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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마법사의 회귀생활-175화 (175/559)

175화. 선행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푸르스름한 새벽녘.

나는 전날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새벽부터 낚싯대를 챙겨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본래 낚시라는 것이 그렇다.

물고기를 낚으려 하면 이보다 지루한 게 없지만, 마음이 심란하거나 복잡할 때는 생각을 정리하기 딱 좋은 핑곗거리였다.

여하튼, 다시금 떠올려 봐도 전날은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 허허, 이 몸을 어찌 무스펠룬 공에 비하겠나? 그분의 위대함에 견주자면 일개 범부에 불과하거늘.

- 하하! 로트린 계곡 대혈전의 영웅께서 겸손하기도 하십니다! 무스펠룬 대공께서도 생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와 비견될 이는 삭풍의 정령사뿐이다’라고요!

겸양을 떠는 마이셀른과 그 얼굴에 금칠을 하는 이름 모를 나인 스타.

그뿐이냐?

- 로트린 계곡 대혈전!

- 데미안, 알아?

- 아니, 몰라.

- 뭐어, 너 그걸 모른다고? 역사 시간에 안 배웠어? 로트린 계곡 대혈전, 당시 수세에 몰려 있던 제국이 역전의 발판을 다질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전투로…….

역사 속 인물을 만났다는 흥분에 쉴 새 없이 지식을 뽐내는 첸비와 얌전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데미안까지.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그토록 믿었던 블란도이건만 적의 위장에 속아 홀라당 성문을 열어 주는 꼴이라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

더 가증스러운 것은 삭풍의 정령사 마이셀른의 간교한 혀 놀림이다.

솔직히 처음부터 이상했다.

아무리 위명이 대단한 삭풍의 정령사라 해도, 나인 스타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렇게 헤벌쭉 환대를 해?

다 이유가 있었다.

뭐랬더라?

- 참, 마이셀른 경. 이제 데미안 도련님도 오셨고 하니…… 아까 하시던 말씀을 마저 해 주시는 게 어떤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은근슬쩍 주제를 바꾸는 나인 스타.

마이셀른이 그 말에 넉넉하게 웃으며 말하길.

- 허허, 맞아.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할 참이었네. 내가 아까 자네에게도 말했다시피…….

- 길에서 우연히 정령사의 자질이 뛰어난 소년을 보셨다고요?

- 그랬네. 그리고…….

- 그게 저희 데미안 도련님이셨다 이 말씀이셨지요, 분명?

- 그래, 딱 보기에 블란도의 자제인 것 같아 수소문해 걸음했다네. 아무래도…….

- 그게 예의라 생각하신 거겠지요?

- ……자네는 눈치가 참 빠르구만?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아.

- 하하! 감사합니다.

누가 봐도 말 끊지 말라고 비꼬는 건데, 눈치 없이 웃는 나인 스타. 경지와 눈치를 맞바꾼 게 틀림이 없다.

여하튼, 마이셀른이 이 저택에 들어오기 위해 부린 수작은 참으로 간교하면서도 악랄한 것이었다.

‘뭐? 데미안의 정령사적 자질이 뛰어나니, 한 수 가르침을 내리고 싶어서 왔다고?’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허’하고 웃음을 토해 버렸다. 덩달아 손에 쥔 낚싯대가 한차례 출렁거렸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래, 데미안의 정령사적 자질이야 있을 수 있다 쳐. 아마 아예 빈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한데, 뭐가 말이 안 되냐고?

정령은 기본적으로 인물을 통찰한다.

그리고 그 통찰을 바탕으로 계약자를 결정하는데, 내가 말이 안 된다 하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이었다.

데미안이 정령사적 자질이 있고 자시고를 떠나서…….

‘얘는 안 돼.’

왜 안 되냐.

‘그냥 안 돼.’

우스갯소리로 정령과의 계약은 인성 평가로 불리는데, 인성이 글러 먹은 데미안이 정령과의 계약을 할 수나 있겠나?

계약을 위해 소환한 정령이 도망이나 안 가면 다행이지.

이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해 봤으니까.

‘몇 번이었더라.’

전생에 한 세 번쯤 정령과 계약도 해 봤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았지. 한 2년 가까이 데리고 다녔나? 썩 강력한 정령은 아니었지만, 공짜 노동력이라는 측면에서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

어느 날 사라지더라.

뭐라더라?

유대감이 워낙 낮아서 그 의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대강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 무서워.

그 뒤로 두 번째는 석 달.

세 번째 계약은 보름.

계약한 정령의 속성은 다 달랐지만, 그 결말은 비슷했다. 첫 번째가 ‘무서워’, 두 번째가 ‘자유를 원해’, 세 번째가 ‘함께해서 즐겁지 않았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였나?

이렇듯.

우리 같은 놈들한테 정령과의 계약은 자질을 떠나서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내가 세 번이나 했던 것이 기적일 지경.

정령들의 심미적 관점이란 인간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 기준도 불분명하고 선악의 관점도 다르다.

‘내가 악한 거 같아?’

이렇게 사는 게 정령들 보기엔 다 악해 보이나 본데…… 이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이 모진 풍파와 격동 속에서 이만한 선량함을 유지한 이가 흔치 않거늘.

“씁, 솔직히 말하자면 좀 아쉽단 말이지.”

정령만큼 우월한 공짜 노동력이 흔치 않거늘.

생각해 봐라.

땅의 정령만 한 마리 있으면 모든 일이 간편해진다.

인부들 서넛이 움직여 날라야 하는 벽돌을 땅의 정령이 손을 스스슥! 하면 파바박! 하고 쌓을 수 있지.

이게 무슨 말이냐.

향후 탑을 건축할 때, 인건비가 획기적으로 감소한다는 의미다.

물론, 월광석이니 여타 마나가 들어간 영양 간식을 챙겨 멕여야 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벌어들일 돈에 비해 남는 장사라는 셈.

즉, 정령이란 ‘밥만 먹고 일하는’의 대명사랄까?

‘확실히 한 마리 있으면 편하겠는데 말이야.’

노예, 일 잘하는 노예…….

어쨌든 말이 조금 샜는데, 마이셀른의 ‘데미안 정령사적 자질론’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

하지만, 그 의지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진심이라는 소리니까.

한데, 삭풍의 정령사쯤 되는 인물이 이 정도까지 진심인 일이라…… 이거 참.

“소름 끼치는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데, 인기척이 느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무어가 소름이 끼치는가?”

“…….”

고개를 돌린 곳에 있는 이는 삭풍의 노예주…… 아니, 정령사 마이셀른.

새삼 내 눈동자에는 공경의 빛이 서렸다.

마이셀른이야말로 수십 년 동안이나 공짜 노예를 부려 먹은, 이 바닥 살아 있는 전설 중 전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눈빛도 잠시.

나는 은근슬쩍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 했다.

‘흉악한 와이번의 사도.’

인간의 탈을 쓰고 내 앞에 나타났지만, 나는 속지 않는다. 역병과 와이번은 피하는 게 인지상정.

그렇게 낚싯대를 정리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얘기나 한번 들어 주게.”

“아뇨, 괜찮습니다.”

“만약, 들어 보고도 거절한다면 깨끗이 물러나겠네. 사례는 내 섭섭지 않게 할 것이야.”

멈칫.

잠깐, 아주 잠깐 내 마음이 흔들렸다.

사례……가 아니라,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절절한 진심이 느껴져서.

“부탁함세.”

난 간곡히 청하는 마이셀른 선배를 눈에 담았다. 까마득히 어린 내게 고개까지 조아릴 정도라니.

이건,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진심이었다.

“그러면, 얘기나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정말인가?”

그럼, 정말이고말고.

“선배님, 일단 여기 앉으시죠.”

“……선배님?”

“인생 선배님이시지 않습니까?”

“음…… 일단 알겠네.”

무스펠룬 대공께서는 내게 ‘외부 코어’라는 희대의 이론서를 남기셨다. 내가 아직 시간이 없어서 활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는 내 지갑의…… 아니, 마법계의 한 획을 그을 거대한 발명품.

한데, 그에 비견되는 삭풍의 정령사라?

‘군침 싹 도는군.’

나는 아직 배고프다.

끝없이, 언제나.

* * *

이야기가 끝났을 때.

두 사람 사이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이셀른은 아스터와 나란히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새벽안개 속에서 출렁이는 물결, 귓가로는 잔잔한 물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마이셀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역시, 안 되는 건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설명해 주었다.

- 아메라 지방 어딘가에는 정령들이 갇혀 있네.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 동안 그곳에서 고통받는 중이지.

덧붙여 그들을 가두어 두고 있는 것이 ‘결계’인 것 같다는 추측과 자신이 지난 세월 동안 나름대로 조사해 온 정보들까지.

요점은 간단했다.

그저, ‘함께 정령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자’였으니까.

하지만, 쉬이 선택할 수 없는 이유 역시 간단하겠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정령들을 가두어 둔 결계. 과연 그 안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인가.

아마, 마이셀른 자신이라 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할 문제였다.

한데, 그 심정을 알아차린 것일까?

퓨리릿.

기운을 내라는 듯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는 퓨리.

마이셀른은 퓨리의 그 마음에 희미한 미소를 짓는 한편, 끝내 단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고통받는 정령들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애꿎은 이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물론, 아쉬움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아쉬움이 없을 수가 있나.

‘……평생의 숙원인 것을.’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는 마이셀른의 숙원이었다.

정령사가 된 그 날부터, ‘정령’이라는 순수한 존재들에게 매료되어 한평생을 살아온 늙은 정령사의 소망.

때문에, 포기가 쉽지는 않지만…… 어쩔 수 있나.

‘결국 홀로 할 수밖에.’

그렇게, 마이셀른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가운데.

아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뭐 하십니까? 어서 가지 않고.”

“……?”

마이셀른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아스터가 어깨에 낚싯대를 걸친 채 재촉하고 있었던 것.

그 빠른 행동에 놀라는 한편, 의문이 일었다.

“어디를…….”

“정령들 구하자면서요? 이럴 시간이 있습니까? 지금도 제 노예…… 아니, 정령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데.”

“……?”

뭐지? 뭔가 들려선 안 될 말이 들렸던 것 같은데?

하나, 의아함도 잠시.

마이셀른은 곧 아스터의 말뜻을 깨닫고는 크게 놀랐다.

“자네, 그 말은…….”

“예,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순간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어째서’냐니? 이럴 때는 그저 ‘고맙다’라 말하고는 넙죽 그 호의를 받으면 그만인데!

염치가 없는 것은 알지만, 그게 현명할 터였다.

한데, 아스터 말하기를.

“어째서라뇨. 요즘은 세상이 각박하여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들이 많아졌다지만, 저는 그러지 못하겠습니다.”

“……허.”

마이셀른은 미처 숨기지 못한 감탄을 토해 버렸다.

‘타인(他人)의 고통이라니?’

타인.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렸을 단어였지만, 마이셀른에게는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어딘지 모르게, 정령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식하는 듯했으니까.

“위험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정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즉, 희생도 마다치 않겠다는 의미다.

그 한마디에 마이셀른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앙다문 입술로 내비치는 결연한 의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모종의 사명까지 엿보인다.

“어째서…… 어째서이지?”

아스터는 답했다.

“선행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 한마디를 남기고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는 아스터.

마이셀른은 굳은 듯 앉아서 멍하니 그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화창한 햇살이 소년의 머리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구원자.’

그래, 정령들이 말한 그 자체로 구원자였으니.

“퓨리야, 지금은 어찌 보이더냐?”

퓨리는 잠시 아스터를 바라보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음, 퓨리야. 왜 그러느냐. 무슨 문제라도?”

마이셀른이 물었지만, 퓨리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 없었다.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아스터. 퓨리가 보는 그의 등에는 불길하리만치 칙칙한 날개가 돋아난 듯 보였으니까.

‘친구들…… 위험.’

뭔지는 몰라도, 뭔가를 꾸미고 있다.

분명…… 분명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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