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그럼 시험해 볼까?
먼저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다시 아돌프부터.
“흠흠, 돌란페가(家)의 1공자 아돌프요.”
“파천이오. 이름은 그리 중요한 자리가 아닐 듯싶군.”
“첫 번째 검이오.”
“……시온.”
한 차례 소개가 끝나자 네 사람의 시선은 아스터 일행에게로 옮겨졌다. 아스터 쪽에서 먼저 입을 연 건 데미안이었다.
“난 데미…… 아니지. 드레이크스라고 해. 마탑의 최상층이 내 거야.”
데미안은 어느새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이마에 숫자가 적히지 않은 평범한 가면이었다.
그다음은 샤인.
“검원주다.”
“난…… 음, 첸비.”
“다들 별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를…… 힉스터요.”
“난 마탑주.”
[궁금한가? 나, 위대한 와이번.]
그렇게 모든 소개가 끝났을 때 아돌프가 슬쩍 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줬으면 하오만.”
“말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아돌프는 아스터, 샤인, 데미안을 가리키며 물음을 던졌다.
“가면은 계속 쓰고 있을 거요? 그 뭐냐, 저쪽 검원주 양반은 사실 아까 얼굴을 다 봤는데.”
파천과 격돌했을 때를 말하는 듯했는데.
그 말에 샤인과 데미안이 아스터를 바라봤다.
어찌하는 것이 좋겠냐는 시선이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고민할 필요 없는 사안이었다.
“벗지, 뭐.”
“흐음?”
샤인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으나, 아스터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
이제 와서는 정체를 감출 이유가 딱히 없었으니까.
‘애초에 <둥지>가 마탑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놈들도 없어졌고. 아카데미도 졸업을 했으니까.’
아, 그 전에.
[넌 쓰고 있고.]
[나? 왜?]
[넌, 씁…….]
[……겠다, 알.]
데미안은 시무룩해져서는 와이번의 말투를 따라 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과 샤인이야 그렇다 쳐도 블란도가(家)의 소가주가 마탑의 소속이라는 게 밝혀지면 어떤 영향이 생길지 몰랐으니까.
아니, 근데 가만.
‘애초에 쟤는 마탑 소속이 아닌데?’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정리를 하냐는 건데.’
아스터는 착잡한 표정으로 첫 번째 검을 바라보고 있는 시온을 일별하고는 첸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계속 진행하라는 의미.
“좋아, 그럼 다들 이 자리에 온 사정을 말해 주시겠어요? 먼저, 아돌프 소가주님부터.”
아돌프를 시작으로 각자 사정을 늘어놓았다.
“난 로르텔의 소가주가 흑기사 프로첸에게 죽기 전에 자웅을 겨루기 위해서 오고 있었네.”
“난 그런 소가주님의 호위요.”
파천은 ‘사실은 감시지만, 어쨌든.’하며 말을 끝맺었고.
시온은 ‘사칭범을 잡기 위해서’, 첫 번째 검은 ‘소가주로부터 마검을 회수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다시 또 넷의 시선이 아스터 일행에게로 모였다.
먼저 입을 연 건 첸비였다.
“나랑 쟤, 그리고 쟤는 그냥 따라온 거예요.”
첫 번째 쟤는 데미안, 두 번째 쟤는 힉스터다.
하면, 누굴 따라왔냐.
……일행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스터와 샤인에게로 돌아갔다.
사실, 이들로서는 가장 궁금한 게 아스터와 샤인의 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명가(名家)의 소가주를, 그것도 반역 누명을 쓰고 쫓기는 이를 사칭하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행위였으니까.
그런 의문 속에서 아스터는 담담히 대꾸했다.
“소가주가 걱정돼서.”
샤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걱정돼?’
데미안도 고개를 갸웃했다.
첸비도, 힉스터도.
와이번까지도.
하지만, 아스터는 뻔뻔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명색이 로르텔의 우방이고. 그 인연을 맺어 준 게 누구냐고. 소가주 아니야. 그런데, 그런 소가주가 반역을 저질렀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그럴 만한 위인이 아닌데 그랬다니까 어찌 된 사정인가 알아보려고 했지.”
“그래서…… 이 몸을 사칭하여 끌어들인 것이다?”
“그렇지. 로르텔도 못 잡고 있는 소가주를 우리가 무슨 수로 잡아? 소가주를 사칭하다 보면 소가주가 오든 로르텔이 오든 올 거라 생각했지. 소가주가 오면 좋은 거고, 로르텔이 와도…… 뭐, 사정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았겠어?”
듣기로는 그럴싸한 이유였다.
다만, 유난히 긴 혓바닥이 께름칙할 뿐.
시온도 바보는 아닌지라 저 마탑주가 그런 순수한 의도로 움직일 위인이 아니라는 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내 편이라는 것 아닌가.’
지금은 그게 중요하다.
그것이.
시온이 그쯤 생각했을 때, 다시 첸비가 나섰다.
“저, 그러면 제가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 본 결과가 있는데요.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첸비의 말이 끝날 즈음 샤인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파천이 속삭였다.
‘소가주, 듣겠다 하시오.’
‘……알겠네.’
그 둘을 시작으로 좌중의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첸비는 그 질서 정연함에 만족스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부분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우선.
“그…… 실례지만 우선 돌란페가(家) 분들은 이 상황과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이후 대화가 끝날 때까지 발언권을 앗아 가고 싶은데. 괜찮겠죠?”
샤인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파천이 답했다.
“소가주의 혀를 잘라도 좋소.”
“……자네.”
“농담이오, 소가주.”
파천을 빤히 응시하던 아돌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첸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후. 좋네. 다만,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은 있지 않나 싶네만. 이래 봬도, 나도 저 친구 목숨에 지분이 있거든.”
말로는 시온의 목숨 지분을 운운하지만, 자리에 남아 어떻게든 힘이 돼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첸비는 그 요청에 시온을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네. 그는 어느 정도 알 자격이 있지.”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어쨌든, 돌란페가(家) 분들은 발언권을 박탈할게요.”
그 말에 파천은 양손으로 텁 입을 막았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아스터, 샤인, 데미안, 힉스터, 그리고 와이번.
첸비는 슬쩍 돌아봤다.
“데미…… 아니, 드레이크스랑? 힉스터, 그리고…….”
[나, 위대한 와이번.]
“어쨌든, 이렇게 셋도 발언권을 박탈하고…….”
“이 몸 역시 발언권을 포기하겠다. 어차피, 이런 일은 저 간악한 놈이 전문이니까.”
그렇게, 샤인까지 발언권을 포기하자 남은 건 딱 셋이었다.
로르텔의 첫 번째 검.
반역의 시온.
마탑의 아스터.
첸비는 그 셋을 바라보다가 운을 뗐다.
“먼저 발언하실 분?”
첫 번째 검 하멜란이 손을 들었다.
“이 늙은이가 먼저 발언하겠네.”
“네, 하세요.”
발언권을 얻은 하멜란은 불꽃 너머 소가주를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래저래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기는 했지만, 결국 하멜란이 해야 할 건 달라지지 않았다.
“전(前) 소가주께서는 로르텔의 신물인 마검을 반납하시오. 그러면 옛정을 보아 이대로 넘어가 드리리다. 이것이 이 늙은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
시온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여기 있소.”
시온은 의외로 순순히 마검을 넘겼다.
왜냐.
어차피, 마검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기사로서의 명예이다.
마검은 그 명예를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가져온 것일 뿐 그 자체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스터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샤인 경.”
“오냐.”
첸비의 신호에 샤인이 냅다 아스터의 대가리를 후려갈겼다.
“……컥!”
“발언권을 얻고 말해라.”
“…….”
아스터는 잠시 샤인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응, 말해.”
첸비의 허락.
아스터는 샤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뭐야. 내가 궁금해서 그런데, 마검이 불에 타던가?”
“……?”
첸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인데, 아스터는 그런 첸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스터의 질문은 첸비를 향한 게 아니었다.
하면, 그 질문의 주인공은 누구냐.
단 한 명이었다.
……하멜란.
“만약에? 하멜란 경이? 진짜 마검만 노리고 온 거였으면? 소가주가 죽어도 상관없지 않았나? 어차피 반역자잖아?”
하멜란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탑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혹시 홀렌드가 마검을 들고 튈까 봐? 근데, 선배도 봤잖수? 그놈 꽁지 빠져라 튀던 거. 아주 따라잡지도 못하게 튀던데. 그러면 그냥 느긋하게 걸어가서 마검을 회수하면 되지 않냐 이거야.”
아스터가 궁금한 건 이런 거다.
어차피 마검이 목적이면.
“왜 그렇게 죽어라 뛰셨지.”
“…….”
“아주, 뼈가 다 삭도록 뛰어가시던데. 난 또, 반역자가 아니라 무슨 가문의 보물이라도 지키러 가는 줄 알았어.”
“…….”
하멜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스터의 저의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던 시온도 그 눈동자의 떨림을 포착했다.
“하멜란 경, 이게 다 무슨 소리요.”
“…….”
하멜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시온은 가늘게 뜬 눈으로 하멜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시금 희미한 희망의 자락을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아마 하멜란이 진실을 말하면, 시온은 그 붙잡은 희망의 자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 터.
하지만, 하멜란이 택한 것은 절반의 진실이었다.
“……정 때문이라면 믿겠는가?”
“정?”
아스터의 물음에 하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반역을 저질렀다지만, 한때는 작은 주인이었네. 내 손주보다도 가까이서 자라는 걸 지켜봐 왔는데, 어찌 한 번에 그 정을 털어 버리겠나.”
“아하, 그러니까…….”
“기사도 사람이네.”
“그래서, 반역을 눈감아 줄 정도로 소가주를 아끼셨다?”
“그랬지. 하나, 탑주. 분명 말하지 않았나? ‘소가주’라는 표현은 지양해 달라고.”
“아하, 미안.”
아스터는 산뜻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대화를 지켜보는 시온의 심정은 결코 산뜻할 수 없었다.
벌써 몇 번째 낙담인지.
‘……난, 이토록 나약한 자였나.’
기사이며 검사.
명예를 숭상하며 마음을 칼처럼 벼리겠다 생각했건만, 명예는 바닥에 떨어지고 칼처럼 벼렸다 여겼던 마음도 뭉툭하다는 걸 알아 버렸다.
이래서였나.
‘아버지께서 마음에 철(鐵)을 품으신 것은…….’
이래서.
사람의 마음을 가져서는 너무도 나약하기에?
하지만, 어찌해야 사람의 마음에 철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시온도 몇 번이고 노력해 봤지만 불가능했다. 로르텔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그 성정은 부드럽고 따뜻한 어머니의 것을 더 많이 닮았기에.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그래, 난 연약하다.’
소가주는 금세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대신,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드러운 철일수록 두드렸을 때 단단해지는 법.’
이 흔들림도 이겨 낸다면 결국 성장의 밑거름이다.
더 높이 나아가고, 더 단단해질 수 있겠지.
분명, 그렇겠지.
‘분명…….’
한데, 그때였다.
“그래? 그럼 시험해 볼까?”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
그에 시온이 고개를 들었을 때, 시온은 눈앞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마력의 덩어리다. 소름이 돋을 만큼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 동시에 그만큼 파괴적이기까지 한…….
이게 뭔지 안다.
탑주의 것.
거기까지 파악했을 때.
“그럼, 죽인다? 우방이잖아, 우리. 반역자 정도는 대신 죽여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들불 같은 살기가 일었다. 그리고 시온이 그 살기를 미쳐 느끼기도 전에.
쩌엉―!
평원으로 푸른 폭발이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