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14화 (14/472)

14화. 환자 전원

똑똑!!

“선생님?”

화이트보드에 정리한 냄새지표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태경에게 별안간 노크 소리와 인기척이 들려왔다.

“여기 계세요?”

“아, 네. 진료실에 있습니다.”

핸드폰 카메라로 화이트보드를 찍은 태경은 재빨리 내용을 지웠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철컥-

“진료실에 계신 줄 몰랐어요.”

진료실로 들어온 사람은 임정숙 간호사였다.

“좀 둘러보느라고요. 진료실이 참 깨끗하네요.”

“깨끗하죠? 진료실은 마음에 드세요?”

“그럼요.”

“새로운 가운은 이틀 뒤에 올 거예요. 그리고 업무에 필요한 물품은 저한테 알려 주세요.”

“네, 그럴게요.”

“맞다. 선생님 정식 출근 원래 일정대로 다음 주에 하시는 거죠?”

“아니요. 저 내일 나올 겁니다.”

“내일 나오신다고요? 혹시 담석 수술 환자 때문에 그러세요?”

“여기서 첫 환자이기도 하고 제가 수술했는데 내일 살펴봐야죠.”

임정숙 간호사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태경의 답변이 그렇게 당연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사도 사람이기에 쉬고 싶은 건 똑같다. 모든 의사가 자신이 수술한 환자 때문에 당직을 자처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정식 출근일도 아닌데 말이다.

‘베테랑 의사가 아직도 저런 열정을 갖고 있네.’

임정숙은 간호사 생활만 20년 차다. 그동안 함께 일한 의사만 해도 수도 없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법.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아직 출근 전이고 쉬는 날인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세요?”

“어차피 집에 있어도 딱히 할 것도 없습니다. 빨리 적응하고 좋죠 뭐.”

태경의 작은 행동 하나가 임정숙 간호사에겐 의사로서 무한 신뢰감을 갖게 했다.

“원래 내일도 이찬희 선생님이 당직이거든요.”

“이찬희가요?”

이찬희의 이름을 듣자마자 태경의 머릿속에 수술실에서 탈주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사실 내일 환자 전원이 1건 있어요. 이 선생님이 따라가고 정의진 선생님이 나오시기로 했고요.”

“전원은 내가 가죠. 그리고 이 선생은 내일 하루 쉬라고 하세요.”

“오늘 이 선생님 실신하신 것 때문에 불안해서 그러시죠?”

역시 경력 20년 짬밥은 무섭다. 도저히 아니라는 말을 못 하겠다.

노파심이겠지만 괜히 환자를 이송하다 실신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그럼 이 선생님한테는 제가 전달하게요. 오늘 신고식 빡세게 하셨는데 얼른 들어가 쉬세요.”

“그래요. 내일 뵐게요.”

똥 아저씨부터 응급 환자에 혼자서 고군분투한 수술까지. 그러고 보니 병원 길을 익히러 왔다가 제대로 신고식을 한 셈이었다.

“집에 가서 잠 좀 자야겠다.”

태경은 내일을 위해 잠을 보충하기로 했다.

* * *

“이 쌤, 저 들어갈게요.”

진료실을 나온 임정숙 간호사는 이찬희를 보러 숙직실을 찾았다.

“수액 맞는 사람이 왜 일어나요. 누워 있지 않고.”

“수술실에서 환자 두고 도망간 놈이 뭐 잘했다고 수액까지 맞겠어요.”

“에이,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실까. 좀 괜찮아요? 어지럽거나 그러진 않고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까 병원 복도에서 쓰러졌다 일어나는데 제 자신이 어찌나 병신 같던지…….”

이찬희는 본인이 답답하고 한심스러웠다.

“그래도 그렇지 병신이라니. 이 쌤! 기운 내요.”

“많이 화나셨겠죠? 아까 수술 끝나고 저한테 엄청 화내셨거든요.”

“그건 이 선생님 사람 자체에 화가 나신 게 아니라 그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부분에서 화나신 걸 거예요.”

“꿈보다 해몽이 좋네요. 아무래도 첫 단추를 잘못 꿴 거 같습니다. 근데 화내시는 게 당연해요. 하!”

“실은 방금 김 선생님 진료실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래요? 뭐라고 안 하세요?”

“별다른 말을 안 하셨고 참, 이 쌤 내일 오프예요.”

“오프요? 내일 당직에 환자 전원도 있는데요.”

“김 선생님이 수술 환자도 살펴보신다고 당직 자처하셨어요. 전원도 직접 가신다니까 이 쌤은 쉬세요.”

“생각지도 못한 오프네요.”

쉬는 날을 마다하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쉬라는 소리를 들은 이찬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간호사 인생 20년 차에 후배 아프다고 직접 수액 놔 준 의사는 처음 봤어요. 그니까 걱정 그만 하고 얼른 집에 가서 쉬세요.”

임정숙 간호사는 다 맞은 수액 주사를 빼며 당직실을 나갔다.

“김 할아버지 전원은 내가 직접 가고 싶었는데…….”

* * *

다음 날 출근한 태경은 전날 수술한 환자와 전원 환자를 살펴보고 진료실로 돌아왔다.

전원 환자는 지방에 사는 자식이 거주지 병원으로 전원을 요청한 케이스다.

“78세 남자 Enteritis 1단계 시큼한 냄새.”

태경은 전원을 앞둔 환자에게서 맡은 냄새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중이었다.

“엔테라이티스(Enteritis, 장염)는 다 잡았으니 냄새의 원인이 장염은 아니란 소리지.”

급성장염으로 입원한 고령의 환자는 평소 고혈압, 당뇨, 전립선에 관한 기저질환을 갖고 있었다. 심각한 건 아니고 평소 약을 통해 조절할 수 있는 수준의 질환들이었다.

더 이상 장염 증상은 없었으니 나머지 기저질환으로 인한 냄새일 것이다.

“그래도 환자가 고령인데 크게 아픈 곳이 없어서 다행이네.”

잠시 후, 사설구급차가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은 태경이 준비를 마치고 진료실을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진료실을 나서자마자 문 앞에 서 있던 이찬희가 그를 불렀다. 사실 이찬희는 아까부터 태경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자신을 그대로 지나치는 태경을 바짝 쫓아간 이찬희가 다시 한번 불렀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몸은?”

“전혀 이상 없습니다.”

“이 선생 오늘 오프잖아.”

“병원에…… 볼일이 있어서요.”

“그럼 볼일 잘 봐.”

“선생님 김상구 환자 전원 제가 가면 안 될까요? 제가 가겠습니다.”

“안 돼.”

“선생님 부탁드릴게요. 환자분과 약속했습니다.”

“그래도 안 돼.”

연신 부탁하는 말과 달리 태경의 대답은 반대였다. 단순히 수술실에서 도망친 것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왜 안 된다고 하는지 알겠지?”

“선생님께서 뭘 우려하시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긴장하다 보니 가볍게 실신한 것뿐입니다.”

“그래 맞아. 바소바갈 사인코피(미주신경성 실신)는 누구나 긴장하면 올 수 있는 가벼운 증상이야. 그런데 환자를 두고 수술실을 나간 의사한테 환자 전원을 맡길 순 없어.”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할 건데?”

“예?”

“어떻게 할 거냐고?”

“그게…… 방법을 궁리 중이지만 반드시 고치겠습니다.”

“만약 전원을 가던 중에 예상 못한 일로 이 선생님 긴장해서 실신했어. 근데 그 상황에 환자에게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그땐 환자의 안전은 누가 책임질 건데?”

“그건…….”

긴 랠리를 이어 가던 대화가 태경의 날카로운 질문에 뚝 끊겼다.

“난 아직 이 선생이 어떻게 일하는지 본 적이 없어. 어제 그 모습으로 지금 이 선생의 말을 신뢰하긴 어려워.”

의사로서 환자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그렇다고 허락을 할 순 없었다.

태경은 김철기에게 병원을 부탁받았다. 그 말은 병원에 온 모든 환자의 안전과 책임을 부탁한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더 할 말 없지?”

“…….”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네. 안 그래요 정 쌤?”

“그럼요.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 불가죠.”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의진과 임정숙 간호사가 불쑥 나타났다.

“이 선생도 알겠지만 김 선생님이 병원 책임자로 오신 거잖아요. 그래서 더 신중하신 거예요.”

“예,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두 분이 함께 가시는 거 어때요?”

“어머, 그거 좋네요. 굿 아이디어.”

임정숙 간호사의 말에 의진이 크게 반응하며 이찬희에게 힘을 실었다.

“조말례 환자는 수술 경과도 좋고 이번 주까지 병원 정비 기간이라 환자가 몰려올 일도 없고요.”

“맞습니다. 정 쌤이랑 제가 병원 잘 지키고 있을게요.”

“참고로 전 바소바갈 사인코피는 전혀 없고 올해 건강 검진 받았는데 너무 건강하답니다.”

“이하 동문입니다. 이 쌤?”

태경의 눈치를 살치고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이찬희의 팔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차 올 시간 다 됐는데 환자분 이동하는 것 좀 도와줄래요?”

“당연하죠.”

이찬희는 태경의 눈치를 살피며 임정숙 간호사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이상하게 내가 당한 거 같은 기분이다.”

“원래 수장의 자리는 고달프잖아요. 잘하셨어요. 선배.”

“언제부터 듣고 있던 거야.”

“음…… 처음부터요. 이 선생이 도와 달라고 했거든요.”

“내가 당했네. 근데 이유가 뭐야?”

“사실 이찬희가 환자에게 오지랖이 깊어요. 잔정도 많고 착해요. 쟤가.”

“그래 보이더라.”

“오늘 이송하는 환자가 붕어빵 장사를 하시던 분이세요.”

태경은 의진으로부터 이찬희와 전원 환자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장사를 하다 몸이 약해진 환자가 119로 병원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이찬희가 진료를 보게 되면서 그 환자에게 정이 깊게 든 것이다.

* * *

“환자분 불편하지 않으세요?”

태경은 누워서 안전벨트를 차고 있는 환자가 불편하진 않은지 수시로 체크하고 있었다.

“전혀요. 하나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네?”

“다 들었습니다. 오늘 이 선생님이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인데 선생님께서 허락해 주셨다고요.”

환자의 말에 바로 옆에 있는 이찬희가 머쓱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들 녀석이 있는 대전으로 병원을 옮기는데 마지막이라 생각해서 제가 부탁을 했었거든요.”

“마지막이라뇨. 제가 대전 갈 일 있으면 할아버지 뵈러 갈게요.”

“쓸데없는 소리. 나 보러 올 시간에 환자나 한 명 더 봐. 선생님, 이 선생님 농땡이 부리면 아주 그냥 혼을 내주세요.”

“네, 환자분.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차량이 하이패스를 통과했습니다. 잔액은 5만 3천 원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사설구급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환자분이 잘 주무시네.”

그사이 태경이 환자를 살피자 살짝 졸던 이찬희가 대답을 하려던 그때였다.

“그러네요. 정말 잘……으악!”

“……!”

말을 하던 이찬희는 물론 태경과 누워서 자던 환자까지. 그들의 몸이 중력을 거스른 채 심하게 쏠렸다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태경은 재빨리 환자부터 살폈다.

“이 선생 괜찮아?”

“예, 전 괜찮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면 상당히 위험했을 순간이었다. 차가 별안간 급정거를 시도한 탓이었다.

탁-

“죄송합니다. 모두 괜찮으십니까?”

사설구급차 운전자가 작은 창문을 열고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입니까?”

“그게 달리던 앞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태경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확인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웬 차들이 이렇게…….”

명절 귀경길 차량처럼 다수의 차량이 국도 위에 멈춰 있었다.

“선생님, 사고라도 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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