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응, 데미안. 내가 최선을 다할게
부둣가로 거친 바람이 휘몰아쳤다.
공간을 자유롭게 뛰놀던 마나(Mana)가 아스터를 중심으로 밀집되며 단단하게 뭉쳤다.
초월을 개방하지 않았으나 얼마 전 네 개로 늘어난 서클은 공간을 장악하기에 충분했다.
“……음, 많이 성급하구나. 아직 대화로 풀 여지가 남아 있다고 보는데.”
“말씀해 보시죠.”
“혹시,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하지만, 이 부분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구나. 너나 데미안, 둘 중 하나가 여자아이였다면, 혼약으로 묶었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말이야. 내가 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레오디스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스터의 경지는 이미 초월.
흑백 지대 부랑아라 그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했지만, 역사에 다시 없을 재능이었다.
그리고 그런 재능을 블란도가 품을 수 있다면, 가주의 위(位)를 넘겨줄 용의도 있었다.
물론, 그 자식은 블란도의 성을 따라야겠지만.
하지만, 데미안은 여자아이가 아니고, 아스터 역시도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선택한 것이 봉신가를 내주는 것인데…….
“아, 이건 어떻겠니? 만약 네가 가주의 자리가 탐나면, 내 양아들이 되는 거란다. 그리고…… 그래, 혼례는 라나와 치르면 되겠구나. 라나 폰 질록스, 일전에 본 적 있지? 내 조카. 그 아이도 엄밀히 따지면 블란도의 피를 이었으니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퍽 기괴한 가정이었다.
흑백 지대 부랑아가 블란도의 가주가 되고, 질록스의 성을 쓴 여인이 안주인이 된다.
그리고 성이 없는 아비와 질록스의 성을 쓰는 어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블란도의 성을 따르고.
명가(名家)의 순혈주의자들이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 만한 일이었지만, 레오디스는 진심이었다.
“데미안 생각은 안 하시나 보군요.”
“그 아이는 가주의 자리에는 관심이 없어. 오히려, 네가 맡아 준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도…… 그 아이가 의무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고.”
“…….”
아스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레오디스는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위험하다며 죽여야 할 것 같다 할 때는 언제고, 그 대상을 가주의 위에 올리겠단다. 심지어 제 아들을 제치고.
일반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 하나, 아스터는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준비를 할 뿐.
레오디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탄성을 토한 한 건 바로 그때였다.
“아! 이거 확실히 좋은 방법이구나. 그래, 너를 죽이기보다는 가주의 위에 앉혀야겠어. 너는 블란도를 손에 쥘 수 있어서 좋고, 데미안도 자유로이 살 수 있겠지. 블란도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아. 라나, 그 아이도 제법 총명하니까, 너와 그 아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다음 대의 블란도를 맡겨도 충분하겠지. 그도 아니면, 다음 대에는 데미안의 자식이 소가주가 되어도 괜찮겠고. 문제는 데미안의 자극제인데…… 그것도 첸비, 그 아이를 쓰면 적당할 거야.”
레오디스는 자신이 내민 제안이 만족스러운 듯한 눈빛이었다.
왜 안 그럴까.
데미안을 향한 애정과 가주로서 가문의 이익을 꾀하는 마음. 그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답일진대.
그 결과가 기괴한 것과는 별개였다.
평범한 이였다면 그 논리에 넘어가 고개를 주억거렸겠지.
아니, 아스터도 혹할 만한 이야기였다.
왜냐.
블란도라는 명가(名家)를 손에 쥐는 일이었으니까.
데큘란이 봉신가를 제안해 개가 되라 했을 때와는 달리, 한 명가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썩 끌리지 않네요.”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한참 신이 나서 제 생각을 읊던 레오디스가 고개를 갸웃한 건 그 때문이었다.
“왜니? 혹시, 블란도가 성에 차지 않는 거니?”
“아뇨, 그건 아니고.”
“마탑이 걸리는 건가?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다. 역대 가주들 중에서도 가문 밖의 집단에 소속된 이들이 제법 있었거든. 당장 나만 해도, 몇몇 학회의 고문이나 명예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단다. 그리고 네가 블란도를 손에 쥐면, 마탑에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데…….”
일견 타당한 의견이었다.
블란도를 등에 업은 마탑.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데큘란을 두려워할 필요도, 그리고 2황자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 터였다.
로르텔과의 연계는 더욱 끈끈해질 것이고, 삼황녀를 키워 2황자를 몰아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글쎄요.”
달콤한 유혹이지만, 아스터는 회의적이었다.
그 태도에 레오디스는 짙은 의문을 표했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텐데.”
“저도 뭐…….”
아스터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레오디스가 내건 조건은 다시 없을 정도로 좋았으니까.
하지만, 마음속에서 내키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블란도의 가주가 된 자신을 생각하니 마음속의 탑이 계속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말해 보렴.”
“슬슬 대화를 끝내도 될까요?”
“음…….”
레오디스는 눈매를 살짝 좁혔다. 고민을 하듯.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슬슬 자리를 파하는 게 좋겠구나. 근데, 정말 생각을 달리할 수는 없는 거니?”
“그럴 것 같네요.”
아스터의 담담한 대꾸에 레오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하마. 네가 가족이 있었으면 조금 믿어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잖니. 근거가 없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어. 아, 혹시 혀가 아니라 눈을 뽑아도 괜찮겠니? 너랑 대화하는 건 제법 즐겁거든.”
“근데 혀는 왜 자르는 거예요?”
“입을 막는 데는 그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으니까.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게 힘들어지거든. 이건 내가 직접 해 봐서 안단다.”
“직접……?”
“혀를 수복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거든.”
미친 소리였다.
제 스스로 혀를 잘라 봤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럼 눈은…….”
“팔다리보다는 덜 아파. 눈은 두 번으로 끝나지만, 팔다리는 네 번이니까.”
“음.”
타당했다.
입을 어찌할 수 없으면 도망이라도 못 치게 하겠다는 건데, 확실히 시력을 뺏는 게 덜 고통스러웠다.
“친절하네요.”
“알아주는구나. 그러면, 코어랑 눈으로 해도 괜찮겠니?”
“그러죠, 뭐.”
아스터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꾸드득, 꾸득―
대기 중의 마나가 한층 더 압축되며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두 사람 사이로 숨 막힐 듯한 긴장이 휘몰아쳤다.
쏴아아아― 철썩!
파도 소리가 유난히 크게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잘 보살펴 주마. 그리고 데미안과는 좋은 친구로 남아 주렴.”
아스터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꽈드득, 꽈득…….
서클의 공명을 최대화해 마나를 압축했다. 초월은 개방하지 않았다. 레오디스는 완숙한 초월에 오른 대마법사이자 마도서의 사용자로, 그를 죽이기 위해서 초월은 최후의 한 수였으니까.
한편.
‘에휴, X발.’
아스터는 욕지거리를 씹어 삼켰다.
‘어찌 된 게, 달라지는 게 없냐, 달라지는 게.’
초월이라는, 지고의 경지에 올랐는데 어째 전생보다 더 동네북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아스터는 마음을 다잡았다.
- 나는 아빠가 없어.
응, 데미안. 내가 최선을 다할게.
“제가 먼저 갈까요?”
“그래, 그러…….”
“예, 감사합니다.”
아스터는 있는 힘껏 레오디스의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쾅……!
인적이 드문 부둣가.
굉음이 울려 퍼졌다.
* * *
초월자와 초월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궁극에 이른 마법사의 전투는 일종의 재해와 같다.
우르릉―
하늘이 비명을 토하며 일렁이고 구름으로는 때아닌 뇌전이 피어올랐다.
고요하기만 하던 바다가 출렁이며 요동치는 가운데 수면 위로 푸른 빛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징조가 폭발로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쩌엉―!
폭멸의 폭발 앞에 수면이 움푹 파였다. 충격파로 인해 사람 키만 한 파도가 부둣가를 덮쳤다.
하지만, 폭발을 정통으로 맞은 레오디스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상황을 관망하듯 아스터를 눈에 담을 뿐이었다.
“놀랍구나.”
이 말은 진심이었다.
태연스러운 낯짝이지만 레오디스는 그 어느 때보다 놀라고 있었다.
아스터가 초월에 이르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재능의 산물이라 여기던 레오디스였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아스터는 어떠한가.
들숨과 날숨.
자신의 호흡과 상대의 호흡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며 그 틈을 파고든다.
공격을 위해 전개하는 마법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마력 기술은 마치 제 손발을 다루듯 자연스럽고, 모든 마법은 맺고 끊음에 낭비가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위력적인 기술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는 듯 보이지만, 그 모든 것에 노림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도…….
쩌저저저저정―!
역장을 때리는 무수한 주먹질. 한 점을 타격하자, 견고한 역장으로 금이 번져 나갔다.
이윽고―
콰장창!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역장.
레오디스는 상념을 갈무리하고 손을 움직였다.
지이잉―
그 손끝으로 피어오른 붉은빛은 아스터의 주먹이 코앞에 닥치기 직전에 광선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
아스터는 고개를 좌측으로 젖혀 광선을 피해 내는 한편, 손아귀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레오디스는 어느새 저만치 바다 한복판으로 이동해 있었는데, 아스터가 주먹을 그러쥔 것은 그의 위치를 확인한 직후였다.
파사삭!
일렁이며 소멸하는 화염.
아니, 소멸이 아니다.
블링크.
“……!”
레오디스의 발밑에서 그악스러운 불길이 치솟았다.
징조 없이 피어오른 불꽃은 아스터가 초월을 이룩할 때 그 토대를 다졌던 불기둥의 축소판.
비록, 초월을 극한으로 전개해 시전했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모든 것을 불태우는 파괴적인 심상이 담긴 불꽃이었다.
하지만, 아스터는 방심하는 대신 두 번째 마법을 준비했다. 아니, 이걸 마법이라고 해야 하나.
꽈드득, 꽈득―!
다시금 동결하는 마나. 코어의 공명과 함께 밀집한 마나가 한계까지 압축되면서 아스터의 손아귀에 모였다.
전투 전, 마나를 밀집시켰을 때와는 그 노림수가 달랐다.
그때는 아에비론이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레오디스의 마법을 봉쇄하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은 오직 파괴를 위해서.
한계까지 응축되고 응축된 마나는 곧 아스터의 손아귀에서 피어오른 마력과 뒤섞였다.
같지만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기운의 융합은 언제나 그렇듯 반발했고, 그 반발은 곧 폭발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주변의 마나가 텅 비어 대기마저 일렁이는 가운데, 아스터는 타오르는 불길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기감이 아닌 육안으로 레오디스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아니.
……확인하면 늦는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아스터는 허공을 박차고 레오디스에게 쇄도했다. 불기둥 속에서 손아귀가 솟구쳐 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아프구나.”
“……!”
불길을 뚫고 나온 레오디스의 얼굴은 화상으로 범벅돼 있었으나, 그 상처는 실시간으로 아물어 갔다. 그 괴이한 장면에 아스터가 놀라는 것도 잠시.
“못된 아이는 벌을 줘야지.”
아스터의 멱살을 쥔 레오디스.
아스터는 서둘러 손아귀의 폭멸을 터트리려 했지만, 그보다는 레오디스의 마법이 좀 더 빨랐다.
우르릉―
하늘이 울고.
쩌저저저저저적!
수십 발의 뇌전이 바다 위, 두 초월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범인이라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극한의 고통. 그 속에서, 아스터는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 나는 아빠가 없어.
데미안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