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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마법사의 회귀생활-95화 (95/559)

95화. 보고 있나 와이번?

어느새 현현한 샤인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꼬나보고 있었다.

한데.

“……더 작아졌다?”

이제는 거의 내 허리춤에나 올 법한 크기다. 그러니까, 미니어처 기사 같달까.

[샌님의 마력 통이 워낙 작아서 어쩔 수 없다. 됐고, 무슨 꿍꿍이인지나 지껄여 봐라. 내게 이 샌님의 노비 노릇을 하라는 건 아닐 테고.]

자못 진지하게 지껄이는 놈.

한데.

‘이 새끼가…….’

여태까지 이처럼 편리하게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는 건가? 그런데도 안 하고 있던 거고?

순간 불끈 쥐어지는 주먹!

하지만, 분노는 잠시였다.

츠즈즈즈―

등 뒤로 느껴지는 사기(邪氣). 마치 뱀과 같다.

마치 의지를 가진 듯, 내 목덜미를 훑으며 전신으로 스멀거리는 기운.

그 섬뜩한 기운이 주는 불쾌감과 비교를 하자면…… 그래, 샤인 정도는 애교다.

하여튼.

“이제 일도 다 마무리되지 않았나? 네놈은 원수를 잡았고, 이제 남은 건 데스트로우의 봉인체를 깨는 것뿐이지.”

[뭐, 그건 그렇다만…….]

“그러니, 이제 갈 길 가자는 거지.”

[……허!]

내 대꾸에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샤인.

투구 안의 불길이 왠지 모르게 뜨겁게 일렁이는 가운데, 오베른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까지 함께 가시는 게…….”

“나 못 믿어?”

[믿을 놈을 믿지. 혹시 아느냐, 네놈이 데스트로우가 깰 때까지 기다…… 읍읍.]

이 새끼는 누구를 쓰레기로 아나.

하여튼, 샤인의 개소리는 벌써부터 명령권을 행사하는 오베른에게 막혔다.

“데스나이트 님, 죄송합니다. 진정하시면 풀어 드리겠습니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샤인.

오베른은 그런 샤인의 발언권을 풀어 주고는 우려 섞인 기색으로 날 바라봤다.

“선배, 아무리 그래도…….”

“너, 저 사기(邪氣) 버틸 수 있겠냐?”

“그런…….”

입을 꾹 다무는 오베른. 하긴, 그럴 것이다.

금마사 놈도 봐라. 비록 샤인한테 허무하게 뒈졌다지만, 원래 그렇게 허무한 놈은 아니었을 것이다.

함정이 속수무책으로 막힌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사기(邪氣) 때문이겠지.’

이지가 흐트러진 것이다.

금마사는 오베른보다 경지도 높고, 이런 종류의 기운에 익숙하다.

한데, 그런 놈도 이지가 흐트러질 지경인데 오베른이 견딜 수 있을까?

“그러면…….”

“대수림 바깥으로 나가 있어. 서둘러 나가면 레일리를 찾는 것도 어렵진 않을 거다.”

“……예?”

“뭐, 그러면 제4 베이스캠프로 가려 그랬냐? 이미 사방 천지 언데드로 덮여 있을 텐데? 괜히 가서 알짱대지 말고 얌전히 나가라.”

“……아.”

나직한 탄식을 내뱉는 오베른.

하나, 납득을 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인다.

난 그런 오베른에게 아공간에서 두툼하게 부푼 주머니 하나를 건네줬다.

“이건…….”

“영약이다. 아까 하도 처먹어서 뭐,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걸 왜…….”

“식충이 데리고 나가려면, 그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냐?”

“……아.”

그저, ‘……아’밖에 할 줄 모르는 오베른. 난 그의 손에 주머니를 쥐여 주고는 샤인을 바라봤다.

“새 주인 잘 모시고.”

[하! 이깟 애송이가 주인은 무슨. 정이 있으니까 동행은 한다만, 대수림을 나서기만 하면 계약은 해지할 거다.]

“그러든가.”

별 관심 없었다.

저렇게 말해도 보기보다 정이 많은 놈이라서, 그렇게 매몰차게 돌아서진 못할 테지.

그렇게 얼추 상황이 마무리됐을 때.

“안 가냐?”

“……선배, 다시 생각해 보심이…….”

“씁.”

“……알겠습니다.”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이는 오베른. 왠지 모르게 무거워 보이는 어깨로 걸음을 내딛는다.

샤인은 더 짜리몽땅해진 크기로 오베른의 걸음을 쫓다가, 뒤를 힐끗 돌아봤다.

[어디서 합류할 거냐.]

“가장 가까운 워프 게이트가 있는 도시에서.”

[흐음, 그렇단 말이지……. 뭐, 알겠다.]

샤인은 그 말을 끝으로 이내 걸음을 돌렸다.

저벅, 저벅.

멀어지는 발걸음. 난 한 사람과 한 마리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수정구를 들었다.

“멍청한 건지, 무식한 건지.”

통신용 수정구. 대수림이라서 안 터진 게 아니었다. 그냥, 오베른이 설정을 잘못 잡아 놔서 먹통이었던 것.

여하튼.

[어쩐…… 치직, 일이십니까?]

오베른이 통신할 때보다는 확연히 나은 음질.

“상황이 좀 괜찮다고?”

[치직…… 예. 지원…… 치직. 와서…….]

멍청한 것은 나였나. 도통 뭐라 말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러니까,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랄까.

난 통신용 수정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냥 전하고 싶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 줬다.

‘뭐, 알아듣겠지. 뭐.’

그렇게, 한 열댓 번 반복했을까?

[알……겠습…….]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플렌의 목소리.

“알아들은 거 맞아?”

잘 모르겠다.

‘뭐, 알아들으면 좋은 거고, 못 알아들었으면 그냥 내 신세려니 해야지.’

전전긍긍해 봐야 의미도 없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샤인과 오베른에게 제4 베이스캠프에 이야기를 좀 전달해 달라 할 걸 그랬나?

‘그랬으면, 퍽도 떠났겠네.’

아마, 오베른의 성격이었으면 떠나지 않았겠지.

뭐, 여하튼.

난 자리에 정좌를 하고 앉아 저 너머를 바라봤다.

끼기긱…… 끼긱―!

때로는 뱀처럼, 때로는 고장 난 관절 인형처럼 기괴하게 움직이는 사기(邪氣).

오베른과 샤인은 그저 사기의 크기만을 느끼는 듯했지만, 내 눈에는 다르다.

사기는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아니, 확실히 의지를 가지고 내 곁을 맴돈다.

그뿐이냐?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어느새, 심장이 시큰거릴 정도로 공명하는 화인(火印).

“아주, 죽고 못 사나 봐, 아주. 응?”

이제는 알 수 있다.

점점 더 강해지는 사기와 공명.

불타 버린 마도서와 고대의 흉물 데스트로우. 두 존재가 서로에게 반응한다.

아니, 반응한다기보다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해야겠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제4 베이스캠프에 전달한 전언은 무엇이 있을까?

단 하나밖에 없다.

- 데스트로우 도래. 플랜B.

데스트로우가 도래한다.

그러니…… 플랜B를 준비하라.

여기서 말하는 플랜B는 이러하다.

턴 언데드를 펼치기 전, 고대의 망령들을 가두어 놨던 결계를 제4 베이스캠프에 펼치는 것.

‘고대의 망령들이 깨어난 데스트로우에게 힘을 전달하지 못하게.’

역으로 제4 베이스캠프에 가두는 것이다.

물론…….

‘뒈지겠지.’

용병들이 많이 뒈질 거다.

‘리하임 선배는 피를 토할 거고.’

하나, 그들의 입장에서 더 절망적인 것은 무엇이냐.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희망이라도 있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고대의 망령. 그것을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보면, 데스트로우의 봉인체가 깨질 테니까.

어쩌면, 살아남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냥, 다 뒈지는 거야.’

데스트로우를 제거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위해.

제4 베이스캠프에 갇혀, 죽을 때까지 언데드와 싸우다가 뒈지는 거지.

물론…….

“알 바냐?”

……물론, 알 바다.

“썩을.”

평소였다면, 용병들이 얼마가 뒈지건. 리하임 선배가 피를 토하건, 숙취에 토를 하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겠다.

“처음부터, 내가 이상하다 했다. 썩을.”

데스트로우. 시대를 막론하고 회자되기 충분한 사건인데.

전생의 나는 이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었다.

이 시기의 내가 흑백 지대 부랑아이기 때문에? 아니, 아니다.

데스트로우 따위가 도래했다면 몇 년이 지나도 풍문 정도는 들어 봤어야 맞는 일.

‘한데도…… 들어 본 적이 없었지.’

이게 무엇을 의미하나.

전생.

그러니까, 내가 개입하지 않았던 시간대.

‘리하임 선배의 계획은…… 성공했을 거다.’

금마사가 있다 해도 그러하다. 물론, 그 과정 따위는 짐작지 못한다.

교장 선배가 보낸 지원군이 늦지 않게 당도했을 수도 있고, 리하임 선배가 무슨 기똥찬 수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지.

이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화인(火印)

이 망할 것이 이처럼 쳐 우는데, 어찌 모르겠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데스트로우의 봉인은 옅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인(火印)이 데스트로우의 도래를 본래보다 빠르게 앞당기고 있다 해야겠지.

그러니…….

“내 알 바다. 내 업보야.”

금마사와 희대의 반역자.

이 자리에서 둘이 최고의 악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진짜 악당은 나였달까.

‘쯧. 걍 째?’

강하게 드는 충동.

모른 체하고 째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데스트로우와 화인? 둘이 죽고 못 살든, 진짜 죽든 무슨 상관이냐.

화인(火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냥 징징 쳐 우는 것밖에 없는데.

하지만…….

“……후우.”

난 하늘을 올려다봤다.

“보고 있나, 와이번?”

광활한 하늘. 와이번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았다. 물론, 진짜 날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내 기분상 그렇다는 거지.

여하튼, 가상의 와이번이 짹짹하고 울부짖었다. 마치 들린다는 것처럼.

그래서, 나 역시 멍멍하고 짖어 줬다.

“이게 내가 선택한 자유다, 짜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물론, 책임을 안 질 자유도 있지만, 난 지는 쪽의 자유를 선택했다.

물론, 그렇다고 싸움에서 질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습, 후.”

들이쉬고 내쉬고.

대수림에서 양치를 못 해서 그런가. 코끝을 스치는 따뜻한 쓰레기 냄새. 하지만, 인상을 구기지는 않았다.

웃고만 살기에도 짧은 것이 인생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호흡법을 끝내고도 충분한 시간을 준비로 보냈다. 아공간에서 육포를 꺼내 배도 채우고, 이것저것 볼 일도 마쳤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좋아! 가 볼까?”

하나도 안 좋은 기분으로, 당찬 발걸음!

천성이 대범하지 못해, 뭣 같은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뭐, 울면서 먹는 겨자가 맛없어도 어쩌겠나.

먹기로 했으면, 먹어야지. 그래, 그런 거였다.

……옘병.

* * *

……그리고 한편 그 시각.

제4 베이스캠프.

“흐음, 플랜B가 그런 말이렷다?”

“……예, 그렇습니다.”

사방이 영상 출력 장치로 이루어진 모니터링 룸에서 플렌은 웬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병은 아니었다.

걸치고 있는 장비는 하나같이 명품. 장인의 손길을 거친 것이 분명한 것이었고, 은연중에 풍겨져 나오는 기도는 고고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니.

플렌은 여인의 기도에 저도 모르게 압도당하고 있었는데, 여인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곳의 상황은…… 나쁘지 않으렷다?”

“예, 덕분에…….”

플렌은 힐끗 모니터링 룸의 영상을 바라봤다.

제4 베이스캠프 이곳저곳을 비추고 있는 영상들.

사뭇 끔찍하다.

성벽을 두드리는 수많은 언데드들.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종은 물론이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소형종까지.

주변의 몬스터는 씨가 말랐다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이제는 고대의 망령들에게 빙의되어 제4 베이스캠프로 죄 들이닥친다.

하지만.

전황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성벽마다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마법사들.

푸른 빛깔의 로브를 걸친 이들이 마법을 펼쳐 언데드를 막는다.

대규모 마법을 펼친 것도 아니다. 그저, 숨 쉬듯 편안하게. 적재적소에 필요한 마법을 골라서 전개할 뿐.

‘소속은…….’

밝히지 않았다.

아니,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인지 로브에 그려진 엠블럼은 모두 가려져 있었다.

다만, 사관 학교 생도로서 제국의 무력 집단을 외운 플렌은 그 정체를 익히 알 수 있었다.

‘푸른색 로브에 극도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전투 스타일. 이런 곳은…… 하나밖에 없지.’

람부르크 공작가(家)의 마법사단, 청안(淸眼).

하면, 청안을 이끄는 눈앞의 여인. 그 정체 역시도 익히 짐작할 만했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람부르크 공작가의 대공녀.’

당대 청안의 주인, 아이리스 드 람부르크.

그 이름은 대수림 안에서 지내던 플렌마저도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 듣기로는 걷잡을 수 없이 포악한 성정을 지녔다는데…….

꿀꺽.

새삼, 그 신분을 떠올리자 긴장에 입이 바짝 마른다.

하나, 그런 가운데.

“음음, 좋아. 하면, 본인 하나쯤은 빠져도 상관없다는 말이렷다?”

“그게 무슨…….”

“아아, 너무 긴장치 말거라. 본인의 수하들은 예의가 발라. 미리 자네에게 지휘권을 양도한다 말해 놨으니, 통솔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플렌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대공녀는 휙 하고 모니터링 룸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어디를 가는 것인가.

플렌의 머릿속이 의문으로 휘몰아치는 그때.

대공녀는 망토 같은 푸른 로브를 흩날리며 제4 베이스캠프를 빠져나갔다.

물론, 생기에 목마른 언데드들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휙, 휙.

발돋움 몇 번만으로 상공에 올라, 떨어지지 않은 채 허공을 거닐 뿐.

가공할 마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이쪽이렷다?”

대공녀는 잠시 멈춰서 방향을 가늠한 후, 이내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방향은 바로 하메른 대수림 깊숙한 곳.

고대의 유적지 쪽.

“본인을 제치고 스승님께 삭월(朔月)의 증표를 물려받은 사제라. 어디, 그 낯짝 한번 보자꾸나.”

만약, 아스터가 들었다면 기함을 토할 일이었다.

한 문장 안에 오류가 두 개였으니까.

첫째, 자신은 슈베르츠의 제자가 아니니, 대공녀와도 사형제 지간이 아니다.

둘째, 삭월은 어디까지나 빌렸을 뿐, 물려받은 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대공녀는 당찬 걸음으로 허공을 거닐었다.

왠지, 그 걸음에는 은은한 살기(殺氣)가 어려 있는 듯.

하지만, 대공녀가 방향감을 상실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원, 넓구나…….”

하메른 대수림에서는 길잡이가 필수라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청안을 안내해 준 패스파인더를 데려올 걸 그랬다.

죽을 수도 있는 자리이지만, 애초에 죄를 지은 죄수이니 별 상관도 없고.

한데, 그때.

저 멀리 대공녀의 눈에 띈 무언가.

“헥, 헥……!”

한 사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수림 바깥쪽을 향해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저 안쪽으로부터 나온 모양인데…….

“호오, 말 좀 묻자꾸나.”

“히익, 뉘, 뉘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대공녀의 모습에 대경을 표하는 사내.

“그대는 저 안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렷다?”

“…….”

눈깔을 뒤룩뒤룩 굴리는 사내. 아니, 레일리.

‘이건, 뭔…….’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마치, 처음 가면을 쓴 마법사님을 만났을 그때처럼. 다르지만 같은 위기감.

“아, 아닌데요?”

일단 발뺌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최악의 선택이었으니.

“본인에게 거짓을 고했구나.”

“……예?”

“본인에게 거짓을 고한 죄는 죽어 마땅하나, 본인은 자비롭다. 한 가지 일만 하면, 그대의 죄를 사해 주지.”

미친놈이다.

레일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아스터라는 미친놈을 경험해 봤기 때문일까. 그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경험상 괜히 입을 열었다간 개처럼 맞을 게 뻔하니까.

하지만.

대공녀의 이어진 말에, 레일리는 저도 모르게 그 입을 열어 버렸다.

아니, 열 수밖에 없었다.

“본인을 안내하도록 해라.”

“어, 어디로…….”

“고대의 유적? 그리 부르던데. 아는가? 몰라도 상관없다. 안내하여라.”

“……이 X벌.”

미쳐도 단단히 미친 자가 아닐 수 없다. 아닐 수 없는데…….

“가자꾸나.”

“……예, 알겠습니다.”

금세 현실을 받아들이는 레일리.

대체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와 대화를 하려면,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속, 정확, 편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바람직한 놈이렷다.”

레일리는 눈물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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