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시간은 너무도 짧은데……
아카데미 감사 건은 그럭저럭 잘 마무리됐다.
감사 결과는 전면 무효.
경질됐던 교수들은 하나둘 아카데미로 돌아왔는데, 그렇다고 혼란이 완전히 가신 것은 또 아니었다.
어째서이냐.
‘……2황자 측에 가담했던 교수들.’
그리고 조교수까지.
적지 않은 교수들이 조사관들에게 연행됐던 것.
삼황녀의 말에 의하면 끌려간 이들은 그리 아름다운 결말을 보지 못할 거라는데, 결말이 아름답지 못한 건 아카데미생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기말 일정에는 변동이 없다. 모두 준비를 소홀히 하지 말도록.”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감사를 감상하던 학생들은 그제야 기말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학업을 놓지 않은 학생들은 쾌재를 불렀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불만을 토해 냈다.
“교수님, 저희는 배운 게 없는데요?”
“수업을 한 게 있어야 시험을 치지 않을까요?”
몇몇 삐딱선을 탄 아이들은 나름대로 반항을 해 봤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알고 보니, 감사 기간 동안에도 진도는 착실히 나갔던 것.
물론, 교수가 직접 나간 진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조교수와 유인물.’
그도 아니면, 교수들끼리 서로 수업을 대신해 주기까지.
몇몇 학생들은 ‘전공 교수님이 아니니 수업의 질에 문제가 있다’며 강력하게 항의를 해 보기도 했지만, 그 발언은 ‘사칙 연산에 애먹는 역사 학자는 없는 법이다’라는 파룬의 말 한마디에 묵살됐다.
물론, 그 논리도 기본반과 중급반까지만 통하는 것이었지만.
‘……그래서 고급반은 아예 개인 연구 리포트로 시험을 바꿨다지.’
어쨌든, 반강제적으로 일상을 찾게 된 아카데미.
내가 교장 선배를 다시 마주한 건, 그 정신 없는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였다.
“어째 혈색이 더 좋아지셨어요?”
“대우가 워낙 좋았어야지.”
내 농담에 교장 선배는 끌끌거리며 답했는데, 그 몰골은 아무리 봐도 좋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건 아마…… 그래, 그나마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이겠지.
‘진짜 뭔 일이 있었으면 이런 농도 건네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잘 돌아왔다는 인사조로 건넨 농이었는데, 성화가 난 건 교장 선배가 아니었다.
삐익! 삑삑! 삐익―!
저저, 저 싸가지 봐라.
주인 없을 때 챙겨 준 건 생각도 못 하고 눈을 까뒤집고 발광이니…… 에잉, 쯧.
이래서 말 못하는 짐승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건가 보다.
여하튼, 그 뒤로 교장 선배와 나는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내 안부야 벨로즈를 통해서 들었을 테고, 교장 선배의 안부는…… 수척해진 몰골이 대강 말을 해 주었으니까.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사가 끝나자, 우리 사이로는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이 기분.
이건 아마…… 서로 표현하는 게 어색해서일 거다.
나나 교장 선배나 ‘잘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너도 고맙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표현에 인색한 사람들이었으니까.
평소 표현을 제법 하던 교장 선배도 막상 자기 일로 마음을 표현하자니 어색한 모양.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지속됐을까.
“저…….”
“그…….”
목소리가 겹치자, 나와 교장 선배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선수를 양보했다.
“먼저 말씀하시죠.”
“흠, 아니다. 네가 먼저 해라.”
“노인은 공경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선배가 먼저 하시죠.”
“네가 배운 게 격이 아니라, 경이 확실하냐? 됐고, 네가 먼저 말해라.”
내가 배운 건 ‘격’이 맞다. 그렇다고 ‘경’을 모르는 건 아닌데…….
쩝.
그래, 후배 좋다는 게 뭐냐.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끝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간단한 한마디가 뭐 그리 하기 어려운 거라고, 나나 교장 선배나 이렇게 망설이는 건지.
“그…….”
“말해라.”
“잘…… 돌아오셨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돌아오셨네요? 굉장히? 다행입니다?”
얼마 전, 아에비론 일 이후로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는 나였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게 최선이었다.
이런 말은 해 본 적도 없거니와 들어 본 적도 없어서.
그래도 진심이 전해진 걸까.
교장 선배의 입가로는 옅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후배야, 무사히 돌아와서 굉장히 불행하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건 내 착각이겠지?”
“뭔…….”
어이가 없어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데.
교장 선배가 입을 연 건 그 직후였다.
“농담이다.”
“…….”
“그리고 나도…… 고맙구나.”
왠지 모르게 훈훈해지는 분위기.
나는 코밑을 쓱 훔치며 괜스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울창한 초록 사이로 펼쳐진 푸른 하늘이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요?”
“…….”
교장 선배는 침묵했다.
나도 침묵했다.
……아, 생각만 한다는 게 그만.
* * *
그래도 교장 선배와의 만남은 나쁘지 않게 마무리됐다.
‘원, 노인네. 속은 좁아 가지고.’
그냥 뻘쭘해서 해 본 말 가지고 뭘 주면 되느냐, 장기라도 하나 떼 주면 되겠냐 꼬장을 부리더라.
나중에는 아예 본인 소유의 땅문서를 가져오겠다며, 툴툴거리는데…….
내가 진짜 보답을 바라고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는지, 진심으로 섭섭한 모양새.
그래도 이번만큼은 나도 잠자코 투정을 받아 줬다.
‘이건 선행.’
사실, 교장 선배는 덤이었으니까.
한데, 그건 그렇고.
교장 선배를 만나고 나니, 경황이 없어서 만나지 못한 몇몇 사람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다.
그게 누구냐.
……펠리나 교수와 파룬.
“조만간 만나야 되기는 하는데 말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 켕길 게 없지 않냐고?
‘……없기는 하지.’
조금 켕긴다고 해 봐야 펠리나 교수인데, 솔직히 그것도 내가 켕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
이유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아티팩트는 원래 내 거였어.’
말없이 가져간 건 놀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건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둘째.
‘내가 구해 줬지.’
아티팩트를 가져간 게 과실이라 해도, 이 일을 처리한 공로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조금 남 탓이기는 한데…….
‘……아니, 펠리나 교수가 자리를 비웠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근본적인 원인은 연구실을 비운 펠리나 교수가 아니었을까? 난 상의를 하러 갔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난 떳떳하다.
암, 떳떳하고말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부끄럼이 없었다.
한데, 왜 그 둘을 만나는 게 꺼려지는 일이냐.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취임식 날 벨로즈와 나눴던 대화를 먼저 말해야 했다.
그러니까…… 알텍스 경의 안내에 따라 벨로즈를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했던 제안 하나.
- 아스터, 내가 네 이름을 조금 빌려도 되겠니?
이건 진짜 내 ‘이름’을 빌린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래, 취임식 날 나타나서 금마사를 압도하고 귀족들을 제압한 ‘가면인’의 존재감을 빌려 써도 괜찮겠냐는 말.
이는 삼황녀가 이번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겠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의중은 이러했다.
- 황권을 노리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보다는…….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
갑자기 웬 삶이냐.
벨로즈는 1황자가 2황자의 숨통을 붙여 놓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본래 약속대로라면 2황자가 재기할 수 없도록 무참히 짓밟아 버려야 했지만, 경우에 따라 1황자는 2황자의 숨통을 붙여 놓을 수도 있다고.
한데, 그게 내 이름을 빌리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바로 2황자의 보복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단순히 이름을 빌리는 게 아니지.’
소문을 퍼트릴 거란다.
- 정체불명의 대마법사와 그 배후 집단이 삼황녀를 비호한다.
물론, 삼황녀가 내 정확한 경지를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식으로 위장을 할 거라는 얘기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소문 하나로 2황자의 보복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벨로즈의 말에 따르면 2황자도 세력이 위축된 상태에서는 쉬이 움직일 수도 없을 거라고.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뭐, 그냥 소문만 내겠다는 건데.’
그에 상응하는 보답도 주겠다 하고.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어쩌면, 적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데큘란, 살바티움, 그리고 자칫하면 2황자까지…….’
데큘란 하나만 해도 벅찬 판국에 살바티움? 거기에 2황자?
데큘란이야 로르텔이라는 우방이 있다지만, 살바티움과 2황자는 마탑이 온전히 감내해야 될 수도 있는 상황.
솔직히 말하자면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도 2황자와 살바티움이 이번 일의 가면인이 나…… 즉, 마탑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지만, 밝혀지지만 않으면 아무런 일도 없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질까.’
영원히? 아니, 그건 너무 낙관적이다.
데큘란이 제2 흑백 지대를 알아낸 것처럼, 2황자와 살바티움 역시 그러지 못하리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 기회에 딜을 거는 게 낫지.’
소극적으로 벨로즈와 연대를 맺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손을 맞잡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아직 삼황녀가 두각을 보일 정도로 세력을 일군 것은 아니었지만, ‘황족’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유사시에는 훌륭한 버팀목이 돼 줄 테니까.
내가 파룬과 펠리나 교수와의 만남을 선뜻 갖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였다.
“너무…… 복잡하게 꼬였어.”
벨로즈는 내 정체를 안다.
그리고 손을 잡게 되면, 당연히 마탑에 대해서도 알아야겠지.
하면, 파룬은?
마탑에 대해서는 알지만 내 정체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펠리나 교수는 파룬과 정반대.
정리하자면, 취임식으로 엮인 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가 각기 다른 것이다.
……사실.
“…….”
난 문득 걸음을 멈춰선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아침 식사 1호가 날개를 펄럭이며 푸른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싸가지를 잃은 대신 기운을 되찾은 모습이었는데,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사실…… 예전이었으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고민이었다.
‘정체? 알 게 뭐야.’
하지만, 이렇게 고민을 하는 건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켕기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던 문제들이, 어느 순간부터 걸리기 시작하는데…….
“친구!”
난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데미안을 보며 살짝 손을 들어 줬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카데미,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이제 고작 1년 반.
남은 시간도 고작 1년 반.
시간은 너무 짧은데…….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은 너무도 많았다.
벨로즈, 파룬, 펠리나 교수를 제외하더라도, 데미안, 첸비, 교장 선배, 그리고 그 밖에도 몇 명.
좋든 싫든 관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그게 끝이 될지, 새로운 시작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있잖아, 친구.”
“응?”
난 상념을 갈무리하고 데미안을 눈에 담았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
“……?”
“바다 가는 거. 첸비도 좋대. 이벨린도 좋대. 첸비는 바다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좋대. 이벨린은 공짜 여행이라서 좋대. 그래서 이벨린은 경비를 따로 받을까 생각 중이야. 그런데, 친구는 내가 특별히 공짜로 해 줄게. 어때?”
난 신이 나서 떠드는 데미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아마, 그건 아니겠지. 일전의 취임식 날의 그 눈빛도 그렇고.
그런데, 바다라…….
“어쩌면,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어!”
아카데미 졸업 때까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난 왠지 ‘마지막’이라는 말이 귀에 박혔다.
그래서일까.
“그래, 뭐. 가자.”
난 흔쾌히 수락했다.
솔직히, 전생 바다에서의 추억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