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무패를 유지하는 제일 좋은 방법
아스터가 뛰기 시작한 그 시각.
눈을 감고 있던 데미안은 천천히 눈을 떠 공간을 담았다.
공간은 넓고 깨끗했다. 앞으로 다가올 전투의 전조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귓가로 울리는 ‘쿵, 쿵, 쿵’ 소리만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알리고 있을 뿐.
데미안은 그 소리를 귀에 담으며 옅은 숨을 들이마셨다. 아스터와 헤어지기 전, 인페르날과의 거리를 꽤나 벌려 둔 터라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괜찮겠는가?”
데미안은 마이셀른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뭐가요?”
“버틸 수 있겠느냐, 이 말일세.”
데미안은 생각했다.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데미안으로서도 답하기 애매한 문제였다.
인페르날은 강하고, 하필이면 자신은 속성도 빙(氷)으로 정해 놨다.
이 빙(氷) 마력은 화염과는 상극이라, 결국에는 강한 쪽이 이기기 마련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마법이 인페르날의 불길을 버틸 수 있느냐 하면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마이셀른이 다시 입을 떼었다.
“자네의 재능은 놀라운 정도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네. 차라리 이 늙은이와 힘을 합치는 편이 옳아.”
“그러면 스승님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 늙은 몸, 더 살아야 무엇하겠나.”
“그건 그래요.”
“…….”
“농담이에요.”
데미안은 옅게 웃어 보이고는 청각을 곤두세웠다. 점점 다가오는 인페르날. 전투가 머지않은 이 시점에서, 데미안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 입이 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저는 재밌어요.”
“재미……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맨날 혼자 놀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같이 놀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재미있죠.”
“……?”
마이셀른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데미안을 바라봤는데,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데미안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 결연한 눈빛은 아스터가 죽었다 생각했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품고 있는 감정이 다른 것이다.
마이셀른이 거기까지 파악했을 때, 첸비가 다가왔다.
“마이셀른 경, 저희는 이만 피해 줘요.”
마이셀른은 가만히 첸비를 들여다봤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첸비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열패감. 안전한 후방으로 물러나지만, 그 마음만큼은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때문에.
“……미력하나마 한 손 보태겠네. 정령들도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네마는 없는 것보다 낫겠지.”
마이셀른은 첸비를 대신해 나서기로 했다.
어린 마법사의 죄책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네.”
그렇게, 첸비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공동 밖으로 물러났을 때.
쿵, 쿵, 쿵…….
한층 더 가까워진 발걸음 소리. 인페르날은 데미안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서서, 데미안과 마이셀른을 눈에 담았다.
여태껏 도망만 치던 쥐새끼가 당당히 자신을 맞이하는 모습이 의아했던 것일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대치가 이뤄지는 가운데, 데미안은 인페르날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 해? 안 놀아?”
그 말이 신호가 되었음일까.
후웅― 쾅!
인페르날의 주먹이 지면을 때린다. 돌가루가 비산한다. 불똥이 타닥, 탁 튀는 가운데, 몸을 날렸던 데미안이 자세를 잡으며 마법을 시전했다.
층, 층층층…….
허공으로 피어나는 무수한 얼음꽃. 아니, 꽃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지독한 살상력이 담긴, 얼음 칼날.
화르륵, 콰득!
인페르날에게 쇄도한 얼음 칼날은 별다른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저물었지만…… 데미안은 웃고 있었다.
* * *
벽을 뚫고 달리는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따금 벽을 뚫고, 뚫고, 뚫다가 길이 나오면 빠르게 방향을 재설정한 후, 다시금 벽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벽을 갈며 나아가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채굴 업계의 혁신일 수도?’
복잡한 장비도 필요 없다. 그리고 딱 한 사람분만큼의 길만 뚫는지라, 무너질 걱정도 크게 없었다.
만약, 이렇게 광산을 뚫고 들어가 광맥을 찾는다면?
이후에는 결국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지만, 광맥을 찾기 전까지 들어가는 노동력과 시간은 절약할 수 있겠지.
물론, 개소리였다. 여긴 길이 있는 곳에서 벽을 뚫고 다른 길로 가는 거고, 광산은 환경 자체가 다르니까.
어쨌든, 이런저런 뻘 생각으로 데미안에 대한 걱정을 지우며 나아가기를 얼마간.
[있다! 저기!]
내 뒤를 바짝 따르던 정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뭐가 있냐, 물어보려는 찰나, 곧 화악 트이는 개방감과 함께 널따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이 끝나고 길이 나타났나 싶었는데, 눈앞에 자리한 것은 벽이 아니라 넓은 방.
구조는 단순했다.
온갖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바닥. 그 중앙에는 2미터 남짓한 길이의 수정이 놓여 있었는데, 나는 그게 결계석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걸음을 멈춰서 결계석을 눈에 담는데.
화르륵, 화륵…….
돌연 방 안으로 ‘후욱’ 끼쳐 들어오는 열기.
그 열기에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체구의 인페르날이 나를 반겼다.
인페르날은 거대했다. 좀 전까지 우리를 뒤쫓던 놈과 거의 대등한 크기.
놈은 침입자의 존재를 파악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그 열기를 가늠하던 나는 무심코 한마디 뱉어 버렸다.
“저게 약해진 거야?”
[……맞다.]
“아까 그놈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원래, 더 세다. 결계 지키는 놈들, 제일 세다.]
요컨대, 사기를 쳤다는 말.
하지만, 당황도 잠시.
나는 인페르날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결계석을 바라봤다.
‘그럼 앞으로 저런 놈이 세 놈이나 더 있다는 거지?’
누군가,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절망할 수도 있겠지. 한 놈도 버거운데, 세 놈이라 더 있었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손은 눈보다 빠르고, 내 발은 인페르날보다 빠르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짼다는 거지.’
쿵, 쿵……!
나는 다가오는 인페르날을 무시한 채 내달렸다. 곧 후욱― 하고 눈앞으로 다가오는 결계석. 하지만, 속도는 줄이지 않는다.
사람은 모름지기, 직진.
콰창……!
생각보다 맥없이 깨지는 결계석.
나는 허공으로 비산하는 파편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대로 두 번째 결계석을 향해 벽을 뚫고 직진했다.
콰가가가각!
다시금 익숙한 진동이 몸 전체를 휘감는 가운데.
나는 생각했다.
‘일단, 하나.’
모름지기, 무패를 유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는 것. 때문에, 난 인페르날과 싸우지 않는다.
다만, 결계석만을 파괴할 뿐.
하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으니.
쾅! 쾅! 쾅! 콰가가각!
등 뒤로 들려오는 무지막지한 소음.
뒤통수로는 뜨끈한 열기가 훅 하고 치밀었다.
진즉에 멀어졌어야 하는 열기가 왜?
의문을 품으며 뒤를 힐끗 봤을 때, 나는 그만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옘병.”
이거…… 따라오는 거였어?
* * *
아스터는 인페르날을 달고 열심히 뛰었다. 평지를 달리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떼어 놓을 수 있었겠지만, 벽을 뚫고. 그리고 벽과 벽 사이에 있는 단단한 내장재를 뚫고 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편, 결계석이 부서짐에 따라 바하르무트의 공간으로는 한차례 변화가 일었다.
스슥, 스스스―
바하르무트 전체를 촘촘히 감싸고 있던 결계. 그것이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한 꺼풀 얇아진다.
그 변화는 아스터는 물론이고, 데미안과 마이셀른, 첸비 역시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는데, 누군가에게는 여실히 느껴지는 변화였다.
[됐다! 됐어? 아직이야. 세 개 남았어. 근데, 깨졌어! 결계, 약해졌다.]
대전의 정령들은 얇아진 결계석의 존재감에 환호성을 토했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을 가두어 온 결계가, 수천 년간 변하지 않던 그것이 단 한 꺼풀이라지만 힘을 잃은 것이다.
물론, 아직 바하르무트를 탈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 아아.]
정령들은 오랜 세월 자신들을 억압해 온 구속이 한 꺼풀 얇아졌다는 사실에 거듭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때였다.
[근데…….]
기쁨에 겨운 목소리 속에서 들려오는 한 줄기 목소리.
[……괜찮을까?]
대전 내부에서, 수정구의 기능으로 바하르무트의 한 공간을 주시하던 정령이 우려를 표했다.
[뭐가? 괜찮아? 안 괜찮아? 문제? 있나? 왜 그러지?]
환호하던 정령들은 혹여나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웅성댔는데, 처음 화두를 꺼냈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봐야 된다. 저쪽.]
[……?]
정령이 가리킨 곳은 총 두 군데였다.
하나는…….
- 썩을.
벽을 뚫고 달리는 아스터.
그 뒤로는 익숙한 정령 하나가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뒤로는 자신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던 인페르날이 흉악스러운 존재감을 뽐내며 추격하고 있었다.
따라잡히기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었지만, 실로 위태로운 모습.
[……아.]
그 모습에 정령들은 다른 의미로 탄식을 토해 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지금이야 큰 문제가 없지만, 저 뒤를 따르는 인페르날들은 곧 있으면 둘이 될 테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넷이 되겠지.
한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냐.
인페르날은 결계가 깨진다 해도 작동을 멈추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결계를 다 부순다 해도, 구원자는 네 구의 인페르날에게서 해방될 수 없다는 소리.
정령들이 그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처음 화두를 꺼냈던 정령이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도 있다.]
두 군데 중 남은 한 곳은…….
데미안과 인페르날의 전투 현장.
아니, 이것을 전투라고 봐야 할까?
- 콰드드득! 쾅! 콰직!
끊임없이 들려오는 폭음.
허공으로 빙결이 난무하는 가운데, 섬뜩한 냉기는 곧 확 피어오르는 열기에 맥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런 후에는 여지없이 인페르날의 주먹이 지면을 두드렸는데, 그 앞에서 작은 소년은 힘겹게 몸을 구를 뿐이었다.
일방적이다.
그리고 처절하다.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버티는 것뿐.
그가 내뿜는 마법은 강렬했으나, 인페르날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에는 한없이 미약했고, 인페르날의 공격은 단순했으나 그 일격, 일격은 살인적이었다.
- 조심하게!
늙은 정령사가 이따금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정령의 힘도 제대로 끌어다 쓰지 못하는 통에 미약할 뿐.
그 광경에 정령들은 침묵했다.
그런 한편, 정령들의 머릿속으로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그들이 본 미래 속.
유적을 찾아왔던 이는 구원자 한 명뿐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령들이 데미안을 비롯한 마이셀른, 첸비가 위험 요소라 생각했던 건, 그들이 본 미래에서 해방된 자신들과 조우한 이가 아스터 한 명뿐이라 그러했던 것이다.
때문에, 셋을 보고 미래가 틀어진 건 아닐까 걱정을 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라.
……그 미래에도 넷이 찾아온 거였다면?
넷이 종래에는 하나만 남고.
그 장면만 자신들이 목도했던 거라면?
[위험? 위험. 소년, 위험? 늙은 인간, 위험? 세 명 위험?]
정령들은 불현듯 떠오르는 가능성에 술렁거렸다.
만약, 자신들이 본 미래가 맞다면, 이 자리에서 구원자를 제외한 모두가 결국에는 죽는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때.
- 커억……!
[……위험!]
인페르날의 주먹이 소년을 정통으로 때렸다. 곧 공간을 완전히 가리는 수증기.
정령들은 숨죽여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시야를 가린 수증기마저도 열기에 금방 흩어지고, 다시 공간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을 때.
[……다행!]
정령들은 비척이며 일어나는 소년을 보며 환호했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만, 환한 빛이 그 몸을 감싸 치유하고 있었다.
불길에 타 버리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그 짧은 순간 마법과 역장으로 막은 덕분이겠지.
- 괜찮은가……!
- …….
늙은 정령사는 몸을 날려 인페르날의 후속 공격으로부터 소년을 구하고, 소년은 곧 몸을 회복할 새도 없이 전투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면서, 정령들은 생각했다.
[도움. 우리가 도움?]
자신들이 도와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한데, 방법이 없었다.
저 소년은 정령사도 아닐뿐더러, 자신들의 힘은 인페르날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늙은 정령사가 있기는 했지만…… 정령들이 보기에, 늙은 정령사는 자신들의 힘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쇠약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억누르는 것은…….
[……두려움.]
오랜 세월 각인되어 온 인페르날에 대한 두려움.
그들은 평생 보아 왔던 것이다.
인페르날의 손에 죽어 가는 정령이 얼마나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지. 얼마나 많은 정령들이 그 불길에 죽어 갔는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정령들이 관측한 미래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