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단골 멘트지, 아주?
쉽지 않다.
그리 여겼지만, 사실 별달리 심각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스터는 사방에서 엄습해 들어오는 어둠을 느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역시.’
파직, 파지직―!
손아귀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스파크.
마력을 집어삼키던 어둠이 미약해졌다. 여전히 마력을 운용하기는 힘겨웠지만, 확연히 약해진 제약.
술자인 9장로가 전투에 나섬으로써 결계의 규칙이 약해진 것이다.
인과율의 법칙이라나 뭐라나.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너, 실수한 거야.”
“……!”
9장로는 눈앞까지 짓쳐들어온 아스터의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어찌나 놀랐는지 장막처럼 두르고 있던 어둠이 일렁거렸다.
“어떻…… 컥!”
파지직!
면상으로 틀어박히는 무지막지한 일격. 힘없이 날아간 9장로가 물수제비처럼 두어 차례 튕겨 올랐다.
‘무슨……!’
공간을 건너뛴 듯한 접근.
혼란스러웠지만 9장로는 곧 정신을 추슬렀다. 아니, 추스르려 했다.
“맞긴 하는구나?”
“……!”
아스터는 9장로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어둠이 점액처럼 달라붙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쾅! 쾅! 쾅! 쾅!
“커, 커억……!”
9장로는 원시적인 폭력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고상함도, 신비도 없다.
격이 높은 마법을 적중시키기 위한 고도의 수 싸움은커녕 최소한의 교양마저 내팽개친 전투.
“이, 미개한 것이―!”
9장로가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치자 사방에서 어둠이 몰려들었다. 아스터는 몰려드는 어둠에 역장을 피워 올렸다.
카각, 카가가가각―!
갈가리 찢어발기려는 어둠의 칼날과 역장의 충돌.
그러는 와중에도 아스터는 9장로의 목을 놓지 않고 있었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싸움은 기세지.’
기세를 넘기면?
그때부터는 끝이다.
특히나 9장로처럼 알 수 없는 술수를 쓰는 놈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최소한 팔 하나.’
그 정도는 내줄 각오가 있어야 했다.
뭐, 이게 비유적인 표현이 될지, 실제 팔 하나가 될지는 그때 가 봐야 아는 일이겠지만.
근데, 그건 그렇고.
“이게 다야?”
“감히…… 컥!”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이게 다면…….”
‘……이만 뒈지라고.’
뒷말은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설렁설렁 즐기는 전투가 아니었으니까.
쾅!
아스터는 한 차례 세게 9장로의 대가리를 지면에 처박고는 그대로 내리눌렀다. 체중을 싣자―
우득!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파직, 파지직―!
손아귀에서 일렁거리는 스파크.
확실하게 끝내려면 폭멸이 좋겠지만, 어둠의 훼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최대는 충돌식인데…….
‘……충분하지.’
아스터는 코어의 마력을 뽑아 충돌식을 만들었다. 그렇게 뽑아낸 마력의 속성은…… 화(火).
화 속성의 마력은 충돌시키면 그 기세가 일반 마력과는 비할 수 없다.
적화의 비전이 경지에 오른 지금은 특히 더.
파직, 파지직―
충돌식의 뇌전이 극에 달했다.
이윽고…….
쩌엉!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번져 나갔다.
‘……해치웠나?’ 따위의 말은 내뱉지 않았다.
왜냐.
해치우지 못한 게 빤히 보였으니까.
아스터는 대가리를 잃고 축 늘어진 9장로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털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눈에 담았다.
스슥, 스스슥…….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실루엣.
하나같이 같은 모습이다.
……9장로.
물론, ‘같다’ 해 봐야 어둠을 두르고 있어서 새까만 모습이 같다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이게 다 몇이야?”
다시 또 환상인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다 실체였다.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단골 멘트지, 아주?”
하나 된 9장로들의 목소리에 아스터가 이죽거리자, 곧 어둠이 들끓었다. 이윽고…….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들끓는 어둠 속에서 9장로들이 짓쳐 들었다.
찢기는 살점과 푸른 뇌전.
어둠이 출렁이며 피가 흘렀다.
* * *
한편, 그 시각.
카하자르와 함께 거닐던 파헤른은 자리에 멈춰 서서 전방을 눈에 담았다.
뒤따르던 카하자르가 그 곁에 다가와 눈을 빛냈다.
“……저긴가?”
저 복도 끝.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누가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그 계단을 마주하는 순간 카하자르는 깨달을 수 있었다.
뭐가 있어도, 저 밑에 있다.
“그럼, 가…….”
“그만.”
“……?”
별생각 없이 나아가려던 카하자르는 걸음을 멈추고 파헤른을 바라봤다. 파헤른은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냉막했다.
하지만, 카하자르는 그 표정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짜증?’
분명했다.
파헤른은 뭔가 언짢음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왜?
의문을 갖는 순간.
파스스…….
계단 앞으로 웬 실루엣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하자르는 그 실루엣에 눈매를 좁혔다.
검은 로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면 흔하디흔한 떠돌이 마법사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당연하게도 평범한 떠돌이 마법사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정체가 무엇일까.
허밋도 아니고.
답은 하나였다.
“……살바티움.”
“바로 맞추셨소, 가주 카하자르. 아, 이 몸의 소개를 해야 하는가? 이 몸은 살바티움의 열한 번째 장로직을 맡는 자요. 이름은 썩 대단치 않으니, 11장로라 불러 주시길.”
11장로는 예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카하자르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로브 밖으로 드러난 11장로의 손은 부드럽고 하얬다. 마치, 귀족가의 영예처럼.
너무도 이질적인 모습에 옅은 괴리감을 느끼는 가운데.
귓가로 11장로의 목소리가 나직이 파고들었다.
“정중히 청하오니, 두 가주께서는 물러가 주시길. 살바티움은 두 가주를 적대할 마음이 없으니 말이오.”
잘 들어 보니 목소리 역시도 여성의 그것이었다. 억지로 감춰 뒀을 뿐.
하지만, 의아함도 잠시.
카하자르는 안색을 굳혔다.
……물러가라?
글쎄.
“그러지 말고, 그대들이 물러가는 게 어떻겠나. 우리 쿠틀란가(家)야말로, 살바티움과는 은원이 없다네. 제국과는 달리 말이지.”
은근한 협박이었다.
물러가지 않으면, 제국의 살바티움 절멸에 한 손 보태겠다는.
“그러기에는 이쪽 사정도 복잡해서 말이오.”
“뭔가 중요한 거라도 있나 보군.”
“부정하지는 않겠소.”
11장로는 은근한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꽤나 단단한 모습이었는데, 카하자르는 그런 그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말해 보게. 혹시 아나? 이해 관계를 일치시킬 수도 있을지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만.”
“무엇을 바라기에?”
은근히 떠보려던 카하자르는 더 이상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다.
도대체 살바티움이 무엇을 노리고 생츄어리로 들어온 것인지.
그 물음에 11장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두통이 이는 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청하겠소. 그냥 물러가 줄 수는 없는 거요?”
“그대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만 말해 보게.”
“관계가 없는 물건일 텐데도?”
“호기심이란 그런 법이지.”
“……후우.”
11장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힐끗 파헤른을 바라봤다.
‘어찌해야 하나.’
파헤른이 4장로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 다섯 번째 방호 체계, 흑색 마법진을 발동시키면 그 파헤른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을걸세.
4장로가 파헤른의 뒤통수를 때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즉, 아군이지만 마냥 아군으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건데, 11장로가 부담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과연, 파헤른이라고 4장로의 속셈을 짐작하지 못할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방호 체계를 가동시키는데?’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
“파헤른, 어쩌겠나.”
카하자르의 목소리에 11장로는 쫑긋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파헤른이 어찌 대답하냐에 따라서, 그 속내를 유추해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어차피, 시간만 끌면 된다.’
시간을 끌면, 4장로가 흑색 마법진을 발동시킬 것이다.
그리되면 제아무리 아크 메이지라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겠지.
그리고 이쪽은 그 틈을 타서 역천의 파편을 가지고 도망가면,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다.
그러니.
‘……부디.’
11장로는 간절한 눈빛으로 파헤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입에서 카하자르의 말에 대한 부정이…… 아니, 하다못해 애매모호한 말이라도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1장로의 체감으로 꽤나 긴 시간이 지났을 무렵, 파헤른이 연초를 꺼내 물었다.
치익…….
타들어 가는 끄트머리.
희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번졌다.
“어디 한번, 막아 보거라.”
단 한마디.
그 한마디에 11장로는 짙은 한숨을 토해 버렸다.
“후우,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군.”
“그게 인생이지.”
카하자르의 이죽거림에 11장로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후회할 거요.”
11장로가 단검을 땅에 박았다.
콰득!
사방으로 번지는 흑마력.
“……흠?”
“…….”
카하자르는 눈매를 좁혔다. 마력을 끌어올려 급히 몰아내려 했지만, 의외로 흑마력은 반발 없이 흩어졌다.
하지만, 변화는 그 직후였다.
퉁―!
바닥에 박아 넣은 단검으로부터 기묘한 술식들이 떠올라 사방을 채웠다. 그것은 언뜻 보면 벌레 같기도 했는데…….
콰드득, 콰득!
술식들 중 일부는 족쇄가 되어 카하자르와 파헤른을 옭아맸다.
“우습군. 한낱 아티팩트로 이 몸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카하자르는 콧방귀를 뀌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백색 마법진의 억압이 있다고는 하나, 아티팩트의 주박 따위에 얽매일 자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파직, 파지직―!
“……허?”
카하자르는 헛웃음을 토했다.
깨트릴 생각으로 마력을 쏟아부었건만, 주박은 깨지기는커녕 마력을 집어삼키고 몸집을 불렸다.
뭐라 해야 할까.
꼭…….
‘……불을 끄겠답시고 기름을 부은 격이군.’
그렇다면, 초월의 지평에서는―
“초월에 진입할 생각이라면 멈추는 게 좋을 것이오. 결코 좋은 꼴은 보지 못할 테니까.”
“무슨…….”
11장로의 충고에 카하자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파헤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직후.
“대고원의 물건인가?”
“비슷하지.”
“……흠.”
카하자르는 옅은 침음성을 흘렸다.
‘대고원’과 ‘초월’.
두 키워드만으로도, 이 아티팩트가 어떤 식으로 작동할지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고원의 주술사들은 중첩시킨 저주로, 잘게 쪼개진 시간 속에서 무한에 가까운 고통을 선사한다.
이 주박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는…….’
카하자르가 움직이려는 그때.
“가주 카하자르, 얌전히 있으시오. 피차 힘 빼서 좋을 일이 무엇이 있을까.”
“부탁은 공손해야 부탁인 법인데…….”
“부탁인 것 같소?”
카하자르는 11장로의 물음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곧장 초월에 진입했다.
저주? 고통?
그것이 무에 어쨌단 말인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시건방을 떨고 있구나.”
첨예한 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카하자르의 시간이 잘게 쪼개졌다.
쿠그그그그―!
무지막지한 마력의 흐름에 생츄어리가 비명을 토했다.
* * *
……그렇게 9장로와 11장로가 대마법사들을 막아서고 있는 그 시각.
“…….”
흑색 마법진을 가동시키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4장로는 어느 석실에 우두커니 서서 벽면의 글자를 훑었다.
벽면에 새겨진 글자에 적힌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생츄어리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좋은 육체로구나.]
벽면의 글귀를 읽던 4장로는 시선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목소리의 정체는 두 명의 마법사였다.
……아스터가 해님과 달님이라 칭하던 그들.
그들은 탐욕스러운 눈동자로 4장로를 바라봤다.
투명하고, 탁한 눈동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