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Golden time
“여기 환자 좀 도와주세요!”
간호사의 외침과 함께 스테이션에 있던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조금 전 항문 출혈 환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다.
태경은 그 광경을 보자마자 환자에게 뛰어갔고 이찬희도 그 뒤를 따랐다.
“환자분! 환자분!”
“다른 환자 드레싱하고 오는데 여기 쓰려져 계셨어요.”
“환자분 정신 차려 보세요!”
“아으…… 네….”
“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간호사에게 설명을 들은 이찬희가 환자의 멘탈 스테이트(mental state, 정신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 와중에 태경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왜 달라졌지?’
냄새가 3단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잠깐!’
순간 쓰러진 환자 뒤로 화장실 문이 보였다.
‘이런, 혹시!’
불현듯 스치는 생각과 함께 태경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철컥- 탁- 탁-
화장실 칸마다 확인하던 그의 손길이 두 번째 칸에서 멈췄다. 떨어진 거즈와 함께 대변기에 엄청난 피가 난자되어 있었다.
환자가 소변을 보다가 대변을 참지 못하고 큰일을 본 것이다.
슬쩍 보기에도 출혈양이 엄청났다.
“이찬희 선생?”
태경은 화장실을 뛰쳐나가 오더를 내린다.
“예.”
“환자에게 그만 질문하고 우선 베드에 눕혀.”
“알겠습니다.”
“환자 Hgb(헤모글로빈, 빈혈 확인 시 필요한 수치) 수치 좀 확인해요.”
“네, 선생님.”
이찬희와 간호사가 오더를 따른다.
환자의 눈 밑과 혀의 상태를 확인해서 혈액이 부족한 정도를 체크한다.
그 결과 혀는 말랐고 눈 밑은 옅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간호사가 빠르게 뛰어오면서 말한다.
“Hgb 수치는 정상입니다.”
“수혈 한 팩 빨리 준비해요.”
“네? 수치가 정상인데요?”
“그 수치는 당장의 출혈을 반영 못하는 수도 있어요. 환자 신체검진상 필요해요. 오더 내릴 테니까 빨리 타 와요.”
“네, 알겠습니다.”
태경이 수많은 경험으로 안 것이다.
수치가 많은 정보를 주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것 말이다.
실제로 병원 현장에서는 잘못된 검사 결과 혹은 아직 반영되지 않은 검사 결과로 인해 환자 상태와 괴리가 있는 경우가 흔하게 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질문한 간호사와 이찬희는 의아해했지만 태경은 확신했다.
지금 환자에게 필요한 건 수혈이라는 것을.
“환자 수혈 이후에 피검사 다시 해 줘요.”
“어머, 여보?”
그사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보호자가 놀라며 어쩔 줄 몰랐다.
“아니 잠깐 전화하고 왔는데 이 양반 왜 이래요?”
“환자분이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다가 출혈이 생겼어요.”
“아흐. 못 살아. 내가 그렇게 참으라고 했는데…… 괜찮은 거예요?”
“선생님이 처치하실 거예요. 보호자분 잠시만 이쪽으로 나오실게요.”
또 다른 간호사가 놀란 보호자를 진정시키며 상황을 설명했다.
“혈관수축제 발려져 있는 거즈나 수축제 액으로 된 것 한 병 줘요.”
“여기 있습니다.”
약을 받은 태경은 거즈를 잔뜩 들었다. 곧장 항문을 식염수로 닦아 낸 다음 거즈에 혈관 수축제를 잔뜩 묻혔다.
그리고 거즈를 항문 출혈 부위가 압박이 되도록 패킹한다.
“환자분 힘드시겠지만 이제 정말 대변보시면 안 돼요.”
“그게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내가 화장실 앞까지 쫓아가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걸 못 참아요.”
“여기서 더 출혈이 생기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제가 옆에서 잘 지키고 있을게요.”
“보호자분이 화장실 갈 때도 잘 봐 주세요.”
마지막으로 태경은 하소연하듯이 정성스럽게 대변을 꼭 참아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3시간 뒤-
“담당 의사분이 위험 상태만 잡아서 보내 달라고 하셨습니다.”
수혈이 마무리된 환자의 상태를 살핀 이찬희가 태경에게 콜을 넣었다.
“수치도 회복되고 있고 환자 멘탈 스테이트도 또렷합니다. 알겠습니다.”
환자를 수술한 항문병원 의사는 환자의 응급 상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맞다. 쌤? 그 환자분 Hgb 수치 어떻게 됐어요?”
조금 전 환자 처치를 돕던 간호사가 스테이션에서 업무를 보다 물었다.
Hgb 수치가 정상인데 수혈을 지시한 태경의 오더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게 선생님 말이 맞았더라고요.”
“정말요? Hgb 떨어졌었어요?”
“네.”
“김태경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저게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겠죠?”
“그렇죠. 휴! 저는 언제 선생님 같은 의사가 될지 모르겠네요.”
“이 쌤도 꼭 그렇게 되실 거예요.”
“그렇겠죠?”
“그럼요. 아무튼 환자가 머리를 안 다쳐서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머리라도 부딪혔다면 경칠 뻔했어요.”
* * *
“설마 지금 저녁 먹는 거예요?”
커피를 가지러 식당에 온 의진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시곗바늘이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긴 오늘 환자가 쏟아지느라 정신없긴 했죠. 참, 선배 너뷰트 잘 봤어요.”
“정 선생도 봤어?”
“그럼요. 아마 우리 병원 모든 직원들이 다 봤을걸요.”
탁-
“내도 봤다.”
직원 식당의 주방장인 오계순이 따뜻한 라면 한 그릇을 툭 내밀며 거들었다.
“국이 식어서 맛이 쪼까 없을기다. 대신 이 묵으라.”
우리병원에서 최고령자이자 김철기와 동갑인 그녀는 유일하게 의사들에게 반말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었다.
병원의 시작을 함께한 그녀는 겉으로는 쌀쌀맞고 퉁명스레 보여도 사실은 마음이 따뜻하고 사람들을 잘 챙기는, 일명 츤데레 같은 사람이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뭐라카노. 기껏 끓였더니 그럼 버리란 소리가?”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라면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앞으로는 미련하게 이 시간까지 있지 말고 저기 바구니 보이지?”
오계순은 배식판 옆에 있는 바구니를 가리켰다.
“저기 김밥 있을 기라. 바쁠 땐 가져가서 입에 털어 넣어라. 의사도 사람이다. 지 몸이 건강해야 사람을 고친데이. 알긋나?”
“네, 감사합니다.”
“내 몸 혹사시키다 골로 가는 의사 여럿 봤데이.”
“아으. 여사님도 무슨 그럼 무서운 말씀을.”
“정 선생 니도 커피 좀 줄여라. 카페인 그거 몸에 안 좋다 안 카나. 그렇게 들이 붓다 위 빵꾸난다.”
오계순은 의사인 태경과 의진에게 건강을 지적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말씀은 저리 험하셔도 속정이 따뜻한 분이세요.”
“그래 보이네. 정 선생도 오늘 바빴겠어.”
“말도 마세요. 평소보다 통증 치료 환자들도 많고 정신없었어요. 그래도 바쁜 게 낫죠.”
“그건 그렇지. 안 그래도 정 선생 진료실 가려고 했는데.”
“환자 때문이면 제가 갈 테니까 콜 하세요.”
의진이 말하는 사이 태경이 무심하게 편의점 봉투를 내밀었다.
탁-
“이거 주려고.”
“이게 뭔데요?”
“케이크.”
“케이크요?”
“응급수술 한 날 정 선생 생일이었다며.”
태경은 쉬는 날, 그것도 생일날 느닷없이 불러낸 게 미안했다.
“아니 생일도 지났는데 무슨 애도 아니고. 아무튼 고마워요.”
“대단한 건 아니고 집 앞 편의점에서 산거야.”
“어디서 산 게 뭐가 중요해요. 그리고 요새 편의점 음식 퀄리티가 좋……!”
기분 좋게 봉지 안에서 케이크를 꺼내던 의진의 말이 뚝 끊겼다.
“감동한 거야? 뭘 이런 걸로 감동까지 하고 그래.”
“아하하. 초코 케이크네요.”
“초코 좋아하는구나?”
“음…… 저기 선배 혹시 기억 안 나세요?”
“무슨 기억.”
“저 초코 알레르기 있어요.”
“어?”
사실 집 앞 편의점에서 두유를 사러 갔다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구매한 케이크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의진이 초코 알레르기라니. 태경은 난감했다.
“예전에 예과 시절에 호스피스 봉사 갔다가 저 초콜릿 알레르기 난 적 있었어요. 그때 선배가 도와줬었는데…… 기억 안 나요?”
젠장!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Rrrrrrrrrrrr
이 민망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던 찰나 전화벨 소리가 태경을 도왔다.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태경은 식판을 들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선생 미안해서 어쩌지. 나 먼저 일어날게.”
“예, 얼른 가 보세요.”
“저기 안에 빵만 퍼 먹어. 빵만. 수고해.”
“수고하세요.”
케이크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의진이 혼잣말을 했다.
“하! 빵도 초코 빵인데.”
* * *
사이렌 소리를 울리는 구급차와 병원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모자를 쓴 남자는 병원 맞은 편 횡단보도에서 두 시간 가까이 서성였다.
“윽!”
별안간 입을 막고 소리를 삼킨 남자가 결심한 듯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우리병원입니다.
“거기, 병원이죠?”
-네. 말씀하세요.
“지금 혹시 병원에……악!! x발!!”
통화한 남자는 갑작스런 고성과 함께 욕설을 내뱉곤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어랏! 너 지금 나한테 욕했지?”
거하게 술에 취한 취객이 남자 옆을 지나다 시비를 털었다.
“야! 나한테 욕 했어 안 했어? 방금 시x이라고 욕 했잖아.”
다다다다-
취객이 목소리를 높이며 다가오자 남자는 전력 질주를 하며 뛰어갔다.
“어린놈의 새끼가 욕을 하고 지랄이야. 세상 참 말세다. 말세야.”
* * *
“뭐지?”
병동 스테이션에서 전화를 받던 간호사가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놨다.
“또 시작인가?”
“그 장난 전화예요?”
옆에 있던 간호사가 물었다.
“네. 한동안 괜찮더니 또 왔네요.”
“오늘도 레퍼토리가 똑같아요?”
“아니 얌전한 목소리도 갑자기 악쓰고 욕한 다음에 끊는다니까요.”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요?”
“내 말이요. 한 번 묻고 싶네요.”
“수 쌤 그 전화 또 왔어요.”
때마침 병동에 있는 태경에게 가기 위해 임정숙 간호사가 올라왔다.
“왜, 또 장난 전화 온 거야?”
“올 때마다 소리 높이고 욕하니까 기분 나빠요.”
“아니 왜 우리 직원한테 욕을 하고 그럴까. 내가 총무팀장님께 말할 게.”
* * *
“선생님 보호자랑 연락이 안 되네요.”
임정숙 간호사가 307호 병실에서 나온 태경에게 다가갔다.
“일단 음성 녹음이랑 문자 남겨 놨어요.”
119로 들어와 입원한 환자였는데 보호자랑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이 환자 주의 깊게 봐야 해요. Vital 흔들릴 수 있어요.”
“그럼 모니터 달면 될까요?”
“그래요. 모니터 달고 Vital 2시간 마다 체크해 주세요.”
“네, 그리고 응급실 조사서 환자 말인데요, 체온이 높지는 않은데 계속 열감을 호소하세요.”
“그래요? 그럼 일단…….”
환자 브리핑을 듣고 오더를 하려던 태경의 표정이 별안간 오던 길로 방향을 돌렸다.
“선생님?”
순식간에 표정이 싸해진 태경을 보며 임정숙 간호사가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
오직 태경만이 감지하는 다섯 번째 바이탈이 느껴진 것이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던 복도에서 포르말린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다.
‘약하지만 포르말린 냄새다.’
한 걸음 두 걸음 태경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냄새의 강도가 점점 진해지더니 말도 안 될 정도로 코끝에 진동했다.
온 복도에 포르말린을 뿌린 것처럼, 지금까지 느꼈던 4단계 냄새 중에 가장 지독했다.
태경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카디악 어레스트(Cardiac arrest, 심정지)다.’
환자에게 심정지가 왔다는 것을.
미친 듯한 속도로 307호를 향해 전력 질주하며 소리쳤다.
“코드블루! 방송 때려요.”
어지나 크게 외쳤는지 병동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들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네?”
“307호 환자 코드블루~!”
방금 전까지 괜찮던 환자를 코드블루라니.
임정숙 간호사는 별안간 코드블루를 외치는 태경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환자가 버텨야 할 텐데…….’
심정지가 온 이상 일분일초가 소중했다. 지금부터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골든 타임(Golden time)이었기에 1초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드르륵-
307호 병실 문을 연 순간 역시나 환자는 심정지 상태였다.
“카디악 어레스트!”
뒤따라온 임정숙 간호사가 놀라며 병동 스테이션을 향해 소리쳤다.
-코드블루~
곧이어 병원 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코드블루~ 코드블루 307호 성인!
-코드블루~ 코드블루 307호 성인!