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식충이를 모욕한 놈이다
제니온 아카데미.
저녁 식사를 마친 첸비는 1학년 학생 식당 1층 카페테리아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다.
먼 곳으로 간 나의 친구 아스터에게. 벌써 열여덟 번째 편지구나.
사각, 사각.
종이를 긁는 펜촉. 첸비는 그 감촉을 느끼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벌써…… 열여덟 번째구나.’
아스터가 떠나간 후.
열흘쯤 지난 후부터 적기 시작한 편지였다.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적기 시작한 편지.
첫 번째 편지를 쓰기 전. 그 전까지의 열흘은 주옥같았다. 아니, 지옥 같았다.
네가 쪽지 한 장 남기고 떠나간 날, 내 희망은 무너졌어.
너도 알잖니? 내가 중간시험이 끝나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데미안에게 해방되는 날을 얼마나 그려 왔는지.
한데, 채 해방을 만끽하기도 전에 떠나간 아스터. 어찌, 세상이 이리도 무심할까.
하늘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니, 아스터 그 X새……. 흠흠. 아스터, 너에게 양심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불쑥.
치미는 화.
“……후우.”
첸비는 불길을 내리눌렀다. 다시금 그 얼굴로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한편, 제4 베이스캠프.
탁.
“이 잡것이…… 사람 말은 들어 보지도 않고.”
샤인은 여유롭게 아스터의 주먹을 잡은 후, 눈깔을 부라렸다. 그러기를 잠시.
“어쭈, 잡아? 잡아?”
“네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로구나?”
샤인은 치솟았던 화를 내리눌렀다. 그 얼굴로는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내 이런 날을 꿈꿔 왔지. 언젠가 한번, 네놈을 꼭 쥐어 패 주고 싶었어.”
솔직히, 이런 생각도 했다? 네가 어디를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임자 한번 제대로 만나서 두들겨 맞기를.
뭐…… 네가 어디를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만약에…….
빡!
옹골찬 타격음과 함께, 아스터의 고개가 휙 젖혀졌다. 코를 정확히 때리는 정권. 하나 아스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떠냐 내 주먹…… 칵!”
냅다 달려들어 샤인을 밀치는 아스터. 곧 숙소 앞으로 두 사람의 신형이 얽혔다. 아스터는 뒤로 물러선 샤인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이 개 같은 것이 어딜 감히…… 억!”
퍽!
이번엔 명치였다.
“네놈이 아무리 잘 친다 해도, 주먹다짐으로 이 몸을 이길 성싶으냐?”
탁, 콰당!
샤인은 아스터의 다리를 쓸어 찬 후, 그를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만약에, 기회가 된다면…….
빡, 빡.
왼팔과 오른팔이 움직일 때마다, 좌우로 휙휙 꺾이는 아스터의 면상.
눈앞에 별이 번쩍일 때까지 맞는 걸 보고 싶어.
‘이 개 같은…….’
눈앞이 핑핑 돈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지? 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어설픈 마운트 자세라면 금세 떨쳐 낼 텐데, 코어의 밸런스가 얼마나 좋은지.
평생 말을 타 온 숙련된 기수처럼 균형을 잡는다.
하지만, 정말 네가 맞기를 바라는 건 아니야. 그래도 우린 친구였잖아.
친구가 맞기를 바라는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이런 날을 꿈꿔 왔느니라. 바라마지 않았지.”
샤인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아스터를 내려다봤다.
가면이 있어서 타격감은 덜하다. 하지만, 그만큼 안심하고 후릴 수가 있으니.
마음 같아서는 그 가면을 벗겨 내고 싶었지만, 그 정도 선까지는 넘지 않았다.
대신…….
쾅! 쾅!
깍지를 낀 채, 그 이마를 힘껏 내리치는 샤인 폰 르망.
아스터의 머리가 고무공이라도 된 것처럼 퉁! 퉁! 튀어 올랐다. 촥, 터져 나온 코피가 가면 안쪽을 흠뻑 적셨다.
잘 지내고 있니?
“네놈은 이리도!”
쾅!
“내 대가리를!”
쾅!
“두드려 댔지!”
쾅!
잘 지냈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삭월의 증표는 어찌나 튼튼한지 그 와중에도 깨지지 않았다.
뒤통수가 조금 아플 뿐.
‘찾자.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스터는 부릅뜬 눈으로 샤인을 올려다봤다.
마력을 쓰면 쉬이 빠져나갈 수 있지만, 상대가 마력을 쓰지도 않는데, 어찌 자신이 마력을 쓸까.
이쯤 되면 자존심 싸움이었다.
나는 솔직히 지금은…… 잘 지내거든.
데미안이 조금 많이, 많이…… 감당하기 힘들기는 한데, 이제는 이것도 익숙해졌어.
참, 너 혹시 아니?
“잡것아, 내 심정을 이제 알겠느냐?”
샤인은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멈췄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건 샤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뱀파이어가 된 몸. 어찌 된 게, 근육의 형태는 더없이 이상적이면서도 그만한 체력은 따르지 않더라.
빛 좋은 개살구랄까.
그러니까, 슬슬 힘이 빠지는 것이다.
‘빌어먹을 몸뚱어리.’
하나, 샤인은 그 속내를 철저히 감춘 채, 여유롭게 자세를 풀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혼쭐을 내 주고 싶지만, 용서해 주마. 그래도 우리는…… 악!”
촤아악!
팔을 내리누른 무릎을 느슨히 하기 무섭게, 모래를 뿌리는 아스터!
샤인이 두 눈을 감쌌다. 흐트러진 자세. 이번에는 아스터의 차례였다.
세상은 참 아름다워.
빡!
머리와 머리가 맞부딪쳤다. 휙 젖혀지는 샤인의 고개. 피가 흩뿌려진다.
허공을 점점이 수놓는 붉은 선혈.
휙, 탁!
자세가 바뀌었다.
“이 간악한 놈이, 비겁하게……!”
“네가 식충이를 알아?”
양 무릎으로 샤인의 전완근을 내리누르고 그 어깨를 억세게 움켜쥔다.
아스터의 들끓는 눈동자. 샤인이 그에 욕지거리를 씹어 뱉으려는데…….
쾅!
박치기.
쾅!.
다시 박치기.
몰랐는데, 세상이 참 아름답더라. 아름답지 않은 건 데미안 그 새끼…….
찍찍. ‘새끼’ 위로 직직 그어지는 가로 선.
아름답지 않은 건 데미안이 아니라, 데미안을 보는 내 마음이었어.
“네가 식충이였다면!”
쾅!
“비겁하다고 할 게 아니라!”
쾅!
“내 면상에 피를 뱉었…… 악!”
“됐냐? 잡것아?”
아스터의 면상에 피를 내뿜은 샤인.
가면 틈새로 핏물이 들어갔지만, 아스터는 가면을 벗을 수 없었다. 닦아 낼 수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이제 다시 내…… 칵!”
휙, 탁.
요령 좋게 팔의 속박을 떨쳐 낸 샤인. 하지만, 아스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면상에 흙을 뿌렸던 것.
같은 것을 보아도, 누군가의 마음은 편하고, 누군가의 마음은 편하지 않으니.
정말, 편치 않은 건 무엇일까?
그걸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그 뒤부터는 진흙탕 싸움이었다.
연꽃도 봐 봐,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 않니?
아스터와 샤인. 둘이 만들어 낸 장엄한 개싸움. 하나, 연꽃은 없었다.
사실, 깨달음을 얻었어.
이 사실을 깨달으니까, 뭔가 느껴지는 거 있지.
이 열여덟 통의 편지를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야.
상담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그러니까, 마음을 안정시키래.
깨달음으로 파문이 인 심상이 안정될 때까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래.
글을 쓰는 게 좋다더라. 그래서 한번 써 보는데, 정말로 효과가 좋아.
첸비는 온화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잠시, 세상을 음미하던 첸비는 다시금 글을 써 내려갔다.
세상은 참 아름다워. 보이지 않니?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무리.
보이지 않았다. 눈이 안 보였으니까.
다만, 별은 보였다.
번쩍! 번쩍!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한 방. 한 방. 성심성의껏 내리꽂는 주먹!
들리지 않니? 저 아름다운 풀벌레 소리.
“마법사님! 흙! 흙 뿌리십쇼! 눈 뜰라 그럽니다!”
언제 온 걸까. 귓가에 울리는 레일리의 응원 소리. 하나, 틈은 나지 않았다.
어찌나 옹골차게 잘 치는지. 지금 멱살을 놓으면 이쪽이 당할 테니까.
“에라……!”
보다 못한 레일리가 한 움큼 흙을 집어 샤인의 눈깔에 내리 뿌렸다.
“칵! 이 버러지가!”
우리는 이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돼. 아름다움을 느껴야 해.
대마법사와 마스터 나이트.
세상에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참으로 하찮은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 새끼! 이 새끼! 어디, 감히 마법사님을!”
“옳지!”
술이 불콰하게 취한 레일리의 난입.
“아악!”
콰장창!
샤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술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허공에 흩뿌려졌다.
“마법사님, 이 틈에 어서 회복하십쇼!”
“이, 이 몸이 누군지 아느……!”
“죽어! 죽어, 이 새끼야!”
“내가, 내가 누군…… 아악!”
거듭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려는 샤인. 하지만, 레일리의 발길질은 가차 없었다.
“내 말 좀……!”
샤인의 공허한 절규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아스터는 뒤로 물러나 가면을 들어 슬쩍 눈을 비볐다.
다시금 가면을 쓰고, 온전한 시야로 바라본 세상.
“식충이를 모욕한 놈이다. 즈려밟도록.”
“예, 알겠슴다!”
열과 성을 다해서 발길질을 거듭하는 레일리. 몸을 잔뜩 웅크린 샤인은 꽤나 하찮다.
아스터는 그 모습에 미소를 머금었다.
들불같이 일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흐뭇한 감정뿐이라.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사실은, 진즉에 눈치챘던 것이다.
때리다 보니 알겠더라. 그러지 않았다면, 레일리가 난입한 순간 기세를 몰아 숨통을 끊어 놨겠지.
“잘 다져 놔라.”
“예!”
그 뒤로 한참, 옹골찬 타격음이 제4 베이스캠프로 울려 퍼졌다.
아스터, 난 행복해. 넌 거기서 잘 지내지?
너도 그곳에서는 행복하길 바라.
첸비는 그 말을 끝으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잉크가 마르게 공용 마법으로 작은 바람을 일으키고는 갈무리했다.
이렇게, 부치지 못한 편지가 열여덟 통.
하나, 부칠 일은 없을 거다.
첸비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
첸비의 마음속, 아스터는 죽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겠더라.
극에 달한 스트레스가 첸비의 사고 회로를 어떻게 해 버린 게 분명했는데, 하여 이는 부치지 못할 편지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편지를 부칠 수 없는 법이니까.
* * *
레일리의 일방적인 매타작이 끝난 것은 그로부터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헥헥, 마법사님. 이거 꽤 끈질긴 놈입니다요. 어떻게…… 더 할깝쇼?”
구슬땀을 흘리는 레일리. 얼마나 열심히 때린 걸까. 온몸이 흠뻑 젖었다.
그런데, 힘든 기색보다는 어딘지 신나 보이는 것이…….
‘이 새끼, 즐기고 있군.’
티를 안 내려 무진장 애쓰고 있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돌고 있으니.
“너, 눈치챘지?”
흠칫.
흔들리는 눈동자.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바닥에 널브러진 샤인을 바라보는데 이내 찔끔 몸을 떨었다.
만신창이가 된 샤인이 도끼눈을 한 채 레일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
“맺힌 게 많았냐?”
“아니, 그, 저…….”
“됐다. 넌 저쪽 양반들이나 깨워서 돌려보내.”
뭐,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쯧, 사람이 말이야. 그러게 평소 마음을 곱게 쓰고 다녔어야지.’
샤인이 데스나이트이던 시절에 레일리를 오죽 구박했냐.
거의 동네북이었다.
말 한마디만 해도 떠벌이라며 구박하고, 말을 안 하면 또 안 하는 대로 불만 있냐며 쥐어박고.
그나마 오베른은 답답하다는 것만 빼면 매를 안 버는 성격이라 다행이지, 레일리는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주먹을 부르는 타입이었으니.
“저, 마법사님. 저는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아, 됐고. 저 양반들이나 깨워서 보내라고.”
“……예, 옙! 그런데, 저 진짜로…….”
“아, 거.”
샤인의 보복이 두려운 것일까. 레일리는 몇 번이고 변명을 지껄이려다가, 이내 슬그머니 픽셔에게 다가갔다.
난 그렇게 토템들을 깨우는 레일리를 뒤로한 채, 널브러진 샤인을 끌고 숙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개 같은…… 분명, 내가…… 내가 이긴 건데…….”
그렇게도 분한 걸까.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주제에, 눈빛은 어찌나 매서운지.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백 번도 더 죽일 눈빛이랄까?
‘확실히, 이런 걸 보면 식충이는 맞단 말이지.’
검은 갑주에서 피육으로 이루어진 몸뚱어리가 되었다지만, 그리고 내가 상상하던 샤인 폰 르망의 모습과는 꽤나 거리가 멀다지만…….
어찌 몰라볼까.
한때, 종속의 팔찌. 그것으로 심령이 연결되어 있었던 사이였기 때문일까?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뭔가 ‘팍’ 하고 와닿는 것이 있었으니.
한데, 뭐랄까.
“너…… 식충이 맞냐?”
“이 간악한 놈아. 그렇게 패고도 모자라단 말이냐?”
샤인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날 쏘아보았다.
‘눈깔은…….’
의자에 앉아 제 한 몸 추스르는 것도 힘겨워하면서, 도통 기가 꺾이지를 않으니.
평소였다면 두어 대 더 쥐어 팼겠지만, 딱 한 대만 때리고 말았다.
“……칵!”
“별, 세게 때리지도 않았고만.”
난 식충이의 이마에 꿀밤 한 대를 먹여 주고는,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한데, 맞은 게 그렇게 억울한 것일까? 분에 못 이겨 부들거리는 놈.
“내가, 내가 샤인 폰 르망이다.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샤인이냐는 말이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내 의문은 그게 아니다.
사람치고는 창백한 피부. 피처럼 붉은 동공. 칠흑 같은 머리칼은 둘째치고서라도, 짐승처럼 삐죽 솟아난 송곳니는 예사 것이 아니었으니.
“너,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
“……믿어 주는 거냐?”
“뭐, 믿기야 믿는 건데…….”
어딘지 억울해 보이는 면상. 그 불퉁한 눈동자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 패야 하나?’
하나, 그런 생각도 잠시.
난 곧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뒈진 놈이 살아 돌아왔으니, 분명 평범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는 것보다 먼저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너…… 깝치지 마라.”
“…….”
아, 이게 아니다.
“흠, 흠흠.”
난 다시금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잘, 잘 돌, 잘 돌아…… 돌아이냐? 그러게 왜 덤벼?”
“뭐, 이 개…….”
아, 먼저 덤빈 건 나였나?
여튼, 표현이 무에 중요할까. 마음만 전달되면 그만인 것을.
아마, 식충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였다. 아마…… 아마도 말이지.
이해하지 못했다면?
“내 오늘 기필코 네놈을 죽여 버리…… 칵!”
빡!
옹골찬 타격음.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동료의 미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