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34/36)

"유전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미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하고 있는 일을  쉬는 편이 낫겠군. 일을  쉬고, 잠시 그녀와 만나지  않도록 해. 

그러는 수밖에 없어.  모든 걸 내던지는 거야. 나와 함께  하와이로 가자구. 매일 

해변에서 뒹굴며  피나 코라다를 마시자구. 거기는  좋은 곳이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돼.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수영을 하고, 둘이서  아가씨를 데리고 

자는 거야. 무스탕을 빌려,  토아즈나 슬라이&더 패밀리 스톤, 비치 보이즈 따위

를 들으면서 15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드라이브를 하세. 기분이 해방돼. 만일 무

엇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 다음에 다시 생각하는 거야."

  "나쁘지 않군."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눈 가장자리에 약간의 주름이  지도

록 웃었다. "또 두 명의 아가씨를  불러, 넷이서 아침까지 놀자구. 그때는 즐거웠

어."

  좋아. 하고 나는 말했다. 관능적인 일상의 작업.

  "나는 언제든 갈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는 어때? 일의 끝매듭을 짓

는 데 얼마나 걸려?"

  고혼다는 이상하다는  듯이 미소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아무리 시일이  흘러도 일을 끝매듭지을 수는 없네. 모두 내팽개치

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런  짓을 하면, 나는 우선 틀림없이 이 세계로부터 영

원히 추방되지. '영구히' 그리고 동시에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는 아내를 잃게 

돼. '영구히' "

  그는 유리잔에 남아 있는 맥주를 다 마셨다.

  "하지만 좋아. 모든 걸 잃어버려도 이제 상관 없어. 체념해도 돼. 자네 말이 맞

아. 나는 지쳐  있어. 하와이로 가서 머리를 비워야  할 시기야. 오케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자네와 함께 하와이로  가겠어. 그 다음의 일은, 일단 머리를 말끔히 

비운 다음에 생각하겠어.  나는- 그래, 착실한 인간이 되고 싶어.  이제 글렀는지

도 몰라. 하지만 확실히 한  번 더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어. 자네에게 맡기겠

네. 나는 자네를 신회하고 있어. 정말이야.  자네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어째서일까. 자네에게는 아주 성실한  데가 있어. 

그리고 그건 내가 죽 추구하고 있던 것이었어."

  "나는 성실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저 제데로 스텝을 지키고 있

을 뿐이야. 그저 춤을 추고 있을 뿐이야. 의미 따위는 없어."

  고혼다는 테이블 위에  50센티미터 정도의 사이가 벌어지도록  양손을 펼쳤다. 

"어디에 의미가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의미가 대체 어디에 있어?" 그리고 웃

었다. "하지만 좋아, 특별히. 그건 이제 어떻든 상관없어. 체념하고 있어. 나도 자

네를 본받기로 하지.  엘리베이터로부터 엘레베에터로 뛰어 옮아가며  밀고 나가

자구.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야냐. 하려고만 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나는 머리

가 좋고 잘 생기고 호감을 주는 고혼다니까. 좋아 하와이로 가세. 내일 비행기표

를 예약해 줘.  퍼스트 클래스로 두 장.  퍼스트 클래스가 아니면 안  돼. 그렇게 

정해져 있어.  자동차는 메르세데스, 시계는  롤렉스, 맨션은 미나토꾸, 비행기는 

퍼스트 클래스야. 모레 짐을 챙겨 날아가는  거야. 당일에 호놀룰루에 도착. 나는 

알로하 셔츠가 어울리거든."

  "자네에게는 무엇이든 어울려."

  "고마워. 희미하게 남겨진 자아가 들썩거리는군."

  "우선 해변의 바로 나가서 피나 코라다를 마셔야지. 차갑게 냉각된 걸."

  "나쁘지 않아."

  고혼다는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봐, 자네는  내가 키키를 죽인 걸 

정말로 잊을 수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언젠가 나는 유치장에 처넣어져 2주일 동안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말했잖아?"

  "말했어."

  "그건 거짓말이야. 나는 모든 걸 마구 지껄이고 금방 나왔어. 무서웠기 때문이 

아냐. 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었기  때문이야. 자신을 깎아내리고 싶었기 

때문이야. 비열한 짓이야.  그래서 자네가 나를 위해  죽 입을 다물고 있어준 게 

내게는 정말 기뻤어. 자신의  비열함마저 구제된 듯한 느낌이 들었어. 별난 느낌

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아무튼 그러한 느낌이  들었어. 별난 느낌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아무튼 그러한 느낌이  들었어. 자네가 나의 비열한 부분을 씻어낸 듯한 

느낌 말야. 그러나  오늘은 꽤 많이 털어 놓고 이야기를  했군. 총복습이야. 하지

만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어. 마음이 놓이는군. 자네는 불쾌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에게 이전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말해야 했으리

라. 하지만 나는 이를 좀더 뒤로 미루어  두기로 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

만 그때는 그러는 편이 나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한 말이 더욱 힘

을 지닐 기회가  가까운 장래에 다가올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

아" 하고 나는 한 번 더 되풀이했다.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진 모자를  집어들어 젖은 상태를  살펴보고, 다시 

제자리에 걸쳐 놓았다. "친구의 정의로서, 한 가지 부탁을 하겠어"  하고 그는 말

했다. "맥주를 한 잔 더 마시고 싶네. 하지만 지금은 일어서서 저기까지 나갈 기

운이 없어."

  "좋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카운터로  가서, 또 맥주 두 잔을 샀다. 카

운터가 혼잡하여 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유리잔을 양손에 들고, 안쪽의 테이블

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맞은 모자도 사라져 버렸다. 주차

장의 마세라티도  사라져 버렸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메세라티가 시바우라의 바다에서 인양된 것은, 이튿날의  점심 때가 지날 무렵

이었다. 예상했던 대로였기 때문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가 사라진 때부터 나

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사체가 또 하나 불어났다. 네스미, 키키, 메이, 딕 노스, 그리고 고혼다. 

모두 다섯이다. 나머지는 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잖은 방식의 전개였다. 다

음에 무엇이 올 것인가? 다음에  누가 죽을 것인가? 나는 유미요시의 일을 문득 

생각했다. 아니, 그녀일 턱이 없다. 그건 너무 가혹하다. 유미요시는 죽거나 사라

져서는 안 된다. 유미요시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유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애는 겨우 열세 살이다.  그녀를 죽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머리  속에, 사자로 화

할 지도 모를  사람들의 리스트를 늘어놓아 보았다. 그러한 일을  하고 있으려니

까 어쩐지 내 자신이  사신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사자의 

순위를 고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카사카 경찰서로 가서 문학을 만나,  어젯밤에 고혼다와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어쩐지 그에게 얘기해 두는 편이 나을 듯한 느낌이 된 것이다. 하

지만 물론 그가 키키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끝

난 일이다. 사체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죽기 직전까지 고혼다와 함께 있었는데, 

그가 몹시 지쳐 있고 노이로제 상태였다고 말하였다.  빚이 많아 억지로 하기 싫

은 일을 해야 했고, 이혼한 일로 마음을 썩이고 있었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간단히 조서로 만들었다.  이전과는 달리 아주 간단한 조

서였다. 나는 거기에  서명했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조서를  다 만들고 나

서, 그는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낀 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주위에서

는 정말 사람이 잘 죽는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한  인생을 보내고 있으면 

친구를 만들 수 없어요. 모두들 싫어해요.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면, 눈매가 나빠

지고 피부가 거칠어져요. 좋을 것 없어요."

  그리고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건 자살이에요. 이는  분명해. 목격자도 있어요. 그러나 아까

워요. 아무리  영화 스타라 해도, 마세라티를  바다에 처넣을 게  뭐요. 시비크나 

카로라면 충분했는데."

  "보험에 들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자살일 경우는 안 될 거요. 아무리 그래도 보험금은  나오지 않을 거요" 

하고 문학은 말했다. "하지만  아무튼 어이가 없어. 나는 돈이 없으니까 그만 어

린애 자전거 생각을 하게 돼요. 어린애가 셋이에요. 셋이나 되면 돈이 많이 들어

요. 모두 제 자전거를 갖고 싶어하거든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좋아요. 이제 돌아가요.  친구는 가엾게 됐어요. 일부러  이야기하러 와주어서 

고마워요." 그는 출구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메이 양 사건은 아직  매듭지어

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수사는 제대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매듭지어질 

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오랫동안 나는 자신이  고혼다를 죽여버린 듯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 

짓눌리는 듯한 기분을 아무래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셰이키즈에서의 그

와의 대화를 하나하나 회상해 보았다. 그때 나는  더 능숙하게 대답하여 그를 구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랬으면 지금쯤은  둘이서 마우이

의 해변에서 뒹굴며 맥주를 마시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 그렇게 되기 어려웠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결국 그는 처음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죽 마세

라티를 바다에  처넣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출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출구의 문의 손잡이를  죽 잡고 기다리

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머리 속에  몇 번이고 마세라티가 바다  속에 가라앉는 

광경을 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의 틈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호흡을  할 수 

없게 되어가는  그 광경을. 그러한  자기 파괴의 가능성을  가지고 유희함으로써 

가까스로 자신을 현실의 세계와 결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

지나 계속될 리는 없었다. 언젠가는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것도 알

고 있었다. 그는 단지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의 죽음이  내게 가져온 것은 오래된  꿈의 죽음 및 그  상실감이었다. 딕 

노스의 죽음은 내게  어떤 체념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혼다의 죽음이  가져온 것

은, 출구가  없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와  같은 절망이었다. 고혼다의 죽음에는 

구원이라는 게 없었다. 고혼다는 자신 속의 충동을, 자기 자신에 잘 동화시킬 수

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근원적인 힘이 그를  극한적인 장소까지 몰고 간 것이다. 

의식의 영역의 제일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어둠의 세계

까지.

  얼마동안 주간지나 TV, 스포츠 신문 등이 그의 죽음을 들쑤시어 먹고 있었다. 

그들은 투구벌레처럼 부육을 아주 맛있는 듯이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한 타이틀

을 보고  있기만 해도 나는 구역질이  났다. 그들이 뭐라고 쓰고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읽지 않고 듣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자들을 찾아다

니며 하나하나 목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금속 배트로 때려죽이면 돼,  하고 고혼다가 말했다. 그 편이 간단하고 빠르니

까. 아니,  그렇치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빨리 죽이면  아까워. 천천히 

목을 졸라 죽이겠어.

  그리고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좋아요" 하고 메이가 말

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세계를 증오했다. 마음 속으로부터 격렬히, 근원적으로 세계

를 증오했다. 세계는 뒷맛이  나쁜 부조리한 죽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나는 무력

하고, 그리고 삶의  세계의 오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갔다. 나간 인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 보았다. 내 손바닥에는  역시 죽음의 냄새가 배어들어 있었다. 아무리 씻어

도 그건 지워지지  않는다, 고 고혼다가 말했다. 이봐 양사나이,  이것이 내 세계

의 연결 방식인가? 나는 끝날  줄 모르는 죽음에 의해 세계에 결부되어 있는가?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상실하려 하고 있는가?  자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이제 행

복해질 수 없을지도 몰라. 그건 그런대로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너무 가혹해.

  나는 문득 어린 시절에 읽은 과학책을  생각해 내었다. 거기에는 "만일 마찰이 

없으면,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 책에는 "만일  마찰

이 없으면, 자전의  원심력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것이 우주로  날려가 버릴 것" 

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나는 정말 그러한 기분이었다.

  "좋아요" 하고 메이가 말했다.

  고혼다가 마세라티를 바다에 처넣은 지 3일  후에, 나는 유키에게 전화를 걸었

다. 나는 솔직히 말해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키는 이야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무력하고 외돌토리인 것이다.  어린애인 것이다. 

그녀를 감쌀 수 있는 인간은 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내게는 그녀가 계속  살아가도록 할 의무가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유키는 하꼬네의 집에는 없었다. 아메가 전화를 받고, 딸은 그저께 아카사카의 

아파트로 가버렸다고 말했다.  아메는 잠이 들려다 깬 것처럼 꽤  느슨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 편이 내게도 편했다. 나는 아카사

카로 전화를 걸었다. 유키는 전화기 옆에 있었는지, 금방 수화기를 들었다.

  "이제 하꼬네에는 있지 않아도 돼?" 하고 나는 물었다.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잠시 혼자 있고 싶었어요. 뭐니뭐니 해도 엄마는 어른

이잖아요? 내가 없어도  제대로 해나갈 수 있어요. 나는 자신의  일을 좀 생각하

고 싶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슬슬 그러한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시

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럴지도 몰라" 하고 나는 동의했다.

  "신문에 난 걸 보았어요. 아저씨의 친구가 죽었더군요."

  "그래, 저주받은 마세라티야. 네 말대로였어."

  유키는 잠자코 있었어. 침묵이  물처럼 내 귀를 적셨다. 나는 수회가를 오른쪽 

귀로부터 왼쪽 귀로 옮겼다.

  "식사라도 하러 가지 않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차피 변변치 않은 걸 먹

고 있겠지? 둘이서 좀  나은 걸 먹자꾸나. 나도 실은 지난 며칠  동안 식사를 제

대로 못했어. 혼자 있으면 식욕이 나지 않아."

  "두 시에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그 이전이면 좋아요."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열한 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좋아. 지금부터 준비하고 맞으러 가지.  30분에 그쪽에 도착할 거야." 하고 나

는 말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어 마시고, 자동차의 키와 

지갑을 포켓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을 잊고  있

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 면도하는 걸 잊고 있었군.  나는 세면실로 가서 

꼼꼼히 면도를 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아직 20대라고 해도 통용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통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20대로 보이든  않든간에, 그러

한 일에는 아마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떻든  상관없는 일

이다.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이를 닦았다.

  바깥은 좋은 날씨였다. 여름이 이미 거기까지  와 있었다. 비만 내리지 않으면, 

아주 기분 좋은 계절이다.  나는 반소매 셔츠에 얇은 면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유키의 맨션으로 스바루를 몰았다. 휘파람까지 불었다.

  멋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름이다.

  나는 차를 운전하면서 임간학교 때의 일을  생각해 내었다. 임간학교에서는 세 

시에 낮잠 자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낮잠을 잘 수  없었다. 자, 

잠을 자라고 해서 잠이 올 리가 없지  않은가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죽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천장이 독립된  세계처럼 여겨진다. 거기로 가면, 여

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든다. 가치가 전도된- 상

하가 거꾸로 된- 세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처럼. 나는 죽 그러한 것을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임간학교 때의 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천장뿐

이다. 멋있다.

  뒤쪽의 세딜락이 경적음을 세 번 울렸다. 신호가 파랑으로 바뀌었다. 침착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서두른다고 그렇게 훌륭한 장소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

은가? 나는 천천히 차를 물었다.

  아무튼 여름이다.

  내가 맨션 현관의 벨을  누르자, 유키는 금방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우아하

게 나염한 옷감으로  만들어진 반소매 원피스 차림에 샌들을 신고,  진한 청색의 

가죽으로 만든 숄더 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오늘은 멋진 옷차림을 하고 있군" 하고 나는 말했다.

  "두 시부터 누구를 만난다고 말했잖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썩 잘 어울려. 우아해" 하고 나는 말했다. "어른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녀는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부근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스프와 스파게티, 상어 소스, 농어, 샐러

드 따위로 이루어진 점심을 먹었다. 아직 열두  시가 되기 전이어서 가게가 비어 

있었고 제대로의 맛이  났다. 열두 시가 지나 샐러리맨이 거리로  우르르 몰려나

올 무렵에 우리는 가게를 나와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겠어?" 하고 나는 물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그냥 이  근처를 빙글빙글 돌고 있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반사회적 행위야. 가솔린의 낭비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하

지 않았다. 못 들은  체하고 있었다. 음, 좋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원래 

지독한 거리인  걸. 좀더 공기가 더러워졌다고  해서, 좀더 교통이 혼잡해졌다고 

해서, 그러한 일에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유키는 카 스테레오의  버튼을 눌렀다. 속에는 토킹 헤즈의 테이프가  들어 있

었다. 아마 "페어  오브 뮤직" 일 것이다.  대체 언제 집어 넣었을까? 여러  가지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나, 가정 교사에게 공부하기로 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오늘 그 

사람을 만나요. 여자예요.  아빠가 주선해 주었어요.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고 아

빠에게 말했더니, 그분이 다음날에 제대로 구해 주었어요. 깔끔하고 좋은 사람이

라는데요. 이상한 애기지만, 그 영화를 보고 웬지 공부를 하고 싶어졌어요."

  "그 영화?" 하고 나는 되물었다. "짝사랑 말야?"

  "그래요. 그거예요." 하고 말하고, 유키는 약간  붉어졌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

이 들어요. 스스로도.  하지만 어쨌든 그 영화를  본 다음에 갑자기 공부를 하고 

싶어졌어요. 아마 아저씨의  친구가 선생님 역할을 하고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 사람을 보고  있을 때는 얼간이처럼 느껴졌는데, 그래도 무엇을 호소

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래. 어떤 종류의 재능이 있었어. 그건 분명해."

  "음."

  "하지만 물론 그건 연기이고 허구야. 현실과는 달라. 그건 알 수 있지?"

  "알고 있어요."

  "치과 의사 역할도  잘 해. 아주 솜씨가 좋아. 하지만  그건 연기야. 솜씨 좋아 

보일 뿐이고 이미지야. 정말로 무슨 일을 한다는  건 비참하게 혼란에 빠지고 힘

겨운 일이야. 의미가 없는 부분이 너무 많고, 하지만 무엇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

은 좋은 일이지. 그러한 게 없으면 잘 살아갈 수 없어. 고혼다도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할 거야."

  "그를 만났어요?"

  "만났어" 하고 나는 말했다. "만나 이야기를 했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지. 

아주 정직하게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그대로 죽어 버렸어. 나와 이야기하고 나

서 곧 바다에 마세라티를 처넣은 거야."

  "내 탓이군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 탓이 아냐. 누구의 탓도 아냐. 사람이 죽는 데

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어.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아. 뿌리와 마찬가지야. 

위에 나와  있는 부분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기고  있으면, 질질 딸려나와. 인간의 

의식이라는 건 깊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거야. 뒤얽혀 있고 복합적이며... 해

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 진정한 이유는 본인밖에 알 수 없어. 본인도 알

지 못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는 그 출구의 문의 손잡이를 죽 잡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계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때문에 나를 틀림없이 미워할 거예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미워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미워하고 있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나중에 미워할 거예요"

  "나중에도 미워하지 않아.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는다구."

  "설령 미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틀림없이 무엇인가가 사라져 버릴 거

예요." 하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너도 고혼다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어."

  "그래요?"

  "그래. 그도 무엇이 사라질까봐  죽 신경을 쓰고 있었어. 하지만 뭘 그렇게 걱

정해? 무엇이든 언젠가는  사라지는 거야. 우리는 모두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어

요. 우리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물은 우리가  이동함에 따라 모두 언젠가는 사

라져 버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라질 때가 오면 사라진다구. 그리고 사

라질 때가 올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아. 이를테면 너는 성장해가지. 앞으로 2년이 

지나면 그 멋진 원피스도  몸에 맞지 않게 돼. 토킹 헤즈도  낡아빠진 것처럼 느

껴질 지도 몰라.  그리고 나와 드라이브 따위를  하고 싶지도 않겠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해.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나는 죽 당신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해요. 그건 시간과는 관계없는 일이

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해주는 건 기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공평하게 말하면, 너는 시간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어. 모든 걸 

처음부터 단정해 버리지 않는 게 좋아. 시간이라는 건 부패와 같은 거야. 뜻하지 

않은 일이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변해 버려.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녀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테이프의 A면이  끝나고, 자동으로 B면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여름이다. 거리의 어디를  내다보아도 여름이 눈에 띄었다. 경관이나 고교생이

나 버스 운전사도  모두 반소매 차림을 하고 있었다. 소매없는  어깨걸이 차림으

로 걸어가고 있는 아가씨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고 있었지, 하

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서 그녀와  둘이서 "헬프 미 

론다" 를 부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겨우 두 달 반밖에 경과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를 미워하지 않아요?"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미워하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이 불확실한 세계

에서 그것만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어."

  "절대로?"

  "절대로. 2500퍼센트 미워할 리가 없어."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 말을 듣고 싶었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혼다를 좋아했었죠?" 하고 유키가 물었다.

  "좋아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눈 속

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하지만 나는 가까스로 이를 억눌렀다. 그리고 심호

흡을 하였다. "만날 때마다 좋아져갔어. 그러한  일은 별로 없는데, 특히 나 정도

의 나이가 되어서는 말야."

  "그가 그 사람을 죽였어요?"

  나는 잠시 선글라스  너머로 초여름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어."

  그는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유키는 창틀에 턱을  괴고 토킹 헤즈를 들으면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녀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약간 어른스러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분 탓이겠지. 아직 두 달 반밖에 경과하지 않은 것이다.

  여름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어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어떡할까" 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것도 정해  두지 않았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하지만 어쨌든 한 번 더 삿포로로 돌아가겠어. 내일이나 모레라도. 삿포로

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나는 유미요시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양사나이. 거기에는 나를 위

한 장소가 있다.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 번 더 그리로 돌아가 풀려진 테를 메워야 한다.

  요요기야하다역 가까이 오자, 그녀는 거기서 내리겠다고 말했다. "오다큐  선을 

타고 가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목적지까지 차로 바래다 주겠어. 어차피  오늘 오후는 한가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좋아요. 꽤 멀어서 전철이 빨라요."

  "이상하군." 하고 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고 말했어.

  "말해도 괜찮잖아요?"

  "물론 괜찮아" 하고 나는 말햇다.

  그녀는 10초나  15초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표정다운  표정은 띠고 

있지 않았다. 기묘하게 표정이  없는 아이다. 눈빛과 입술의 모양이 조금씩 변할 

뿐이다. 입술이 약간 오므라들고, 날카로운 눈에는  생긱가 깃들어 있었다. 그 눈

은 내게 여름  햇빛을 연상시켰다. 날카롭게 물 속으로 비쳐들어  굴절하며 흩어

지는 여름날의 그 햇빛.

  "단지 감동하고 있을 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이상한 사람"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 차를 내려 쾅  문을 닫고, 뒤돌아보

지도 않고 걸어가  버렸다. 나는 유키의 훌쭉한 뒷모습이 사람들의  발걸음 속으

로 사라져 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아주 슬픈 기분이 되었다. - 마치 실연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라빈 스픈훌의 "서머  인 더 시티" 를- 불면서 오메산도를 거

쳐 아오야마가까지 가서  기노쿠니야에서 식료품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주차장

에 차를  주차하려다가, 내일이나 모레는 삿포로로  간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만들 필요도 없고,  식품을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갑자

기 할 일이 없어 따분해졌다. 우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나는 한 번 더 목표도  없이 거리를 빙글 돌고, 그리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

파트의 방은 휑뎅그렁해 보였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침

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일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

했다. 상실감 하고 나는 입에 올려 말해 보았다. 별로 좋은 느낌을 주는 말은 아

니었다.

  좋아요 하고 메이가 말했다. 그 소리가  휑뎅그렁한 방안에 커다랗게 울려퍼졌

다.

    키키의 꿈

  나는 키키의 꿈을 꾸었다. 이는 아마 꿈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꿈과 유사한 행위다. '꿈과 유사한 행위' 란 대체 무었일까? 나도 알 수 없다. 하

지만 그러한 게 있다. 우리의 의식의 변경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여러 가지 일

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간단히 나는 그것을 꿈이라 부르기로 한다.  역시 그 표현이 가장 실체

에 가까우리라고 여겨지므로.

  나는 새벽녘에 키키의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도 시간은 새벽녘이었다. 나는 전화를  걸고 있었다. 국제 전화. 나는 

그 호놀룰루의 다운 타운에 있는 방의 창틀에,  키키 같아 보이는 여자가 남겨두

고 간 전화번호를 돌리고 있었다. 드륵드륵 하고  회선이 이어져 가는 소리가 들

렸다.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하나의 번화가 차례로 이어져 가는 것

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수화기를 단단히 귀에 

대고, 그 흐린 소리를 세어 보고 있었다.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하

고 나는 세고 있었다. 열두번째에  누가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그 방

에 있었다.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의 휑뎅그렁한 그 '죽음의  방' 에. 시각은 점심 

때인 빛은 몇 개의  굵은 기둥이 되어 바닥으로부터 직립하고, 그  속에 작은 티

끌이 떠돌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빛의  기둥은 칼로 잘라내어진 것처럼 선명하면

서도 예각적으로,  남국의 태양의 격렬함을 방안에  전달하고 있었다. 빛이 없는 

부분은 어둡고 차가웠다. 그 차이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마치 해저에 있는 것 같

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방의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전화 코드가 길게 바

닥을 가로질러 뻗어가고 있었다.  코드는 어두운 부분을 가로질러, 빛 속을 빠져

나가고, 그리고 멍하고 희미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굉장히 긴 코드다. 

이렇게 긴 코드는 본  적이 없다. 나는 전화기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방안을 둘

러보았다.

  방안의 가구 배치는  이전에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침대,  테이블, 소파, 의자, 

텔레비전, 플로어 스탠드, 그러한 것들이 부자연스러우리만큼 제멋대로 배치되어 

있다. 방의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밀폐된  채로 있던 방의 냄새다. 공기

가 탁하고 곰팡이 냄새가  난다. 하지만 6개의 백골은 없어져 버렸다. 침대 위나 

소파, 텔레비젼 앞의 의자, 식탁 위에 있던 먹고 있는 중이던- 식기도 사라져 버

렸다. 나는  전화를 소파 위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하지만 머리가  약간 아팠다. 

굉장히 높은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얼얼한   느낌의 아픔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거기에 주저앉았다.

  제일 먼 곳의 희미한 어둠 속에 있는 의자 위에서 무엇이 움직인 것처럼 보였

다. 나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쑥 일어나 구두 소리를 내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키키였다. 그녀는 천천히  어둠 속에서 나타나서 빛 속을 가로질러 식

탁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청색의 원피스

에 하얀 숄더 백.

  키키는 거기에 앉아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부드

러웠다. 그녀는 빛의 영역이나 그림자의 영역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지점에 위

치하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거기까지 가보려다가  어쩐지 기가 죽어 그만두었

다. 게다가 관자놀이에는 아직 희미한 아픔이 남아 있었다.

  "백골은 어디로 갔나?" 하고 나는 물었다.

  "글쎄요" 하고 키키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없어졌겠죠."

  "네가 없앴어?"

  "아뇨, 그냥 없어졌어요. 당신이 없애지 않았나요?"

  나는 옆에  놓아둔 전화기를 문득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가벼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건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을까? 여섯 구의 백골."

  "당신 자신이에요." 하고 키키는  말했다. "여기는 당신의 방인걸요. 여기에 있

는 건 모두 당신 자신이에요."

  "내 방"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돌핀 호텔은" 거기는 뭔가?"

  "거기도 당신의 방이에요. 물론. 거기에는 양사나이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있고."

  빛의 기둥은 흔들리지 않는다. 딱딱하고, 질이  고르다. 그 속의 공기가 희미하

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흔들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곳에 내 방이  있군" 하고 나는 말했다. "이봐, 나는 죽 꿈을  꾸고 있었

다구. 돌핀 호텔의 꿈이야. 거기서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있었어. 매일처럼 

그와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어. 돌핀 호텔이  굉장히 기다란 모양을 하고 있고, 

거기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있었다구. 나는 그게 너인 줄 알고 있었어. 그

래서 아무래도 너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느낌이 들었어."

  "누구나 당신을 위해 울고  있어요" 하고 키키가 말했다. 아주 조용하고,  신경

을 위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당신을 위한 장소인 걸요. 거기서는 

누구나 당신을 위해 울어요."

  "하지만 너는 나를 부르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돌핀 

호텔까지 갔어. 그리고 거기서... 여러  가지 일이 시작되었어. 이전과 마찬가지로 

말야. 여러 사람을 만났어. 여러 사람이 죽었어. 이봐, 네가 나를 부르고 있었지? 

그리고 네가 나를 이끌었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을 부르고 있던 것은 당신 자신이에요. 나는 당신 자신의 

투영에 지나지 않아요. 나를 통해 당신 자신이 당신을 부르며, 당신을 이끌고 있

었던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그림자를 파트너 삼아 춤을 추고 있었던 거예요. 나

는 당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이것은 자신의 그림자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고 고혼다는 말했다. 이 그림자를 죽이면 잘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모두들 나를 위해 울까?"

  그녀는 이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며시  일어서서 구두 소리를 내면서 

다가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뻗쳐, 손가락 끝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매끄럽고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이어 내 관자

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당신이 울 수 없는 것을 위해 우리가 우는 거예요." 하고 키키는 조용히 말했

다. 마치 타이르듯이 천천히. "당신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을 위해 우리가 눈

물을 흘리고, 당신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을  위해 우리가 소리 내어 우는 거예

요."

  "네 귀는 아직 그대로인가?" 하고 나는 물었다.

  "내 귀는-" 하고 말하고  그녀는 빙긋 웃었다. "아직 그대로예요. 이전과  똑같

아요."

  "한 번 더 내게  귀를 보여 주지 않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한 번 더 

그 기분을 음미하고  싶어. 네가 언젠가 레스토랑에서 내게 귀를  보여주었을 때

의, 세계가 다시 태어나는 듯한 그 기분을, 나는 죽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그건 언제나  볼 수 있는 게  아녜요. 그건 정말로, 보기에  적합한 때에만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때는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언제든 또 

보여 드리죠. 당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에."

  그녀는 다시  일어나, 천창으로 곧바로 비쳐드는  빛의 기둥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강한 빛의  티끌 속에서 그녀의 몸은 당장이라

도 분해되어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이봐, 키키, 넌 죽었니?" 하고 나는 물었다.

  빛 속에서 그녀는 빙글 몸을 회전시켜 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고혼다 말예요?"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고혼다는 자신이 나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고 키키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는 나를 죽였을지도 몰라요. 그에게  있어서는 그래요. 그에게 있어서는, 그

가 나를 죽였어요. 그건  필요한 일이었어요. 그는 나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일을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나를 죽일 필요가 있었어요. 그 사람은 그러지 않고는 어

디에도 갈 수 없었어요.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하고 키키는 말했다. "하지만 나

는 죽지 않았어요.  그저 사라졌을 뿐. 사라지는 거예요. 옆에  나란히 달리고 있

는 전철에 옮아 타는 것처럼. 그게 사라진다는 것이에요. 알겠어요?"

  알 수 없다고 나는 말했다.

  "간단해요. 보고 있어요."

  키키는 이렇게 말하고,  바닥 위를 가로질러, 벽을 향해 자꾸  걸어갔다. 벽 앞

에 이르러서도 보조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벽 속에  흡수되어 사라졌

다. 구두 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죽 그녀가  흡수된 벽의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벽이었

다. 방 안은  조용했다. 빗 속의 티끌만이 여전히 천천히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또 약간 아팠다. 나는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가만히 그 벽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때도,  호놀룰루에서 내가 이끌려 갔던  그때도, 그녀는 마찬가

지로 벽에 흡수되어 갔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요? 간단하죠?" 하고 말하는 키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해 봐요."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간단하다고 했잖아요? 해 보세요. 곧바로 그대로 걸어가면 돼요.  그

러면 이쪽으로 올 수 있어요. 무서워하면 안 돼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나는 수화기를 손에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 코드를 질질 끌면서  그녀가 흡수

된 부근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벽이 가까워지자 나는 약간 기가 죽었지만, 그래

도 보조는  늦추지 않고 그대로 벽에  부딪쳐 갔다. 하지만 몸이  벽에 부딪쳐도 

아무런 충격이 없었다. 내 몸은 불투명한 공기의 층을 빠져 나갔을 뿐이었다. 공

기의 질이  약간 변화한 듯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그 층을  빠져나오고, 그리고 내 방의  침대로 돌아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

아, 전화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간단해"  하고 나는 말했다. "굉장히 

간단해."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대어 보았지만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이는 꿈일까? 아마 꿈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러한 걸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돌핀 호텔에 도착했을 때, 프런트의 카운터에는  세 명의 아가씨가 서 있

었다. 그녀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블레이저  코트에 새하얀 블라우스 차

림으로 나를 상냥하게 맞아  주었는데, 그 속에 유미요시의 모습은 없었다. 그래

서 나는 몹시  실망했다. 아니, 절망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나는 여기에 오

면 당연히 유미요시와 곧 재회할 수 있으리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래서 나는 말을 잘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자신의 이름조차 잘 발음

할 수 없었고, 그 결과로 나를 상대해준  아가씨의 미소는 활력소가 떨어진 것처

럼 약간 굳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내 크레디트 카드를 의심스러운  듯이 바라보

고는 컴퓨터에 집어넣어, 그것이 도난품이 아님을 확인했다.

  나는 17층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세면장에서 세면을 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푹신푹신한 고급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는 체하면서 프런트를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유미요시는  어쩌면 잠시 쉬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

지만 40분이 지나도 유미요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여 분

간하기 어려운 세 아가씨가 언제까지나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 꼭 한 시간을 기

다린 다음에 나는 체념했다. 유미요시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거리고 나가  석간 신문을 샀다. 그리고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혹시 내게 흥미있는 기사가 나와  있지 않을까 싶어 구석구석을 샅샅이 읽어 보

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고혼다에 관한 일이나 메이에 관한 일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다른 살인이나 다른 자살 따위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신문을 읽으면서, 호텔에  돌아가면아마 유미요시가 프런트에 서  있으리라고 생

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간 후에도 여전히 유미요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어떤 이유로 세계로부터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문득 들었다. 이를테면 벽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자, 나

는 몹시 불안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어 보았

다. 전화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유미요시가 있

는가고 물어보았다. "유미요시 어제부터 휴가 중이에요." 하고  다른 아가씨가 가

르쳐 주었다.  모레부터 출근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

다. 왜 미리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두지 않았을까? 왜 전화를  거는 일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하지만 나는 어쨌든 비행기를  타고 즉시 삿포로로 날아오는 일밖에는 염두를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삿포로에 오면  이내 유미요시를 만날 수 있다

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없는 얘기다. 도대체 나는 지금까지 언제 그

녀에게 전화를 걸었나? 고혼다가 죽은 후로 한 번도 걸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도 걸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유키가 해안에서 토하고 나서, 내게 고혼다가 

키키를 죽였다고 말한 때부터 죽  걸지 않았다. 꽤 오랜 기간이다. 나는 죽 유미

요시를 방치해둔 것이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간단히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혼다가 키키를 죽였다고 키키가 말했다. 그리고 고혼다는 

마세라티를 몰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는 유키에게 "괜찮아, 네 탓이 아냐"  하

고 말했다. 키키가 내게 당신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대체 무

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우선 유미요시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전화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

안했다. 유미요시가 이미 벽에 흡수되어 버려, 나는 이제 영원히 그녀를 만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래, 그 백골은 모두  여섯이었다. 다섯까지는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만은 남아 있다. 이는  누구의 것일까? 이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기분이 되었다. 답답하리만큼 가슴이 두근거렸

다. 심장이 자꾸만  부풀어 올라 늑골을 뚫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 난생 처음으로 그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나는 유미요시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다. 만나  얼굴을 보기 전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

이다. 나는 손가락이  아파질 만큼 몇 번이나 유미요시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격렬한 불안감이 내 잠을  몇 번이고 중단시켰

다. 나는 땀을  흘리며 깨어나, 불을 켜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두 시이

고, 다음에는 세 시  십오 분이고, 그 다음에는 네 시 이십  분이었다. 그리고 네 

시 이십 분 이후에는 끝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심장소리

를 들으면서 거리가 밝아져 가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유미요시, 나를  더 이상 외돌토리로 만들지 말아 다오,  하고 나는 생각

했다. 내게는 네가  필요해. 나는 외돌토리가 되고 싶지 않다구.  네가 없으면 나

는 원심력에  의해 우주 가장자리로 날려가  버릴 듯한 느끼밍 들어.  제발 내게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나를 어딘가에 연결시켜 다오.  현실의 세계에 연결시켜 주

기 바란다. 나는 요괴에 흘리고  싶지 않아. 나는 보통의 서른네 살이 된 사나이

야. 내게는 네가 필요하단 말야.

  나는 아침 여섯시 반부터 죽 그녀의 방에  전화 번호를 계속 돌렸다. 30분마다 

나는 전화 앞에 앉아  다이얼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삿포로의 

6월은 멋진 계절이었다. 오래 전에 눈이 녹아, 불과 몇 개월 전에는 딱딱하게 얼

어붙어 있던 대지가 지금은 새까만 모습으로 부드러운 생명의 숨결을 띠고 있었

다. 나무들마다엔 푸른 잎이  무성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그 잎들을 흔

들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투명하며, 구름은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러한 풍경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죽 호텔의 방에 머물며 그녀집의 

전화번호를 계속 돌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녀가 돌아온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는가, 하고 나는  10분마다 자신에게 타이렀다. 하지만 나는 내일이 오는 

걸 기다릴 수 없었다.  내일이 오는 걸 누가 보증할 수 있는가?  나는 전화기 옆

에 앉아 다이얼을 계속  돌렸다. 그리고 전화를 걸고 있지 않을  때는 침대에 누

워 꾸벅꾸벅 졸며 의미도 없이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여기에 돌핀 호텔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한 호텔이었다. 하지

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이나 시간의 찌꺼기가, 그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들에, 벽의 얼룩들에 남아  있었다. 나는 의자에 깊숙히 

앉아 발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눈을 감고 돌핀 호텔의 광경을 회상해 보았다. 

그 입구 문의  형태로부터 닳아 떨어진 카펫,  색이 바랜 놋쇠로 만들어진 열쇠, 

구석에 먼지가 쌓여 있는 창틀 따위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복도를 걸어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갈 수 있다.

  돌핀 호텔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그림자와 낌새는 아직 여기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돌핀  호텔은 새롭고 거대한 '돌핀  호텔' 속에 

잠겨져 있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나는 그  속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늙은 개가 

기침을 하는 것처럼 킁킁거리며  엘리베이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

다. 그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에 있다. 이 장

소가 내  이음매이다. 괜찮아,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이다, 하고  나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녀는 반드시 되돌아온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 하고.

  나는 룸 서비스로  나오는 저녁 식사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어 마셨

다. 그리고 여덟 시 반에 한 번 더 유미요시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무도 나

오지 않았다.

  나는 TV를  켜고, 아홉 시까지 야구  중계를 보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하고, 

화면만을 보고 있었다. 시시한  시합이었고, 특별히 야구 시합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어쨌든 살아 있는 인간이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고 싶었

다. 배드민턴 시합이든 수구  시합이든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나는 시합의 흐름

을 좇아가지 않고,  그저 사람이 볼을 던지거나, 치거나, 달려가곤  하는 것을 보

고 있었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자신과는 관계없는 누군가의  삶의 단편으로서. 

마치 멀리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홉 시가 되어 나는 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번에는 벨이 단 한 번 울리자 

그녀가 나왔다. 나는 잠시 동안 그녀가 전화를 받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갑

자기 거대한 일격을 받아, 나를 세계에 연결하고  있던 밧줄이 끊어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의 힘이 빠지면서 단단한 공기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유미요시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이다.

  "여행을 하고 방금 돌아온 참이에요."  하고 유미요시는 아주 시원스런 목소리

로 말했다. "휴가 중에 도쿄에 가 있었어요. 친척집에. 당신의 집에 전화를 두 번 

걸었어요. 아무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삿포로로 와서, 네게 죽 전화를 걸고 있었어."

  "엇갈렸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엇갈렸어" 나는  이렇게 말하며 수화기를 꼭  잡고는 TV의 소리없는 화면을 

잠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에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봐요. 왜 그래요. 여보세요" 하고 유미요시가 말했다.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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