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그렇게 별빛이 쏟아지는 밤
가장 먼저 알프레도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첸비와 이벨린 역시 힐끗 레오디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걸음을 옮겼다.
“아, 첸비 군…… 이것 좀.”
이벨린은 잠이 든 아스터를 옮기기 위해 첸비를 불렀고, 첸비와 함께 아스터를 옮겼다.
지지지직…….
그렇게, 이벨린과 첸비는 낑낑거리며 아스터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평평하던 모래사장 위로 사람 하나 크기만큼의 고랑이 패었다.
레오디스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데미안을 눈에 담았다.
“아들.”
데미안은 답하지 않았다.
“아들.”
데미안의 눈가로 물기가 번졌다. 눈가가 붉게 물들고, 볼이 잘게 떨렸다. 동시에 거칠어지는 호흡.
“아빠가 미안해.”
“…….”
“아빠 욕심이었어. 아들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어. 그런데, 그 방식이 조금…… 아니, 많이 잘못됐던 거 같아.”
레오디스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눈동자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다. 옅지만 분명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아들이 타고난 걸 조금 더 잘 활용했으면 했어. 그렇게 하면, 아들이 조금 더 잘될 줄 알았어. 근데, 아빠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
“어느 순간부터, 아들과 소가주를 혼동했던 것 같아. 아들한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아들과 소가주는 조금 다르거든. 아들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어여쁘지만, 소가주는 그래선 안 되거든. 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면서, 소가주로서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했던 것 같아.”
감정이 희미해졌기 때문에, 레오디스는 자신의 감정마저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데미안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사유하는 레오디스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감정을 올올이 풀어헤쳐 더듬어 나갔다.
그러니까…….
아들을 위한다면서, 가주로서 소가주에게 품는 기대치를 충족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레오디스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라 믿었다.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데미안은 눈물 맺힌 눈동자로 레오디스를 바라봤다. 그 입이 열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 소가주로서 부족해?”
“부족…… 음, 아니. 부족하지 않아. 작년까지는 손가락을 쪽쪽 빨고 다니고, 가출도 하고, 지금도 열세 살이나 됐는데 아직 애처럼 말하기는 하지만, 아빠는 알아. 아들이 똑똑하다는 거.”
“나…… 안 똑똑했으면 부족한 거야?”
“아니. 우리 아들이 안 똑똑했으면 또 어때. 소가주, 안 하면 되지. 아들은 소가주 하고 싶어?”
“몰라.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래, 그렇겠지.”
차남으로 태어나 형과 가주의 위를 두고 경쟁했던 자신과 달리, 데미안은 독자(獨子)였고 당연하다는 듯 소가주의 위를 거머쥐었다.
‘소가주’라는 직위는 데미안에게 있어 이름만큼이나 익숙한 무언가였고, 소가주가 아닌 자신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겠지.
“아들, 아들은 하나도 안 부족하고, 부족해도 괜찮아. 응, 괜찮아.”
“정말?”
“그럼.”
데미안은 어느새 훌쩍이고 있었다.
레오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데미안에게 다가가 그 눈가를 닦아 주었다. 데미안이 고개를 들어 레오디스의 얼굴을 올려다본 건 그즈음이었다.
레오디스는 제 아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들, 아빠가 미안해. 조금 천천히 가도 돼. 헤매도 되고, 때로는 조금 주저앉아 있어도 돼. 아빠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 같아. 아빠 사과 받아 줄래?”
데미안은 손길을 느끼며 레오디스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내가 용서해 줄게.”
“……그래.”
레오디스는 어딘지 가슴이 찡한 기분이었다.
“친구들한테도 사과해 줘.”
“그래, 그럴게.”
“그리고 엄마한테는 이를 거야.”
“……응.”
환한 달빛이 두 부자를 비췄다.
* * *
데미안과 레오디스는 모닥불 앞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오디스는 데미안이 해 주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는데, 주로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이 주된 화제였다.
첸비가 어쨌고, 이벨린이 어쨌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단연 아스터였다.
“아들, 아스터가 그렇게 좋니?”
데미안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답했다.
“응, 친구랑 놀면 재밌어.”
“원래 나쁜 친구들이랑 놀면 재밌는 법인데.”
“아냐, 친구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 그냥 속이 좀 좁고 졸렬한 것뿐이야. 그래도 애는 착해.”
레오디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속이 좁으면 인색하기 마련이고, 인색함은 보통 사람으로 하여금 선의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졸렬하기까지? 그런 사람이 착할 수가 있나?
레오디스는 잠시 고민해 봤지만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데미안의 말은 계속됐다.
“근데, 친구는 나랑 잘 안 놀아 줘.”
“안 놀아 줘?”
“응, 맨날 혼자 놀고. 나가서 놀고. 몰래 놀고 그래. 안 들킬 줄 알겠지만, 사실 나는 다 알아.”
“어떻게?”
“그냥 알아. 분위기가 달라지거든.”
“음. 그렇구나. 그런데, 혼자 놀고 나가서 노는 거면 친구가 그냥 왕따인 건 아닐까?”
“그것도 맞기는 한데 조금 달라. 그래서 조금 생각해 봤어. 친구가 왜 나랑 안 놀아 주는지.”
레오디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음을 던졌다.
“친구, 집에 데려갈까?”
“아냐, 그건 괜찮아.”
“근데, 왜 안 놀아 주는 거래?”
“그건…… 음. 내가 다른 애들이랑 안 노는 거랑 비슷한 이유야.”
데미안은 모래로 두꺼비집을 만들면서 입을 열었다. 고운 모래가 작은 손 위로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러니까, 데미안이 다른 아이들이랑 놀지 않는 이유는…… 이런 거였다.
“수준이 안 맞아. 내가 뭐 하면 ‘와아’ 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뭐라고 해야 되지? 좀…… 뭔가가 뭔가야.”
“뭔가가 뭔가?”
“음…….”
“거리감이 생기는구나?”
“맞아, 아빠는 똑똑하구나?”
“아들보다는 똑똑하겠지.”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래서?”
데미안은 빤한 눈빛으로 레오디스를 바라보다가 다시 두꺼비집을 만들면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친구도 그런 게 싫어서 나랑 안 노는 거 아닐까? 왜냐하면, 친구는 은근히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
“그게 아니라, 못된 짓을 하느라 그런 건…….”
“아빠, 친구 싫어해?”
“음…… 아니, 그렇지는 않단다. 네 친구가 가문의 비전을 몰래 익히고, 네 삼촌과 몰래 작당해서 가문에 큰 화를 끼칠 뻔했지만 싫어하지는 않아.”
“삼촌? 누구?”
“헨지.”
“아하.”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이어 나가려다가 물음을 던졌다.
“친구가 뭐 익혔는데?”
“치유의 빛.”
“헨지 삼촌이랑은 뭐 했는데?”
“그건 말해 주기 힘들단다.”
“음……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는 착해. 그러니까, 아빠가 조금 이해해 줘. 마음이 많이 아픈 친구야.”
“그건 조금 생각해 보도록 하마. 어쨌든, 그래서?”
“아, 친구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데 친구가 나랑 첸비랑 이벨린이랑…… 이렇게밖에 없어. 우리가 안 놀아 주면 친구는 진짜 왕따인 거야.”
“음.”
“어쨌든, 그래서 같이 안 노는 게 아닐까 해.”
데미안은 어느새 완성한 두꺼비집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빼려는데, 표면에 금이 가면서 무너질 기미가 보였다.
꽈드득.
두꺼비집 표면에 맺히는 얼음 결정.
데미안은 두꺼비집을 얼린 후 손을 뺐다.
제법 만족스러운 듯 보였는데, 레오디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데미안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응?”
“친구랑 같이 놀려면, 어떻게 해야지 좋을까 생각해 봤니?”
“음…….”
데미안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2~3년이면 얼추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지금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바하르무트 때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느꼈는데, 이번 총장 취임식 때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격차를 따라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오디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잘 모르겠어?”
“응. 근데, 집에 데려가는 건 안 돼.”
“집에는 데려가지 않도록 하마. 상대를 끌어내려 수준을 맞추는 건 좋지 않은 일이지. 평생 자리에 머물러 제 살을 파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응?”
“아니, 아니다. 그건 그렇고…….”
레오디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스터의 경지는 이미 초월이었다.
그리고 그 경지는 해가 갈수록 완숙해지겠지.
서류상의 나이가 맞다면 이제 고작 열다섯이었으니, 스무 살 즈음에는 대륙을 발아래에 둘 수 있을 것이다. 뭇 대마법사와 마스터 나이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데, 자신의 아들이 그 격차를 메꿀 수 있을까?
‘이대로는…… 힘들겠지.’
그러니, 레오디스는 아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기로 했다.
“아들, 아빠가 힌트를 좀 줄까?”
“힌트?”
“그래, 힌트.”
데미안은 눈을 빛냈다.
“응! 뭔데?”
“이번에…… 빙결의 마력을 익혔다고 했지?”
“응. 여름에 시원해.”
“그러면…… 보자. 보여 주마.”
레오디스는 검지를 곧게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똑같이 손가락을 폈다.
“중지?”
“응, 친구가 그랬는데 흑백 지대에서 쓰는 인사래.”
“친구는 따로 면담을 다시 해야겠구나. 어쨌든, 손가락은 접고 여기를 볼래? 자 뭐가 보이니.”
“손가락?”
“아니, 좀 더 자세히 보렴.”
데미안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뭔가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얼음!”
“보이니?”
“응, 안 보이는데 보여.”
레오디스의 손끝에 피어오른 건 육각형 형태의 얼음 결정이었다. 흔히 눈꽃이라 부르는 그것.
“그럼 이제부터 잘 보렴. 아들이 이걸 좇는다면…… 어쩌면, 친구도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니까.”
레오디스는 손끝에 피어오른 눈꽃에 심상을 가미했다. 비록, 주된 속성이 빙결이 아니라 한계가 있었지만 부족한 부분은 마도서의 공능으로 채웠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은…….
빙정(氷精)
모든 것을 얼리는 혹한.
데미안이 물었다.
“이게…… 뭐야?”
“글쎄. 잘 모르겠구나. 아빠도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서.”
다만, 아스터가 피워 올렸던 불꽃. 그것을 보고 떠오른 심상을 얼음 마법에 결합시켰다. 만약, 이름을 붙인다면 아스터의 마법과 반대가 되어야겠지.
“그럼 내가 지어도 돼?”
“그럴래?”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블리자드야.”
“블리자드?”
“응.”
레오디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블리자드라 하면 추위와 강한 눈보라를 동반하는 강풍을 의미하는데, 얼음 결정을 두고 블리자드라 한다니?
하지만.
“…….”
눈보라를 눈에 담고 있는 데미안의 머릿속에는 훤히 보였다.
훗날, 저 얼음 결정이 온전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지.
……그렇게, 별빛이 쏟아지는 밤.
데미안은 한 걸음 나아갔다.
초월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