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 그럼 죽이든가
난 가만히 서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헨지를 응시했다.
내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그때.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질문에 대해 궁리할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 눈앞의 보상을 보고 섣불리 답하지 마시길.”
헨지가 내 대답을 막았다.
하나, 난 고개를 저었다.
“당장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해 보시죠.”
“싫습니다.”
헨지가 멍한 눈동자로 나를 담았다.
난 담담히 그 눈빛을 마주했는데, 헨지의 눈빛은 꼭 내게 제정신이냐 묻는 듯했다.
당연히 제정신이었으니, 내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뭐,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얘기나 들어 봅시다. 할 만하다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하면 되는 거니까.”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한데, 그거나 한번 들어 보자는 심정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도? 만약 듣고도 거절한다면 제가 아스터 군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헨지의 눈동자에 언뜻 스산한 빛이 스쳤다.
그것은 명백한 살기.
그러니까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은 진심인 것이다.
내 말투가 삐딱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 그럼 죽이든가.”
“…….”
잠깐의 침묵.
스스스―
부관주실로 끈적한 살기가 들어차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파라락, 파락.
수백 장의 서류들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가운데, 티 없이 선하던 헨지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눈빛도 좀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가면을 완전히 집어 던져 버린 본모습이랄까.
“하하, 재미있군요. 아스터 군은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소가주의 위세를 믿고 그러는 거라면 크게 후회할 텐데…….”
그 눈동자가 내 몸을 훑었다.
냉혈 동물의 그것과 같은 기질.
하나, 나도 지지 않았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죽음이 다라고 생각하면 섭섭합니다, 아스터 군. 제 개인 공간에 가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여 줄 수 있거든요.”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광기(狂氣)는 유전인가.’
헨지의 눈빛은 보통 미쳐서는 나올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블란도의 가주, 데미안의 아버지 역시 한번 관찰해 보고 싶었으나……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거기까지 말하고는 ‘아차’ 싶었다.
‘아, 난 두 번 뒈지는 거구나.’
하지만 괜찮다.
솔직히 예상은 했다. 이런 성격이면 오래 살지는 못하겠구나.
전생에는 얕은 야산의 고블린처럼 가늘고 길게 연명하다가 끝내는 와이번도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지만…….
이번 생은 노는 물이 너무 커졌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내가 먼저 갈까?”
“정말 후회…….”
……라고 말하는 즉시, 무어라 입을 열려던 헨지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 거리라면, 마법이 아니라 주먹질이 최고였다. 그리고 내 주먹질은 평범하지 않았다. 전생의 동료들과 연구한 기술을 가미한 것이니까. 하지만…….
‘역장에 막히겠지.’
아마 그럴 거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견제 수. 전투의 흐름을 내게 가져오기 위한 자그마한 조약돌이랄까.
……라고 생각했는데.
뻐억.
“……?”
경쾌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우당탕!
허공에서 한 세 바퀴 휘돌고는 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지는 헨지.
그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몇 차례 팔다리를 떨어 댔는데, 딱 봐도 쇼크를 먹은 듯했다.
내가 때렸지만, 적잖이 황당했다.
‘왜…… 안 막지?’
헨지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쉬이 막을 수 있을 만한 타격이었다. 그래서 이 타, 삼 타를 연달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절호의 기회!
나는 재빨리 달려가 헨지를 즈려밟았다. 아니, 즈려밟으려 했다.
번쩍―
환하게 비추는 빛.
블란도가의 핵심 비전, 치유의 빛이 동반하는 현상이었다.
“후후. 아스터 군, 시험은 합격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군요. 그나저나 희한한 비전을 쓰는 것 같던데…….”
헨지는 좀 전처럼 선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는데, 그 모습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나, 그 팔다리가 몇 차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봤기 때문일까. 처음과 같은 귀족적이고 엘리트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그런 헨지를 보며 내가 물었다.
“한데 시험이라면……?”
보통이라면 믿지 않겠지만, 나는 믿었다.
왜냐하면 헨지 정도 되는 마법사가 공격을 못 막을 리 없거든.
다만 예상하지 못한 거다. 마법을 발현한 것도 아니고, 마법사의 주먹질이 이처럼 빠르고 위력적인 경우는 없었으니까.
그런 사소한 실수는 뒤로하고.
헨지가 답했다.
“흠, 흠흠.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사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근데 또 블란도가 사람이면 안 되는지라…….”
다시 자리로 돌아온 헨지.
하나, 기분 탓일까.
파르르.
그 손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하나 내 기분 탓이 아니었는지 은은하게 흐르는 빛무리. 헨지가 치유의 빛을 다시 시전한 것인데, 그 뒤로 떨림이 완전히 멎었다.
잠시 후, 헨지가 말을 이었다.
* * *
헨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는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다행히 잠깐의 소란에도 찻물은 쏟아지지 않았는데, 아스터 역시 따라서 찻물을 머금으려다 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
먼지가 너무 많았다.
어쨌든 헨지의 말은 이거였다.
“솔직히 별 기대는 없었습니다. 뭐, 흑백 지대 부랑아야 다 거기서 거기고. 소가주야 워낙 어리니 사람 보는 눈이 없을 수도 있죠.”
그래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는데, 마침 소문이 돌더라.
“가모께서 아카데미 입학을 권유했다라…… 그런데 아십니까? 이건 알프레도가 청한다고 한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소가주의 옆에 둬도 괜찮을 만한 인물이다.
그런 판단이 선 거라고.
헨지는 계속해서 제 생각을 털어놓았다.
“가모의 눈은 정확합니다. 또한 소가주에 대한 사랑 역시 유별나죠. 웬만한 기준에서는 그 눈에 찰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흑백 지대 부랑아를 곁에 둔다?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데 마침…….”
“못난 동생이 나한테 처맞고 왔다…… 입니까?”
“……반말을 하든 존대를 하든 둘 중 하나만 하죠, 아스터 군.”
“그럽시다.”
아스터는 말을 편하게 했다.
헨지 쪽에서 편하게 하라 했으니, 더 편한 쪽을 택했다. 물론, 편하게 하라 한 적은 없었지만 고르라 했으니 편한 쪽을 고르는 게 인지상정.
“큼, 흠. 어쨌든, 마침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긴 겁니다. 동생이 처맞았으니, 형이 불러서 당사자와 면담을 한다. 개연성이 있죠.”
“개연성이 있다라…….”
아스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학관의 부관주쯤 되면, 제아무리 소가주의 손님이라 해도 얼굴 정도는 비출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손님의 신분이 어떠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직접 보고 싶거나, 부르고 싶으면 명분 따위야 얼마든 만들 수 있었다.
‘한데…….’
굳이 머저리 동생을 빌미로 삼았다?
‘마침이라 한 걸 보면, 그저 때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뉘앙스가 어째…….’
본인이 먼저 나서기 꺼려지는 상황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헨지는 빙긋 웃는 얼굴로 아스터를 눈에 담았다.
“아스터 군의 생각이 맞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
헨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모르게 그 이마에 힘줄이 불룩 솟았지만,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라.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먼저 나서기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아, 가문 내의 알력 다툼은 아닙니다. 블란도가는 끈끈해요.”
아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집단인지라 어느 정도의 알력 다툼은 있었지만, 블란도가의 결속은 그 어느 명가보다도 위에 있었다.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한 다툼이 아니라, 가문을 위하는 방법이나 그 태도가 달라서 생기는 마찰이랄까.
“사실 저는 지금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감시라면…….”
“혹시 데큘란가를 아시는지요?”
헨지는 그렇게 묻고는 아스터를 살폈다.
‘모르진 않겠지만…….’
또 모를 일이다.
아스터가 비록 상식이나 교양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흑백 지대 부랑아.
먹고 살기 급급한 그곳에서 대륙의 정세까지 어찌 신경 쓸까. 저 멀리 있는 명가보다는 골목에서 어깨에 힘 좀 주는 왈패 무리가 더 무서운 이들인데.
그런 생각으로 아스터를 바라봤는데.
“데큘란이라……. 모르진 않지.”
헨지가 기묘함을 느낀 건 그즈음이었다.
‘……?’
모르진 않다고 대수롭지 않게 답하면서도 그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는다.
딱히 특별한 기색은 없었다. 살기를 띤 것도 아니고, 그저 눈빛이 무미건조하게 바뀌었을 뿐. 하지만 그게 이상했다.
그저 듣기만 했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리 없다. 그렇다고 원한이나 악감정이 있다 하기에는 또 너무도 담담했고.
‘뭔지 모르겠군요.’
헨지는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다만 이건 확실했다.
그 눈빛의 의미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속에 내포된 감정은 굉장히 혼돈스러운 것.
진즉에 폭발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감정의 다발을 억누르고 옭아매, 끝내 본인조차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뒤튼 느낌이랄까.
마치…… 그래.
십수 년 전의 자신처럼 말이다.
“한데, 왜?”
헨지는 아스터의 목소리에 상념을 접었다.
그리고 전과 같은 그림처럼 선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데큘란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
“블란도가 어딘가에 세작을 심어 놓은 것 같은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먼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스터는 빤히 헨지를 바라봤다.
‘뭔…….’
미친놈이라 그런가.
남들이라면 웃으면서 하지 못할 얘기를 담담히 웃으면서 지껄인다. 그 꼴이 꼭 ‘아, 어제는 비가 내리더군요.’하는 느낌.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왜지?”
“아, 그 이유 말입니까?”
헨지는 빙긋 웃었다.
“뭐, 죽어도 상관없다 하셨으니 속 시원하게 털어놓겠습니다. 물론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전 아스터 군을 해칠 생각이 없어졌어요. 적어도, 저는 말이죠.”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죽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
하나 아스터의 눈동자는 심드렁했다.
헨지는 그 심드렁한 눈빛에 더 가뿐하게 말을 지껄일 수 있었다.
“사실은 제가…….”
“한 번에 말합시다, 좀.”
“아,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지금 데큘란가의 기본공이라는 천원공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한데 그게 그만 들킨 모양입니다. 아, 천원공은 아시죠? 데큘란가의 혈족들만 익힐 수 있는 비전인데, 우연한 경로로 입수할 수 있었죠. 그런데…….”
“잠깐.”
아스터가 헨지의 말을 끊었다.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뭘 연구했다고?”
“천원공이요.”
“……입수 경로가?”
“우연한 기회……라고밖에 설명을 못 드리겠군요. 뭐, 이보다 더 큰 비밀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아스터는 헨지를 빤히 바라봤다.
이런 생각이었다.
“왜 죽었어야 하는 놈이 살아 있지? 블란도가 입장에서 연구를 했다면, 당연히 그 파훼법을 연구했을 텐데…….”
“하하, 아시는군요? 데큘란가의 행사가 좀 뒤가 없죠. 파훼법만 연구했다면, 제가 블란도가 부관주라 해도 당연히 절 죽이려 했을 겁니다.”
“그런데?”
빙글빙글 웃는 헨지.
그는 빤한 눈으로 아스터를 바라봤는데, 그 투가 꼭 맞춰 보라는 듯했다.
아스터는 그 눈빛을 가만히 받아 냈다. 그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갔는데, 문득 뇌리로 ‘혹시’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파훼법‘만’ 연구한 게 아니다?”
“네, 맞습니다. 처음에는 파훼법만 연구하려 했는데, 이거 참. 보이지 뭡니까?”
헨지가 초점이 반쯤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옛일을 회상하는 듯했는데, 그 입에서는 홀린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데큘란가 모든 비전의 뿌리라는 천원공. 그 오랜 역사 속에서도 개량되지 못한 그 자체로 완벽한 비전이죠. 그런데 보였습니다.”
헨지의 초점이 휙 하고 돌아왔다.
“그 보완법이.”
“…….”
“멈춰야 된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더군요.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길이 있는데, 어찌 그 길을 안 갈 수가 있을까요”
그는 아스터를 바라봤다.
“그래서 걸었습니다. 아스터 군이라면…… 제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죠?”
“…….”
아스터는 퀭한 눈동자로 헨지를 바라봤다.
어찌 자신이 광인의 마음을 이해할까. 그 마음은 같은 광인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나 헨지는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그를 이해하려면 그 정도 수준은 미쳐야 하는데, 과연 대륙에 그런 자가 몇이나 있을까.
‘이해하지 말자.’
왠지 모르게 이해되려 하는 것 같아서, 애써 생각을 지웠다.
다만―
‘옘병…….’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데큘란가가 블란도를 멸망시켰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갔어. 치유의 빛? 치유 비전? 그걸 바랐으면 진즉 붙었지.’
블란도가 차지하고 있는 막대한 영토를 바랐다 해도, 말이 안 됐다.
비록 데큘란이 승리한 전쟁이라지만 그들도 많은 걸 잃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을 제외하고는 전쟁을 할 이유가 없었던 터라…….
‘적당히 그렇게 이해했는데.’
이거면 이해할 수 있었다.
천원공의 보완법
그것이 블란도가에 있었다 하면…… 데큘란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일이 더 이상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