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이유
쏴아아아아―!
잠깐 비가 그쳤던 게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대수림으로는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대수림의 우기(雨期).
숙련된 길잡이도 얌전히 집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시기다.
노름빚에 허덕이는 길잡이도 마찬가지다. 우기라 하면, 빚쟁이도 이해해 주며 늘어나는 이자나 잘 갚으라고 다독여 준다.
다른 지역의 빚쟁이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린타운의 빚쟁이들은 그렇다.
한데, 그 우기에 대수림으로 들어간 불행한 길잡이가 한 명 있었다.
그 이름은 마크롱.
그는 일찍이 대수림을 오가는 호위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패스파인딩을 배운 후 전문 길잡이로 전직을 한 케이스였는데, ‘레일리’라는 불세출의 길잡이가 은퇴를 한 지금 마크롱은 자타공인 그린타운의 일류 패스파인더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괴인들에게 붙잡힌 것은.
“그러니까, 이제 여기서는 내가 먼저 태우고…….”
“차라리 내가 먼저 베겠다. 그리고 이 뒤에…….”
“아냐. 기다려 봐. 내가 좋은 생각이 있어.”
3, 4, 5.
가면을 쓴 괴한들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마크롱은 그 광경을 텅 빈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용이 된 지 며칠.
마크롱은 아는 것이다.
저 논의가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 들어 봐. 일단은…….”
3번 가면을 쓴 마법사가 무어라 무어라 떠들자, 4번 5번 가면을 쓴 자들이 감탄사를 터트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그럼 해 본다?”
“그래, 해 봐.”
“기대하마.”
앞으로 나서는 3번 가면.
마크롱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3번이군’하고 중얼거리며 배낭에서 방한 용품을 꺼내 걸쳤다.
체온을 유지해 주는 보온석과 몇 가지 털 옷.
그 밖의 기타 등등.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먼저 시작은…….”
3번 가면의 중얼거림과 함께 뭔가가 번져 나갔다.
‘뭔가’는 마력이었다. 그리고 그 마력에 자극받은 마나(Mana)였다. 하지만, 경지가 낮은 마크롱으로서는 마나인지 마력인지도 알 수 없었다.
좀 전에 말했다시피 그저 ‘뭔가’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릴 뿐.
그렇게, 미세한 파동이 방향성을 갖고 번져 나갔다.
방향은…….
‘……전방.’
곧 3번이 고개를 돌렸다.
“마크롱, 이쪽 맞지? 아, 안 보이나? 자, 보여 줄게.”
곧 대기 중에 번져 간 마력이 반짝반짝 색채를 머금었다. 그것은 꼭 밤하늘의 은하수 같았다.
그 은하수는 마크롱이 어렴풋이 느꼈던 것처럼 앞으로 뻗어 나가 있었는데, 마크롱은 그 방향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좋았어. 그리고…….”
이번에 3번이 시선을 돌린 건 저 위쪽이었다.
3번…… 데미안의 시선을 받은 용용이는 먼 하늘 위에서도 용케 그 의도를 알아채고는 우렁차게 울어 재꼈다.
그오오오오―!
마크롱이 아무리 뛰어난 길잡이라 해도, 인간인 이상 일직선으로 쭉 걸어 나가는 건 불가능한 일.
용용이의 역할은 방향이 틀어지지 않았는지 보는 것이었다.
“폼 더럽게 잡네.”
“냅둬라.”
아스터의 툴툴거림에 샤인이 눈총을 줬다. 아스터는 그 눈빛에 고개를 살래 저었다.
한편, 데미안은 집중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좀 전의 울음소리는 방향이 틀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 남은 것은 이제 마법을 발현하는 것뿐.
색이 다른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마크롱은 이 순간이 가장 신비로웠다.
뭐라 해야 할까.
‘영혼이 빨려 드는 기분.’
분명,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듯하다. 이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본능으로도 어렴풋하게밖에 살필 수 없는 변화가 중첩되는 느낌.
이것이 경지가 낮은 이가 ‘초월’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상이었다.
한없이 신비하고.
한없이 경이로운.
하지만, 무엇이 신비하고 무엇이 경이로운지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애매모호한 기분.
그렇게, 마크롱이 경이에 빠져 있을 때.
변화가 일었다.
쩍, 쩌적…….
첫 시작은 나직한 파열음이었다.
살얼음이 얼어들어 가는 듯 옅은 소리는 곧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변화가 육안으로 포착된 것도 그쯤이었다.
쩌적, 저저저적.
하얗게 얼어 가는 대지.
나무.
나뭇잎.
넝쿨.
심지어 수풀과 수풀 사이 비를 피하고 있던 몬스터들도, 이름 모를 곤충들도, 그 밖에도…….
마력이 깔려 있던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는다.
……마크롱은 알지 못했지만, 그저 표면이 얼어붙는 게 아니었다.
데미안의 마력은 땅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빙(氷)과 수(水)는 결국 한 갈래이니, 얼음 계열의 마법을 다루는 데미안이 땅속으로 파고드는 빗물에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땅속으로 들어간 마력은 뿌리를 타고 나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빨려 들어간 마력은 점차 나무 속 수분을 타고 번져 나갔다.
그렇게…….
쩍, 쩌적―!
얼어붙는 것이다.
그 뿌리부터.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해서 가장 바깥에 이르기까지.
“아…….”
그 황홀한 광경에 마크롱이 나직한 탄성을 토해 낼 때.
데미안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샤인이 앞으로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과연, 훌륭하구나.”
마검 프로티우스를 꼬나 들고, 초월에 진입한다. 동시에 ‘결’을 본다. 얼어붙은 나무들의 ‘결’. ‘결’이 뭉치는 중심.
하나의 나무에 하나의 중심이 있고.
경로상에는 수천 그루의 나무가 있다.
즉, 꿰뚫어야 할 중심은…….
‘……수천.’
하지만, 샤인에게 필요한 검격은 오직 단 한 번.
그 이상의 검격은 필요치 않으니.
쩌엉―!
파열음이 울려 퍼지고.
툭, 투둑…….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나무로부터 균열이 일었다. 그 나무를 시작으로 균열은 점차 번져 나갔다.
이윽고.
쿵, 쿠구궁―.
무너져 내리는 나무.
나무가 무너진 자리로는 길이 뚫려 있었다.
길고…… 넓은 대로가.
“자, 이제 가자꾸나.”
세 괴한은 당연하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마크롱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뒤로 따라붙었다.
아니, 몇 걸음 따라붙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저 뒤.
지나온 길이 뻥 뚫려 있다.
‘이게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까?
아니, 멍청한 의문이었다.
눈앞에 엄연한 현실이 펼쳐져 있는데.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거다.
지난 세월, 수천 년간 인간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던 자연의 땅 하메른 대수림에 길이 들어서고 있다.
‘어쩌면…… 많은 게 변할 수도 있어.’
대수림과 함께 호흡해 온 마크롱은 다가올 변화를 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변화’를 남들보다 빨리 알아챈 것이,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킨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행운으로 작용할 것인지.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어째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대수림에 길이 들어서지 못했는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난 저녁이었다.
* * *
데미안이 길을 만든 다음 날 저녁.
쏴아아아―!
아스터는 역장을 때리는 비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일단, 여정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두 명의 대마법사, 한 명의 마스터 나이트.
셋이 번갈아 가면서 길을 열었다.
만약, 셋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힘들었을 일이다.
하메른 대수림은 그만큼 넓었고, 둘뿐이었다면 지금보다 신경 쓸 게 몇 배는 더 많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마도서와 마검.’
이 두 기물의 도움이 상당히 컸다.
어제 데미안의 마법이 그 광범위한 영역에 작용하면서도 그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마도서 덕분.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가 하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이보다 빨리 갈 수는 없다고 했지.’
한데도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냐.
지금 이 순간에도 첸비는 고대종인지 뭐시긴지에 쫓기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설령 첸비가 고대종에게 쫓기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 해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더 빨리 가고 싶은데.
“쯧.”
아스터는 불만스럽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냥, 확 용용이를 타고 들어가?’
대강 근처에 온 것도 같고.
저공비행을 하면서 기감으로 훑으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스터는 지체하지 않고 길잡이 마크롱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렸다. 하지만, 마크롱의 대답은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쯤 오면 그렇게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고대종의 영역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하늘에서만 봐서는 알기 힘듭니다. 잘못하면,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서 처음부터 찾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흠.”
“말씀드렸다시피, 이만하면 충분히 빠른 편입니다. 길잡이 레일리가 오지 않는 이상 이게 최선입니다.”
“길잡이 레일리는 개뿔.”
아스터는 모르는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되기 시작한 레일리의 존재에 못마땅함을 느꼈다.
대수림에 계속 남았으면 실력은 좋지만 믿음직스럽지는 못한 뺀질이 패스파인더쯤으로 불렸을 텐데.
어쨌든.
“흐음. 결국 조급함을 버리라는 건데.”
“차라리, 여기서부터는 제 방식대로 나아가면 어떨까 합니다.”
“그게 더 빨라?”
“예, 이래저래 돌아가야 할 구간은 다 지난 것 같습니다. 폭발 꽃 지대도 지났고, 늪도 지났습니다. 식인 식물 군락도 통과했죠.”
“그래서 이제는 굳이 길을 뚫는 것보다 그냥 길을 찾아서 가는 게 더 빠르다?”
“예, 아마도요.”
“흠.”
아스터는 잠시 고민했다.
길을 일직선으로 뚫으며 나아가는 것과, 길을 뚫지 않고 나아가는 것.
어느 쪽이 더 놓을 것인가.
‘흠.’
하늘은 날 수 있지만, 대수림의 울창한 초록은 하늘과 땅을 단절시켜 놨다. 그리고 길잡이는 땅을 살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길잡이가 하늘에서도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뭐, 어쩔 수 없나.’
아스터는 상념을 갈무리했다. 쓸데없는 심력 소모는 이만하면 충분했다.
이 이상 고민한다고 방법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한데, 그건 그렇고.
“야.”
[부른다, 왜?]
“네 쫄따구는 밤마다 맨날 어디 가냐.”
[……쫄따구?]
“용용이.”
와이번은 아스터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꼬리가 어색하게 툭툭 땅을 때렸다.
[른다, 모.]
“모른다고?”
[렇다, 그.]
“말은 또 왜 그래?”
아스터는 날이 갈수록 해괴해지는 와이번의 말투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그래, 제 놈들도 비밀이 있겠지.’
어쨌든.
“쫄따구 간수 잘해. 응? 사고 치면, 알지?”
[겠다, 알.]
사고만 안 치면 된다. 사고만.
아스터는 그렇게 밤마다 사라지는 용용이 건을 마무리했다.
내일 또 길을 나서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길을 뚫으면서 가는 건 제아무리 대마법사라 해도 피곤한 작업이었으니까.
[잔다?]
“렇다, 그.”
아스터가 침낭으로 들어가자 와이번이 파다닥 날아올라 파고들었다. 아스터는 통통해진 와이번을 베개 삼아 베고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
……그리고.
“……일어나라.”
‘손님’의 ‘방문’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샤인이었다.
샤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검 프로티우스를 손에 쥐고는 저 먼 어둠을 바라보았다.
수천 년의 세월.
하메른 대수림이 문명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세 명의 초월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