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뒷골목 마법사의 회귀생활-28화 (28/559)

28화. 충견이었구나

칼라헨의 아공간 주머니. 그 잠금을 해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용자가 입력한 마력 패턴을 찾아내는 건 일견 상당히 어려워 보이는 과정이지만, 보안 마법의 원리와 마력적 센스만 있으면 꽤나 쉬운 일에 속한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벌써 한 달인가.’

평방 9㎡ 남짓한 석실.

이곳은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수련실로, 주로 호흡법을 운용하거나 개인적인 수련을 할 때 사용하는 공간이다.

요 근래 난 아침저녁으로 수련실을 찾고 있었는데, 이는 칼라헨의 아공간의 잠금을 풀기 위함이었다.

증표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아공간이었지만, 남들이 보는 앞에서 해제를 시도하기엔 아무래도 껄끄러웠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무려 한 달.

파지직, 파직.

거무튀튀한 아공간 주머니 위로 짙푸른 스파크가 튀어 오르다 사라졌다.

드디어 해제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장비만 있었으면 더 쉬웠을 텐데.’

마도 공학자들이 사용하는 장비 몇 개면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을 일이다.

한데, 무려 한 달이라니.

‘뭐…… 이것만 하고 지내지는 않았으니까.’

상품 영약의 약성 전부를 마력으로 녹여 냈다. 더불어 마력량을 늘리기까지.

또한 아카데미의 수업은 제법 유익한 면이 있었는데 덕분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제법 흡수하기까지.

확실히 가르침을 받는 건 달라도 뭐가 다르다.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달까.

사실, 난 관점이랄 게 없었다.

전생에는 그때그때 필요하다 싶은 비전들을 가져다가 동료들과 고심해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원리들만 부분적으로 발췌해 사용했고.

현생에는 배움이라 해 봐야 헨지의 마학서뿐인데, 이것도 독학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내게 아카데미 교수들의 수업은 내 지식들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쨌든.

“……보자.”

난 칼라헨의 아공간을 조심스럽게 열어 봤다.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다른 아공간과 달리 소량의 마력을 주입해야 했는데, 곧 그 속이 눈앞에 훤히 비춰 보였다.

그 내용물은 이러했다.

‘이건…… 포션이고.’

파룬 교수의 저택에서, 역류가 발생했을 때 칼라헨이 들이켰던 약물이다.

그래도 확실히 확인하는 게 좋으니 그 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퐁.

청량한 소리와 함께 석실 안으로 퍼지는 향기.

‘확실하군.’

마력 역류가 발생했을 때 억제를 도와주는 포션이었다.

그런 동종의 포션이 5개.

데큘란 마법사단의 부단주쯤 되면 봉급이 다른 걸까. 아니면, 그만큼 지원을 받는 걸까. 이게 이렇게 여러 개 들고 다닐 만한 물건이 아닌데.

‘하긴, 데큘란이니까.’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아공간에는 칼라헨의 이름이 우스울 정도로 쓸 만한 물건이 없었다.

대부분이 내가 쓰기 뭐한 잡동사니의 일종이거나, 혹은 데큘란의 문양이 너무 선명하게 박혀 있어서 쓸모가 있어도 쓰지 못하는 물건들뿐.

‘빌어먹을 놈들, 더럽게 꼼꼼해서는.’

난 데큘란의 문양과 마법사단 홍옥(紅玉)의 인장이 선명히 박힌 로브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아공간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았다.

‘이건…… 못 쓰지.’

데큘란의 문양이 이렇게 선명히 박혀 있어서야.

어떻게 된 게, 아공간의 잠금을 푸는 것보다 문양을 지우는 작업이 더 어렵다.

문양 하나도 옛 마법이 담긴 아티팩트를 써서 새기니, 들어가는 시간 대비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달까.

그나마 건진 것 중 가장 쓸 만한 건 팔찌 형태를 띤 방호 아티팩트 한 쌍이었다.

‘방호력은…….’

난 충돌식을 일으켜 아티팩트에 부하를 가했다.

곧 손아귀에 느껴지는 반발력.

지잉―

조금씩 충돌식의 위력을 증가시키자 아티팩트에서 가해지는 반동 또한 점점 거세졌다.

그러기를 잠시.

찌이잉―!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팔찌 아티팩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가 충돌식을 거둬들인 것도 그 직후였다.

‘이 정도면, 나쁘진 않네.’

내가 전력으로 전개한 역장에 비하자면 모자라겠지만, 그 어떤 마법사도 방호 아티팩트에 그만한 방호력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위급 상황에서 마법 한두 방, 혹은 조금이라도 대미지를 상쇄시켜 줄 수 있으면 족할 뿐.

난 아티팩트를 헨지의 아공간에 따로 챙겨 넣은 후, 계속해서 아공간을 뒤졌다.

그렇게 얼마나 뒤졌을까.

수련실이 칼라헨의 아공간에서 나온 물건으로 가득 찰 무렵, 난 몇 개의 아티팩트를 추가적으로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비전서.

쯧.

“설마, 따로 빼 둔 건가.”

이제 나오는 거라고는 대부분이 전리품으로 추정되는 것들뿐이었다.

피 묻은 검이나 쓰지도 못할 정도로 우그러진 방패나 갑옷. 혹은 오브가 깨진 마법사의 지팡이나 다 찢어져 걸레짝이 된 로브쯤.

사람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로브까지.

그렇게 반쯤 포기했을 무렵.

“……!”

발견했다.

잡동사니 틈에 끼어 있는 책 한 권.

‘그럼, 그렇지…….’

칼라헨이 누군가를 믿는 성격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으레 그런 놈들은 가장 중요한 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법이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책을 꺼내자 그 표면에는…….

<적화(赤火)>

아로새겨진 글자.

그 글자를 확인했을 때, 입가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데큘란이 자랑하는 청화(靑火),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적화는 그 하위 개념에 속하는 비전으로 역장조차 불태우는 빌어먹을 마법이다.

‘칼라헨, 네가 충견이긴 충견이었나 보다.’

데큘란이 무려 적화를 하사해 줬을 줄이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쾅쾅쾅!

누군가 수련실을 두드렸다.

이어서 들리는 목소리.

“친구! 수업 가자!”

데미안이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난 수련실을 가득 채운 잡동사니들을 칼라헨의 아공간에 적당히 쓸어 담고는, 흐트러진 아카데미 교복을 말끔하게 정돈한 후 수련실을 나섰다.

* * *

마음 같아서는 앉은 자리에서 적화 비전서를 독파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적화는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비전이 아닐 터였다.

‘역장을 태우는 불길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완숙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이야기지.’

만약 칼라헨이 적화의 진정한 위력을 끌어 올렸다면, 나나 파룬 교수는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

어쨌든.

나와 데미안이 걸음을 옮긴 곳은 언제나 모이던 M3반 교실이 아니었다. 위치는 기본반 1, 2, 3학년 공용 부지.

정확히 세 부지 중앙에 위치한 영역으로, 특별한 일정이 있을 때나 이용하는 곳이다.

그리고 나와 데미안을 이곳으로 이끈 특별한 일정은 바로 중간 전 수행 평가.

오늘은 이례적으로 마법계 M1반부터 M3반까지, 세 반의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는데, 인파 속의 첸비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스터, 데미안! 이쪽!”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첸비는 오늘도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배어 있었는데, 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매진한 결과였다.

넓은 세상을 맞닥뜨린 충격에 주저앉지 않고 새롭게 한 발 내디딘 것이다.

물론, 넓은 세상에 대한 충격을 완전히 떨쳐 버린 건 아니었다.

“어떻게, 잠은 잘 잤어?”

“잘 잤어!”

“그래…… 그렇구나.”

데미안과 얘기할 때면 어딘지 그 목소리에 맥아리가 빠진달까.

나름대로 하루하루 제 자신과의 싸움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참, 그 소식은 들었어?”

“무슨 소식?”

“이번 수행 평가, 나도 M1반 애들이 얘기하는 거 들은 건데 종목이 정해졌대.”

“종목?”

“응, 원래는 시련의 관을 통과할지, 협곡 돌파를 진행할지, 시뮬레이터를 돌릴지, 안 정해졌다 그랬잖아.”

“그렇지.”

중간 전 수행 평가는 필기가 아닌 실기로 치러진다.

M1반부터 M3반까지 모든 마법계 학생들이 굳이 이곳에 모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첸비가 말한 시련의 관이니, 협곡 돌파니, 시뮬레이터니 하는 시험들을 치를 수 있는 설비가 모두 공용 부지에 몰려 있기 때문.

하지만, 그 종목은 아직 발표가 되지 않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M1반 애들 몇 명이 우연히 행정실 직원들 하는 말을 들었는데, 글쎄 한창 바쁠 시기에 협곡을 정비해야 한다고 앓는 소리를 하더래. 그러면, 뭐겠어?”

“협곡 돌파다?”

“그렇지!”

난 그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사실, 수행 평가 종목이 뭐로 정해지든 나로서는 그리 흥미로운 화젯거리는 아니었다. 이는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

하나, 아카데미의 성적이 절실한 첸비로서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정보인 듯했다.

“그러면 봐 봐. 협곡 돌파면 여기 있는 애들이 한꺼번에 싹 몰려갈 텐데…….”

이제는 아예 전략까지 짜는 녀석.

오직 데미안만이 그 말에 대꾸를 해 주는 가운데, 난 그런 둘을 뒤로하고 기감을 넓게 확장시켰다.

‘…….’

이는 칼라헨과의 접전 이후, 되살아난 전생의 습관이다.

시시때때로 기감을 확장시켜 주변을 살펴보는 것인데, 혹시나 놓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역시 걸리는 건 없었다.

‘당연하긴 한데…….’

파룬 교수의 습격 사건은 결국 칼라헨의 단독 행동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제국과 데큘란 사이에 어떤 협약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데큘란 측에서는 적지 않은 출혈을 감수해야 했을 터.

그와는 별개로 아카데미의 자체적인 방비와 도시 하젠의 경비가 한층 강화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뭐라 해야 할까.

‘그놈들이 이렇게 쉽게 넘어간다고?’

물론 그럴 리 없을 것이다.

파룬 교수가 헨지의 조력자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당장 칼라헨의 아공간과 함께 적화의 비전서가 탈취당했는데.

‘생존한 트러블슈터들이 분명 내 존재를 알렸을 테고, 그러면 당연히 아공간의 행방을 찾으려 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아마 내 꼬리는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파고, 파고, 파다가 도저히 팔 게 없어지면 데큘란이 팔 건 아카데미밖에 없었다.

‘봉신가를 이용할 속셈인가?’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기본반 1학년생 중에 데큘란의 봉신가는 없었다.

하지만 2학년 혹은 그 위 학년으로 올라가면 또 모르는 일이니.

참고로 말하자면 데큘란의 직계 혈족은 제니온 아카데미에 진학하지 않는다.

제 놈들 스스로 켕기는 게 많아서 혈족을 함부로 빼돌리지 않는 것인데, 따로 혈족들을 위한 아카데미를 하나 설립할 정도.

봉신가 후계자들은 데큘란의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정석이지만, 간혹 차남이나 그 방계는 제니온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도 하니.

‘수를 쓰면 그쪽이 될 수도 있겠어.’

대강 생각을 정리했다.

학생들 사이의 소요가 멎은 것도 그쯤이었다.

“모두 정숙.”

어느새 나타난 조교수가 학생들을 주목시켰다.

학생들은 그간 해 온 것처럼 오와 열을 맞춰 도열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끔한 아카데미의 정복을 차려입은 교수가 앞으로 나섰다.

“반갑다. 마법계 M1반 담당 교수 파룬이다. 이번 수행 평가의 책임 교수를 맡게 됐다.”

파룬 교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무적인 말을 지껄였다.

그러니까 반갑지도 않고 어차피 너희는 내가 누군지 다 알고 있겠지만, 형식상 인사를 해야 하니까 건넨다는 투.

하지만, 그럼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파룬 교수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후했다.

왜 안 그럴까.

이미 데큘란의 칼라헨이 파룬 교수에게 죽었다는 소문은 퍼질 대로 퍼진 상태.

데큘란이 칼라헨의 단독 범행이라 선언한 후, 아예 공표를 해 버렸는데, 그 탓에 아카데미 학생들 역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면인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카데미로 복귀한 폴라 역시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어쨌든, 그 덕에 파룬 교수를 향한 학생들의 눈빛은 그야말로 선망 그 자체.

그런 와중에 파룬 교수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행 평가 종목은 시련의 관이다.”

그리고 그 말이 번졌을 때.

M1반을 중심으로 몇몇 학생들이 당혹스러운 탄성을 토해 냈다.

그리고 그건 첸비 역시 마찬가지.

“어어, 어…….”

첸비는 부족을 잃은 고블린처럼 망연한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때 데미안이 쐐기를 박았다.

“거짓말쟁이.”

“…….”

데미안이 첸비의 말을 믿고 있다가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사실 데미안은 시험 종목이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으니.

그냥 첸비의 반응이 재밌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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