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이젠 하다 하다
데미안과 대화를 나눈 후, 나는 곧장 파룬을 만나러 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고 만남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삼황녀 건은 파룬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
이런저런 진실은 당장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뭐…… 내가 딱히 속인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자면 상호 동의하에 묵인한 쪽에 가까웠으니까.
여하튼, 그렇게 도착한 파룬의 저택.
“오랜만이군.”
“오랜만이네.”
파룬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평소와 같았는데, 난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고는 소파에 앉았다.
“마실 게 필요한가?”
“아무거나.”
“기다려라.”
난 파룬이 음료를 내오기를 기다리면서 잠시 집무실을 눈에 담았다.
듣기로는 자택까지도 압수 수사가 들어갔다는데, 집무실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모든 게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와 동일한 모습.
파룬의 성격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셔라. 지금은 있는 게 그것밖에 없군.”
파룬이 내게 건넨 건 유리병에 든 피로 회복 음료였다. 그러니까, 희석된 포션이 첨가된.
“아, 땡큐.”
까라락.
뚜껑을 따자 기묘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곧 파룬도 맞은편에 앉아 까라락.
나는 잠시 피로 회복 음료를 홀짝이며 괜스레 시선을 위로 올렸다.
‘무늬가 참 이쁘네.’
자수를 놓은 건가?
천인지 종이인지 알 수 없는 천장 벽지는 언뜻 보기에도 보통 고급스러운 게 아니었다.
뭐라 해야 할까. 디테일이 엿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마, 이런 저택은 굉장히 비싸겠지. 벽지도 저렇게 좋은 걸 쓰는 걸 보면.
그렇다면, 이 저택. 화장실은 어떨까.
얼핏 듣기로는 화장실이야말로 이런 저택의 품격? 고급스러움? 그런 걸 엿볼 수 있다던…….
“오늘은 어째 말이 없군.”
“응? 아.”
난 파룬의 목소리에 음료를 한 모금 홀짝였다.
“아니, 벽지가 이뻐서.”
“……벽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파룬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내가 바라보고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릴 뿐.
그러고는 ‘바가지 쓴 건 아니었군.’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는데, 아무래도 비싸긴 비쌌던 모양.
여기까지는 평소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데, 왜일까.
이 어색한 기분은.
분명, 내가 숨기거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파룬을 속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나.’
천성적으로 정직해 남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려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정직하게 살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험한데.
새삼 세상의 험난함을 느끼며 우수에 젖는데, 파룬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게 아니었나?”
“아니, 뭐. 잘 지냈나 궁금하기도 하고.”
파룬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무슨 해괴한 걸 다 보냐는 듯 날 꼬나봤다.
……아니, 안부 정도는 물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토했다. 아니, 토하려 했다. 파룬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당장 말할 생각이 없으면 내가 먼저 말하지.”
“……?”
난 고개를 갸웃했다.
“아카데미는 슬슬 정리할 생각이다.”
“퇴직을…… 하겠다고?”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적당하더군. 로르텔과 데큘란의 전쟁이 끝나면, 여러모로 귀찮은 게 많아.”
“그래도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얻는 이득이 적지 않을 텐데?”
내 물음에 파룬은 고개를 살래 저었다.
“평생 아카데미에 있겠다면야, 남아 있는 게 맞겠지.”
그건 공감한다.
만약 퇴직을 할 거라면 데큘란의 감시가 옅어진 지금이 적기겠지.
하지만, 파룬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한 명을 더 데려갈까 하는데.”
“……? 헨지 동생?”
“헨지 동생 놈은…… 그래, 그놈도 데려가긴 해야겠지. 아무리 봐도 연구실 체질은 아니야. 하나, 내가 말하려는 건 그 덜떨어진 놈이 아니다.”
참고로, 헨지 동생은 고아원에 두려다가 파룬에게 양보해 줬다. 마탑의 노예이니, 파룬에게도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한데, 그럼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는데, 파룬이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 교수다.”
“교수?”
교수라면 누굴 말하는 거지?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
“전공은 마도 공학과 아티팩트. 그 분야에서는 제법 이름이 있는데, 들어 봤을지는 모르겠군.”
설마…….
“혹시 펠리나 교수라고 아나?”
옘병?
* * *
파룬의 질문이 끝난 후, 공간으로는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인 풍경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가닥가닥 끊어진 사고로 엉망이었다.
‘웬 펠리나?’
펠리나 교수가 왜 여기서 나오지? 아니, 둘이 어떻게 알……기야 하겠지. 그래, 같은 아카데미 교수니까. 그런데, 둘이 친했나? 이직 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온갖 의문이 들끓는 가운데.
“왜 말이 없지? 아는 이름인가?”
“어…… 아니? 잘 모르…….”
“모르?”
난 말을 하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모른다’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는 건, 아마 내 마음에 있는 뾰족뾰족한 양심 때문이겠지. 단 한 번도 닳은 적이 없는 새것 같은 양심 말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그렇게, 잠깐의 고민.
‘그래, 결정했다.’
결정이 내려지자 대답은 신속했다.
“아니, 모르는데?”
“하긴, 네놈은 학계 쪽이랑은 연관이 없을 테니.”
내가 버린 것은 양심.
결심은 쉽지 않았지만 막상 버리고 나니 이처럼 편할 수가 없었다.
난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선 첫 번째 의문은 이거였다.
“근데, 친한가 봐?”
“친하냐…… 한때 고급반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지.”
“아카데미 동창?”
“굳이 말하자면 펠리나 교수가 내 선배라 할 수 있겠군. 고급반은 수업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으니까.”
아, 펠리나 교수가 선배였구나. 그렇다면, 학연으로 얽힌 사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두 번째 의문.
“혹시 마탑에 대해서 오픈한 건가?”
“그건 아니다.”
파룬은 고개를 저으며 사정을 설명했는데, 그 말을 요약하자면 이런 거였다.
‘이번 감사를 계기로 펠리나 교수가 교수직에 짙은 회의를 느꼈고…… 그러던 차에 우연히 술자리를 갖게 됐다?’
교수들끼리 모인 자리였는데, 그때 만취한 펠리나 교수가 파룬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았단다.
“무슨 아티팩트를 도둑맞았다는데, 그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만, 계기가 무엇이든 아카데미에서는 마음이 뜬 모양이야. 개인 연구실을 차릴까 생각 중이라더군.”
저런, 아티팩트를 도둑맞다니. 그렇게 애석할 수가.
어쨌든, 정리를 하자면…….
‘……아직 펠리나 교수가 마탑에 들어온다는 의사를 내비치지는 않았다는 말인데.’
펠리나 교수를 언급한 건 어디까지나 파룬의 희망 사항인 모양.
여기서 나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끌어들여야 될까?”
“분명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어느 학회나 아티팩트 전공자는 필요해. 그게 학회의 주 수입원이 되기 때문이지.”
“주 수입원?”
“그래. 귀족들이나 제국의 투자를 받아서 굴러가는 학회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회는 아티팩트로 필요 경비를 충당한다. 그 수입이 적게는 경비의 20퍼센트에서 크게는 70퍼센트를 차지하지.”
그러니까, 꼭 펠리나 교수가 아니더라도 아티팩트 전공자는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는데…….
“근데, 그게 꼭 펠리나 교수일 필요가?”
“꼭 펠리나 교수를 꺼리는 것처럼 들린다만. 말했다시피 펠리나 교수는 아티팩트 분야에서 저명한 인사다. 그만한 이는 찾기 힘들어.”
“…….”
난 쓸데없이 날카로운 파룬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꺼리는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맞았다.
뭐라 해야 할까.
당장 아티팩트 건으로 껄끄러운 걸 떠나서 왠지 모르게 내가 마탑 상성 최약체가 되는 기분이었다.
파룬은 원래 그랬고, 이벨린은…… 말을 말자. 거기에 펠리나 교수까지? 옘병.
‘……마탑의 주인은 난데.’
하나하나가 대하기 녹록지 않은 인사들만 모이는 느낌.
하지만, 이걸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지라, 나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 어차피 우리가 부르고 싶다 해도, 중요한 건 펠리나 교수의 의사였으니까.
“우리 돈 없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연구비는커녕 봉급으로 줄 돈도 없다는 말.
하지만.
“그 정도 돈은 있다.”
“……네가?”
교수가 교수 월급을 줄 정도로 돈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나? 선대로부터 쌓아 온 부가 제법 된다. 당장 조부님까지는 상단을 운영했으니까.”
“……?”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인데.
“얼마나…… 많은데?”
“은행에 예치해 둔 금액만 따지면…… 뭐지? 그 눈빛은?”
“내 눈빛이 어때서?”
“꼭 사흘 굶은 고블린 같다만. 그냥 적당히 있다고만 알아 둬라. 교수 한 명 월급 줄 정도는 충분해.”
파룬은…… 부자.
‘일단 체크.’
그건 그렇고, 의지가 대단하다.
사비를 털어서 펠리나 교수를 고용하겠다고? 땅 얘기를 할 때는 꿈쩍도 안 하던 놈이?
내 눈빛을 읽은 걸까. 파룬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땅 때는 어쩔 수 없었다. 묶여 있는 자금이 많아서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그리 많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용도가 정해진 자금을 함부로 내돌리는 건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지.”
“…….”
그래, 말을 말자.
그 뒤로 파룬은 본인의 ‘자금 운용론’에 대해서 설파를 했는데, 내 식대로 요약을 하자면 이런 거였다.
‘돈이 없다’는 진짜 돈이 없다는 게 아니라, ‘전부 다 용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따로 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이야기.
어쨌든, 그러면.
“그…… 펠리나 교수가 오려고 할까?”
펠리나 교수의 합류는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양심을 버리기로 한 몸. 그래, 당분간은 괜찮겠지. 파룬도 그렇고, 펠리나 교수도 그렇고 당장 2학기부터 아카데미를 때려 치겠다는 소리는 아닐 테니까.
파룬이 돈을 댄다 그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었다. 절대로.
다만, 문제는 펠리나 교수가 마탑에 올 것이냐인데…….
“그건 걱정하지 마라. 조건을 최대한 맞춰 주면 올 테니까.”
“조건?”
“연봉은 당연한 거고, 마탑 차원의 연구뿐만 아니라 개인 연구에 대한 연구비도 지원할 생각이다. 평생 연구비를 지원할 수는 없겠지만, 머지않아 수익이 나겠지.”
그 뒤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난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게 좋은 건지는 딱히 모르겠거든.
그리고 뭐…….
‘……내가 생각할 문제도 아니고.’
파룬이 어련히 잘하지 않겠어?
그보다 중요한 건…….
‘……어째 이벨린 때가 생각나는데. 기분 탓이겠지?’
물론, 그건 아닐 거다. 아닐 건데.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
기분이 좋으면서도 찝찝하고, 마음이 웅장해지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는 게 여간 복잡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교수급 노…… 아니, 인재는 흔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긍정적으로 사고 회로를 돌리는데 파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그러면 펠리나 교수는 내가 추후에 또 얘기하지. 그런데, 정말 안부나 물으러 온 건가?”
“내가 뭐, 일 있을 때만 찾는 줄 알아?”
“한 단계 성장했군.”
“……?”
“자아 성찰을 하지 않았나.”
……뭐래.
난 차게 식은 눈으로 파룬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우스갯소리는 여기까지.
이제는 진짜 본론을 말해야 할 때인데…… 나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기를 잠시.
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 내가 삼황녀랑 움직인 건…… 알지?”
“짐작은 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랐다.
“삼황녀랑 손을 잡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이젠 하다 하다 황족까지 등쳐 먹겠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