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뒷골목 마법사의 회귀생활-115화 (115/559)

115화. 좋은 꿈을 꾸나 보구나

이른 아침, 난 아카데미의 교복을 챙겨 입고 숙소였던 여관을 나섰다.

전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레일리는 고주망태로 쓰러져 있었는데, 그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은 꿈을 꾸나 보구나.’

그래, 현실에서나마 못 이룬 꿈. 잠결에서나마 이루어라.

“이제 가느냐?”

“따라오지 말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샤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내 마음 아니겠느냐.”

“널 쥐어 패는 것도 내 마음이겠지.”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붉은 눈을 빛내는 샤인. 자신만만한 눈동자에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게 제4 베이스캠프에서 쥐어 터진 놈이 맞나. 아주 자신감이 넘친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제4 베이스캠프에서 도시 하젠에 오기까지.

적지 않은 힘을 회복한 샤인이었다.

뱀파이어의 힘 수급은 혈액을 섭취함으로써 이뤄지는데, 누가 식충이 아니랄까 봐 몬스터의 피를 어찌나 야무지게 빨아 재끼던지.

하나, 힘을 회복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됐고, 사고나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쫄기는.”

난 괜스레 도발을 던지는 샤인을 뒤로하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서클을 만들어야 쓰겠는데.’

초월(超越).

전생에는 넘지 못했던 벽을 넘어섰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경지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그릇이 미흡하달까?

초월을 온전히 펼쳐 내기 위해서는 육체. 그릇 역시 그에 비등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급선무.

이는 얼마가 걸릴지 쉬이 장담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뭐, 그래 봤자 초월의 벽을 뚫는 것만큼 힘겹지는 않을 테지만…….’

여하튼, 초월은 그릇을 키우기 전까지는 봉인 상태.

하나, 그렇다 해도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초월 당시에 적화(赤火)의 비전 최종 단계, 생화(生花)를 엿본 덕일까?

심상이 이 단계 성화(成火)에서 삼 단계 겁화(劫火)로 나아갔으니.

드디어 칼라헨의 경지를 따라잡은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이제 칼라헨 정도는 요행수 없이 짓밟을 수 있다는 말이지.’

참으로 눈물겨운 성취였다.

여태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경지가 높아서도, 지닌바 비전이 특출나서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잘나서.

매 순간 뒤가 없는 것처럼 날뛰었으니까, 칼라헨도 잡고, 응? 늪의 지배자도 잡고, 응? 그랬던 거지.

다른 놈들이었다면 진즉 다 뒈졌다.

‘확실히, 내가 잘 치기는 잘 쳐.’

혹자는 얍삽하고 비겁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얍삽한 것도 실력이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하메른 대수림의 모험가들에게 공포로 군림하던 늪의 지배자가 내게 짓밟힌 것처럼, 언제나 상성은 있는 법이니까.

여하튼.

마침내 도착한 기숙사.

‘……아직인가?’

난 오랜만에 들어선 로비를 한차례 둘러봤다.

등교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내가 찾는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 시간쯤이면 내려올 때가 됐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낯익은 얼굴과 마주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멈칫.

날 보고는 걸음을 멈추는 학생 하나. 변함없이 냉막한 면상의 주인공은 바로 폴라였다.

“여.”

“…….”

룸메이트 폴라는 날 복잡한 눈으로, 아니.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휙 내 곁을 지나쳐 갔다.

“……편지는 잘 전달했다.”

“오냐.”

“그리고 내 몸값은 비싸다. 이번 한 번뿐…… 음.”

팅!

“됐지?”

내가 튕겨 낸 동전을 낚아챈 폴라는 은빛 광채를 확인하곤 날 휙 쏘아봤다.

“다음에 또 이용해라.”

단순한 새끼.

자본에 충실한 점은 아주 마음에 든다.

여하튼, 스쳐 지나가는 폴라를 말없이 보내는데,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들어 봐. 첸비,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난 약속을 지켰어. 중간시험을 열심히 봤고, 16등 안에 들었단 말이야. 그렇지?”

“응, 그랬구나.”

“그러면, 엄마는 피땀 눈물 1호, 2호를 전부 만들어 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여기까지는 이해했지?”

“응, 그랬구나.”

“그런데, 선택하래. 피땀 눈물 1호를 만들지, 2호를 만들지. 이게 말이 돼?”

“응, 그랬구나.”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텐션의 목소리. 성의 없는 대꾸 속에서도 꿋꿋이 제 할 말을 하고 있다.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두 개의 얼굴은 제법 낯이 익은 것이었다.

“이건 엄연한 계약 위반…… 어?!”

“응, 그랬구나.”

날 먼저 발견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데미안은 몇 번 눈을 비비고는 날 빤히 바라봤다.

반쯤 달관한 눈빛의 첸비가 날 발견한 것은 그 직후였다.

“……친구?”

“……? ……!”

부릅뜬 눈동자.

“친구?!”

“……아스터?”

“친구 맞아?!”

“아스터……?”

죽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번갈아 탄성을 토해 내는 두 사람.

난 그런 둘을 넉넉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내가 왔다.”

한데, 왜일까.

일렁이던 첸비의 눈동자가 짜게 식었다. 놈은 살짝 굳은 얼굴로 날 외면하고는, 데미안을 끌고 걸음을 옮겼다.

“데미안, 저건 아스터가 아니야.”

“아닌데, 맞는데?”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없어.”

“아닌데, 안 죽었는데?”

“아니. 아스터는 죽었어. 저건 환영이고, 우린 헛것을 본 거야.”

“그런 거야?”

나를 지나쳐 가는 두 사람.

데미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뒤를 돌아봤는데, 첸비의 태도는 확고했다.

급기야, 데미안의 목깃을 잡고 질질 끌고 가는 첸비.

“친구, 진짜 죽은 거야?”

“…….”

그 물음에 난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고작 한 달 남짓. 길다 하기에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인데. 도대체 무엇이 첸비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아카데미의 수업은 별 게 없었다.

이미 중간시험도 끝나고, 대인 전투 시험도 마무리가 된 터라 대부분의 수업이 복습 위주로 진행됐다.

학기 말,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곧 다가올 방학에 대한 기대감으로 붕 뜬 시간을 영위했다.

물론, 난 아니었다.

“……그러니까, 수련을 떠났다가 시간을 못 맞췄다고?”

“예, 길을 잃어서…….”

“흐음.”

제이라 교수와의 면담은 꽤나 삭막했다.

그녀는 왠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어쨌든 출석 일수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 시험도 불가능해. 이 점 알아두도록.”

“예, 알겠습니다.”

뭔가 가타부타 묻고 싶은 게 많은 듯했지만 제이라 교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적당히 얼버무린 거 치고는 알리바이가 꽤나 촘촘했으니까.

그렇게 교무실을 나서는데, 서류를 들고 오던 조교수 요르비와 마주쳤다.

“아스터 군, 오랜만입니다. 참 빨리도 오셨군요.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아, 예.”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건지, 늦었다고 꼽을 주는 건지.

한결같이 재수 없는 양반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골드린 상단의 금지옥엽 이벨린이랑은 어떻게 됐나 몰라.

내가 이벨린이었으면 갈아 먹었을 것 같은데.

‘낯짝이 판판한 걸 보니, 별일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참고로, 이벨린은 요즘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대외적으로는 상단의 일이 많아서라는데, 암시장 건으로 귀족가를 달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는 모양.

여하튼, 제이라 교수와의 면담이 끝난 후, 난 학생 식당 1층 카페테리아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난 첸비와 데미안과 함께 2차 면담을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늦은 거라고?”

“……뭐, 그렇지.”

난 하메른 대수림에서의 여정을 적당히 각색해 풀어 줬다.

물론, ‘하메른 대수림’이라느니 ‘데스트로우’, ‘금마사’와 같은 민감한 주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수련차 여행을 떠났는데 그게 하필 몬스터가 넘쳐 나는 숲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길을 잃어서 그야말로 죽다 살아났다. 이 정도.

“……으음,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뭐, 다치긴 했었는데 다 나았지.”

“아프면 안 돼.”

죽다 살아났다는 말 때문일까? 뻣뻣하던 첸비의 기세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아니, 수그러드는 줄 알았다.

“난 또, 네가 도망간 줄 알았지.”

“…….”

“어디 숨어서 노는 줄 알았어. 아, 오해는 하지 마. 수련을 빙자한 농땡이를 피웠다고 생각한 건 아니야.”

맞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나야, 뭐. 아카데미에서 편하게. 아주 편하게 지냈거든. 데미안이랑,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하루 한 번 가출하는 거 잡아다 끌고 오고.”

“…….”

“절대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음, 절대 아니지. 그냥, 네가 어디 가서 사고 난 건 아닐까 걱정도 안 했어. 응, 절대로 안 했지.”

“…….”

맺힌 게 많았던 걸까.

그러고 보니, 고작 한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데미안은 키도 한층 크고 볼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데에 반해, 첸비는 어딘지 까칠하게 날 서 있다.

이때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오직 하나.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요한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넙죽 엎드리는 것뿐.

그렇게, 얼마나 한탄을 들었을까.

“어쨌든, 아스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다행이야!”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난 괜찮다.

첸비의 조곤조곤한 말투가 비수가 되어 날 난도질했지만, 숨은 붙어 있었으니까.

가시방석에 앉아 속으로 수백 번 피를 토하며 쓰러졌지만, 그래도 끝내 살아남았으니까.

그렇게, 청문회를 끝마친 후.

우리는 그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참, 대인 전투는?”

“내가 2등! 첸비는 22등!”

“2등?”

“응. 달리아가 1등 했어. 그런데, 사실은 내가 봐줬어. 이길 수 있었는데, 내가 이기면 달리아가 다치거든.”

아마, 달리아가 뒤 없이 달려들었던 모양.

절실하지 않았던 데미안이 한발 양보해 달리아가 승리를 취한 모양새였다.

하나, 그렇다 해도 달리아의 선전은 꽤나 의외의 것이었다.

‘생각보다 감을 빨리 잡았나 본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만한 결과도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그간 있었던 근황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주된 대화의 화제는 피땀 눈물 1호, 2호. 그러니까, 호수와 조각상이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래!”

“그럼 당연히 2호지.”

왜냐하면 그게 손이 더 많이 가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대화 화제는 앞으로 있을 ‘방학’에 맞춰졌다.

코앞으로 다가온 첫 번째 방학.

“난 이번에는 데미안이랑 블란도가(家)에 가서 가모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우리 부모님은 벌써 와 계신대.”

“난 가서 2호 만들 거야.”

첸비는 이번 기회에 가모 비앙카를 만나고,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낼 요량.

데미안은 피땀 눈물 2호. 드래곤 조각상을 만들 생각인 듯했다.

뭐, 그래 봐야 석공들이 다 하고, 데미안이야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 말밖에 안 하겠지만.

여하튼, 잔뜩 신이 나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데미안이 문득 날 바라본 건 바로 그때였다.

“친구도 같이 갈 거지?”

빤한 눈동자.

난 그 눈빛에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마음 같아서는 나도 블란도가(家)로 가서 서클이나 만들고 싶지만, 아직 아카데미에서 할 일이 태산이었다.

라피테르를 방문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파룬 교수.’

파룬 교수가 날 찾고 있었으니까.

- 빠직, 빠각.

며칠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루에 하나씩 부서지는 호출 구슬.

우선은 파룬 교수를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