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20화 (20/472)

20화. 선홍색 출혈

병원에 공식 휴무가 지나고 태경은 여느 때처럼 버스로 출근을 하는 중이다.

-삑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버젓이 빈자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경은 기사 뒷자리에 서서 승차하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패스, 패스, 시큼, 암모니아, 시큼…….’

능력이 생긴 뒤 태경은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체크하는 거였다.

‘1단계가 다섯 명에 2단계가 세 명.’

이유는 간단했다. 냄새가 강할수록 병이 있거나 응급 환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오늘도 크게 아픈 사람은 없네.’

아직까지 3단계와 4단계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감사합니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태경은 출출한 뱃속을 채울 겸 근처 분식집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뭐 드릴까요?”

“안녕하세요. 김……죄송합니다. 잠시 만요.”

김밥을 주문하려던 태경은 급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밖으로 나갔다.

“여보…….”

-선생님!?

‘여보세요.’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정숙 간호사의 고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지금 큰일 났어요?

“큰일이요? 응급 환자 왔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영상 보고 사람들이 몰려왔다니까요.

“영상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 어디세요? 병원 오시는 중이시죠?

“병원 근처에 있는데요. 김밥 먹고 들어가려고요.”

-지금 김밥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냥 빨리빨리 오세요. 뛰어오세요.

“바로 갈게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태경은 병원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 * *

병원에 도착한 태경이 정문에 있는 자동문을 지나던 그때였다.

“……!”

순간 벌어지는 자동문 틈 사이로 아픔의 냄새가 확 밀려왔다.

“윽! 뭐야 웬 냄새가 이렇게…….”

시큼한 냄새와 진한 암모니아 냄새 그리고 미약한 분뇨 냄새까지. 물밀듯이 그의 후각을 건드렸다.

“아니!”

그리고 중앙 접수처에 다다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태경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도대체…….”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것이었다.

“저기요? 접수 안 받아요?”

“저 접수된 거 맞죠?”

“진료 몇 시부터 시작이에요?”

“접수는 오신 순서대로 하고 있고요. 네, 환자분 접수되셨습니다.”

대기실 의자를 가득 메우다 못해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접수처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다.

“선생님!?”

이 놀라운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는 태경을 발견한 임적숙 간호사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이제 오셨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이게 다 무슨 일이예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죠?”

“저기 계신 저분들 다 우리 병원에 진료 보러 오신 분들이세요.”

“예?”

불과 오늘 아침까지, 아니 퇴근길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병원을 살릴까 고민하던 태경이었다.

병원을 찾아온 저 사람들이 감사했지만 하루아침에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선생님께서 환자 고치는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대요. 저기 있는 저분들 다 그 영상 보고 왔다니까요.”

“영상이요?”

어리둥절한 태경에게 임정숙 간호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진료 시작까지 시간 얼마나 남았죠?”

“좀 여유 있어요.”

“직원들 다 출근했나요?”

“네.”

“제 진료실, 아니 의국실로 직원들 불러 주세요.”

* * *

의사, 간호사, 식당직원, 총무팀, 환경미화 직원까지.

태경의 호출로 오늘 출근한 병원 내 모든 직원들이 의국실로 모였다.

“우선 갑작스럽게 모이라고 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때문에 저희 병원이 살아나서 직원들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넉살좋은 총무팀장 최병근이 허허실실 웃으며 반응했다.

“일단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다들 아실 테니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껏 고조된 직원들의 표정과 달리 태경의 표정은 진지했고 들떠 있지도 않았다.

“아시겠지만 병원에 환자가 몰리기 시작하면 의사도 환자도 마음이 급해집니다.”

환자가 몰려서 기쁜 것보다 자칫 그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를 혼란스러움을 방지하고자 했다.

“병원에 온 사람들은 몸이 불편하거나 아파서 온 사람들이기에 작은 것에도 예민할 수 있으니 그 점 염두에 두세요.”

“당연하죠.”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긴 하루가 될 겁니다. 다들 지치지 말고 잘해 봅시다.”

직원들은 태경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더 이상 환자분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10분 뒤 진료 시작하겠습니다.”

* * *

병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태경은 외래와 응급실을 정신없이 오가는 와중에도 환자를 꼼꼼히 살폈다.

“약 처방해 드릴 테니까 잊지 마시고 꼭 챙겨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환자분 계산하시고 처방전 받아 가시면 됩니다.”

“수고하세요.”

환자 한 명 한 명 진료가 끝날 때면 태경은 어떤 병에서 어떤 냄새가 났는지도 잊지 않고 기록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책상 위 시계를 보니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요. 이제 본격적으로 응급실이 바빠질 시간이네요.”

임정숙 간호사도 덩달아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입원 환자도 들어왔죠?”

“네, 그리고 내일 전원으로 올 환자도 있습니다.”

“기저 질환 꼼꼼히 체크하시고 EMR(전자차트)정리 끝나면 바로 넘겨주세요.”

“그나저나 선생님 여태 식사도 못 하셨죠?”

임정숙 간호사는 유일하게 식사를 못 한 태경의 끼니를 걱정했다.

틈틈이 식사를 권했지만 태경은 괜찮다며 밀려드는 환자를 우선했다.

“그러게요. 슬슬 배가 고픈데요?”

“당연하죠. 자동차도 기름을 넣어야 굴러가는데 사람도 밥심이에요.”

“맞는 말이네요.”

“외래 진료는 마감했으니까 응급실 더 바빠지기 전에 빨리 식사부터 하고 오세요.”

“그럴까요? 그럼 저 빨리 먹고 올게요. 응급 생기면 바로 콜하세요.”

안 그래도 슬슬 배가 고프던 찰나였다.

“네, 찬희 쌤. 선생님 여기 계세요.”

태경이 진료실을 막 나가려던 찰나 임정숙 간호사가 전화를 받았다.

“혈변이요?”

‘혈변’이란 소리를 듣자마자 태경이 진료실을 박차고 나갔다.

“찬희 쌤, 김 선생님 바로 가셨어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식사하시기는 글렀네.”

* * *

“환자는?”

“지금 베드에 있습니다.”

“혈변이라고?”

태경이 이찬희를 보자마자 다시 한번 물었다.

“네, 선생님. 57세 남자가 혈변으로 왔습니다.”

혈변은 출혈 부위에 따라서 대량의 출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꼼꼼하고 신속하게 검사를 해야 한다.

특히 출혈 부위가 소화 기관일 경우 응급 내시경이 가능하냐에 따라서 환자의 생명까지도 좌지우지될 수 있다.

그렇기에 빠른 결정과 대응이 필요한 증상이다.

“오늘 소화기 내과 선생님 계시는 날인가?”

“그러지 않아도 콜했는데요, 오늘 아이가 아파서 못 나오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태경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럴 경우 환자를 파악하고 필요시 빠르게 전원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대량 출혈일 경우 가는 동안 위급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버티는 역할까지 책임져야 한다.

촤르륵-

환자가 있는 베드 커튼을 열자마자 암모니아 냄새가 인사처럼 풍겨 왔다.

‘2단계다.’

냄새의 지표로는 비교적 가벼운 2단계지만 태경은 안심하지 않았다.

환자 상태에 따라 냄새 또한 순식간에 바뀐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정확한 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안녕하세요.”

베드에 누웠던 남자는 조금 기운이 없는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혈변을 보셨다면서요?”

“네, 선생님.”

“전에도 혈변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이 정도로 혈변을 본 적은 처음입니다.”

“혈변을 보면서 어지럽거나 머리가 띵하진 않았나요?”

“그러진 않았습니다.”

“앓고 있는 질환은요?”

“없는데요.”

“그럼 우선 항문 좀 볼게요. 환자분 옆으로 누우시고 바지 내려 보세요.”

장갑을 끼고 항문을 보니 항문 한쪽으로 피가 고여 있었고 살이 약간 푹 파여져 있었다.

열상 같지만 열상이라고 하기 에는 경계가 깨끗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수술 자국이다.

“환자분 혹시 항문 수술하신 적 있으시죠?”

“아, 네……. 보름 전에 치질 수술을 했습니다.”

역시 태경의 예상이 맞았다.

“근데 그 뒤로 혈변을 본 적은 없었거든요.”

“요 근래 변을 힘겹게 보거나 아픈 적은 없으셨고요?”

“그 처음 혈변이 시작된 게 오늘 아침인데요. 그때 좀 오랜만에 변을 봐서 굵기는 했어요.”

이럴 경우 십중팔구는 수술했던 부위가 다시 찢어진 것이다.

이 상태도 대량 출혈 가능성이 있지만 내부 소화기가 아닌 눈으로 보이는 처치이기에 태경은 안심했다.

“환자분 제가 안에 상태를 좀 보려고 수지 검사를 할 거예요.”

“예? 수지 검사라면 그 손가락 넣는 거 말하시는 거죠?”

수지 검사라는 말에 환자는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맞습니다.”

옆에 서 있는 이찬희가 대신 대답했다. 사실 항문 질환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지 검사를 반기지 않는다.

“조금 불편하실 수 있는데 금방 끝나요.”

“선생님은 똥꼬 아파 본 적 없죠?”

“예?”

“자기 똥꼬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긴장을 풀어 주려고 덧붙인 이찬희 말이 환자에게 공감을 사진 못했다.

“환자분 제가 최대한 천천히 넣을게요. 어쨌든 지금 출혈이 있기 때문에 수지 검사를 해 봐야 해요.”

이럴 땐 환자를 살살 달래는 게 최고다.

“알겠습니다.”

“자, 최대한 힘을 빼시고 아~ 하세요.”

“아~~!”

태경은 천천히 환자의 항문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윽!”

직장을 손가락으로 넣어서 확대해 보니 안에 선홍색 피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왔다.

‘안에 더 있겠네.’

이 정도면 아직 직장에 피가 많은 것이다. 동시에 수술 부위로 보이는 곳에서도 피가 새어 나왔다.

이것으로 더 이상의 검사도 무의미했다.

원래는 위세척을 통해 상부위장관의 출혈 여부를 판단한다. 하지만 출혈의 원인이 항문 질환인 것이 확연했기 때문이다.

“자, 됐습니다. 불편하셨죠?”

“괜찮았습니다. 저 뭐가 문제인가요?”

“아버님께서 얼마 전에 항문 수술 받으셨다고 하셨잖아요.”

“예.”

“이게 수술 이후에 이럴 수 있어요. 혹시 그 수술하신 병원에 연락은 하셨어요?”

“아니요. 아직 못 했습니다. 수술 이후에 이런 적이 처음이라 그게 원인이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그럼 수술이 잘못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수술의 합병증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환자분 입장에서 많이 당황스러우시고 걱정스러우시겠지만 이런 경우가 생기곤 해요.”

“어쨌든 출혈이 나온 게 제가 심각하게 아픈 거나 그런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럼요.”

전에 일하던 대학병원에서도 종종 보았기에 태경은 환자를 진정시키며 설명했다.

“이 선생. 저분 검사는 더 필요 없을 거 같아.”

“네, 선생님.”

태경은 환자 베드에서 조금 떨어져 이찬희에게 오더를 내렸다.

“그리고 보호자에게 수술한 병원 번호 받아서 어찌하면 좋을지 물어봐 봐.”

“예, 알겠습니다.”

“저기요…….”

한창 대화중인 두 사람을 환자 보호자가 난감한 표정으로 불렀다.

“네, 보호자분.”

“저기 우리 이이가 대변이 마렵다고 하는데…… 어떡하죠?”

“안 됩니다.”

태경이 단호하게 답했다.

“환자분 지금 대변은 참아야 해요.”

배출하려고 나오는 대변을 참으라고 말하는 태경의 마음도 그리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많이 힘드세요?”

“아니 뭐 참을 만한 정도입니다.”

“지금도 출혈 양상이 있어서 제가 항문을 거즈로 막아 놨어요. 그런데 지금 대변을 보시면 상처가 덧날 수 있습니다.”

태경은 최대한 환자를 자극하지 않고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내 환자가 바지를 입더니 자세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그러시면 안 돼요.”

“환자분.”

태경과 이찬희는 동시에 환자를 말렸다.

“환자분 우선…….”

“소변이요. 소변! 여기서 오줌을 쌀 수는 없잖아요.”

“아, 네. 소변은 보셔도 됩니다. 거즈 빠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대변을 참느라 살짝 예민해진 환자가 목청을 높였다.

“아니, 이이는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오줌 마려우니까 그렇지 진료 때문에 아까부터 참고 있었어.”

“아으. 목소리 좀 낮춰요.”

“저 소변은 봐도 되는 거죠?”

“그럼요. 대변만 참으시면 됩니다.”

다시 한번 대변을 강조한 태경은 이찬희와 함께 응급실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입원 환자 차트 정리 끝났나?”

“여기 있습니다. 지금 드릴까요?”

“아니요. 이 쌤 지금 드리지 마세요.”

업무를 보던 임정숙 간호사가 이찬희의 손에 있던 태블릿 PC를 뺏으며 말했다.

“일단 식사부터 얼른 하고 오세요.”

“차트 주면 밥 먹으면서 볼게요. 그럼 됐죠?”

“대신 곧장 식당으로 가셔야 해요.”

“물론이죠.”

그렇게 임정숙 간호사가 건넨 태블릿 PC가 태경의 손에 안착하려던 그때였다.

쾅!

별안간 큰 소리와 함께 소리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환자 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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