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달콤할 수밖에
만약, 자신이 로르텔과 같은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럼에도 답이 달라지지는 않았…….
‘……은 개뿔.’
달라지지 않을 수가 있나.
아스터는 저 강철과도 같던 사내가,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던 자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만드는 것은 데큘란이고, 신념은 그 흐름에 맞서라 한다.
하지만, 맞서면?
그 결과는?
데큘란이 ‘저놈들은 전쟁을 일으킨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 놈들이다!’라고 하면, 그 상황은 누가 감당하느냐 이 말이다.
신념의 대가로 이 한목숨 짓밟히는 건 그리 억울하지 않았다. 아니, 억울해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그 신념과 함께 스러질 마탑의 생명들은?
……그래서인 거다.
가주 무하드가 데큘란이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모든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대답은 그렇다 치고…… 소가주를 내쫓은 이유는? 뭡니까?”
[살아남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데큘란은 게걸스러운 뱀이고, 배가 터질 때까지 집어삼켜도 금세 배가 고파 먹잇감을 찾아 헤맬 게 뻔한 노릇이지.]
“……아하.”
이건 이해했다.
데큘란은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이번이라고 다를까?
무하드의 추측처럼 데큘란이 칭제를 성공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칭제를 성공하게 되면?
‘잠깐은 만족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겠지. 그나마 남은 명가(名家)들을 집어삼키려 할 거야.’
가주 무하드는 그것을 예견한 것이다.
한데.
“그거랑 소가주를 내쫓은 건……?”
[데큘란도 아예 멍청하지는 않아서 배가 찢어질 것 같은 먹이는 삼키지 않지. 즉, 덩치를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하면, 로르텔이 덩치를 키우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본 적 있나?]
아스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서 생각해 본 적 없는 화제였다. 하지만, 대답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명가(名家)가 몸집을 키우기 위해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칭제? 칭왕?”
이 경우에는 칭제니 칭왕이니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국가’를 설립하는 것만이 명가(名家)에게 있어 유일한 세력 확장법이라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한 아스터가 탄식을 터트렸다.
“아.”
[알겠나? 무엇이 문제인지?]
“아마도요?”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데큘란은 칭제할 수 있다. 아니, 데큘란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명가(名家)들은 하나의 가문으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었고, 지금으로써는 그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자원을 소모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의 데큘란이 아니더라도 명가(名家)들이 칭제니 칭왕이니 어쨌든 국호를 선포하는 것은 예견된 미래라는 사실.
하지만, ‘모든 명가’는 그러해도 되지만, 그래선 안 되는 명가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이 어디냐.
다름이 아니다.
‘……로르텔.’
어째서?
그 이유를 파고들자면 ‘기사’의 연원과 관련이 있다.
지금에서야 그 의미가 많이 희석되어 중요시 여기는 자들이 드물었지만, 기사의 제일 미덕은 다름 아닌 충성이었다.
한데, 보자.
로르텔의 기사들은 가주에게 충성을 바친다.
그렇다면…….
‘……가주는?’
가주 역시도 한 명의 기사일진데, 가주 본인은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는가.
원론적으로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옳으나, 이 명가(名家)라는 기형적으로 성장한 집단의 자존심은 자신의 주인이 황제에게 무릎 꿇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로르텔의 가주가 섬기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기사도(騎士道)
기사로서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를 섬긴다. 그리고 그것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로르텔이 기사의 가문인 것은, 가주가 가문 기사들의 절대적 충성을 받는 것은, 그리고 더 나아가 대륙의 기사들이 로르텔을 존중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한데 그런 로르텔의 주인이, 가주가, 데큘란과 함께 칭제를 한다.
기사도에 충성을 바치는 가주가 칭제를 하는 것인데, 이게 뭐가 문제냐.
다름이 아니다.
‘……황제는 충성을 바치는 존재가 아니니까.’
황제든 왕이든,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는 만인의 머리 위에 설 수 없는 법.
물론, 속국의 군주는 중추국의 군주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하지만, 기사들을 거느린 기사왕이 속국의 군주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로르텔이 칭제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고리타분하긴 한데.’
데큘란이라면 콧방귀를 뀌고 무시해도 아무런 일도 없다지만, 로르텔이 그러면 그간 쌓아 온 영향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게 되겠지.
‘근데, 생각해 보면 진짜 문제는 이 부분이 아니네.’
이거야 뭐…… 어찌어찌 잘 말하면 넘어갈 수도 있다.
애초에 기사도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도 봐주는데, 말만 잘 꾸미면 뭔들 안 될까.
진짜 문제는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 있었다.
그 과정은…….
‘……더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로르텔에도 트러블슈터와 같은 집단이 있다.
그 대표 격인 집단이 가주의 암중검이 된 그림자 기사단. 그리고 또 몇 개인가가 있었는데…….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
데큘란과는 달리, 로르텔은 스스로 지원한 자만 받아들이니까.
질적으로는 트러블슈터와 비교할 수 없으나, 수적으로는 트러블슈터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더러운 일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될 거라는 이야기.
잠깐은 숨길 수 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갈까.
그리고 그게 밝혀지면?
‘좋지 않지.’
권력의 근간이 되는 기사들의 인망을 잃는데.
그렇다면.
“소가주를 추방시킨 건…….”
[타락한 아비를 몰아낸 아들. 썩 괜찮은 그림이지.]
“미친.”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그러니까, 모든 악덕은 본인이 짊어지고, 제 아들에게는 깨끗하고 명예로운 왕좌를 물려 주겠다는 소리였는데…….
‘……그래, 일리가 있어.’
황제의 위든, 왕의 위든, 어쨌든 한 번 오른 자리를 무르라 하지는 않을 테니까. 시온은 그렇게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데큘란도 함부로 할 수가 없게 되겠지.
데큘란이 몸집을 불리고 내실을 정비하는 사이, 국가가 된 로르텔도 똑같은 과정을 거칠 테니까.
한데, 그 과정에서 시온은?
그 당사자는?
일방적인 호의.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미친 가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제안을 하도록 하지.]
“무슨 제안?”
[도와라. 타락한 아비를 몰아낸 아들, 그 곁에 서면 마탑도, 검원도 얻는 게 적지 않을 터. 제왕의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제법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보고 댁 아들이 아비의 목을 치는 걸 도와라?”
[젊은 기사를 도와 타락한 건국제를 몰아내라는 말이다.]
……아스터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무미건조한 그 목소리는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차분했다.
하지만, 되레 그 차분함이 증명하고 있다.
그 말이 진심임을.
그러니…….
[타락한 건국제를 몰아낸 새 황제, 그 곁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은 작지 않다. 또한 제국이 된 로르텔은 그대와 마탑을 지키겠지. 설령 그 상대가 데큘란이라 하여도. 어떤가. 이만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을 터인데.]
유혹은 달콤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게도.
* * *
저 먼 평원.
샤인은 지평선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아스터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흐음.”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은 건가?
엿듣고자 하면 들을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간악한 것이 소리를 차단한지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뿐이냐. 입술 모양이 읽힐 걸 염려했는지 등까지 돌린 채 있었으니.
샤인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
물론, 아스터를 기다리는 건 샤인뿐만이 아니었다.
“흐음, 상황이 제법 재밌게 흘러갈 것 같구려, 소가주.”
“파천, 그대는 아가리를 좀 여무는 게 좋을 것 같네. 눈치가 없어도 이리 없을 수가 있나.”
“그래서, 소가주는 재미없을 것 같다, 이 말이오?”
“그건 아니네만…….”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돌란페의 두 명은 현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고.
이는 데미안, 첸비, 힉스터 역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동부 대륙 제일의 검술 명가(名家) 로르텔의 일이었으니, 관심이 안 갈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아스터를 가장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시온.
시온은 착잡한 눈동자로 저 멀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스터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대체 왜.’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에게 반역의 누명을 씌운 건 첫 번째 검이 아니었다.
바로 가주이신 아버지.
하면, 아버지는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누명을 씌우셨을까.
자신이 가문을 물려받는 게 마땅치 않아서? 그러니까, 자신이 가문을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 판단하신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이런 수를 쓰실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시온의 생각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마음 같아서는 첫 번째 검을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깨어난 이후 시종일관 눈을 감고 침묵으로 상황을 흘려보내는 모습을 보면 어찌해도 입을 열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남은 건 아스터였는데…….
“왔느냐.”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는 검원주의 목소리에 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대상은 탑주.
한데, 왜일까.
탑주의 눈동자는 어딘지 착잡해 보였다.
“……탑주?”
“…….”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시온은 재차 물었으나 아스터는 침묵했다. 대신 빤한 시선으로 시온을 말없이 응시할 뿐.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스터가 입을 열었다.
“하나, 타락한 황제를 몰아낸 2대 황제가 된다.”
“……?”
“둘, 황제고 자시고 모르겠고, 착한 아들이 된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시온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아스터는 시온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 나갔다.
“첫 번째를 선택하면 본인은 힘들겠지만 본인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행복할 수가 있지. 그러니까, 여기서 ‘함께하는 모든 이들’은 로르텔을 뜻해. 근데, 두 번째를 선택하면…… 음, 뭐라 해야 할까.”
아스터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본인은 좋아. 근데 로르텔이 많이 힘들어지겠지. 어쩌면 몰락을 생각해야 할 수도 있어.”
아스터가 생각하기에 쟁점은 이거였다.
‘개인’이냐 ‘가문’이냐.
본래, 가주 무하드는 시온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 했으나, 아스터는 그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왜냐.
‘솔직히, 흔들리는 제안이었어.’
만약,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면, 무조건 무하드의 말을 따를 정도.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어째서?
그야…….
‘이 길의 선두는 내가 아니니까.’
이 길은 결국 소가주 시온이 걷는 길이다.
그러니, 그가 선택하는 것이 옳다.
그런 마음인데…….
“만약, 소가주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어?”
“……중요한 질문인가?”
“아마도?”
“으음.”
시온은 눈매를 좁혔다. 시온도 바보가 아니다. 당연히, 이 질문이 자신의 현 상황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시온의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길이 더 옳은가?”
“……뭐?”
“난 옳은 길을 가겠네. 비록 그것이 로르텔의 멸망을 뜻하더라도.”
아스터는 그 말에 눈매를 좁혔다. 그리고 물었다.
“그 선택으로 식솔들이 모두 죽는다 해도?”
그 말에 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로르텔의 멸망이 모두의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지. 나의 죽음이 로르텔의 죽음이 될 수는 있으나, 로르텔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네. 그리고 그리되게 해야 하는 게 나의 책임이고.”
……그것이 권리를 누린 자가 짊어진 책임이다.
이것이 시온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