 달라붙듯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메는 물기가 어린 충혈된 눈으로, 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
대어 쉬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약물의 작용으로, 정신이 후퇴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키는 무표정했지만, 어머니가 허탈한 상태로 지신에
게 기대고 있는 것을 특별히 불쾌히 여기거나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묘한 분위기가 생겨난다. 아메만이 있을 때와도 다르
고, 유키만이 있을 때와도 다른 분위기다. 거기에는 뭔가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대체 무엇일까?
아메는 두 손으로 커피 잔을 들고, 아주 중요한 것을 마시는 것처럼 천
천히 커피를 마셨다. "맛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커피를 마시고나자, 아메
는 약간 마음이 안정된 듯했다. 눈에 약간이나마 밝은 빛이 돌아왔다.
"너는 뭘 마시겠어?" 하고 나는 유키에게 물었다.
유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러 가지 처리할 일들은 이제 끝났습니까? 사무적인 일이나 법률적인
일 따위의 자질구레한 수속들 말예요."하고 나는 아메에게 물었다.
"네, 이미 끝났어요. 구체적인 사고 처리에 관한 건 특별히 까다로운 일
은 없었어요. 보통의 흔히 볼 수 있는 교통 사고니까. 집에 경관이 와서,
알려주었을 뿐예요. 그래서 난 그사람에게, 딕의 부인에게 연락하도록 했어
요. 부인은 금방 경찰에 나왓나 봐요. 그녀가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끝냈
어요. 법률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나느 딕과는 무관계한 사람이니까. 그 후
에 그녀가 집에 전화를 걸어왔어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고 있을
뿐예요. 비나하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흔히 볼 수 있는 교통 사고, 하고 나는 생
각했다.
앞으로 3주일쯤 지나면 아마 이여자는 딕 노스가 있었던 일 따위는 거의
잊어버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잊어버리기 쉬운 타입의 여자이고, 잊혀
지기 쉬운 타입이 남자인 것이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하고 나는 아메에게 물었다.
아메는 내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깊이가
없는 단조로운 시선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눈빛이 둔해지고, 이어 또 조금씩 거기에 밝은 빛이 되살아
났다. 멀리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가, 문득 생각이 바뀌어 되돌아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딕의 짐' 하고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부인에게 보내주
겠다고 한 것 말예요. 아까 당신에게 그 얘기를 했죠?"
"네, 얘기 들었습니다."
"그걸 어젯밤에 정리했어요. 원고와 타이프라이터, 책, 의복따위를 챙겨,
그의 수트케이스 속에 넣어 두었어요. 그다지 많지 않아요. 물건들을 별로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중간 정도의 크기의 수트케이스 하
나예요. 미안하지만 그걸 그의 집에 갖다줄 수 있겠어요?"
"좋아요. 갖다 주죠.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오또구지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자세한 주소는 알 수 없어요. 찾
아봐 주시겠어요? 수트케이스의 어디엔가 씌어져 있는 것 같던데."
그 수트케이스는 2층 복도의 맨 끝방에 놓여 있었다. 수트케이스의 이름
표에는, 꼼꼼해 보이는 글씨로 딕 노스라는 이름과 고오또구지의 주소가
씌어져 있었다. 유키가 그 방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다락방처럼 좁고 기
다란 방이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예전에 입주하여 가사를 거드는
아줌마가 있을 때에, 이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유키는 말했다. 딕 노스는
그 방을 깔끔히 정리해 두고 있었다. 조그마한 집필 책상 위에는, 가느다랗
게 잘 깎여진 다섯 자루의 연필이 지우개와 함께 정물화처럼 가지런히 놓
여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작은 글씨의 메모가 가입되고 있었다. 유
키는 방무에 기대어, 잠자코 방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는 잠잠했다. 새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마카하 교외의 아담한 집
을 생각해 내었다. 거기도 조용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새소리밖에는 들리
지 않았다.
나는 그 수트케이스를 안고 아래로 내려갔다. 수트케이스 속에는 원고나
책 따위가 잔뜩 들어 있는 모양이어서, 보기보다는 훨씬 무거웠다. 그 무게
는 내게 딕 노스의 죽음의 무게를 상상케 하였다.
"지금 갖다 주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는 아메게게 말했다. "이러한 일은
빨리 할수록 좋으니까요. 그밖에 또 내가 할 일은 없습니까?"
아메는 망설이는 것처럼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키는 어깨를 움칫
했다.
"실은 식료품이 별로 없어요." 하고 아메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사러 나갔다가, 그렇게 돼서, 그러니까..."
"좋습니다. 적당히 사오겠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느 냉장고 속에 있는 걸 점검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메모하였다. 그리고 아래쪽 거리로 내려가 딕 노스가 그 앞에서 죽은 수퍼
마켓에서 식료품들을 구입했다. 4,5일은 가겠지. 나는 사온 식품들을 하나
한 제대로 랩에 싸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아메는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대수로운 일이 아녜요, 하고 나는 말
했다. 실제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딕 노스가 하려다가 남겨두고 죽어
버린 것을, 내가 이어받아 끝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돌담 위에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마카하에 있던 때와 마찬가
지로,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손을 흔들지 않았다. 내게 손을 흔드는 것
은, 딕 노스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두 여자는 돌담 위에 나란히 서서, 거의
움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신
화적인 느낌을 주는 정경이었다. 나는 그 회색의 플라스틱 수트케이스를
스바루의 뒷좌석에 집어넣은 다음 운전석에 올랐다. 그녀들은 내가 커브를
돌 때까지 죽 거기에 서 있었다. 해질녘이어서, 서쪽 바다가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은 앞으로 여기서 대체 어떠한 밤을
보낵 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호놀룰루 다운타운의 그 기묘하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본
외팔의 백골을 생각해 내었다. 그건 역시 딕 노스의 뼈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거기에는 죽음이 모아져 있었던 것이다. 6구의 백골-6개의 죽음.
나머지 5개는 누구의 죽음일까? 하나는 네스미일지도 모른다. 네스미-죽어
버린 내 친구. 그리고 또하나는 아마 메이일 것이다. 나머지 3개.
나머지 3개.
하지만 왜 키키가 그러한 곳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왜 키키가 내게 그 6
개의 죽음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나는 오다와라까지 내려가서, 도오메이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그리고 미
노끼짜야에서 수도 고속도로룰 빠져나와, 길안내 지도에 표시된 대로 세다
다니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돌아 겨우 딕 노스의 집에 도착하였다. 집
자체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보통-집장수가 장사곡으로 집을 지어서 파
는 종류의-주택이었다. 자그마하고 아담한 2층 집으로 문이나 창문, 우편
함, 대문에 달아놓은 등 따위가 모두 몹시 작아보였다. 문 옆에 개집이 있
고, 줄에 매어진 잡종견이 자신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그 주위를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온 집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들으 목소리
도 들렸다. 좁은 현관에는 대여섯 켤레의 검은 가죽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주문하여 배달이 된 김밥 상자도 보였다. 딕 노스의 유해가 여기에
안치되어 밤생르 하고 잇는 것이다. 그에게도 적어도 죽은 후에는 돌아갈
장소가 있었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수트케이스를 차에서 꺼내어 현관까지 운반하였다. 벨을 누르자 중
년의 사나이가 나왔기에, 이 짐을 여기까지 운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
다. 사나이는 수트케이스의 이름표를 보고, 이내 사정을 이해한 듯했다.
"친절히 갖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그는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말
을 하였다.
나는 어전지 석연치 않은 기분을 안은 채 시부야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나머지 3개 하고 나는 생각했다.
딕 노스의 죽음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방에서 혼다 위스키를 마
시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나의 퍼즐에 생겨난 몇 개의 공백에는,
그 생각의 실마리들이 전혀 합치되지 않았다. 뒤집거나 옆으로 돌려보아도
마찬가지 였다. 아마 틀리는 범주에 속하는 생각인가 보다 .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더라도, 상황에 뭔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별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웬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직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딕 노스는 본질적으로 선의의 사
나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연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소멸되어 버렸다.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난다. 아마 상황은 이전보다 더 경
색되어가리라.
이를테면?
이를테면- 나는 아메와 있을 때의 유키의 무표정한 눈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
지 않았다. 그리고 유키와 함께 있을 때 아메의 멍하고 단조로운 눈도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는 뭔가 불길한 게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나는 유키가 좋았다. 머리가 좋은 아이다. 이따금 몹시 완고해지지만, 근본은 순
진하다. 또 나는 아메에게도 호의 같은 걸 품고 있었다. 단 둘이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역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재능이 넘치고, 무방비 상태였다. 유키보다
훨씬 어린애다운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둘이 함께 있게 되면, 그 분위기가 나를
몹시 피로하게 만들었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저 두 사람 덕분에 내 재능은 소멸
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의미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거기에 직접적인 힘 같은 게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두 사람 사이에 딕 노스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금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도 내가 두 사람과 직접 대면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러한 셈이다.
나는 유미요시에게 몇 번인가 전화를 하고, 고혼다와 몇 번인가 만났다. 유미
요시의 태도는 전체적으로 보아 여전히 차가웠지만, 어조로 미루어 보아 내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다소는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그다지 귀
찮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듯했다. 그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 학교에 다니고, 휴일에는 남자 친구와 이따금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지난
일요일에 그와 어떤 호수로 드리이브를 갔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과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친구예요. 고등학교 때 한 반이
었어요. 삿포르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뿐이에요."
별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그러한 일은 어
떻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내가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은, 수영 학교에 관한 일뿐
이다. 보이 프랜드와 어느 호수로 가든, 어느 산에 오르든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말해 두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고 유미요시는 말
했다. ."무엇을 숨겨두는 걸 나는 싫어하니까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나는 한 번 더 삿포르로 가서 너를 만나 이야기를 하겠어. 그것만이 문제야.
너는 내키는 대로 누구하고나 데이트를 하면 돼. 그러한 건 나와 너 사이의 일
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나는 죽 너에 관해 생각하고 있어. 전에도 말한 것처
럼 우리 사이에는 뭔가 서로 통하는 게 있어."
"이를테면?"
"이를테면 호텔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거기는 네 장소이고, 또 내 장소이기
도 하거든. 거기는 우리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장소인 셈이야."
"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도 아닌, 어디까지나 중립
적인 '흠' 이었다.
"나는 너와 헤어진 후로 여러 사람들을 만났어. 여러 가지 일들을 겪기도 했
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죽 네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노상 너와
만나고 싶어하고 있어. 하지만 아직 갈 수가 없어. 하는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진심은 깃들어 있지만 비논리적인 설명이었다. 나답다.
과히 짧지도 길지도 않은 간격의 침묵이 이어졌다. 중립으로부터 약간은 긍정
적인 방향으로 기운 듯한 느낌을 주는 침묵이었다. 하지만 결국 침묵은 단순한
침묵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물을 너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 작업이 진전되고 있나요?" 하고 그녀는 질문했다.
"그러하리라고 생각해. 아마 그러하리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
고 나는 대답했다.
"내년 봄까지 마무리지어지면 좋겠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정말." 하고 나는 말했다.
고혼다는 약간 피곤해 보였다. 일의 스케줄이 꽉 짜여 있는 데다, 그 틈을 이
용하여 헤어진 아내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어. 이것만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
어." 하고 고혼다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원래 이러한 기교적인 생활에는 맞지 않아.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가정
적인 인간이거든. 그래서 날마다 무척 피곤해. 신경이 잔뜩 늘어뜨려진 듯한 느
낌이 들어."
그는 고무줄을 늘여뜨리는 것처럼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그녀와 둘이서 휴가를 얻어 하와이로 가야겠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럴 수 있으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힘없이 미소지었다. "그럴 수 있
으면 얼마나 즐거울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며칠 동안 둘이서 해변에
서 뒹굴며 지내는 거야. 닷새면 돼. 아니 사치스럼 말은 하지 않겠어. 사흘이라
도 좋아. 사흘이면 피로가 꽤 풀릴텐데."
그날 밤에 나는 그와 함께 아지부에 있는 그의 맨션으로 가서, 멋진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그가 출연한 TV 광고를 모은 비디오를 보았다. 위장약의
광고, 그 광고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 사무실의 엘리베이터, 벽이나 문이나
칸막이도 없이 개방된 네 기의 엘리베이터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오르내리고 있
다. 고혼다는 다크수트를 입고, 가죽가방을 안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마
치 엘리트 샐러리맨 같은 풍모다. 그는 그 엘리베이터로부터 엘리베이터로 날쌔
게 뛰어 옮아탄다. 저쪽 엘리베이터에 상사가 타고 있으며, 그쪽으로 가서 업무
를 상의하고, 이쪽 엘리베이터에 예쁜 여직원이 타고 있으면 데이트 약속을 하
고, 또 다른 쪽 엘리베이터에 하다 남은 업무가 놓여져 있으면 그쪽으로 가서
급히 마무리짓고 하는 것이다. 두 대 너머 저쪽의 엘리베이터에서 전화 벨이 울
리고 있는 수도 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다른 엘리베이터로부터 엘리베이터
로 뛰어 옮아가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혼다는 시원스런 표정을 일그
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자못 필사적으로 뛰어 옮아가고 있다.
그리고 코멘트가 나온다. "피로한 나날, 피로가 위에 쌓입니다. 분주한 당신에
게 부드러운 위장약..."
나는 웃었다. "재미있군, 이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 쓸모없는 광고야. 광고 따위는 근본적으로 모두 쓸
모없는 쓰레기 같은 거야. 하지만 이건 상당히 잘 촬영이 되어 있어. 비참한 얘
기지만, 내가 주연한 대부분의 영화들보다 훨씬 질이 높아. 이건 돈도 꽤 들인
거라구. 세트나 특수 촬영에 말야. 광고하는 이들은 세밀한 데 아낌 없이 돈을
투자하거든. 설정도 재미있어."
"그리고 자네의 지금 상황을 시사하고 있어."
"정말." 하고 말하고 그는 웃었다. "자네 말대로야. 정말 아주 비슷해. 틈을 내
어 이리저리 잽싸게 뛰어다니고 있어. 하고 있는 사람은 결사적이야. 피로가 위
에 쌓여. 하지만 이 약은 효험이 없어. 한 다스 주길래 시험해 봤는데, 통 효험
이 없더군."
"하지만 동작이 썩 좋아." 하고 나는 리모콘으로 한 번 더 그 광고를 플레이백
해 보면서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바스터 키턴적인 우스꽝스러움이 있어. 자네
는 의외로 이러한 종류의 연기에 어울리는지도 몰라."
고혼다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희극을 좋아해.
흥미가 있어. 가능성을 느껴. 뭐라고 할까, 나처럼 직선적인 타입의 배우는 직선
적이기 때문에 우스워보이는 점을 잘 표출하면 재미있으리가고 생각해. 이 비뚤
어지고 까다로운 세계에서 올바로 직선적이게 살아가려고 하지. 하지만 그러한
삶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측면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
"알아." 하고 나는 말했다.
"특별히 우스꽝스런 짓을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보통으로 있으면 되는 거야.
그것만으로 충분히 우습거든. 그러한 연기에는 흥미가 있네. 그러한 타입의 사람
들이 오버 액션을 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와 반대되는 거야. 아무런 연기
도 하지 않은 거야."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
무도 내게 그리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그러한 역할을 주지 않아. 가져오는 것이라곤 노상 의사나 교사, 변호사 따위의
역할뿐이야. 이젠 싫증이 나요. 거절하고 싶지만, 난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돼. 피로가 위에 쌓인다구."
그 광고는 상당히 평판이 좋아 몇 개의 속편이 만들어졌다. 형식은 언제나 마
찬가지였다. 단정한 얼굴을 한 고혼다가 비지니스 수트를 입고, 전철이나 버스,
비행기 등에 간발의 시간차로 아슬아슬하게 뛰어오르고 있었다. 혹은 그는 서류
를 살짝 겨드랑이에 끼고 고층 빌딩의 벽에 달라붙거나 로프를 타고 저쪽 방으
로부터 이쪽 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모두 잘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혼다
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점이 좋았다.
"처음에는 몹시 피곤한 표정을 지으라는 거야, 감독이. 기진 맥진한 채 녹초가
되어 쓰러질 것 같은 느낌으로 하라는 거야. 하지만 난 싫다고 했어. 그렇지 않
다, 이건 시원스럽게 하니까 재미있는 거다." 라고 말했지. 물론 그치들은 돌대가
리들이어서 내 말을 통 믿지 않더군, 하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았어. 나는 이게
좋아서 이러한 광고에 나오고 있는 게 아냐.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하고 있어.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이건 틀림없이 재미있는 게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어. 그
래서 철저히 불평을 했지. 결국 두 종류의 필름을 만들어 모두에게 보여 주었어.
물론 내가 주장한 방식의 필름 쪽이 훨씬 인기가 있었지. 하지만 광고가 성공하
자, 공로는 모두 그 감독들에게로 돌아갔어. 무슨 상을 탔다더군. 그 따위는 어
떻든 상관 없지. 하지만 나는 그치들이 아주 당연한 거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뽐
내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치들은 지금은 그 광고의 아이디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스스로 생각해낸 걸로 믿고 있어. 그러한 자들이야. 상상력이 없는
자들일수록 자기 합리화하는 일이 재빠르거든. 그리고 나는 불평하기 좋아하고
그저 잘 생겼을 뿐인 서투른 배우로 여겨지고 있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닐, 자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듯한 느낌이 드
는군." 하고 나는 말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자네와 실제로 만나 이야기해 보
기 전에는 그러한 느낌이 들지 않았어. 자네가 나온 몇 편의 영화를 보았지만,
솔직히 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형편없는 영화였어. 그러한 데 나오면,
자네까지 형편없이 보였어."
고혼다는 비디오 데크의 스위치를 끄고, 새 술을 만들고, 빌 에반스의 레코드
를 틀었다. 그리고 소파로 돌아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한 일련의 동작은
여전히 참으로 우아했다.
"맞아. 옳은 말이야. 그러한 쓸모없는 영화에 나가고 있으면, 자신이 점점 쓸모
없게 되어가는 걸 알 수 있어. 자신이 몹시 초라하게 느껴져. 하지만 아까도 말
한 것처럼, 나는 무엇인가를 선태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않아. 무엇 하나
선택할 수 없어. 자신이 매는 넥타이의 무늬마저 제대로 선택할 수 없어.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얼간이들과 자신의 취미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속물들이 제멋대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저리로 가라, 이리로 와라, 저 일을 하
라, 이 일을 하라, 이 차를 타라, 이 여자와 자라고 말야. 쓸모없는 영화와 같은
쓸모없는 인생이야. 언제까지나 한없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까지 계속될까? 스스
로도 짐작이 가지 않아. 이미 서른넷인데 말야. 한 달 후면 서른다섯이 돼."
"결단을 내려 모든 걸 버리고 제로가 되면 될 거야. 자네 같으면 제로부터 다
시 시작할 수 있어. 사무소를 나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조금씩 빚을 갚아나
가면 돼."
"맞아. 나도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어. 그리고 나 혼자라면, 틀림없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을 거야. 제로가 되어, 어느 극단에라도 들어가서 좋아하는 연
극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상관없어. 돈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될 거야.
하지만 말야, 내가 제로가 되면 그녀는 틀림없이 나를 버릴 거야. 그러한 여자
야. 이러한 세계가 아니면 호흡해갈 수가 없어. 제로가 된 나와 함께 있으면, 그
녀는 호흡 곤란 상태에 빠져버릴 거야. 좋은 일이냐의 여부를 떠나, 그러한 체질
이야. 그녀는 스타 조직이라는 조직 속의 그러한 기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상
대에게도 이와 같은 기압을 요구해. 그리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로
부터 떨어질 수가 없어. 그것만은 안 돼."
출구가 없는 것이다.
"사방이 꽉 막혀 있어." 하고 고혼다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뭔가 다른 이야
기를 하자구. 이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면 아침까지 끌고 가도 제자리 걸음일 테
니까."
우리는 키키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가 키키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키키가 우리를 끌어당긴 셈인데, 생각해 보면 자네로부터는 그녀의 이야기를
거의 들어보지 못한 느낌이 든다고 고혼다는 말했다. 그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종류의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아니, 이야기하기 어려운 건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키키와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우연한 일로 우리는 서로 알게 되
어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마치 공백 속에 어떤 기체가 소리도 없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처럼, 그녀는 내 인생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잘 설명할 수가 없군. 모든 게
그저 자연스레 이루어진 거야. 그래서 그때는 특별히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
았어.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 일들이 비현실적이며 조리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말로 나타내 보면 어이없는 일로 여겨져, 정말,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나는 술을 마시고, 컵 속의 깨끗한 얼음 조각을 흔들었다.
"키키는 당시 귀모델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의 그 귀의 사진을 보고
키키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어. 그건 말야, 뭐라고 할까, 정말로 완벽한 귀였어.
나는 그때 그 귀의 사진을 사용하여 광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지. 그 사진
에 문안을 첨가하는 거야. 무슨 광고였던가, 잊어버렸다. 하지만 아무튼 그 귀의
사진이 내게 보내져 왔어. 굉장히 크게 확대된 키키의 귀의 사진이야. 솜털까지
보일 정도야. 나는 그걸 사무소의 벽에 걸어 두고 매일 바라보며 지내고 있었어.
처음에는 광고 문안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지만, 나중에는 그 사진을 보는 일
이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어. 광고 일이 끝난 후에도, 나는 죽 그 사진을 바라보
고 있었네, 그건 정말 멋진 귀였어.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실물을 보여주
지 않으면 설명이고 뭐고 안 될 테니까. 그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한
완벽한 귀였어."
"그러고 보니, 자네는 키키의 귀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었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응 그래,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그 귀의 소유자를 만나고 싶어졌어. 그녀를
만나지 않으면, 인생이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않을 듯한 느낌이 들
더군. 어째서일까? 하지만 그러한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키키에게 전화를
걸었지. 그녀는 나와 만나 주었어. 그리고 만난 첫날에 키키는 내게 개인적으로
귀를 보여 주었어. '개인적인 귀를 보여준 거야. 영업용이 아닌 개인적인 귀를.'
그건 사진보다 훨씬 멋진 귀였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멋진 귀였어.' 그녀는 영
업용으로 귀를 사용할 때에는- 즉 모델을 할 때에는- 의식적으로 귀를 폐쇄하는
거야. 그러니까 개인적인 귀는, 이와는 전혀 달라. 알겠어, 그녀가 귀를 보여주
면, 그것만으로 거기에 있던 공간이 변화되어 버리는 거야. '세계의 모습이 일변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아마 허황된 얘기로 들릴 테지만 말야. 하지만 이렇
게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어."
고혼다는 이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다. "귀를 폐쇄한다는 건 무슨 뜻인
가?"
"귀와 의식을 분리하는 거야. 간단히 말하면."
"흠" 하고 그는 말했다.
"콘센트를 제거하는 거야, 귀의."
"흠."
"우습게 들리지, 하지만 정말이야."
"물론 믿고 있네, 자네 말은. 제대로 이해하려 하고 있을 뿐이야. 우습게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냐."
나는 소파에 기대어,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귀는 특수한 힘을 갖고 있어. 무슨 소리를 알아듣고, 사람을
적절한 장소로 이끄는 거야." 하고 나는 말햇다.
고혼다는 또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하고 그는 말했다. "그때 키
키는 자네를 어디로 이끌고 갔군? 적절한 장소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고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